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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 9. 작시, 즐거운 괴로움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산책 - 9. 작시, 즐거운 괴로움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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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작시(作詩), 즐거운 괴로움

 

 

1. 예술(藝術)과 광기(狂氣)

 

 

대상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하찮은 기교라 할지라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만이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예로부터 예술의 천재들에게는 스스로도 주체하기 힘든 광기(狂氣)가 있다. 인간의 열정(熱情)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그들 안에서는 느껴진다.

 

 

최흥효(崔興孝)는 조선 초의 유명한 명필(名筆)이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갔는데, 답안을 쓰다 보니 우연히 한 글자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와 같게 되었다. 넋을 잃고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뚫어지게 그 글자만을 바라보던 그는, 답안지를 차마 제출하지 못하고 그냥 품에 넣고 돌아오고 말았다. 우연히 같게 써진 한 글자 앞에서 그는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꿈마저도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이다.

崔興孝通國之善書者也. 甞赴擧書卷, 得一字, 類王羲之坐視, 終日忍不能捨, 懷卷而歸, 是可謂得失不存於心耳.

 

이징(李澄)은 조선 중기의 화가이다. 어려서 다락 위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는데, 집에서는 간 곳을 몰라 사방을 찾아 헤매다가 사흘 만에야 그를 찾았다. 아버지는 노하여 볼기를 쳤다. 이징(李澄)은 울면서 눈물을 찍어 새를 그렸다.

李澄幼登樓而習畵, 家失其所在, 三日乃得. 父怒而笞之, 泣引淚而成鳥, 此可謂忘榮辱於畵者也.

 

종실(宗室) 학산수(鶴山守)는 명창(名唱)으로 이름났다. 산에 들어가 노래 공부를 할 때면, 한 곡을 부를 때마다 모래 한 알을 신에다 던져, 신이 모래로 가득 차야 돌아왔다. 한 번은 도적을 만나 죽게 되었는데, 바람결을 따라 노래를 불렀더니 도적 떼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鶴山守通國之善歌者也. 入山肄, 每一闋, 拾沙投屐, 滿屐乃歸. 甞遇盜將殺之, 倚風而歌, 群盜莫不感激泣下者.

 

 

연암 박지원(朴趾源)형언도필첩서(炯言挑筆帖序)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디 그뿐인가. 추사(秋史)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초서(草書)에 능했던 명필(名筆) 이삼만(李三晩)은 일생에 먹을 갈아 구멍을 낸 벼루만도 여러 개였다고 한다.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더니, 벼루 여러 개가 구멍 나도록 그는 열심히 먹을 갈고 또 썼다. 사광(師曠)은 전국시대의 유명한 악사(樂師)였는데, 그는 소리를 듣는데 방해가 된다하여 자신의 눈을 찔러 멀게 하였다.

 

예술도 이쯤 되면 그 이르러 간 경지를 보통 사람은 측량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술에서 상달경계(上達境界)로 진입하려면, 잗단 기교(技巧) 쯤은 까맣게 잊어야 한다.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영욕(榮辱)도 득실(得失)(生死)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그때 예술은 비로소 참 모습을 드러낸다.

 

최흥효(崔興孝)의 글씨

사군(使君)은 술잔 들어 수성(愁城)을 깨뜨리고[使君携酒破愁城]

나그넨 시 읊으며 갈 길을 잊었구나[客子名詩忘去程]

제비는 훨훨 날아 춤을 추는 것만 같고[雀燕翩飛如作舞]

숲 저편 꾀꼬리는 노랫소리 보내온다[隔林黃鳥送歌聲] 

 

 

2.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한 구절의 시구도 목숨처럼

 

고려 때 김황원(金黃元)이란 이가 평양 감사가 되어 부벽루(浮碧樓)에 올랐는데, 누각에 걸린 고금의 제영(題詠)이 성에 차는 것이 없는지라 시판(詩板)을 다 떼어 불사르게 하고는 하루 종일 난간에 기대 괴로이 읊조렸으나 다만 다음의 두 구절만 얻었다.

 

長城一面溶溶水 장성 한 면에는 넘실대는 강물이요
大野東頭點點山 넓은 벌 동편에는 점점이 산일래라.

 

그러고선 뜻이 고갈되어 마침내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일화가 역대 시화에 두루 전한다.

 

역시 고려 때 유명한 시인 강일용(康日用)은 백로를 가지고 시를 지으려고, 비만 오면 짧은 도롱이를 입고 성문 밖 천수사(天水寺) 남쪽 시내 위로 가서 황소 등에 걸터앉아 이를 관찰하였다. 날마다 수염을 꼬며 고심하기 백 일이 다 되어 문득 다음의 한 구절만 얻었다.

 

飛割碧山腰 푸른 산허리를 날며 가르네.

 

그리고 오늘에야 고인이 이르지 못한 것을 비로소 얻었다. 뒤에 마땅히 이를 잇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뒤에 이인로(李仁老)교목의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占巢喬木頂].”를 그 앞에 얹어 짝을 맞추었다. 파한집(破閑集)에 전한다.

