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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 제2장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 제2장

건방진방랑자 2023. 3. 1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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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과 대승

구하라! 그러나 쉽게 얻을 것을 기대치 말라

 

 

모든 종교는 소승에서 대승으로 발전경로를 거치게 마련이다. 작은 숫자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신봉을 하던 시대에서 거대 숫자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신봉되는 시대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때 반드시 철학의 변화가 일어난다. 소승의 내면적이고 심오한 가르침은 보다 쉽고 보편적이고 즉각적인 성격으로 변화한다. 그 단적인 변화가 우리의 구함에 대한 도마의 기술과 마태의 기술에서 예시되고 있음을 본다.

 

 

2

1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2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3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4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1Jesus said, “He who seeks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he finds? 2When he finds, he will be troubled. 3When he is troubled, he will marvel, 4and he will reign over all.”

 

 

우리는 서장에서 살아있는 예수은밀한 말씀들의 의미를 파악하였고, 그것을 예수의 분신인 쌍둥이 도마가 기록하였다는 것을 나레이터의 기술을 통하여 명료하게 인지하였다. 같은 나그함마디 라이브러리에 포함되어 있는 문서 중에, 도마가 주인공으로 출현하는 또 하나의 성서인 도마서(The Book of Thomas the Contender)에는 이와 같이 적혀있다: “형제 도마여! 그대가 이 세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가 그대 마음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그대에게 드러내 보이리라. 자아! 그대는 나의 쌍둥이요, 나의 진실한 반려로다. 그러기 때문에 그대는 그대 자신을 되돌아보고, 그대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그대가 지금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138, 4~10, NHL 201: NHLJames M. Robinson, ed. The Nag Hammadi Library in English. Third, Completely Revised Edition.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8의 약자이다. 그 다음은 이 책의 페이지 표시. 그 앞의 숫자는 콥트어 원전 분류방식).

 

그 다음 제1장에서 우리는 기록자인 도마가 독자에게 이 은밀한 말씀을 대하는 우리 삶의 자세에 관하여 권유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 진지한 노력의 보상이 무엇인지를 기록자인 도마의 말을 통하여 들었다. 그것은 은밀한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 생명의 환희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발견이란 끊임없는 추구를 의미한다. 상기의 도마서 인용에서 예수가 도마에게 하는 말을 상고하여 보면, 이 끊임없는 추구는 결국 도마 자신의 존재의 내면적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과연 지금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도마의 권유에 뒤이어 나타나는 예수의 첫 마디는 구하라!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라라는 선포였다. 여기서 우리는 도마복음서의 놀라운 구성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앞서(47) ‘컨스트럭션과 디컨스트럭션의 긴장감이라고 표현한 그 절묘한 연결고리를 엿보게 된다.

 

1에서는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And he said,)”로 시작하였지만 2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Jesus said,)”로 시작하고 있다. 전자는 3인칭 지시대명사를 썼지만, 후자는 명료하게 화자 예수를 특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곧바로 예수께서 가라사대로 시작하는 이 복음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대 1세기에 이 문헌을 접하는 사람들은 우리보다도 예수에 관하여, 그 삶의 역정에 관하여 정보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주어지고 있는 2천 년의 누적된 권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전기적(傳奇的) 정보나 권위가 없는 상태에서 곧바로 예수께서 가라사대로 직입(直入)하는 도마복음서의 구성력은 오히려 매우 강렬하고 파격적이며 더 체험적일 수 있다.

 

 

