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소승과 대승
구하라! 그러나 쉽게 얻을 것을 기대치 말라
❝모든 종교는 소승에서 대승으로 발전경로를 거치게 마련이다. 작은 숫자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신봉을 하던 시대에서 거대 숫자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신봉되는 시대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때 반드시 철학의 변화가 일어난다. 소승의 내면적이고 심오한 가르침은 보다 쉽고 보편적이고 즉각적인 성격으로 변화한다. 그 단적인 변화가 우리의 ‘구함’에 대한 도마의 기술과 마태의 기술에서 예시되고 있음을 본다.❞
제2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2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3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4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1Jesus said, “He who seeks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he finds? 2When he finds, he will be troubled. 3When he is troubled, he will marvel, 4and he will reign over all.”
우리는 서장에서 ‘살아있는 예수’의 ‘은밀한 말씀들’의 의미를 파악하였고, 그것을 예수의 분신인 쌍둥이 도마가 기록하였다는 것을 나레이터의 기술을 통하여 명료하게 인지하였다. 같은 나그함마디 라이브러리에 포함되어 있는 문서 중에, 도마가 주인공으로 출현하는 또 하나의 성서인 도마서(The Book of Thomas the Contender)에는 이와 같이 적혀있다: “형제 도마여! 그대가 이 세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가 그대 마음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그대에게 드러내 보이리라. 자아! 그대는 나의 쌍둥이요, 나의 진실한 반려로다. 그러기 때문에 그대는 그대 자신을 되돌아보고, 그대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그대가 지금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138, 4~10, NHL 201: NHL은 James M. Robinson, ed. The Nag Hammadi Library in English. Third, Completely Revised Edition.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8의 약자이다. 그 다음은 이 책의 페이지 표시. 그 앞의 숫자는 콥트어 원전 분류방식).
그 다음 제1장에서 우리는 기록자인 도마가 독자에게 이 은밀한 말씀을 대하는 우리 삶의 자세에 관하여 권유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 진지한 노력의 보상이 무엇인지를 기록자인 도마의 말을 통하여 들었다. 그것은 은밀한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 생명의 환희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발견’이란 ‘끊임없는 추구’를 의미한다. 상기의 도마서 인용에서 예수가 도마에게 하는 말을 상고하여 보면, 이 끊임없는 추구는 결국 도마 자신의 존재의 내면적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과연 지금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도마의 권유에 뒤이어 나타나는 예수의 첫 마디는 “구하라!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라”라는 선포였다. 여기서 우리는 도마복음서의 놀라운 구성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앞서(제47편) ‘컨스트럭션과 디컨스트럭션의 긴장감’이라고 표현한 그 절묘한 연결고리를 엿보게 된다.
제1장에서는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And he said,)”로 시작하였지만 제2장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Jesus said,)”로 시작하고 있다. 전자는 3인칭 지시대명사를 썼지만, 후자는 명료하게 화자 ‘예수’를 특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곧바로 ‘예수께서 가라사대’로 시작하는 이 복음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대 1세기에 이 문헌을 접하는 사람들은 우리보다도 예수에 관하여, 그 삶의 역정에 관하여 정보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주어지고 있는 2천 년의 누적된 권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전기적(傳奇的) 정보나 권위가 없는 상태에서 곧바로 ‘예수께서 가라사대’로 직입(直入)하는 도마복음서의 구성력은 오히려 매우 강렬하고 파격적이며 더 체험적일 수 있다.
▲ 가나의 산하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산들이 모두 잔잔하게 다듬어진 바위들로 덮여 있다. 이 지역이 원래 포도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가나는 예수의 시대에는 갈릴리지역에 포함되었다. 성지순례객들에게 이곳 ‘진실한’ 레바논 가나를 꼭 한번 가볼 것을 권유한다. 이스라엘 가나의 교회건물과 즐비한 포도주상점 구경하는 것보다는 몇천만 배 소중한 살아있는 예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독자는 알 필요가 없다. 그러한 허접스레한 내러티브가 없이 곧바로 예수를 등장시킨다는 것은, 예수라는 인간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열쇠로서, 진리의 도구로서, 진리의 방편으로서의 예수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라는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말한 ‘은밀한 말씀들’이 중요한 것이다. 독자는 직접 그 말씀들과 맞부닥쳐야 하는 것이다.