 

飛割碧山腰 占巢喬木頂 푸른 산허리를 날며 가르다가 교목의 꼭대기에 둥지를 트네.

 

조선 중기의 시인 신광한(申光漢)은 일찍이 낮잠을 자다가 소나기가 연꽃 화분을 지나는 소리에 잠을 깨어 문득 다음과 같은 시구를 얻었다.

 

夢凉荷瀉雨 연잎에 쏟는 빗소리에 꿈이 서늘터니.

 

그 뒤 몇 해가 지나도록 그 대구를 얻지 못하여, 율시 한 수를 이루었으나 그 행만은 빈칸으로 비워두고 반드시 절묘한 대구를 얻어 채우려 하였다. 박란(朴蘭)이 이 말을 듣고, “옷이 젖자 돌에선 구름이 이네[衣濕石生雲].”가 어떠냐고 했으나, 신광한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죽을 때까지 이 구절의 대구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상의 예화들은 선인들의 시 한 구절에 대한 애착과 노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청강시화(淸江詩話)에 전한다.

 

夢凉荷瀉雨 衣濕石生雲 연잎에 쏟는 빗소리에 꿈이 서늘터니, 옷이 젖자 돌에선 구름이 이네.

 

 

 

시에 살고 시에 죽던 권필

 

권필은 조선 중기의 시인인데, 평생 벼슬길에 몸담지 않았다. 이를 안타까이 여겨 벼슬을 권하는 벗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고서(古書) 여러 권이 있어 홀로 즐기기에 족하고, 시는 비록 졸렬하지만 마음을 풀기에 족하며, 집이 비록 가난해도 또한 막걸리를 댈 만은 하니, 매양 술잔 잡고 시를 읊조릴 때면 유연히 스스로 얻어 장차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니, 저 이러쿵저러쿵 하는 자들이 내게 있어 무엇이리요?

 

 

그는 타고난 시인 기질을 어쩌지 못해, 불의는 결코 좌시하지 못했다. 부딪치는 일마다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형국을 빚었다. 다만 시를 지을 때만은 유연히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조차 까맣게 몰랐으니, 그는 삶의 의미를 시 속에서 찾았던 생래의 시인이었다.

 

희제(戱題)라는 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詩能遣悶時拈筆 시는 고민 걷어가 때로 붓을 잡았고
酒爲澆胸屢擧觥 술은 가슴 적셔줘 자주 잔을 들었지.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지으며 타는 가슴 속의 번민을 토로했던 자신의 삶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뒷날 그는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풍자한 궁유시(宮柳詩)라는 시 한 수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입어, 곤장을 맞고 귀양길에 올랐다가 장독(杖毒)을 추스리지 못해,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야말로 시에 살고 시에 죽었던 시인이다.

 

 

 

좋은 시구를 얻어 기쁜 나머지

 

당나라 때 주박(周樸)이란 이는 경물과 만나면 괴로이 시구를 찾으며 읊조렸다. 산에서 해가 지는데 돌아오기를 잊은 적도 있었다. 만약 좋은 시구를 얻게 되면 더욱 신이 나서 즐거워했다. 한 번은 들판에서 등에 나무를 지고 오는 나무꾼을 만났는데, 그를 꽉 잡으며 소리 지르기를, “잡았다!”고 하였다. 나무꾼은 너무 놀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그만 나무를 진 채로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때 마침 순찰 돌던 나졸이 그 광경을 보고 나무꾼을 도적인 줄 알고 붙잡아 신문하였다. 주박(周樸)이 급히 달려와 말하기를, “내가 저 나무꾼을 보자마자 갑작스레 기막힌 영감이 떠올라 좋은 시구를 얻었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를 붙잡았던 것이오.”라 하고는, 지은 시를 읊조렸으니 다음과 같다.

 

子孫何處閑爲客 자손들은 어디메서 한가롭길래
松柏被人代着薪 솔잣나무 대신해서 땔감 되었나.

 

이 이야기가 우무(尤袤)전당시화(全唐詩話)에 보인다.

 

 

 

백옥루를 완공하러 떠난 이하

 

당나라의 천재 시인 이하(李賀)는 매일 아침 파리한 나귀를 타고 집을 나서는데, 나귀 등에는 낡아 해진 비단 주머니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길을 가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메모하여 주머니 속에 넣곤 하였다.

 

저물어 돌아오면, 그 어머니가 계집종을 시켜 주머니를 꺼내보게 하였다. 써 놓은 것이 많으면 문득 말하기를, “이 얘가 심장을 다 토해내어야만 그만 두겠구나.”하며 한숨 쉬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이하(李賀)는 그 메모지를 가져다가 먹을 정성스레 갈아 원고지에 또박또박 써서는 다른 주머니 속에 보관하였다. 술에 크게 취하거나 초상이 있는 날이 아니면 언제나 이같이 했고, 이미 지난 원고는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렇듯 작시(作詩)에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건강을 해친 그는 27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죽기 전에 한 비단 옷 입은 사람이 나무 판 하나를 가지고 와서는 그에게 말하기를, “옥황상제께서 백옥루가 완공되어 그대를 불러 상량문을 짓게 하고자 하신다.”하였는데, 과연 얼마 뒤에 죽었다. 이 뒤로 세상에서 아까운 인재가 요절하면, 천상에 또 백옥루가 완공된 모양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시에 대한 집착이 낳은 비극

 

당나라 때 유희이(劉希夷)가 일찍이 백두음(白頭吟)을 지었는데, 그 한 연은 다음과 같다.