 가나의 산하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산들이 모두 잔잔하게 다듬어진 바위들로 덮여 있다. 이 지역이 원래 포도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가나는 예수의 시대에는 갈릴리지역에 포함되었다. 성지순례객들에게 이곳 ‘진실한 레바논 가나를 꼭 한번 가볼 것을 권유한다. 이스라엘 가나의 교회건물과 즐비한 포도주상점 구경하는 것보다는 몇천만 배 소중한 살아있는 예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독자는 알 필요가 없다. 그러한 허접스레한 내러티브가 없이 곧바로 예수를 등장시킨다는 것은, 예수라는 인간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열쇠로서, 진리의 도구로서, 진리의 방편으로서의 예수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라는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말한 은밀한 말씀들이 중요한 것이다. 독자는 직접 그 말씀들과 맞부닥쳐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라는 부분은 물론 형식상 도마의 기록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나레이터의 도입이다. 예수의 말씀인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말씀과 말씀간의 인터벌을 줌으로써 텍스트를 구분시키는 효과를 내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체험세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휴식과 반성과 재고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밥 먹고 똥 싸고 민중들과 어울려 다니고 예루살렘에서 못 박혀 죽은 인간이 아니다. 그 인간은 도마복음서의 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도마기독교 공동체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는 오로지 말씀의 주체이며, 또 진리의 계시자(Revealer of Truth)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가 아니요 살아있는 자다. 그가 선포하는 진리는 단순하다. ‘천국그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도마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살아있는 예수의 선포의 핵심주제였던 천국이라는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도마복음의 제1장에서 제시한 총론적 메시지는 이미 천국의 은밀한 해석이었고 천국의 은밀한 발견이었다후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도마는 천국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천국은 그에게 토포스(topos) 개념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나라라고만 말한다. 그러나 나의 기술에 있어서는, 독자들에게 천국이라는 표현이 이미 익숙하므로 문맥에 따라 천국도 혼용한다.

 

발견은 끊임없는 추구의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 가라사대의 제1탄은 구하라로 시작된다. 그러나 예수가 가르치는 우리의 구함의 행위는 결코 단순한 한 시점의 행위일 수가 없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일 뿐이다. 그것은 발견될 때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만 하는 추구의 과정이다. ‘구하는 자들이여!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공자는 말한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일단 물을진댄 확연히 알 때까지는 그것을 놓지 말지어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일단 생각할진댄 확연한 해답을 얻을 때까지는 그것을 놓지 말지어다[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중용20).

 

그러나 이미 큐복음서에 속하는, 비교적 공관복음서에서 오리지날한 층대에 속한다고 하는 마태ㆍ누가의 파편 속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와 같은 예수의 로기온이 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문은 열릴 것이다” (Q35, 7:7~8, 11:9~10. 도올 역주 큐복음서174).

 

큐에서는 인간의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에 대한 결론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쉽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에서는 이러한 쉬운 방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아가페적 해방의 논리가 아닌, 고독한 개인의 실존적 내면의 고투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구함을, 찾을 때까지 그치지 말라는 명제와 구하기만 하면 쉽게 주어진다는 명제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더 원래적 예수의 말씀에 근접하는 것인지는 독자들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나 도올은 바로 여기서 소승기독교가 대승기독교로 확대되어가는 제1세기의 발전경로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시돈에 있는 십자군 성채, 히잡을 쓴 레바논의 젊은 여인들이 견학후 걸어나오는 모습을 망원으로 잡았다. 1228년에 지어졌는데 원래 페니키아의 헤라클레스에 해당되는 신인 멜카르트(Melkart)의 신전 위에 건설된 것이다. 페니키아 레방트(Levant)【불어로 ‘해가 뜬다’는 의미인데 지중해 동부해안을 가리킨다】 해안을 따라 계속 건설된 십자군 성채는 유럽역사의 부정적 측면을 대변하는 적의와 불신과 야만의 잔재이다. 1095년부터 시작되어 1291년까지 지속된 8차의 십자군 원정은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성 분묘교회(the Christian shrine of the Holy Sepulchre)를 탈환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는 왕권강화, 교황권 강화, 봉토확장, 골치 아픈 기사들의 처리문제, 베니치아 상인들의 농간 등등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었다. 이 성채는 이집트의 맘룩크왕조에 의하여 정복되었고, 후에 오스만제국이 확장하여 군요새와 모스크로 활용하였다. 십자군시대의 유럽은 문명 수준이 낮은 야만국가들이었다. 오히려 이 지역의 고등한 문명이 역류되어 르네상스의 기초를 이룩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쉬움과 어려움

찾았을 때 너는 고통스러우리라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같다. 그 목표가 인간의 구원이라고 한다고 하면 제종교간에도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교는 인간의 구원이 쉽게 얻어진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종교는 매우 어렵다고 판단한다. 한 종교 내에서도 쉬움()과 어려움()의 견해 차이는 종단이나 분파간에 다양한 교리를 형성시킨다. 대체로 대승은 쉬운 길을 택한다. 물론 쉬움의 위대성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쉬움의 교리는 의타적 기만성을 조장할 수도 있다. 살아 있는 예수는 우리에게 인간의 구원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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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2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3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4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1Jesus said, “He who seeks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he finds? 2When he finds, he will be troubled. 3When he is troubled, he will marvel, 4and he will reign over all.”

