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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2장 - 쉬움과 어려움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2장 - 쉬움과 어려움

건방진방랑자 2023. 3. 1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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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움과 어려움

찾았을 때 너는 고통스러우리라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같다. 그 목표가 인간의 구원이라고 한다고 하면 제종교간에도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교는 인간의 구원이 쉽게 얻어진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종교는 매우 어렵다고 판단한다. 한 종교 내에서도 쉬움()과 어려움()의 견해 차이는 종단이나 분파간에 다양한 교리를 형성시킨다. 대체로 대승은 쉬운 길을 택한다. 물론 쉬움의 위대성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쉬움의 교리는 의타적 기만성을 조장할 수도 있다. 살아 있는 예수는 우리에게 인간의 구원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2

1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2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3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4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1Jesus said, “He who seeks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he finds? 2When he finds, he will be troubled. 3When he is troubled, he will marvel, 4and he will reign over all.”

 

 

소승에서 대승에로의 발전이 모든 종교의 필연적 과정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더구나 소승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대승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가치판단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하나의 종교, 그러니까 하나의 도그마를 신봉하는 교단조직이 인간세에서 보편적인 지배력을 확보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계기들이 개입된다. 대승기독교의 결정적 모우멘텀은 아마도 AD 3121027일 로마 근교 밀비우스다리(Milvian Bridge)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콘스탄티누스는 현몽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고, 계시받은 문장을 병사들의 방패 위에 그려 그의 아내의 오빠인 막센티우스(Maxentius)의 군대를 무찌를 수 있었다. 그는 다리 밑 테베레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한 자기 처남의 시체를 다시 참수하여 그 대가리를 창 끝에 꽂고 로마에 입성함으로써 6명의 황제가 1인의 황제로 통일되어가는 결정적 계기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불가침의 신성한 1인 절대권력의 꿈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 덕분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콘스탄티누스 본인이 이러한 신앙을 직접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에게 고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밀비우스다리의 무속적 계시가 313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의 실제적 계기였다. 그리고 기독교는 공인되었다.

 

그러나 대승기독교의 이론적 틀은 이미 요한복음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요한은 이미 바울신학에서 제시된 부활사상의 심오하게 철학적인 영지주의 측면과, 마가복음으로부터 시작된 내러티브 가스펠의 화려한 대중성과,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상가 필로(Philo Judaeus, c,BC 20~AD 40)가 유대교의 인격신 개념과 플라토니즘적 세계관을 결합시키면서 인간의 이성과 신적 사유의 매개체로서 설정한 로고스(logos), 그리고 당대에 네오플라토니즘의 유출설적 연속성과 낙관론이 단절된 상황에서 신의 자기구원(the self-saving of God)의 상징으로서 등장한 영지주의의 대속자신화(代贖者神話, the Gnostic redeemer myth) 등등, 이 모든 당대의 조류를 창조적으로 결합하였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공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승적 발전의 탄탄한 대로를 예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도마복음서를 이러한 대승적 조류와 대비되는, 대승 이전의 소승적 조류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스리랑카의 소승불교도들이 자신을 소승불교도라고 인지하지는 않는다.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가 발전되었다고 소승불교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팔리어장경에서 불교의 초기모습을 보다 리얼하게 파악할 뿐이다. 니까야(nikāya)를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종교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길거리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아무 생각없이 외치는 전도사의 고함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냥 무조건 교회에 나가 간구하기만 하면 3, 5, 천중, 만중의 현세적 축복이 쏟아질 것인가?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만사가 다 이루어진다는 사람이야말로 줏대없는 간교한 이기주의자요, 출세만을 지향하는 기회주의자일 수도 있다. 물론 교회의 문은 두드리기만 하면 열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다. 교단의 세력이 확장되고 연보돈이 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마가 만난 살아있는예수의 첫 마디는 천국의 문은 아무리 두드리고 또 두드려도 쉽게 열리지 않는다고 하는 경고이다. 두드리고 또 두드려라! 열릴 때까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쳐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쉽게 즉각적으로 결론이 주어지는 과정이 아니다. 어렵고 지루한 추구의 과정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중도에 포기하고 말 그러한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는 중도에 포기하지 말 것을 강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그토록 어렵게 구하고 또 구해서 드디어 찾았을 때,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는가?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은 무엇인가? ‘찾았을 때 너는 고통스러우리라!’ 아니 이건 또 웬 말인가? 어찌하여 천국을 찾았는데, 구하려고 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데, 구한 것을 얻었는데, 왜 고통스럽단 말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밤 콘스탄티누스 꿈에 나타난 방패문양, XP를 합친글씨. XP키로라고 읽는데 그리스도의 첫 두글자이다. 안티옥 부근의 성 시므몬교회 외벽에서 찍었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의 대표적 주화, 콘스탄티누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 뒷면에 불패의 태양신(soli invictus)’이 새겨져 있다. 즉 콘스탄티누스 자신을 로마 전통의 태양신과 동일시한 것이다. 기독교공인의 의미가 이와 같이 처음에는 모든 종교와의 공존을 의미했다. 태양신 축제일이 일요일이었고 이것이 기독교 예배일이 되었다. 일요일은 성경에 나오는 유대교 안식일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천국은 맘몬(Mammon)이 아니다(Q74, 6:24, 16:13). 돈을 구해서 얻는 것과도 같은 기쁜 세속적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 고통스럽다(will be troubled)’는 것은 당혹스럽다.’ ‘번민에 휩싸인다는 뜻이다. 구하는 것을 얻었을 때 우리는 당혹스럽고 고통스럽게 된다. 왜냐?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인격주체의 근원적인 변화(the transformation of one's subjectivity)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자아의 몸으로서는 천국의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아이디 카드(identification card), 즉 자기동일성의 증표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디 카드를 새로 발급받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관습과 관행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통스럽지 않다면 나의 구함은 진정한 구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옛 관습과 관행의 지속일 뿐이다.