 

今年花落顔色改 올해 꽃 지자 낯빛도 시어지니
明年花開復誰在 내년 꽃 피면 다시 누가 있으리오.

 

짓고 나서 생각하니, 시의 내용이 매우 불길한지라 이를 지워버리고 다시 읊조렸다.

 

年年歲歲花相似 해마다 해마다 꽃은 비슷하건만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해마다 사람은 같질 않네.

 

그래도 시상(詩想)이 역시 펴지질 않자, “사생(死生)은 운수가 있는 것이다. 어찌 이까짓 빈 소리에 연연하랴!”하고는 앞서 지웠던 것까지 모두 남겨 두었다.

 

그의 장인 송지문(宋之問)이 사위가 지은 위 구절을 너무 아낀 나머지, 자기에게 줄 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유희이(劉希夷)는 장인에게 짐짓 그러마고는 했으나 끝내 주지는 않았다. 이에 자기를 속였다 하여 격분한 송지문은 하인을 시켜 흙주머니로 눌러 사위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도 못 된 때의 일이다. 시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낳은 패륜의 살인극이다. 당재자전(唐才子傳)에 전한다. 사실 여부야 차치하고라도, 과연 시에 대한 이같은 집착과 애착이 있고서야 진정으로 시를 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창작의 고통

 

주흥사(周興嗣)가 하루 저녁 사이에 천자문(千字文)을 만들어 올렸는데 수염과 머리털이 다 세어 버렸다. 돌아와서는 두 눈을 한꺼번에 실명하고, 죽을 때에는 마음이 단전(丹田)을 떠난 것 같았다 한다. 사령운(謝靈運)은 반일 동안에 시 백 편을 짓고서 갑자기 이가 열두 개나 빠졌으며, 맹호연(孟浩然)은 눈썹이 모두 떨어졌다고도 한다. 위상(魏裳)초사(楚史)76권을 저술하고는 심혈이 모두 닳아서 죽고 말았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실려 있다. 창작한다는 것은 이같이 피를 말리는 일이다.

 

이정(李禎), 의송망안도(倚松望雁圖), 17세기, 19.1X23.5cm, 국립중앙박물관.

지팡이 든 노인이 소나무 등걸에 기대 북녘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고 있다. 끝이 갈리진 몽당붓으로 썩썩 몇 번 붓질만 더해 아득한 의경을 만들어냈다.

 

 

3.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한유(韓愈)정요선생묘지명(貞曜先生墓誌銘)에서 맹교(孟郊)의 시에 대해, “그 시를 지음에 미쳐서는,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하였다[及其爲詩, 墫目鉥心].”고 하여, 준열한 시정신을 기린 바 있다. 실제 맹교(孟郊)는 한 편의 좋은 시를 짓기 위해, 칼로 자기 눈을 찌르고 가슴을 도려내는 것 이상의 고통을 달게 여겼던 시인이다.

 

야감자견(夜感自遣)이라는 다음과 같다.

 

夜吟曉不休 苦吟鬼神愁 밤새 읊조려 새벽까지 쉬잖으니 괴로이 읊조림, 귀신조차 근심하리.
如何不自閑 心與身爲仇 어찌하여 제 스스로 한가치 못하는가 마음이 몸과는 원수 되었네.

 

오죽하면 몸이 마음을 원수로 알 지경에 이르렀겠는가마는, 시를 향한 마음이 골수에 깊이 박힌 고질(痼疾)이 되고 보니 자신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푸념이다.

 

숙난성역각기상산장서기(宿欒城驛却寄常山張書記)에서는 다음과 썼다.

 

一更更盡到三更 일경이 다 가고 삼경 되도록
吟破離心句不成 이별의 맘 읊으려도 되지를 않네.

 

시작(詩作)에 골몰타가 밤을 꼬박 지새는 심경을 노래하였다.

 

추숙산관(秋宿山館)에서는 다음과 썼다.

 

山館坐待曉 夜長吟役神 산속 여관 앉아서 새벽을 기다리니 기나긴 밤 시 짓느라 정신을 괴롭혔네.

 

추일한거기선달(秋日閑居寄先達)에서는 다음과 썼다.

 

乍可百年無稱意 백년 인생, 뜻 맞는 일 없어도 괜찮지만
難敎一日不吟詩 하루라도 시를 짓지 않고는 못 견디겠네.

 

산중기우인(山中寄友人)에서는 다음과 썼다.

 

不是營生拙 都緣覓句忙 살 도리 찾을 재주 없는 것이 아닐세 이 모두 시 짓느라 바쁜 때문이지.