 

 

소승에서 대승에로의 발전이 모든 종교의 필연적 과정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더구나 소승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대승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가치판단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하나의 종교, 그러니까 하나의 도그마를 신봉하는 교단조직이 인간세에서 보편적인 지배력을 확보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계기들이 개입된다. 대승기독교의 결정적 모우멘텀은 아마도 AD 3121027일 로마 근교 밀비우스다리(Milvian Bridge)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콘스탄티누스는 현몽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고, 계시받은 문장을 병사들의 방패 위에 그려 그의 아내의 오빠인 막센티우스(Maxentius)의 군대를 무찌를 수 있었다. 그는 다리 밑 테베레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한 자기 처남의 시체를 다시 참수하여 그 대가리를 창 끝에 꽂고 로마에 입성함으로써 6명의 황제가 1인의 황제로 통일되어가는 결정적 계기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불가침의 신성한 1인 절대권력의 꿈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 덕분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콘스탄티누스 본인이 이러한 신앙을 직접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에게 고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밀비우스다리의 무속적 계시가 313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의 실제적 계기였다. 그리고 기독교는 공인되었다.

 

그러나 대승기독교의 이론적 틀은 이미 요한복음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요한은 이미 바울신학에서 제시된 부활사상의 심오하게 철학적인 영지주의 측면과, 마가복음으로부터 시작된 내러티브 가스펠의 화려한 대중성과,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상가 필로(Philo Judaeus, c,BC 20~AD 40)가 유대교의 인격신 개념과 플라토니즘적 세계관을 결합시키면서 인간의 이성과 신적 사유의 매개체로서 설정한 로고스(logos), 그리고 당대에 네오플라토니즘의 유출설적 연속성과 낙관론이 단절된 상황에서 신의 자기구원(the self-saving of God)의 상징으로서 등장한 영지주의의 대속자신화(代贖者神話, the Gnostic redeemer myth) 등등, 이 모든 당대의 조류를 창조적으로 결합하였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공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승적 발전의 탄탄한 대로를 예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도마복음서를 이러한 대승적 조류와 대비되는, 대승 이전의 소승적 조류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스리랑카의 소승불교도들이 자신을 소승불교도라고 인지하지는 않는다.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가 발전되었다고 소승불교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팔리어장경에서 불교의 초기모습을 보다 리얼하게 파악할 뿐이다. 니까야(nikāya)를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종교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길거리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아무 생각없이 외치는 전도사의 고함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냥 무조건 교회에 나가 간구하기만 하면 3, 5, 천중, 만중의 현세적 축복이 쏟아질 것인가?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만사가 다 이루어진다는 사람이야말로 줏대없는 간교한 이기주의자요, 출세만을 지향하는 기회주의자일 수도 있다. 물론 교회의 문은 두드리기만 하면 열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다. 교단의 세력이 확장되고 연보돈이 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마가 만난 살아있는예수의 첫 마디는 천국의 문은 아무리 두드리고 또 두드려도 쉽게 열리지 않는다고 하는 경고이다. 두드리고 또 두드려라! 열릴 때까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쳐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쉽게 즉각적으로 결론이 주어지는 과정이 아니다. 어렵고 지루한 추구의 과정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중도에 포기하고 말 그러한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는 중도에 포기하지 말 것을 강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그토록 어렵게 구하고 또 구해서 드디어 찾았을 때,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는가?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은 무엇인가? ‘찾았을 때 너는 고통스러우리라!’ 아니 이건 또 웬 말인가? 어찌하여 천국을 찾았는데, 구하려고 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데, 구한 것을 얻었는데, 왜 고통스럽단 말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밤 콘스탄티누스 꿈에 나타난 방패문양, XP를 합친글씨. XP키로라고 읽는데 그리스도의 첫 두글자이다. 안티옥 부근의 성 시므몬교회 외벽에서 찍었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의 대표적 주화, 콘스탄티누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 뒷면에 불패의 태양신(soli invictus)’이 새겨져 있다. 즉 콘스탄티누스 자신을 로마 전통의 태양신과 동일시한 것이다. 기독교공인의 의미가 이와 같이 처음에는 모든 종교와의 공존을 의미했다. 태양신 축제일이 일요일이었고 이것이 기독교 예배일이 되었다. 일요일은 성경에 나오는 유대교 안식일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천국은 맘몬(Mammon)이 아니다(Q74, 6:24, 16:13). 돈을 구해서 얻는 것과도 같은 기쁜 세속적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 고통스럽다(will be troubled)’는 것은 당혹스럽다.’ ‘번민에 휩싸인다는 뜻이다. 구하는 것을 얻었을 때 우리는 당혹스럽고 고통스럽게 된다. 왜냐?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인격주체의 근원적인 변화(the transformation of one's subjectivity)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자아의 몸으로서는 천국의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아이디 카드(identification card), 즉 자기동일성의 증표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디 카드를 새로 발급받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관습과 관행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통스럽지 않다면 나의 구함은 진정한 구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옛 관습과 관행의 지속일 뿐이다.

