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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9. 작시, 즐거운 괴로움 - 3.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9. 작시, 즐거운 괴로움 - 3.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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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한유(韓愈)정요선생묘지명(貞曜先生墓誌銘)에서 맹교(孟郊)의 시에 대해, “그 시를 지음에 미쳐서는,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하였다[及其爲詩, 墫目鉥心].”고 하여, 준열한 시정신을 기린 바 있다. 실제 맹교(孟郊)는 한 편의 좋은 시를 짓기 위해, 칼로 자기 눈을 찌르고 가슴을 도려내는 것 이상의 고통을 달게 여겼던 시인이다.

 

야감자견(夜感自遣)이라는 다음과 같다.

 

夜吟曉不休 苦吟鬼神愁 밤새 읊조려 새벽까지 쉬잖으니 괴로이 읊조림, 귀신조차 근심하리.
如何不自閑 心與身爲仇 어찌하여 제 스스로 한가치 못하는가 마음이 몸과는 원수 되었네.

 

오죽하면 몸이 마음을 원수로 알 지경에 이르렀겠는가마는, 시를 향한 마음이 골수에 깊이 박힌 고질(痼疾)이 되고 보니 자신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푸념이다.

 

숙난성역각기상산장서기(宿欒城驛却寄常山張書記)에서는 다음과 썼다.

 

一更更盡到三更 일경이 다 가고 삼경 되도록
吟破離心句不成 이별의 맘 읊으려도 되지를 않네.

 

시작(詩作)에 골몰타가 밤을 꼬박 지새는 심경을 노래하였다.

 

추숙산관(秋宿山館)에서는 다음과 썼다.

 

山館坐待曉 夜長吟役神 산속 여관 앉아서 새벽을 기다리니 기나긴 밤 시 짓느라 정신을 괴롭혔네.

 

추일한거기선달(秋日閑居寄先達)에서는 다음과 썼다.

 

乍可百年無稱意 백년 인생, 뜻 맞는 일 없어도 괜찮지만
難敎一日不吟詩 하루라도 시를 짓지 않고는 못 견디겠네.

 

산중기우인(山中寄友人)에서는 다음과 썼다.

 

不是營生拙 都緣覓句忙 살 도리 찾을 재주 없는 것이 아닐세 이 모두 시 짓느라 바쁜 때문이지.

 

생활의 무능까지도 시 외에 딴 곳에는 잠시도 정신을 팔 수 없는 탓으로 돌리고 있다.

 

고음(苦吟)이란 작품에서는 숫제 다음과 썼다.

 

生應無暇日 死是不吟時 살아선 한가한 날 결코 없으리 죽어야만 시를 읊조리지 않겠네.

 

죽기 전에는 끝이 없을 주체할 길 없는 창작에의 열정을 토로하고 있다. 말하자면 맹교(孟郊)는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시를 위해 살았던 시인이다. 시를 빼고 나면 그의 삶에서 남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되니, 목숨을 걸고 시를 썼던 시인이 바로 그다.

 

 

이 맹교(孟郊)와 나란히 일컬어지는 시인에 가도(賈島)가 있다. 송나라 소식(蘇軾)제유자옥문(祭柳子玉文)에서 맹교는 차고, 가도(賈島)는 수척하다고 하여, ‘교한도수(郊寒島瘦)’의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이 가도(賈島) 또한 맹교(孟郊) 이상으로 고음(苦吟)의 시인(詩人)으로 유명하다. 그는 3년을 침음(沈吟)한 끝에 송무가상인(送無可上人)의 경련(頸聯)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獨行潭底影 數息樹邊身 홀로 걸어가는 연못 아래 그림자 자주 쉬어가는 나무 가의 몸.

 

이 득의구(得意句)를 얻고는 감격한 나머지 그 아래에다가 다시 시 한수를 써서 득구(得句)까지의 사연을 주()내어 적었다.

 

兩句三年得 一吟淚雙流 두 구절을 삼 년 만에 얻고서 한 번 읊조리매 눈물이 주루룩 흐르네.
知音如不賞 歸臥故山秋 벗들이 좋다고 기리지 아니하면 고향 산 가을에 돌아가 눕겠노라.

 

득의의 시구를 얻고 환호작약하다가, 끝내 낙루(落淚)에 이르는 시심(詩心)이 갸륵하기까지 하다. 더욱이 자신의 이 시를 안목 있는 이들이 칭찬하지 아니하면 아예 죽어 고향 산에 묻히고 말겠노라 하였으니, 그 자부가 또한 대단하다.

 

당재자전(唐才子傳), 가도(賈島)가 골똘히 작시(作詩)에 빠져들 때에는 앞에 왕공귀인(王公貴人)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였으며, 마음은 아득한 하늘 위에서 놀고, 생각은 끝없는 속으로 들어갔었다고 적고 있다. 비록 길 가거나 머물거나 자리에 누울 때나 밥 먹을 때나 괴로이 읊조리기를 그만두지 않았다고도 하였다. 일찍이 절뚝거리는 노새를 타고 우산을 쓰고서 장안(長安)의 거리를 가로질러 가는데, 가을바람이 매서워 길 위에 낙엽을 불어가므로 홀연 다음의 구절을 얻었다.

