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장 3. 대덕자를 대덕자답게, 소덕자를 소덕자답게
‘소덕 천류 대덕 돈화(小德 川流 大德 敦化)’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소덕 천류 대덕 돈화(小德 川流 大德 敦化)’ 작은 덕은 작은 시냇물이 흐르듯이 졸졸 흐른다[川流]! 이 골 저 골 흐르는 물들이 다 제각기 제 산수에서, 제 환경에서, 제 모습을 가지고 흐르는 그 모습을 상상하세요. 얼마나 서로 해치지 않고 제 위치에서 잘 흐르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흐름들은 계속 그렇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큰물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중용(中庸)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덕(大德)은 모든 것을 도탑게 해서 조화시키고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이 대덕(大德)은 이 소덕(小德)들이 모여서 흐르는 바다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대덕(大德)이 가져야 할 것은 천류(川流)가 아니라 바로 도탑게 해서 조화시키는 돈화(敦化)라는 것입니다. 한강에 가서 물을 한바가지 떠서는 야~ 이거는 양수리에서 온 물이구나, 음 이것은 남한강에서 왔군! 하고 알 수 있습니까? 그냥 한강물일 뿐이죠. 돈화(敦化)라는 말은 이렇듯 큰물에서는 다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천류(川流)들은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하는 식으로 흐르고 대덕(大德)은 그것들을 돈화(敦化)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인간 사회에는 이러한 대덕(大德)과 소덕(小德)이라는 양면이 다 있어야 합니다. 군자는 바로 그러한 대덕(大德)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범인들은 천류(川流), 즉 자기 흐름을 따라서 자기 개울을 흐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원성이 유교(儒敎) 문명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엘리트주의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이러한 것이 사회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대덕(大德)을 가진 자들은 대덕(大德)을 가진 자답게 행동할 줄 알아야 하고 소덕(小德)을 가진 사람을 소덕(小德)을 가진 자로서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하는 세계관을 가져야 해요. 그것이 없이 서로 혼돈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대덕자(大德者)는 대덕자(大德者)로서 우리가 존중해 줘야 합니다.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얼마 전에 한 단체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인즉은, 고등학교를 떨어져 마음 상한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저에게 모 소설가와 대담하면서 그 학생들을 위로하는 좋은 말씀을 해주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의도가 나쁘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분명히 위로를 받아야 하고 그 행사도 참 좋은 행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꼭 나를 불러야만 하겠습니까? 그런 자리에 적합한 다른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지 않겠어요?
얼마 전 오오에 켄자부로(大江 健三郎, おおえ けんざぶろう, 1935~)가 왔을 때 신문사에서 무슨 대담을 주선한다기에 나에게도 초청장 하나는 날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분과 안면도 있고, 또 상당히 존경하는 분이기에 초청을 해준다면 공개적인 자리에서 위대한 대담을 한번 하고 싶었는데, 웬걸 초청장은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리에는 나를 안 부르고 뭐 고등학교 입시 떨어진 학생들에게 위로하는 자리에 나오라니,
정말 우리 사회의 사람 보는 수준이 이 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대체 대덕자를 대덕자로 대접할 줄을 모르는 사회예요. 사실 이제는 그런 데 대해 원한도 없습니다. 이제는 평범하게 소리 없이 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러한 나의 설움을 단순하게 개인적 감정의 일단일 뿐이라고 지나치기보다는 조선 문명의 새로운 축을 모색할 때 무얼 고민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심각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대덕자를 대덕자로 대접하고, 소덕자를 소덕자로서 또 존중하는 그러한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중용(中庸)은 다음과 같이 이 30장을 끝내고 있습니다.
‘차천지지소이위대야(此天地之所以爲大也).’
‘차천지지소이위대야(此天地之所以爲大也).’ 이 말은 소덕(小德)의 천류(川流)가 있고, 대덕(大德)의 돈화(敦化)가 공존해야만 천지(天地)가 천지(天地)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천지(天地)에는 작은 법칙이 있는가 하면 또 큰 법칙이 있는 거예요. 생물의 법칙을 지배하는 DNA가 세포마다 있는가 하면 또 가이아처럼 거대한 운행을 다스리는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소위 천지(天地)가 위대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註)를 살펴보고 이 30장을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주자(朱子)는 “서로 해치지 않고 어그러지지 않는 것은 ‘소덕지 천지(小德之 川流)’고 그것을 그렇게 하게끔 병육. 병행 시키는 것을 ‘대덕지 돈화(大德之 敦化)’라 한다[所以不害不悖者, 小德之川流; 所以幷育幷行者, 大德之敦化].”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자(朱子)의 이기(理氣)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나온 해석입니다. 주자(朱子)는 계속 말하기를 “소덕자는 전체를 나누어 가진 것이요, 대덕자는 만 가지가 다를 수 있는 근본이다. 천류(川流)라는 것은 그 시냇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요, 자기가 걸어가는 그 골짜기마다의 그 맥락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항상 가면서 쉼이 없는 것이다. 돈화자(敦化者)는 그 모든 것을 조화해서 교화시키는 것을 돈독히 하며 근본이 성대해서 그 산출함에 끝이 없다. 이것은 천지(天地)의 도(道)를 말씀하여 윗 문장【辟如天地之 無不持載 無不覆幬 辟如四時之錯行 如日月之代明】에서 비유를 취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小德者全體之分, 大德者萬殊之本. 川流者, 如川之流脈絡分明而往不息也; 敦化者, 敦厚其化根本盛大而出無窮也. 此言天地之道以見上文取譬之意也].” 주자(朱子)는 이것을 이렇듯 이기론(理氣論)적으로 풀었습니다.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라는 말은 아마도 중용(中庸)에 있어서 가장 많이 인용이 되는 문장이고, 나는 평생 이것을 이상으로 삼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노자(老子), 즉 도가(道家)의 ‘자연(自然)’이라는 말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중용(中庸)의 부분이라는 것도 아울러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30장도 상당히 중요한 장입니다.
21장 핵심 내용 |
천도 (天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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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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