 

새로운 자아의 건설(the construction of an alternative subjectivity)은 고통스럽다. 붓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말하지만, 살아있는 예수는 인간의 현존재를 고(, duḥkha)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창조적인 고통을 말할 뿐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때,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될 때 인간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의 순간 때문에 비로소 인간은 천국의 경이로움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울 때 너는 경이로우리라!’

 

경이는 타우마제인(taumazein, 놀람, 경탄)이다. 모든 참된 앎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했듯이, 타우마(thauma, 놀람, 경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천국이란 바로 일상적 자아가 고통스러운 주체의 변환(變換)을 통하여 얻는 경이(驚異). 그러나 경이는 경이로서 완료되지 않는다. 경이는 타 동·식물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인간의 특권이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다. 경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이를 낳아야 하고, 경이는 다른 지속태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 지속태란 무엇인가? 예수는 말한다: “경이를 체험하면 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여기 다스림이란 무엇인가?

 

 

기독교박해에 열심히던 유대교도 사울이 다메섹(Damascus)으로 가는 도중에 특별한 계시를 받고 개종하게 된 사도행전 9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자신은 그러한 사건을 보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나에게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셨다라고만 고백한다(1:16). 그리고 개종직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사막으로 갔다. 이 바울이 개종 후 최초로 간 아라비아가 바로 에돔땅 나바태안 왕국(Nabataean Kingdom)이다. 또 고린도후서(11:32~33) 에 보면 훗날에 아레타왕(King Aretas)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 했기에 도망쳤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아레타왕이 바로 나바태안왕국의 왕이었다. 그는 헤롯 안티파스의 장인이었다. 헤롯대왕도 본시 이 지역 이두메(에돔) 출신이었다. 이 나바태안왕국의 실체가 오늘 페트라의 장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이 지역은 십자군이 잠깐 다녀간 적은 있으나 그 뒤로 완벽하게 망각의 세계로 사라졌고 베두인의 비밀스러운 성지로만 은폐되고 외부인들에게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아랍어를 노련하게 구사했던 스위스의 젊은 탐험가 버크하르트(J. L., Burckhardi)가 이 지역에 관한 소문을 듣고 무슬림성자로 가장하고 침투한 것이 1812년의 사건이었다. 아론의 무덤에 제사지낸다는 명목으로 이 검붉은 장밋빛 사암의 웅대한 협곡 (The Siq, 1.2km)에 당도했을 때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요르단에 속한 페트라는 신() 7대불가사의 실제적 1호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혜와 왕()

구하는 자여! 그대 몸의 왕국의 왕이 되라

 

 

도마복음의 언어는 고도의 상징적 체계이다. 그 은밀함을 푸는 열쇠 중의 하나가 지혜문학전통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신학도들이 암암리 기독교를 서양 종교로 규정하고 동양적 가치관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AD 1세기의 기독교는 동·서양이 완전히 융합된 가치관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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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2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3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4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1Jesus said, “He who seeks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he finds? 2When he finds, he will be troubled. 3When he is troubled, he will marvel, 4and he will reign over all.”