 

생활의 무능까지도 시 외에 딴 곳에는 잠시도 정신을 팔 수 없는 탓으로 돌리고 있다.

 

고음(苦吟)이란 작품에서는 숫제 다음과 썼다.

 

生應無暇日 死是不吟時 살아선 한가한 날 결코 없으리 죽어야만 시를 읊조리지 않겠네.

 

죽기 전에는 끝이 없을 주체할 길 없는 창작에의 열정을 토로하고 있다. 말하자면 맹교(孟郊)는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시를 위해 살았던 시인이다. 시를 빼고 나면 그의 삶에서 남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되니, 목숨을 걸고 시를 썼던 시인이 바로 그다.

 

 

이 맹교(孟郊)와 나란히 일컬어지는 시인에 가도(賈島)가 있다. 송나라 소식(蘇軾)제유자옥문(祭柳子玉文)에서 맹교는 차고, 가도(賈島)는 수척하다고 하여, ‘교한도수(郊寒島瘦)’의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이 가도(賈島) 또한 맹교(孟郊) 이상으로 고음(苦吟)의 시인(詩人)으로 유명하다. 그는 3년을 침음(沈吟)한 끝에 송무가상인(送無可上人)의 경련(頸聯)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獨行潭底影 數息樹邊身 홀로 걸어가는 연못 아래 그림자 자주 쉬어가는 나무 가의 몸.

 

이 득의구(得意句)를 얻고는 감격한 나머지 그 아래에다가 다시 시 한수를 써서 득구(得句)까지의 사연을 주()내어 적었다.

 

兩句三年得 一吟淚雙流 두 구절을 삼 년 만에 얻고서 한 번 읊조리매 눈물이 주루룩 흐르네.
知音如不賞 歸臥故山秋 벗들이 좋다고 기리지 아니하면 고향 산 가을에 돌아가 눕겠노라.

 

득의의 시구를 얻고 환호작약하다가, 끝내 낙루(落淚)에 이르는 시심(詩心)이 갸륵하기까지 하다. 더욱이 자신의 이 시를 안목 있는 이들이 칭찬하지 아니하면 아예 죽어 고향 산에 묻히고 말겠노라 하였으니, 그 자부가 또한 대단하다.

 

당재자전(唐才子傳), 가도(賈島)가 골똘히 작시(作詩)에 빠져들 때에는 앞에 왕공귀인(王公貴人)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였으며, 마음은 아득한 하늘 위에서 놀고, 생각은 끝없는 속으로 들어갔었다고 적고 있다. 비록 길 가거나 머물거나 자리에 누울 때나 밥 먹을 때나 괴로이 읊조리기를 그만두지 않았다고도 하였다. 일찍이 절뚝거리는 노새를 타고 우산을 쓰고서 장안(長安)의 거리를 가로질러 가는데, 가을바람이 매서워 길 위에 낙엽을 불어가므로 홀연 다음의 구절을 얻었다.

 

落葉滿長安 秋風吹渭水 낙엽은 장안 길에 가득하건만 가을바람은 위수(渭水)로 불어오누나.

 

기쁨을 가눌 길 없었던 그는, 다짜고짜 대경조(大京兆) 유서초(劉棲楚)의 집에 뛰어들었다가 하룻밤 구금되어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석방되었다.

 

 

또 한 번은 가도(賈島)가 이응(李凝)의 유거(幽居)를 찾아가다가 다음의 시구를 얻었다.

 

鳥宿池邊樹 僧推月下門 새는 연못 가 나무에서 잠들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미누나.

 

그리고는 ()’로 할까 ()’로 할까 결정치 못하고, 손짓발짓하며 가다가 그만 경조윤(京兆尹) 한유(韓愈)의 수레를 가로 막고 말았다. 좌우의 하인들이 가도(賈島)를 한유(韓愈) 앞에 무릎 꿇게 하고 힐문하니, 가도(賈島)가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수레를 멈추고 한참을 서 있던 한유(韓愈)고자(敲字)가 낫겠네[作敲字佳矣]”하고는, 함께 돌아가 시도(詩道)를 논하며 포의(布衣)의 사귐을 맺었다. 그리고는 아예 중노릇을 그만 두고 과거에 응시케 하였다.

 

두 글자가 다 좋지만, ‘()’라 하면 문을 그저 삐꺽 하고 밀며 들어가는 것이니 이응(李凝)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음이요, ‘()’라 하면 똑똑 노크하는 것이니 서로 약속이 없는 불시의 방문이 된다. 못 가에 새도 잠든 밤의 적막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과연 삐꺽하고 문을 미는 소리보다는,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똑똑 소리가 더 어울림직하다. 상소잡기(湘素雜記)에 전한다.

 

그런데 청 왕부지는 강재시화(薑齋詩話)에서 이 일을 두고 이렇게 톡 쏘았다.

