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서(渤海考序)
성해응(成海應)
발해의 상세 정보
泠齋柳公惠甫, 嘗撿中秘書, 得渤海事, 比唐書渤海傳, 益加詳, 編其世系ㆍ傳記ㆍ地理等, 爲一卷. 渤海太氏, 起於粟末水, 粟末, 卽今混同江也, 太氏以區區之衆, 雄張於東北, 能交聘鄰國, 文辭爛然. 而職官品服, 與夫州府建置, 頗倣効唐制. 五京十五府, 其南京南海府, 今南關也; 其東京柵城府, 今北關也; 其西京鴨綠府, 今關西之北境也, 其餘二京十五府, 亦皆在鴨綠豆滿二江之外, 與我境不遠.
是時, 高麗新滅, 唐雖建安東都護以鎭之, 然荒遠不治, 其民多徙江淮而地空. 所以渤海漸侵牟自大者數百年, 爲契丹所滅.
발해 후기의 역사는 연구되지 않았다
夫自肅愼以後, 或稱勿告, 或稱靺鞨, 或稱渤海, 其部帳之盛衰興滅, 固不足道. 方其忿鷙魁傑, 負力怙氣, 屯結山林, 互相傾奪, 跳踉自恣, 有足以考, 其得失之跡, 而彊事進退, 山川險阻, 皆可爲籌國者, 所當宄解.
유득공이 지은 책의 가치와 연구 방향
但賈耽郡國志, 簡而不備, 脫脫『遼史』, 又多繆誤, 『金史』雖詳其山名水名, 多茫然無徵.
惠甫, 素明於地理之學, 其所援据辨核, 皆秩然有序, 如南海府定爲咸興, 柵城府定爲鏡城. 獨以鴨綠府謂在江界東北二百里, 鴨綠江北, 余以其所領神桓諸州觀之, 在江南, 而不在江北也. 公之費精罷力, 考校尋繹, 爲此書者, 固出於好奇, 非欲人知之. 然人苟能詳閱, 得其開創設置之意, 則有裨於經濟之策者不細, 而知者鮮少, 顧漫棄之, 可勝惜哉! 『硏經齋全集續集』 册十七
해석
발해의 상세 정보
泠齋柳公惠甫, 嘗撿中秘書, 得渤海事, 比唐書渤海傳, 益加詳, 編其世系ㆍ傳記ㆍ地理等, 爲一卷.
영재(泠齋) 유혜보(柳惠甫)가 일찍이 중비서(中秘書)【나라에 비장한 서적】를 검색하다가 발해사(渤海事)를 얻었고 당나라에서 쓴 발해전(渤海傳)과 비교하니 더욱 더 자세하여 세계(世系)ㆍ전기(傳記)ㆍ지리(地理) 등을 편집하여 한 권으로 만들었다.
渤海太氏, 起於粟末水, 粟末, 卽今混同江也, 太氏以區區之衆, 雄張於東北, 能交聘鄰國, 文辭爛然.
발해 대씨【원문은 ‘태씨’(太氏)라 하였는데, 태와 대는 서로 통용하여 쓴다. 그렇지만, 발해왕은 대씨였고, 멸망 후에 고려로 들어온 후손은 태씨라 부르고 있으므로, 이를 구별하여 쓸 필요가 있다.】는 속말수(粟末水)【속말수(粟末水)는 제2송화강을 가리킨다. 송화강(松花江)은 크게 북쪽으로 흐르는 부분과 동쪽으로 흐르는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을 북류(北流) 송화강 또는 제2송화강이라 부르고, 뒷부분을 동류(東流) 송화강 또는 제1송화강이라 부른다.】에서 일어났는데 속말수는 지금의 혼동강(同江也)【혼동강(混同江)은 시대에 따라 지칭 대상이 다른데, 여기서는 송화강을 이른다.】이고 대씨가 잘게 흩어진 민중으로 동북에 크게 세력을 떨쳐 이웃나라와 사신을 보낼 수 있었으니 문장들은 화려했다.
而職官品服, 與夫州府建置, 頗倣効唐制.
그리고 관직과 관품과 관복과 주(州)ㆍ부(府)를 세워 매우 당나라 제도를 본떴다.
五京十五府, 其南京南海府, 今南關也; 其東京柵城府, 今北關也; 其西京鴨綠府, 今關西之北境也, 其餘二京十五府, 亦皆在鴨綠豆滿二江之外, 與我境不遠.
5경 15부로 남경인 남해부(南海府)【남경 남해부의 위치를 성해응은 함흥 일대로 비정하였다.(『연경재전집』「외집 제1」354쪽 참조) 남관 지방은 지금의 함경남도 일대, 북관 지방은 함경북도 일대를 가리키는데, 『숙종실록』「숙종 30년 5월 임자」에 “남관의 북청ㆍ거산과 북관의 경성ㆍ수성(輸城)”을 지적한 데에서 알 수 있다.】는 지금의 남관(南關)이고 동경인 책성부(柵城府)【동경 책성부는 동경 용원부를 말한다. 성해응은 이 곳을 육진(六鎭) 즉 지금의 함경북도 북부 지역에 비정하였다.】는 지금의 북관(北關)이며 서경인 압록부(鴨綠府)【이 곳을 성해응은 강계 폐사군(廢四郡) 지역에 비정하였다.】는 지금의 관서(關西)의 북쪽 국경이고 나머지 2경 15부는 또한 모두 압록강과 두만강의 밖에 있으니 우리 나라와 멀지 않다.