 

 

상식인들이 보통 기독교를 생각할 때, 복음서에 나오는 이적이나 신화적 기술 때문에, 그것을 매우 유치한 종교로 생각하기가 쉽다. 실제적으로도 이적이나 부활 때문에 예수장사가 잘된다고 북 치고 장구 치는 쟁이들을 제외하고는, 세계의 상식인들에게 기독교는 유치하게 비친다. 대한민국은 유독 그러한 열렬한 쟁이들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나의 상식적 언급을 오히려 터무니없다고 말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이 순간에도 북 치고 장구 치며 방언하고 앉아있는 방방곡곡 서낭당 휴거파들의 행태를 비상식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정상인은 이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탄생된 그레코로만의 1세기 팔레스타인의 지적 분위기는 그러한 뮈토스가 극복된 매우 성숙한 것이었다. 희랍고전철학의 고도의 논리적 탐구와 추상적 사유가 전달되어 있었으며, 알렉산더대제의 세계정복 이후에 전개된 헬레니즘의 다양한 삶의 철학사조가 꽃을 피웠다. 이미 폴리스(polis)의 시대는 지나가고 코스모폴리스(cosmopolis)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사유도 다양한 이방문명과의 접촉을 거치면서 거창한 신화적 영웅담을 탈피하여 보다 상식화되고 인간화되고 일상화되는 일련의 담론을 노출시킨다. 우리 동양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구약 중에서 욥기(Job)나 잠언(Proverbs)이나 전도서(Ecclesiasticus)와 같은 문학작품은 크게 부담을 주지 않는 주옥같은 금언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위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 전통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BC 6세기로부터 싹을 틔우기 시작하여 예수의 시대에는 만개한 유대교의 중요한 흐름인 것이다. 히브리말로는 호크마(hokmā), 희랍어로는 소피아(sophia)라고 부르는 이 지혜란 무엇인가?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원래 지혜란 본시 삶의 지혜인 것이다. 그것은 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 삶과 행동에 관련한 다양한 사태에 정의롭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인간적 폭이나 능력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셈족 언어에서는 이 지혜는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의인화(personification)되는 경향을 보인다: “지혜를 네 신부로 삼고, 슬기를 네 애인이라 불러라”(7:4, 공동번역).

 

따라서 지혜는 문학가들의 상상력과 더불어 아름다운 레토릭의 옷을 입으며 독자적인 우주적 인격체로서 발전해간다. 그러다가 결국 또다시 신적인 속성과 결합하게 된다. 인간의 자족적인 지혜는, 욥기문학이 항변하고 있듯이, 분명 한계가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자신 정통적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이러한 유대적 지혜전통 속에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큐복음서에도 예수는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의 화신이다(Q41, 12:42, 11:31).

 

도마복음서를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지혜문학의 전통 속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나는 그러한 이해방식에 관하여 크게 토를 달 생각은 없지만 너무 지나치게 지혜 문학이라는 사조의 틀을 실체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도마복음을 이해하는 하나의 레퍼런스로 생각하면 족하다. 그러나 내가 지혜를 말하는 뜻은 우리가 도마복음서를 지혜롭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크하르트의 충격이 보고되자 그 뒤를 이어 간 사람이 바로 유명한 화가이기도 했던 영국인 데이비드 로버트(David Roberts)였다. 183936일 그는 페트라에 도착했다. 이 그림은 다음날 그린 것인데 페트라의 왕들의 묘역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로버트의 그림들이 석판으로 출판되자 그것은 모험심에 가득 찬 유럽인들의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예수가 태어나기 직전에 성립한, 헬라화된 다이애스포라의 유대인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집필된 지혜문학서 솔로몬의 지혜서(Wisdom of Solomon)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지혜는 빛을 발하며 시들지 않는다. 지혜는 그녀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쉽게 식별되고, 그녀를 구하는 자들에게 발견된다. 그녀는 그녀를 원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녀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죽음을 맛보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간다. 지혜의 사랑은 우리를 왕국으로 이끈다. (6:12~20).