 

 

달빛 아래 스님이 문을 두드린다는 가도의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은 단지 망상으로 억탁한 것일 뿐이니, 마치 다른 사람의 꿈을 말하는 격이다. 설령 형용이 거의 비슷하다 하더라도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마음을 끌어낼 수 있겠는가? 왜 그런고 하니, ()’()’ 두 글자를 깊이 읊조리는 것은 바로 그가 생각으로 짓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경과 만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면 ()’든지 ()’든지 반드시 어느 하나일 뿐일 것이다. 경을 인하고 정에 따른다면 자연스레 영묘하게 되니 어찌 수고로이 따져 의논하겠는가? “장하(長河)로 떨어지는 해가 둥글다[長河落日圓]”는 애초 정해진 경이 없었고, “물 건너 나무꾼에게 물어본다네[隔水問樵夫]”는 처음부터 생각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곧 선가(禪家)에서 이른바 현량(現量)’이라는 것이다.

僧敲月下門, 祗是妄想揣摩, 如說他人夢. 縱令形容酷似, 何嘗毫髮關心? 知然者, 以其沈吟推敲二字, 就他作想也. 若卽景會心, 則或推或敲, 必居其一. 因景因情, 自然靈妙, 何勞擬議哉? 長河落日圓, 初無定景; 隔水問樵夫, 初非想得. 則禪家所謂現量也.

 

 

가도가 이 글을 읽었더라면 가슴이 뜨끔했을 것이다. 요컨대 그는 결코 달빛 아래서 문을 밀지도, 두드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 놓고 생각만으로 이게 더 좋을까 저게 더 좋을까 따지며 걷다가 한유(韓愈)의 수레와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왕부지는 단언한다. 만약 그가 실제로 그런 경우를 당했더라면, 그의 선택은 ()’가 되든 ()’가 되든 따지고 말고 할 필요가 없었으리라고.

 

어쨌든 가도의 이 유난스런 시벽을 두고 한유(韓愈)증가도(贈賈島)라는 시를 지어 주기까지 하였다.

 

孟郊死葬北邙山 맹교(孟郊)가 죽어 북망산에 묻힌 뒤
日月風雲頓覺閑 해와 달 바람 구름, 문득 한가해졌네.
天恐文章渾斷絶 문장이 끊어질까 하늘이 염려하여
再生賈島在人間 가도(賈島)를 다시 내어 인간에 있게 했네.

 

가도(賈島)는 매년 그믐날이 되면 반드시 그 한 해 동안에 지은 작품을 책상 위에 모아 놓고, 향을 살라 두 번 절하고는 술을 부어 빌기를, “이것이 내 한 해 동안의 고심(苦心)함이다.”라 하며, 취토록 술 마시며 노래 불렀다고 한다.

 

 

 김홍도, 월하고문(月下敲門), 18세기, 27.4X23cm, 간송미술관.

연못가 나무에서 새는 잠들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 두드리네.” 달빛 아래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린다. 아래쪽 나뭇가지에 자다 깬 새 서너 마리가 보이는가. 아스라하다.

 

 

4. 가슴 속에 서리가 든 듯

 

 

섭석림기(葉石林記)란 책에는 송나라 때 진사도(陳師道)의 일화가 실려 전한다. 그는 산수를 노닐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곧 돌아와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쓰고 침상에 누워 버린다.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면, 즉시 고양이나 개는 멀리 쫓고 애기는 안고 어린애는 데리고 가서 이웃집에 맡긴다. 그리고는 그가 시를 완성하기를 기다린다. 시가 완성된 뒤라야 감히 다시 애도 데려오고 고양이와 개도 불러올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사흘씩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시인이 고심참담한 결과만을 놓고 좋으니 나쁘니, 잘 되었네 못 되었네 말들 하지만, 정작 그 갈피 갈피에 서린 고초는 간과해 버리기 일쑤이다. 고인(古人)이 작시(作詩)의 괴로움을 읊은 시 몇 구를 살펴보자.

 

두보(杜甫)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이란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爲人性僻耽佳句 내사 성벽이 가구(佳句)를 탐닉하여
語不驚人死不休 말이 남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도 그치잖으리.

 

이 시를 통해 만장의 기염을 토한 바 있다.

 

노연양(盧延讓)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吟安一箇字 撚斷幾莖髭 한 글자를 알맞게 읊조리려고 몇 개의 수염을 비벼 끊었던가.

 

그 작시에 골몰하느라 수염을 배배 꼬며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절로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방간(方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吟成五字句 用破一生心 다섯 자의 시구를 읊조리느라 일생의 심력을 다 바치었네.

 

글자 하나 구절 하나를 놓고 좌고우탁(左顧右度), 천사만려(千思萬慮)의 고심을 거듭하던 옛 사람들의 시작(詩作) 자세를 알 수 있다.

 

두목(杜牧)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欲識吟詩苦 秋霜若在心 시 읊조리는 괴로움 알고 싶은가 가슴 속에 가을 서리 서린 듯하네.

