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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30장 - 3. 대덕자를 대덕자답게, 소덕자를 소덕자답게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30장 - 3. 대덕자를 대덕자답게, 소덕자를 소덕자답게

건방진방랑자 2021. 9. 22.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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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 대덕자를 대덕자답게, 소덕자를 소덕자답게

 

 

소덕 천류 대덕 돈화(小德 川流 大德 敦化)’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소덕 천류 대덕 돈화(小德 川流 大德 敦化)’ 작은 덕은 작은 시냇물이 흐르듯이 졸졸 흐른다[川流]! 이 골 저 골 흐르는 물들이 다 제각기 제 산수에서, 제 환경에서, 제 모습을 가지고 흐르는 그 모습을 상상하세요. 얼마나 서로 해치지 않고 제 위치에서 잘 흐르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흐름들은 계속 그렇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큰물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중용(中庸)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덕(大德)은 모든 것을 도탑게 해서 조화시키고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이 대덕(大德)은 이 소덕(小德)들이 모여서 흐르는 바다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대덕(大德)이 가져야 할 것은 천류(川流)가 아니라 바로 도탑게 해서 조화시키는 돈화(敦化)라는 것입니다. 한강에 가서 물을 한바가지 떠서는 야~ 이거는 양수리에서 온 물이구나, 음 이것은 남한강에서 왔군! 하고 알 수 있습니까? 그냥 한강물일 뿐이죠. 돈화(敦化)라는 말은 이렇듯 큰물에서는 다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천류(川流)들은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하는 식으로 흐르고 대덕(大德)은 그것들을 돈화(敦化)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인간 사회에는 이러한 대덕(大德)과 소덕(小德)이라는 양면이 다 있어야 합니다. 군자는 바로 그러한 대덕(大德)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범인들은 천류(川流), 즉 자기 흐름을 따라서 자기 개울을 흐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원성이 유교(儒敎) 문명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엘리트주의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이러한 것이 사회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대덕(大德)을 가진 자들은 대덕(大德)을 가진 자답게 행동할 줄 알아야 하고 소덕(小德)을 가진 사람을 소덕(小德)을 가진 자로서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하는 세계관을 가져야 해요. 그것이 없이 서로 혼돈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대덕자(大德者)는 대덕자(大德者)로서 우리가 존중해 줘야 합니다.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얼마 전에 한 단체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인즉은, 고등학교를 떨어져 마음 상한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저에게 모 소설가와 대담하면서 그 학생들을 위로하는 좋은 말씀을 해주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의도가 나쁘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분명히 위로를 받아야 하고 그 행사도 참 좋은 행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꼭 나를 불러야만 하겠습니까? 그런 자리에 적합한 다른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지 않겠어요?

 

얼마 전 오오에 켄자부로(大江 健三郎, おおえ けんざぶろう, 1935~)가 왔을 때 신문사에서 무슨 대담을 주선한다기에 나에게도 초청장 하나는 날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분과 안면도 있고, 또 상당히 존경하는 분이기에 초청을 해준다면 공개적인 자리에서 위대한 대담을 한번 하고 싶었는데, 웬걸 초청장은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리에는 나를 안 부르고 뭐 고등학교 입시 떨어진 학생들에게 위로하는 자리에 나오라니,

 

정말 우리 사회의 사람 보는 수준이 이 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대체 대덕자를 대덕자로 대접할 줄을 모르는 사회예요. 사실 이제는 그런 데 대해 원한도 없습니다. 이제는 평범하게 소리 없이 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러한 나의 설움을 단순하게 개인적 감정의 일단일 뿐이라고 지나치기보다는 조선 문명의 새로운 축을 모색할 때 무얼 고민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심각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대덕자를 대덕자로 대접하고, 소덕자를 소덕자로서 또 존중하는 그러한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중용(中庸)은 다음과 같이 이 30장을 끝내고 있습니다.

 

 

차천지지소이위대야(此天地之所以爲大也).’

차천지지소이위대야(此天地之所以爲大也).’ 이 말은 소덕(小德)의 천류(川流)가 있고, 대덕(大德)의 돈화(敦化)가 공존해야만 천지(天地)가 천지(天地)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천지(天地)에는 작은 법칙이 있는가 하면 또 큰 법칙이 있는 거예요. 생물의 법칙을 지배하는 DNA가 세포마다 있는가 하면 또 가이아처럼 거대한 운행을 다스리는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소위 천지(天地)가 위대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를 살펴보고 이 30장을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주자(朱子)서로 해치지 않고 어그러지지 않는 것은 소덕지 천지(小德之 川流)’고 그것을 그렇게 하게끔 병육. 병행 시키는 것을 대덕지 돈화(大德之 敦化)’라 한다[所以不害不悖者, 小德之川流; 所以幷育幷行者, 大德之敦化].”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자(朱子)의 이기(理氣)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나온 해석입니다. 주자(朱子)는 계속 말하기를 소덕자는 전체를 나누어 가진 것이요, 대덕자는 만 가지가 다를 수 있는 근본이다. 천류(川流)라는 것은 그 시냇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요, 자기가 걸어가는 그 골짜기마다의 그 맥락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항상 가면서 쉼이 없는 것이다. 돈화자(敦化者)는 그 모든 것을 조화해서 교화시키는 것을 돈독히 하며 근본이 성대해서 그 산출함에 끝이 없다. 이것은 천지(天地)의 도()를 말씀하여 윗 문장辟如天地之 無不持載 無不覆幬 辟如四時之錯行 如日月之代明에서 비유를 취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小德者全體之分, 大德者萬殊之本. 川流者, 如川之流脈絡分明而往不息也; 敦化者, 敦厚其化根本盛大而出無窮也. 此言天地之道以見上文取譬之意也].” 주자(朱子)는 이것을 이렇듯 이기론(理氣論)적으로 풀었습니다.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라는 말은 아마도 중용(中庸)에 있어서 가장 많이 인용이 되는 문장이고, 나는 평생 이것을 이상으로 삼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노자(老子), 즉 도가(道家)자연(自然)’이라는 말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중용(中庸)의 부분이라는 것도 아울러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30장도 상당히 중요한 장입니다.

 

21
핵심
내용
천도
(天道)
22 24 26     30 31 32 33
전편
요약
인도
(人道)
23 25 27 28 29      

 

 

 

 

 

인용

목차

전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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