 

落葉滿長安 秋風吹渭水 낙엽은 장안 길에 가득하건만 가을바람은 위수(渭水)로 불어오누나.

 

기쁨을 가눌 길 없었던 그는, 다짜고짜 대경조(大京兆) 유서초(劉棲楚)의 집에 뛰어들었다가 하룻밤 구금되어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석방되었다.

 

 

또 한 번은 가도(賈島)가 이응(李凝)의 유거(幽居)를 찾아가다가 다음의 시구를 얻었다.

 

鳥宿池邊樹 僧推月下門 새는 연못 가 나무에서 잠들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미누나.

 

그리고는 ()’로 할까 ()’로 할까 결정치 못하고, 손짓발짓하며 가다가 그만 경조윤(京兆尹) 한유(韓愈)의 수레를 가로 막고 말았다. 좌우의 하인들이 가도(賈島)를 한유(韓愈) 앞에 무릎 꿇게 하고 힐문하니, 가도(賈島)가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수레를 멈추고 한참을 서 있던 한유(韓愈)고자(敲字)가 낫겠네[作敲字佳矣]”하고는, 함께 돌아가 시도(詩道)를 논하며 포의(布衣)의 사귐을 맺었다. 그리고는 아예 중노릇을 그만 두고 과거에 응시케 하였다.

 

두 글자가 다 좋지만, ‘()’라 하면 문을 그저 삐꺽 하고 밀며 들어가는 것이니 이응(李凝)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음이요, ‘()’라 하면 똑똑 노크하는 것이니 서로 약속이 없는 불시의 방문이 된다. 못 가에 새도 잠든 밤의 적막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과연 삐꺽하고 문을 미는 소리보다는,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똑똑 소리가 더 어울림직하다. 상소잡기(湘素雜記)에 전한다.

 

그런데 청 왕부지는 강재시화(薑齋詩話)에서 이 일을 두고 이렇게 톡 쏘았다.

 

 

달빛 아래 스님이 문을 두드린다는 가도의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은 단지 망상으로 억탁한 것일 뿐이니, 마치 다른 사람의 꿈을 말하는 격이다. 설령 형용이 거의 비슷하다 하더라도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마음을 끌어낼 수 있겠는가? 왜 그런고 하니, ()’()’ 두 글자를 깊이 읊조리는 것은 바로 그가 생각으로 짓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경과 만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면 ()’든지 ()’든지 반드시 어느 하나일 뿐일 것이다. 경을 인하고 정에 따른다면 자연스레 영묘하게 되니 어찌 수고로이 따져 의논하겠는가? “장하(長河)로 떨어지는 해가 둥글다[長河落日圓]”는 애초 정해진 경이 없었고, “물 건너 나무꾼에게 물어본다네[隔水問樵夫]”는 처음부터 생각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곧 선가(禪家)에서 이른바 현량(現量)’이라는 것이다.

僧敲月下門, 祗是妄想揣摩, 如說他人夢. 縱令形容酷似, 何嘗毫髮關心? 知然者, 以其沈吟推敲二字, 就他作想也. 若卽景會心, 則或推或敲, 必居其一. 因景因情, 自然靈妙, 何勞擬議哉? 長河落日圓, 初無定景; 隔水問樵夫, 初非想得. 則禪家所謂現量也.

 

 

가도가 이 글을 읽었더라면 가슴이 뜨끔했을 것이다. 요컨대 그는 결코 달빛 아래서 문을 밀지도, 두드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 놓고 생각만으로 이게 더 좋을까 저게 더 좋을까 따지며 걷다가 한유(韓愈)의 수레와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왕부지는 단언한다. 만약 그가 실제로 그런 경우를 당했더라면, 그의 선택은 ()’가 되든 ()’가 되든 따지고 말고 할 필요가 없었으리라고.

 

어쨌든 가도의 이 유난스런 시벽을 두고 한유(韓愈)증가도(贈賈島)라는 시를 지어 주기까지 하였다.

 

孟郊死葬北邙山 맹교(孟郊)가 죽어 북망산에 묻힌 뒤
日月風雲頓覺閑 해와 달 바람 구름, 문득 한가해졌네.
天恐文章渾斷絶 문장이 끊어질까 하늘이 염려하여
再生賈島在人間 가도(賈島)를 다시 내어 인간에 있게 했네.

 

가도(賈島)는 매년 그믐날이 되면 반드시 그 한 해 동안에 지은 작품을 책상 위에 모아 놓고, 향을 살라 두 번 절하고는 술을 부어 빌기를, “이것이 내 한 해 동안의 고심(苦心)함이다.”라 하며, 취토록 술 마시며 노래 불렀다고 한다.

 

 

 김홍도, 월하고문(月下敲門), 18세기, 27.4X23cm, 간송미술관.

연못가 나무에서 새는 잠들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 두드리네.” 달빛 아래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린다. 아래쪽 나뭇가지에 자다 깬 새 서너 마리가 보이는가. 아스라하다.

 

 

인용

목차

1. 예술(藝術)과 광기(狂氣)

2.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3.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4. 가슴 속에 서리가 든 듯

5.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技癢)

6. 개미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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