 

새로운 자아의 건설(the construction of an alternative subjectivity)은 고통스럽다. 붓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말하지만, 살아있는 예수는 인간의 현존재를 고(, duḥkha)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창조적인 고통을 말할 뿐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때,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될 때 인간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의 순간 때문에 비로소 인간은 천국의 경이로움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울 때 너는 경이로우리라!’

 

경이는 타우마제인(taumazein, 놀람, 경탄)이다. 모든 참된 앎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했듯이, 타우마(thauma, 놀람, 경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천국이란 바로 일상적 자아가 고통스러운 주체의 변환(變換)을 통하여 얻는 경이(驚異). 그러나 경이는 경이로서 완료되지 않는다. 경이는 타 동·식물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인간의 특권이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다. 경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이를 낳아야 하고, 경이는 다른 지속태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 지속태란 무엇인가? 예수는 말한다: “경이를 체험하면 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여기 다스림이란 무엇인가?

 

 

기독교박해에 열심히던 유대교도 사울이 다메섹(Damascus)으로 가는 도중에 특별한 계시를 받고 개종하게 된 사도행전 9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자신은 그러한 사건을 보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나에게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셨다라고만 고백한다(1:16). 그리고 개종직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사막으로 갔다. 이 바울이 개종 후 최초로 간 아라비아가 바로 에돔땅 나바태안 왕국(Nabataean Kingdom)이다. 또 고린도후서(11:32~33) 에 보면 훗날에 아레타왕(King Aretas)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 했기에 도망쳤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아레타왕이 바로 나바태안왕국의 왕이었다. 그는 헤롯 안티파스의 장인이었다. 헤롯대왕도 본시 이 지역 이두메(에돔) 출신이었다. 이 나바태안왕국의 실체가 오늘 페트라의 장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이 지역은 십자군이 잠깐 다녀간 적은 있으나 그 뒤로 완벽하게 망각의 세계로 사라졌고 베두인의 비밀스러운 성지로만 은폐되고 외부인들에게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아랍어를 노련하게 구사했던 스위스의 젊은 탐험가 버크하르트(J. L., Burckhardi)가 이 지역에 관한 소문을 듣고 무슬림성자로 가장하고 침투한 것이 1812년의 사건이었다. 아론의 무덤에 제사지낸다는 명목으로 이 검붉은 장밋빛 사암의 웅대한 협곡 (The Siq, 1.2km)에 당도했을 때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요르단에 속한 페트라는 신() 7대불가사의 실제적 1호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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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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