이 ‘예수께서 가라사대’라는 부분은 물론 형식상 도마의 기록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나레이터의 도입이다. 예수의 말씀인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말씀과 말씀간의 인터벌을 줌으로써 텍스트를 구분시키는 효과를 내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체험세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휴식과 반성과 재고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밥 먹고 똥 싸고 민중들과 어울려 다니고 예루살렘에서 못 박혀 죽은 인간이 아니다. 그 인간은 도마복음서의 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도마기독교 공동체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는 오로지 말씀의 주체이며, 또 진리의 계시자(Revealer of Truth)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가 아니요 살아있는 자다. 그가 선포하는 진리는 단순하다. ‘천국’ 그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도마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살아있는 예수의 선포의 핵심주제였던 ‘천국’이라는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도마복음의 제1장에서 제시한 총론적 메시지는 이미 ‘천국의 은밀한 해석’이었고 ‘천국의 은밀한 발견’이었다【후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도마는 ‘천국’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천국’은 그에게 토포스(topos) 개념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나라’라고만 말한다. 그러나 나의 기술에 있어서는, 독자들에게 ‘천국’이라는 표현이 이미 익숙하므로 문맥에 따라 ‘천국’도 혼용한다】.
발견은 끊임없는 추구의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 가라사대의 제1탄은 ‘구하라’로 시작된다. 그러나 예수가 가르치는 우리의 ‘구함’의 행위는 결코 단순한 한 시점의 행위일 수가 없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일 뿐이다. 그것은 발견될 때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만 하는 추구의 과정이다. ‘구하는 자들이여!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공자는 말한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일단 물을진댄 확연히 알 때까지는 그것을 놓지 말지어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일단 생각할진댄 확연한 해답을 얻을 때까지는 그것을 놓지 말지어다[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중용』제20장).
그러나 이미 큐복음서에 속하는, 비교적 공관복음서에서 오리지날한 층대에 속한다고 하는 마태ㆍ누가의 파편 속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와 같은 예수의 로기온이 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문은 열릴 것이다” (Q35, 마 7:7~8, 눅 11:9~10. 도올 역주 『큐복음서』 174).
큐에서는 인간의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에 대한 결론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쉽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에서는 이러한 쉬운 방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아가페적 해방의 논리가 아닌, 고독한 개인의 실존적 내면의 고투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구함을, 찾을 때까지 그치지 말라’는 명제와 ‘구하기만 하면 쉽게 주어진다’는 명제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더 원래적 예수의 말씀에 근접하는 것인지는 독자들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나 도올은 바로 여기서 소승기독교가 대승기독교로 확대되어가는 제1세기의 발전경로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 시돈에 있는 십자군 성채, 히잡을 쓴 레바논의 젊은 여인들이 견학후 걸어나오는 모습을 망원으로 잡았다. 1228년에 지어졌는데 원래 페니키아의 헤라클레스에 해당되는 신인 멜카르트(Melkart)의 신전 위에 건설된 것이다. 페니키아 레방트(Levant)【불어로 ‘해가 뜬다’는 의미인데 지중해 동부해안을 가리킨다】 해안을 따라 계속 건설된 십자군 성채는 유럽역사의 부정적 측면을 대변하는 적의와 불신과 야만의 잔재이다. 1095년부터 시작되어 1291년까지 지속된 8차의 십자군 원정은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성 분묘교회(the Christian shrine of the Holy Sepulchre)를 탈환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는 왕권강화, 교황권 강화, 봉토확장, 골치 아픈 기사들의 처리문제, 베니치아 상인들의 농간 등등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었다. 이 성채는 이집트의 맘룩크왕조에 의하여 정복되었고, 후에 오스만제국이 확장하여 군요새와 모스크로 활용하였다. 십자군시대의 유럽은 문명 수준이 낮은 야만국가들이었다. 오히려 이 지역의 고등한 문명이 역류되어 르네상스의 기초를 이룩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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