是時, 高麗新滅, 唐雖建安東都護以鎭之, 然荒遠不治, 其民多徙江淮而地空.
이때 고구려가 새로 망하자 당나라가 비로소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세워 진무(鎭撫)케 했지만 거친 데다 멀어 다스려지지 않아 백성들이 대개 양자강과 회수로 옮겨 가서 땅은 비었다.
所以渤海漸侵牟自大者數百年, 爲契丹所滅.
발해가 점차 침범하여 빼앗아[侵牟] 스스로 커진 지 수 백년이었지만 거란에게 멸망당했다.
발해 후기의 역사는 연구되지 않았다
夫自肅愼以後, 或稱勿告, 或稱靺鞨, 或稱渤海, 其部帳之盛衰興滅, 固不足道.
대체로 숙신(肅愼) 이후로부터 혹 물길(勿告)이라 불리거나 혹 말갈(靺鞨)이라 불리거나 혹 발해(渤海)로 불렸는데 부족의 흥망성쇠는 진실로 말할 만하지 않다.
方其忿鷙魁傑, 負力怙氣, 屯結山林, 互相傾奪, 跳踉自恣, 有足以考, 其得失之跡, 而彊事進退, 山川險阻, 皆可爲籌國者, 所當宄解.
두려 화내가 날쌔며 거센 용맹으로 힘을 자부하고 기를 믿고 숲에 진치고 모여 서로 기울어뜨리고 빼앗으며 날뛰고 스스로 방자한 것은 고찰해보기 충분하니 득실의 자취나 강토의 커짐이나 줄어듦, 산천의 험함은 모두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이라면 마땅히 조사하고[宄=覈] 해석해야 한다.
유득공이 지은 책의 가치와 연구 방향
但賈耽郡國志, 簡而不備, 脫脫『遼史』, 又多繆誤, 『金史』雖詳其山名水名, 多茫然無徵.
다만 가탐(賈耽)의 군국지(郡國志)【가탐(賈耽, 730〜805)은 당나라 사람으로 793년에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외국에서 온 사신이나 먼 곳에서 온 사람을 만나면 꼭 그곳의 지리를 물어, 801년에 마침내 『해내화이도』(海內華夷圖)와 『고금군국현도사이술』(古今君國縣道四夷述) 40권을 저술하였다. 이 가운데, 외국의 교통로에 대한 서술이 『신당서』「지리지」에 실려 있고, 발해와 당나라 사이의 교통로에 대한 중요 정보도 이 곳에 포함되어 있다.)이 지은 『군국지(군국지(君國志)는 가탐이 지은 『고금군국현도사이술』을 가리킨다.】는 간략하여 갖춰지지 않았고 탈탈(脫脫)의 『요사(遼史)』는 또한 오류가 많으며 『금사(金史)』는 비록 산 이름과 물 이름이 자세하지만 대체로 아득해 징험할 게 없다.
惠甫, 素明於地理之學, 其所援据辨核, 皆秩然有序, 如南海府定爲咸興, 柵城府定爲鏡城.
혜보(惠甫)는 본래 지리학에 해박해 근거로 삼은 게 명백하고 핵심이 있어 모두 질서정연히 차례가 있으니 남해부(南海府)를 함흥(咸興)으로 비정하고 책성부(柵城府)를 경성(鏡城)으로 비정한 것 같은 경우다.
獨以鴨綠府謂在江界東北二百里, 鴨綠江北, 余以其所領神桓諸州觀之, 在江南, 而不在江北也.
유독 압록부(鴨綠府)가 압록강 경계 동북 200리 압록강 북쪽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압록부가 관할한 신주(神州)ㆍ환주(桓州) 등으로 그걸 보니 압록강 남쪽에 있었고 압록강 북쪽에 있진 않았다.
公之費精罷力, 考校尋繹, 爲此書者, 固出於好奇, 非欲人知之.
공께서 정력을 소비하여 고증하고 교열하며 찾아 연구하여 이 책을 지은 것은 진실로 호기로움에서 나온 것이지 남이 그걸 알게 하려 한 건 아니다.
然人苟能詳閱, 得其開創設置之意, 則有裨於經濟之策者不細, 而知者鮮少, 顧漫棄之, 可勝惜哉! 『硏經齋全集續集』 册十七
그러나 사람이 진실로 자세히 살펴 개국하고 지방정부를 설치한 뜻을 터득할 수 있다면 나라를 다스릴 계책에 도움 있기가 적지 않겠지만 알아주는 이는 드물고 돌아보면 함부로 그걸 버리니 이루 애석할 만하구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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