 

시로 태운 안타까운 가슴은 얼마나 뜨거울 것인가 마는, 그간의 고초를 생각하면 차라리 가슴 속에 차디찬 가을 서리를 품은 듯하다 했다. 그런데도 이 말이 전혀 엄살이나 과장으로 비치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게 냉혹하리만치 준엄했던 옛 시인의 시정신 때문일 터이다.

 

이백(李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爲問如何太瘦生 묻노니 어찌하여 그다지 말랐더뇨
只爲從前作詩苦 다만 이제껏 시 짓는 괴로움 때문일 테지.

 

작시(作詩)에 골몰하느라 바싹 야위어버린 벗의 모습을 애상(哀傷)한 바 있다. 이 말이 있은 이후 시를 쓰다 야윈 것을 따로 시수(詩瘦)’라 일컫기도 한다. 고금의 시 가운데 창작의 괴로움을 토로한 것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고문위(顧文煒)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爲求一字穩 耐得半宵寒 한 글자의 온당함을 구하느라고 긴긴 밤의 추위를 참아 견뎠네.

 

두순학(杜荀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典盡客衣三尺雪 엄동설한 나그네 옷 죄다 잡히고
煉精詩句一頭霜 시구를 가다듬다 머리 다 셋네.

 

제기(齊己)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覓句如探虎 逢知似得仙 좋은 시구 찾기를 범 찾듯 했고 알아줌을 만나면 신선 만난듯 했지.

 

유소우(劉昭禹)풍설시(風雪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句句夜深得 心從天外歸 구절마다 깊은 밤에 얻은 것이니 마음은 하늘 밖에서 돌아온다오.

 

밤마다 작시(作詩)에 골몰하느라 넋이 아득한 하늘 밖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즐거운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배설(裵說)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苦吟僧入定 得句始成功 입정(入定)에 든 스님처럼 괴로이 읊조리니 시구를 얻어야만 공을 이루리.

 

아예 시도(詩道) 삼매(三昧)를 선정(禪定)에 든 고승(高僧)의 삼매경(三昧境)에다 견주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미친 듯한 몰두 끝에 얻어진 시이고 보니, 그 시에 대한 애착 또한 유난스럽기 짝이 없다.

 

 

 

 

5.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技癢)

 

 

구양수(歐陽修)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놓고 볼 때마다 이를 고쳤는데, 마지막 완성되고 나면 처음의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소동파(蘇東坡)적벽부(赤壁賦)를 지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단숨에 이를 지은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를 짓느라 버린 초고가 수레 석 대에 가득하였다 했으니 그간의 고초를 헤아려 무엇하랴. 사문유취(事文類聚)에 나온다.

 

송자경(宋子京)이란 이가 나는 번번이 예전에 지은 문장을 볼 때마다 그것을 미워하여 반드시 불태워 버리고 싶어진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매요신(梅堯臣)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그대의 글이 진보하는 것입니다. 나의 시 또한 그러합니다.” 매요신(梅堯臣)은 앞서 여러 시인이 그랬듯 시()에 고질(痼疾)이 들었던 시인으로, 그는 아예 시벽(詩癖)을 제목으로 시를 지은 것이 있다.

 

人間詩癖勝錢癖 인간의 시벽(詩癖)이 돈 욕심 보다 더하니
搜索肝脾過幾春 애간장 졸이며 시구 찾느라 몇 봄을 보냈던고.
囊槖無嫌貧似舊 주머니 비어 가난해도 개의하지 않았고
風騷有喜句多新 새로운 시구 많은 것만 기뻐했었다.
但將苦意摩層宙 다만 괴로이 층층의 하늘을 치달았을 뿐
莫計終窮涉暮津 곤궁 속에서 저승 갈 일은 따지지도 않았다.

 

시에 대한 고질도 이쯤 되면 편작(扁鵲)이 열이라도 고칠 방도는 없게 되고 만다.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시와 무관한 것이 없고 보니, 시를 짓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 매 순간 순간을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한유(韓愈)는 시를 향한 자신의 병적인 몰두를 두고 슬프다. 유익함도 없는 일에 정신을 낭비하니[可憐無益費精神].”라고 자조한 바 있다. 이수광(李晬光)은 또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대체로 사람의 정신을 피폐케 하고 진기(眞氣)를 소모하게 만드는 것은 시라는 마물(魔物)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간혹 감흥이 일어난 때에 짓는 것은 좋으나 어찌 마땅히 남에게 좇아 나의 심신의 알맹이를 손상하겠는가[夫弊人精神以耗眞氣, 詩魔之爲也. 其或遇興爲之則可矣, 豈宜徇人而喪吾實乎].라는 충고를 남기기까지 하였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체하기 힘든 표현 욕구를 옛 사람들은 기양(技癢)’이란 말로 표현했다. ‘()’이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바로 기양(技癢)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어, 정신을 피폐케 하고 진기(眞氣)를 온통 소모해 가면서까지 순단월련(旬鍛月鍊), 시구의 조탁에만 힘 쏟게 하는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마물(魔物)이 있으니, 옛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마(詩魔)라 했다.

