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작시(作詩), 즐거운 괴로움
1. 예술(藝術)과 광기(狂氣)
대상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하찮은 기교라 할지라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만이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예로부터 예술의 천재들에게는 스스로도 주체하기 힘든 광기(狂氣)가 있다. 인간의 열정(熱情)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그들 안에서는 느껴진다.
최흥효(崔興孝)는 조선 초의 유명한 명필(名筆)이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갔는데, 답안을 쓰다 보니 우연히 한 글자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와 같게 되었다. 넋을 잃고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뚫어지게 그 글자만을 바라보던 그는, 답안지를 차마 제출하지 못하고 그냥 품에 넣고 돌아오고 말았다. 우연히 같게 써진 한 글자 앞에서 그는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꿈마저도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이다.
崔興孝通國之善書者也. 甞赴擧書卷, 得一字, 類王羲之坐視, 終日忍不能捨, 懷卷而歸, 是可謂得失不存於心耳.
이징(李澄)은 조선 중기의 화가이다. 어려서 다락 위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는데, 집에서는 간 곳을 몰라 사방을 찾아 헤매다가 사흘 만에야 그를 찾았다. 아버지는 노하여 볼기를 쳤다. 이징(李澄)은 울면서 눈물을 찍어 새를 그렸다.
李澄幼登樓而習畵, 家失其所在, 三日乃得. 父怒而笞之, 泣引淚而成鳥, 此可謂忘榮辱於畵者也.
종실(宗室) 학산수(鶴山守)는 명창(名唱)으로 이름났다. 산에 들어가 노래 공부를 할 때면, 한 곡을 부를 때마다 모래 한 알을 신에다 던져, 신이 모래로 가득 차야 돌아왔다. 한 번은 도적을 만나 죽게 되었는데, 바람결을 따라 노래를 불렀더니 도적 떼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鶴山守通國之善歌者也. 入山肄, 每一闋, 拾沙投屐, 滿屐乃歸. 甞遇盜將殺之, 倚風而歌, 群盜莫不感激泣下者.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형언도필첩서(炯言挑筆帖序)」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디 그뿐인가. 추사(秋史)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초서(草書)에 능했던 명필(名筆) 이삼만(李三晩)은 일생에 먹을 갈아 구멍을 낸 벼루만도 여러 개였다고 한다.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더니, 벼루 여러 개가 구멍 나도록 그는 열심히 먹을 갈고 또 썼다. 사광(師曠)은 전국시대의 유명한 악사(樂師)였는데, 그는 소리를 듣는데 방해가 된다하여 자신의 눈을 찔러 멀게 하였다.
예술도 이쯤 되면 그 이르러 간 경지를 보통 사람은 측량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술에서 상달경계(上達境界)로 진입하려면, 잗단 기교(技巧) 쯤은 까맣게 잊어야 한다.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영욕(榮辱)도 득실(得失)도 (生死)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그때 예술은 비로소 참 모습을 드러낸다.
▲ 최흥효(崔興孝)의 글씨
사군(使君)은 술잔 들어 수성(愁城)을 깨뜨리고[使君携酒破愁城]
나그넨 시 읊으며 갈 길을 잊었구나[客子名詩忘去程]
제비는 훨훨 날아 춤을 추는 것만 같고[雀燕翩飛如作舞]
숲 저편 꾀꼬리는 노랫소리 보내온다[隔林黃鳥送歌聲]
인용
6. 개미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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