 

 

독자들은 솔로몬의 지혜서와 도마복음서 사이에 공통되는 많은 언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도마복음서의 언급과 우리를 왕국으로 이끈다는 솔로몬의 지혜서의 언급의 상관관계에 관한 것이다. 옥시린쿠스사본 도마복음서에 사용된 다스린다에 해당되는 희랍어 단어는 왕노릇 한다(βασιλεύω)’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 ‘하늘의 나라라고 할 때의 나라,’ 즉 바실레이아(βασιλεια)와 같은 어원의 말인 것이다.

 

경이를 체험한 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는 표현은 결국 왕이 된다는 뜻이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천국의 꼬붕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나라에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은 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경이를 체험하면 왕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가 선포하는 천국은 권세와 폭력의 세속나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혜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지혜의 왕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왕국인 것이다. 결국 이 내 몸(Mom, Soma)이야말로 천국인 것이다. 이 천국에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 몸 속에 있는 신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다는 뜻이다. 내 몸의 천국 속에서 나는 왕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은 호랑이나 느티나무가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인간이 만들 뿐이다. ? 인간이 자기 몸의 왕노릇을 할 수 없을 때, 내가 나의 사단(四端)칠정(七情)을 다스리지 못할 때, 끔찍한 우주의 모든 죄악이 파생하는 것이다. ‘라는 왕국의 왕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구함과 찾음과 고통과 경이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옥시린쿠스사본은 콥트어사본과 달리 이 한마디를 첨가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만이 휴식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인복음서(The Gospel of the Hebrews)도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경이를 체험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스릴 것이요, 다스리는 자는 누구든지 휴식할 것이다(Whoever marvels will rule and whoever rules will rest). 6a.”

 

여기서 휴식(Rest)’이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언어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다스림의 본 뜻과 그 의미맥락을 확연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편협한 기존 성서의 가치관에서만 도마복음서의 언어를 대하기 때문에, ‘휴식의 의미조차 명료하게 파악치 못하는 것이다. ‘휴식열반적정(涅槃寂靜, śāntam nirvāṇam)’적정이다. 그것은 고요함이요, 평온이요, 구극적으로는 해탈이다. 그것은 죽음이 아닌 생명의 원천이다. 인간은 내 몸의 왕이 될 때에만이 비로소 휴식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예수가 도마복음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첫 메시지는 추구와 발견과 번민과 경이와 제압과 해탈이다. 참으로 놀라운 도언(導言)이 아닐 수 없다.

 

 

페트라의 협곡은 시크(The Siq)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의 장관이다. 그것은 침식의 소산이 아니라, 지각변동으로 거대한 바위가 찢겨 틈을 낸 것이다. 양쪽 바위 높이 200m, 폭은 2~5m 정도, 길이 1.2km에 이르는 협곡, 그 바닥은 로마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 붉게 타오르는 사암의 미로 끝에 우리는 충격적인 건축물을 만난다. 카즈네트 알 파라운(Khaznet al-Faraoun, The Treasury of Pharaoh)! 이 성전은 이집트 파라오가 이스라엘 도망자들을 추격하다가 보물을 이곳에 숨겨두었다고 하는 전설 때문에 파라오의 보물창고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면에 이집트 여신 이시스가, 양 옆에는 도끼는 여전사 아마 조네스, 후면 감실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 아래층 양쪽에는 제우스의 말 탄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 꼭 대기 지붕 처마 끝에는 나바태안왕국의 최고신 두샤라(Dushara)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조각되어 있다. 중동문명권과 이집트 문명이 혼합된 헬레니즘양식으로 아레타스왕 3세 때의 작품이다(BC 1세기), 사도 바울은 이곳에 와서 이 코린트 양식의 찬란한 위용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사진은 갑자기 휘몰아치는 모래광풍 속의 신전을 잘 포착하고 있다. 태고의 정취가 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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