 

 

 

이규보와 시마

 

이규보(李奎報) 또한 매요신(梅堯臣)과 마찬가지로 시벽(詩癖)이란 제목의 긴 시를 남긴 바 있다.

 

年已涉縱心 位亦登台司 나이 이미 칠십을 지나 보냈고 지위 또한 삼공(三公)에 올라 보았네.
始可放雕篆 胡爲不能辭 이제는 시 짓는 일 놓을 만도 하건만 어찌하여 능히 그만 두지 못하는가.
朝吟類蜻蛚 暮嘯如鳶鴟 아침엔 귀뚜라미처럼 읊조려 대고 저녁에도 올빼미인양 노래 부르네.
無奈有魔者 夙夜潛相隨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이 아침저녁 남몰래 따라 와서는,
一着不暫捨 使我至於斯 한 번 붙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日日剝心肝 汁出幾篇詩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도려내 몇 편의 시를 쥐어 짜내지.
滋膏與脂液 不復留膚肌 내 몸의 기름기와 진액일랑은 다 빠져 살에는 남아 있질 않다오.
骨立苦吟梞 此狀良可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나니 이 모습 정말로 우스웁구나.
亦無驚人語 足爲千載貽 그렇다고 놀랄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만한 것도 없다네.
撫掌自大笑 笑罷復吟之 손바닥을 부비며 홀로 크게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 본다.
生死必由是 此病醫難醫 살고 죽는 것이 필시 시 때문일 터이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렵도다.

 

아쉬울 것 없는 일흔을 넘긴 노인이 피골이 상접하도록 시작(詩作)에만 몰두하는 가긍한 정황을 적고 있다. 죽고 사는 것이 시에 달려 있다 했으니 이쯤 되면 병도 중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시 때문에 생긴 증세를 자가(自家) 진단하는 마당에서도 시로써 그 처방을 내리고 있으니, 과연 시를 떠나서는 단 하루도 삶의 보람은 없게 되고 말 것이 아닌가.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시마(詩魔) 때문이라 하였는데, 이 시마(詩魔)란 놈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김득신과 시마

 

김득신(金得臣) 또한 고음(苦吟)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에 몰두할 때면 멍하니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한 번은 점심상에 상치를 얹어 내오면서 일부러 초장을 놓지 않았다. 작시에 골몰한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초장이 없는데 싱겁지도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응응! 모르겠어.” 했더란다. 동시화(東詩話)에 보인다.

 

그도 시벽(詩癖)시 한 수를 남기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爲人性癖最耽詩 이 내 성벽이 시 짓기를 좋아하여
詩到吟時下字疑 시 지어 읊을 제면 글자 놓기 망설이네.
終至不疑方快意 끝내 의심 없어야만 비로소 통쾌하니
一生辛苦有誰知 일생의 이 괴로움 알아줄 이 그 누구랴.

 

한 글자라도 바로 놓이지 않으면 마음에 쾌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평생 스스로를 이렇게 괴롭히니, 그 사이의 괴로움을 누가 알겠느냐는 넋두리다. 이어 그는 ! 오직 아는 자라야 이러한 경계를 더불어 말할 수 있으리라. 지금 사람들은 얕은 배움으로 경솔하게 시를 지으면서도 남을 놀래킬 말만 지으려 든다.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 唯知者, 可與話此境. 今人以淺學率爾成章, 便欲作驚人語. 不亦踈哉]?”라는 말을 덧붙였다. 종남총지(終南叢志)에 보인다.

 

 

 

 

6. 개미와 이

 

 

일찍이 높은 산에 올라 성시(城市)를 굽어보니 마치 개미굴 같았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높은 데서 바라보니 참으로 한 번 웃을 만했다. 산이 성시(城市)보다 높다한들 능히 얼마나 되랴마는, 그런데도 이미 이와 같으니, 하물며 진짜 신선이 허공 속에 있으면서 티끌세상을 굽어본다면 또 어찌 다만 개미굴이겠는가?

 

 

허균(許筠)한정록(閒情錄)에 나오는 말이다. 실제로 옛 사람이 보허등공(步虛登空)하여 하계(下界)를 조감하는 유선시(遊仙詩)에는 이러한 광경을 노래한 구절이 있다. 김시습(金時習)능허사(凌虛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下視塊蘇嗟渺渺 굽어보니 땅 덩어리 너무도 아득한데
大鵬飛少蠛蠓多 대붕은 잘 안 뵈고 하루살이만 우글대네.

 

임제(林悌)효적선체(效謫仙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下視東華土 茫然但黃埃 아래로 동화(東華) 땅을 내려다보니 아득히 다만 누런 먼지 뿐.

 

근교 산에 올라가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노라면, 그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저 안에서 복작대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 가소롭기도 하다. 그럴 때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은 마치 구름 위에 신선인양 통쾌한 호연지기를 심어주기에 족하다. 대개 시인들이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자이다. 그러면서 산 아래에서 헐고 뜯고 싸우는 인간들의 작태를 조소하고 비웃고, 때로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자이다.

