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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서장 - 예수의 죽음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서장 - 예수의 죽음

건방진방랑자 2023. 3. 17.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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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죽음

예수는 기묘한 과일이었다

 

 

예수는 과연 어떻게 죽었을까? 그의 죽음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있는 이야기는 모두 마가복음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 누가, 요한은 마가의 기술을 자기 나름대로 특색있게 각색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기술은 애초부터 예수의 생애에 관한 사실적 보고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됨의 선포가 목적이었기에, 예수의 죽음은 오직 부활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의 죽음은 현대신학에서는 불가지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앞 편에서 우리는 브레데슈바이처, 두 위대한 사상가의 역사적 예수의 삶에 관한 상반된 견해를 살펴보았다. 슈바이처의 논의는 매우 웅장하고 웅변적이다. 그리고 예수라는 실존했던 인간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매우 구체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리 전체가 억지춘향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에게는, 복음서를 구성하는 예수 전기자료 전체가 하나의 픽션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문헌비평의 성과가 성숙되어 있질 못했다. 그리고 나그함마디 문서와 같은 새로운 자료로 촉발된 다양한 관점이 수용될 수 있는 그러한 시대적 바탕이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연 역사적 예수는 종말론적 신념에 불타,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하고 그 소신대로 죽음을 택한 사람이었을까?슈바이처의 논의는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은 결국 심리적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환멸을 느끼면서 죽어 갔을지도 모르는 종교적 광인(a religious fanatic)’의 이미지에 머물러 버릴지도 모른다

 

나그함마디 문서 발견으로 촉발된 초기 성서문헌의 연구성과는 예수의 죽음 직후부터 이미 놀랍게 다양한 예수운동들이 산발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로마제국의 권력에 의하여 그 성격규정이 획일화되는 4세기초 이전까지는 방만하게 흩어져 있던 기독교도들의 가슴속에 그려진 예수의 심상은 매우 자유롭고 비권위주의적이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때로는 하나님은 진리로서만 규정되며, 예수는 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길동무일 뿐이다. 그는 제자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진리의 방편(a provisional measure)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에 도달케 되면 예수라는 존재는 사라져버린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즉 예수의 권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스승을 뛰어넘기 위한 것이다(The purpose of accepting authority is to learn to outgrow it. Pagels, The Gnostic Gospels 138).

 

예수의 삶에는 묵시론적ㆍ종말론적 전제가 없었다. 그가 실제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2세기 교부 중에서 영지주의 이단을 격렬하게 배척한 최대의 로마 정통파 사상가로 알려진 이레나에우스(Irenaeus, AD 180/90년경 활동)는 예수가 50이 넘어서 노년에 죽었다고 주장한다. 신약성서 중에서 쓰여진 연대가 가장 앞서는 문헌 중의 하나이며(AD 48~55 사이), 바울의 서한임이 거의 확실한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십자가사건으로 보고하지 않는다. 예수를 그냥 나무에 목 매달린 자로 보고할 뿐이다(3:13). 사도행전에도 베드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보고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예수를 나무에 목매달아 죽였다’(5:30)고 말한다. 베드로가 욥바로부터 가이사랴로 와서 이탈리아군단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기념비적인 강연을 행하였을 때도 이와 같이 말했다: “저희가 예수를 나무에 목매달아 죽였도다(They put him to death by hanging him on a tree.”

 

우리는 여기서 백인들의 인종차별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했던 흑인 천재가수 빌리 할러데이(Billy Holiday, 1915~1959)가 담담하게 부른 노래, 기묘한 과일(Strange Fruit)(1939)을 연상케 된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목숨을 잃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흑인을 기묘한 과일이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 어느 마을 동구 밖 느티나무에 걸려있는 기묘한 과일이었을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돌로 쳐 죽인 사람의 시신을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고표시로 나무에 매달아 놓는 습관이 있었다.(신명기 21:22). 십자가로 말한다면 오시리스디오니소스도 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이곳이 바로 폴이 죽은 그 동굴이다. 폴이 바로 이 콥틱 크리스찬의 모습으로 세상을 떴을 것이다. 정면 밝은 곳에 폴의 석관이 있다. 천장에 달린 타조 알은 죽은 것 같지만 부화되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상징한다고 한다. 천장에 그냥 구멍을 뚫어 채광하는데 1년 강우량이 5m 이하이기 때문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했다.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현재 성서신학자들의 대세는 로마총독 빌라도의 재판 운운하는 거창한 장면들은 모두 마가의 드라마구성에서 연유된 픽션으로 간주한다. 예수의 실제적 삶에 대한 보고로서 간주하지 않는다. 기묘한 과일처럼 죽어간 예수, 너무도 사랑스러웠고 위대했던 천국운동의 실천가 예수, 그는 젊은 나이에 한 무명인으로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그의 말씀을 듣고 따랐던 사람들에게는 사모의 염이 깊어갔고, 그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운동은 눈덩이처럼 불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소박한 진실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참으로 위대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 때 소박한 모습으로 남을 수가 없다. 진실은 곧 상징의 옷을 입고 신화의 치장을 하고 화려한 역사의 나들이를 떠난다. 진리는 오히려 발가벗지 않는다.

