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심을 잊은 이행이 여행하며 쓴 한시
그렇다면 『소화시평』 권하 64번에 인용된 이행의 「대흥동도중(大興洞途中)」이라는 시는 여행시의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한 것 중에 어디에 포함되는지를 보는 것도 재밌는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선 전편을 본 후에 어디에 들어갈지 각자 생각해보며 정리해보도록 하자.
芒鞋藜杖木綿衣 | 짚신 신고 명아주 지팡이 짚고 목면 입고 나니까, |
未覺吾生與願違 | 나의 삶이 원하는 것과 어긋나지 않는구나. |
塵土十年寧有是 | 속세에 10년 동안 어찌 이것이 있었겠나. |
溪山終日便忘機 | 산수 속에서 종일토록 문득 기심마저 잊었네. |
多情谷鳥勸歸去 | 다정한 골짜기의 새는 돌아가길 권하고 |
一笑野僧無是非 | 한바탕 웃는 들의 스님은 시비를 안 따지네. |
更着詩翁哦妙句 | 다시 시옹이 붙어서 묘한 시구 읊조리니, |
晩風催雨正霏霏 | 저녁 바람 비 재촉해 정히 부슬부슬. 『容齋先生集』 卷之四 |
수련에선 여행을 떠나려 준비할 때의 모습과 그에 대한 소감을 다뤘다. 여행을 떠나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으며 무명옷까지 입고 나니 기분이 새로웠을 것이다. 단순히 가까운 곳을 왕래하는 정도라면 이렇게까지 갖춰 입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제법 먼 거리를 가야 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여행자의 풀세트를 갖춘 것이리라. 그런데 이때 이행은 여행을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여유롭고 세상에 대한 집착 없이 사는 인생이 바로 자신이 꿈꿔왔던 삶이라고 고백을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삶이 늘 이상 속으로 꿈꾸던 삶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자기 고백을 통해 이행이 여행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일상의 치열함이 아닌 여행을 할 줄 아는 여유로움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함련에선 속세에 살며 치열하게 살던 10년의 삶을 회고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엔 지금과 같은 여유로움이나 너그러운 마음 따윈 없었다고 말이다. 이 말은 굳이 길게 하지 않아도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 치여 살 때 얼마나 좀생이가 되어가며 자잘한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주말에 뒷 산에라도 올라보면 내가 그렇게 치열하게 살던 곳이 얼마나 비좁은 곳이었는지, 그리고 그만큼 나의 시야가 얼마나 편협해졌는지를 느끼게 되고 다시 한 번 맘을 다잡게 된다. 이처럼 여행을 떠난 지금의 이행은 과거를 돌아보며 회상에 잠겨 있고 그만큼 지금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산수를 종일토록 다니는 지금은 기심(機心)마저도 잊게 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심은 한마디로 하면 욕심이라는 말인데 그건 권력의 한 목판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강렬하게 작동한다. 관계를 이익의 관점으로 단순화시켜 당장에 이익이 되면 동지로, 그렇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하면 행동할수록 자신은 더욱 피폐해져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권력에서 벗어나 산수를 벗삼아 살다 보니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식의 편협한 사고들이 자신을 뒤흔들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미련에 가면 ‘기심을 잊었다’는 게 실질적으로 삶에서 드러나면 어떻게 되는지가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산속을 거닐다 보면 수풀 내음이 코를 찌르고 산새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평상시 같았으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지나칠 법한 데도 이땐 온전히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심마저 잊은 채 거닐고 있으니 산새가 마치 나에게 얘기를 건네 오는 것만 같다. 그런데 그 산새는 ‘돌아가’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잘못 생각하면 ‘환로(宦路)로 나가라’라는 표현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건 정말 아니 될 말이다. ‘귀거(歸去)’라는 단어는 정확히 도연명이 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염두에 두고 쓴 단어기 때문이다. 그러니 벼슬자리에 대한 미련일랑 완전히 버리고 자연 속에서 돌아가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대뜸 김형술 교수님은 여기서 재밌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말하는 새가 어떤 새일 거 같아요?”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건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새에 대한 전고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나의 머릿속엔 그런 지식이 없으니 대답하질 못했는데 한 학생이 “두견새입니다.”라고 똑부러지게 말한다. 두견새는 아래에서 덧붙이기로 인용했듯이 ‘불여귀(不如歸)’라고 울기 때문에 이번 시에 나오는 새는 이런 전고를 통해 두견새라 보는 게 맞다.
촉(蜀, 지금의 四川省) 나라에 이름이 두우(杜宇)요, 제호(帝號)를 망제(望帝)라고 하는 왕이 있었다. 어는 말 망제가 문산(汶山)이라는 산 밑을 흐르는 강가에 와 보니, 물에 바져 죽은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오더니 망제 앞에서 눈을 뜨고 살아났다. 망제는 이상히 생각하고 그를 데리고 돌아와 물으니 “저는 형주(刑州) 땅에 사는 별령(鱉靈)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서 물에 빠져 죽었는데, 어떻게 해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것이다. 망제는, 이는 하즐이 내린 사람이다. 하늘이 내게 어진 사람을 보내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별령에게 집을 주고 장가를 들게 하고, 그로 하여금 정승을 삼아 나라일을 맡기었다. 망제는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약한 사람이었다. 이것을 본 별령은 은연중 불측한 마음을 품고 망제의 좌우에 있는 대신이며 하인까지 모두 매수하여 자기의 심복으로 만들고 정권을 휘둘렀다. 그때에 별령에게는 얼굴이 천하의 절색인 딸 하나가 있었는데, 별령은 이 딸을 망제에게 바쳤다. 망제는 크게 기뻐하여 나라일을 모두 장인인 별령에게 맡겨 버리고 밤낮 미인을 끼고 앉아 바깥일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이러는 중에 별령은 마음 놓고 모든 공작을 다하여 여러 대신과 협력하여 망제를 국외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망제는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나 그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서 두견이라는 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를 부르짖어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뒷사람들은 그를 원조(怨鳥)라고도 하고 두우(杜宇)라고도 하며, 귀촉도(歸蜀途) 혹은 망제혼(望帝魂)이라 하여 망제의 죽은 넋이 화해서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엔 스님을 만났나 본데 기심을 잊은 그가 보기엔 스님조차 매우 평온해보였던 듯하다. 그러니 한바탕 웃으며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시비를 따지고 이해를 타산하는 행동은 일절 없이 자연과 합일되어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미련에 나의 경우엔 이 시를 짓고 있는 이행의 얘기로 봤었다. 그래서 시옹이 절로 여유로워진 나에게 붙어 이렇게 시를 짓고 있으니 그때 저녁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따라 비는 부랴부랴 내리기 시작했다는 정조로 마무리 지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교수님은 같이 가고 있던 친구가 있어 그 친구에게 시옹이 붙어 아름다운 시를 한 수 읊조리고 있는 장면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해줬다. 아마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묘구(妙句)’라는 말 자체에 있을 것이다. 이행이 지은 이 시는 ‘묘한 시구’가 없이 자연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으니, 이 시에 대해 자기 스스로 ‘묘한 시구’라는 표현을 쓰진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건 자신이 지은 이 시에 대한 평어이기보다 친구가 그 당시에 지었던 시에 대한 평어로 볼 수 있다.
도중시(途中詩)의 유형 | |
사회시(社會詩) | 유몽인의 「襄陽途中」 |
여행시(旅行詩) | 성간의 「途中」 / 권필의 「途中」 |
철리시(哲理詩) | 이곡의 「途中避雨有感」 / 신채호의 「白頭山途中」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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