 

그런데 연암 박지원(朴趾源)벗에게 보낸 엽서에 보면 또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내가 일찍이 약산(藥山)에 올라 그 도읍(都邑)을 굽어보니 그 사람과 물건이 달리고 뛴다는 것이 땅에 엎어져 꿈틀꿈틀 하는 듯하여, 마치 개미굴의 개미와 같아 능히 한 번 훅 불면 흩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마을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한다면, 언덕을 더위잡고 바위를 따라 덩굴을 잡고 나무를 안고 꼭대기에 올라, 망령되이 스스로 높고 큰 체 하는 것은 또한 머리의 이가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것과 무에 다르겠는가.

僕嘗登藥山, 俯其都邑, 其人物之若馳若騖者, 撲地蠕蠕, 若屯垤之蟻, 可能一噓而散也. 然復使邑人而望吾, 則攀崖循巖, 捫蘿緣樹, 旣躋絶頂, 妄自高大者, 亦何異乎頭蝨之緣髮耶?

 

 

그러고 보면 시인들의 산 아래를 향한 연민에 찬 탄식이나, 조소 넘치는 비아냥도 저 아래 사람들이 보기에는 같잖기 그지없는 일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한 사람은 위에서 아래를 보며 개미와 같다고 하고, 훅 불면 날려가 버릴 것 같다고 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하는데, 아래서는 또 위를 보며 머리카락 위에서 비틀대는 이 같다고 하고, 괜히 저 혼자만 고상한 체 한다고 하고, 꼴 같지 않게 논다고 눈을 흘기니 말이다.

 

 

 

시를 무가치하게 보다

 

사실 실용적으로만 말한다면 시처럼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도 없고, 시인처럼 무능한 인간들도 없다. 공연히 세상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듯이 끙끙대지만, 실제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김종직(金宗直)영가연괴집서(永嘉連魁集序)에서, “문장은 잗단 기예(技藝)이다. 시부(詩賦)는 더더욱 문장의 보잘 것 없는 것이다[文章, 小技也. 而詩賦, 尤文章之靡者也].”라고 했는데, 앞뒤 헤아리지 않고 보면 시()란 것은 소기(小技)인 문장 중에서도 가장 하급에 속하는 것이 된다. 정약용(丁若鏞)은 또 오학론(五學論)에서 문장학이란 우리 도()의 커다란 해독이다. 대저 이른바 문장이란 것은 무엇이던가? 문장이란 허공에 걸려 있고 땅에 퍼져 있으니, 어찌 바람을 보고 달려가 붙잡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이겠는가[文章之學, 吾道之鉅害也. 夫所謂文章者何物? 文章豈掛乎空布乎地, 可望風走而捉之者乎]?”라고 하고, 나아가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 글은, 한 평생 읽고 외워 본들 슬프고 우울하기만 하지 천하와 국가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문학의 심각한 해독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시에 가치를 부여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이(李珥)인물세고서(仁物世藁序)에서 말이란 것은 소리의 정채로운 것이고, 문사(文辭)란 것은 말의 정채로운 것이며, ()란 것은 문사(文辭)의 빼어난 것이다[言者, 聲之精者也; 文辭者, 言之精者也; 詩者, 文辭之秀者也].”라고 하였다. 권필(權韠)시라는 것은 말의 정채로운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시()는 또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빛나는 보석이다. 사실 세상에는 쓸모만으로 따지면 맥 빠지는 일들이 많다. 춤이니 그림이니 하는 것들도 쓸모없기는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사람을 배부르게 해주지도 않고, 그다지 기쁘게 해주지도 못한다. 마라톤 주자가 42.195Km를 달린다 한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황영조의 쾌거에 마음 설렌다.

 

 

 

시인의 마음가짐

 

오늘날 말하는 당() 나라 때의 시의 융성은 앞서 여러 제가의 시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약간은 미친 듯한 열기와 목숨을 건 집착 속에서 이룩된 것이다.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두 눈을 바늘로 찌르며, 심장을 다 토해낼 듯, 가슴 속에 찬 서리가 든 듯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들은 오직 시를 위해 살았고, 시를 위해 일생의 심력을 다 쏟아 부었다. 고인(古人)의 이러한 거울 위에 오늘의 시단(詩壇)을 비추어 보면 어떨까? 날마다 시집이 쏟아져 나오고, 잡지마다 시가 넘쳐흐르지만, 낙루(落淚)의 감격은 고사하고 수염을 꼬는 고심의 흔적도 찾지 못할 시가 수두룩하다. 정신은 간 데 없이 껍데기만 남은 시가 너무도 많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이 아무 데에 쓸모없는 시를 짓느라고 고금(古今)에 피를 말리며 밤을 지새는 시인을 어찌 손 꼽을 수 있으랴. 그 고심참담의 결과를 앞에 놓고 독자들은 마음의 위안을 얻고 삶의 깊은 의미를 읽는다. 중요한 것은 시가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정채로운 보석이든, 아무 짝에 쓸모없는 해독(害毒)이든 간에 시는 시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보석으로 만들고 독약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시인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2018년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가며 전주 상공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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