 

더구나 마가복음이 쓰여진 70년대는 이미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진 후였다. 즉 복음서작가들의 붓길을 억압하는 모든 종교적ㆍ정치적·사회적 질곡이 붕괴된 후였다. 누가 어떤 구라를 쳐도 그 구라를 검증할 수 있는 권위가 부재했다. 이스라엘민족과 국가가 사라졌다. 그리고 최후의 정신적 상징인 성전, 야훼가 임재하는 지성소까지 여지없이 파괴되었다. 모든 종교적 권위가 힘을 잃었다. 누구나 마음대로 뻥 칠 수 있었다. 복음서기자들에게 주어진 사상적 자유는 완벽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동원되고, 빌라도 총독까지 동원되는 화려한 픽션이 구성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시된 복음서기자들의 책무였다. 그러나 마가복음 이전에 실존했던 도마복음서에는 이적도 없고, 구약적 예언의 성취도 없고, 세계질서를 파괴하는 묵시록적 천국도 없고, 타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누가 죽을 일도 없다. 오직 살아있는, 기묘한 과일의 전제조차 없는, 한 인간의 말씀만 있을 뿐이다.

 

브레데슈바이처의 대결을 운운한다면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브레데에게 승리의 한 팔을 번쩍 치켜들게 만들었다. 21세기의 예수는 또 다시 묵시록적 사상가에서 지혜론적 스승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슈바이처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순수한 지혜로운 스승의 이미지만 있었다면 후대 초대교회에서 갑자기 메시아사상이 솟아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지혜로운 스승 예수와 메시아 예수 사이에는 논리적 필연성이 역사적으로 확보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지혜로운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역사적 실상과 무관하게 얼마든지 종말론적 메시아 사상은 솟아날 수 있다. 크로쌍은 말한다.

 

우리의 결론은 이러하다. 역사적 예수는 희랍의 도시중심의 견유학파와는 다른 스타일의, 농촌중심의 유대인 견유학파의 한 사람(a peasant Jewish Cynic)이었다. 그가 사역의 대상으로 삼은 갈릴리 농촌마을들은 세포리스(Sepphoris)와 같은 그레코·로만 도시에 근접해 있었기에, 견유학파의 지식이나 그 방랑하는 카리스마들의 모습을 결코 낯설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의 활동지는 주로 남부 갈릴리(Lower Galilee)갈릴리는 북부(Upper)와 남부(Lower)로 나뉘는데 북부는 산악고원지대이고 남부는 평원지대이다의 농촌과 마을에 집중해 있었다. 예수의 전략은 자신의 경우는 물론,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더 명료하게, 공짜치료(free healing)와 공동식사(common eating)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이는 로마제국의 정치질서나 유대교의 종교적 위계나 후견질서를 총제적으로 거부하는 종교적, 경제적 평등주의(a religious and economic egalitarianism)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하나님의 새로운 브로커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방랑했다. 그는 브로커도 아니고 중개자도 아니었다. 신성과 인성 사이에, 혹은 인성과 예수의 집단 사이에 무엇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던, 매우 파라독시칼한 선포자였다. 이적과 비유, 병고침과 나누어먹음은 모두 참가자들 개개인이 하나님과 직접 매개없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소통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그리고 또한 참가자들이 모두 서로 매개 없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직접 소통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예수는 브로커 없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던 것이다”(The Historical Jesus 421~2).

 

 

 레바논의 시돈(Sidon) 페니키아문명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2천년대부터 도시국가로 발전하여 기원 전 1천년대 극히 번성하였다. 역사적으로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알렉산더,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독자적 도시국가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였다. 예수시대에는 헤롯대왕이 이 도시를 새롭게 건축하였고, 예수도 이 지역에서도 활발한 선교를 펼쳤다. 이 지역전승에 의하면 예수가 선교활동을 할 때, 엄마 마리아가 동행하였으며, 여자가 같이 다니면서 설치는 풍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엄마는 이곳 동굴에 머물며 아들 예수가 오는 것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이곳 말로 만타라(mantara)의 언덕이라 하는데 만타라는 ‘기다림’이라는 뜻이다. 이 마리아의 동굴거소는 제1세기부터 초대교회가 되었다. 배경의 나무는 돌무화과 수종인데 그 밑에서 마리아가 아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제55편에는 초대교회의 진실한 모습을 알리는 충격적인 영상이 나갈 것이다. 기다리는 엄마는 한국인에게도 리얼한 이미지로서 다가온다. 나는 항상 신촌의 안산 언덕에서 나를 기다리시던 엄마의 손을 잡는 심정으로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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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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