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가슴 속에 서리가 든 듯
『섭석림기(葉石林記)』란 책에는 송나라 때 진사도(陳師道)의 일화가 실려 전한다. 그는 산수를 노닐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곧 돌아와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쓰고 침상에 누워 버린다.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면, 즉시 고양이나 개는 멀리 쫓고 애기는 안고 어린애는 데리고 가서 이웃집에 맡긴다. 그리고는 그가 시를 완성하기를 기다린다. 시가 완성된 뒤라야 감히 다시 애도 데려오고 고양이와 개도 불러올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사흘씩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시인이 고심참담한 결과만을 놓고 좋으니 나쁘니, 잘 되었네 못 되었네 말들 하지만, 정작 그 갈피 갈피에 서린 고초는 간과해 버리기 일쑤이다. 고인(古人)이 작시(作詩)의 괴로움을 읊은 시 몇 구를 살펴보자.
두보(杜甫)는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이란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爲人性僻耽佳句 | 내사 성벽이 가구(佳句)를 탐닉하여 |
語不驚人死不休 | 말이 남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도 그치잖으리. |
이 시를 통해 만장의 기염을 토한 바 있다.
노연양(盧延讓)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吟安一箇字 撚斷幾莖髭 | 한 글자를 알맞게 읊조리려고 몇 개의 수염을 비벼 끊었던가. |
그 작시에 골몰하느라 수염을 배배 꼬며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절로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방간(方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吟成五字句 用破一生心 | 다섯 자의 시구를 읊조리느라 일생의 심력을 다 바치었네. |
글자 하나 구절 하나를 놓고 좌고우탁(左顧右度), 천사만려(千思萬慮)의 고심을 거듭하던 옛 사람들의 시작(詩作) 자세를 알 수 있다.
두목(杜牧)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欲識吟詩苦 秋霜若在心 | 시 읊조리는 괴로움 알고 싶은가 가슴 속에 가을 서리 서린 듯하네. |
시로 태운 안타까운 가슴은 얼마나 뜨거울 것인가 마는, 그간의 고초를 생각하면 차라리 가슴 속에 차디찬 가을 서리를 품은 듯하다 했다. 그런데도 이 말이 전혀 엄살이나 과장으로 비치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게 냉혹하리만치 준엄했던 옛 시인의 시정신 때문일 터이다.
이백(李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爲問如何太瘦生 | 묻노니 어찌하여 그다지 말랐더뇨 |
只爲從前作詩苦 | 다만 이제껏 시 짓는 괴로움 때문일 테지. |
작시(作詩)에 골몰하느라 바싹 야위어버린 벗의 모습을 애상(哀傷)한 바 있다. 이 말이 있은 이후 시를 쓰다 야윈 것을 따로 ‘시수(詩瘦)’라 일컫기도 한다. 고금의 시 가운데 창작의 괴로움을 토로한 것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고문위(顧文煒)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爲求一字穩 耐得半宵寒 | 한 글자의 온당함을 구하느라고 긴긴 밤의 추위를 참아 견뎠네. |
두순학(杜荀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典盡客衣三尺雪 | 엄동설한 나그네 옷 죄다 잡히고 |
煉精詩句一頭霜 | 시구를 가다듬다 머리 다 셋네. |
제기(齊己)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覓句如探虎 逢知似得仙 | 좋은 시구 찾기를 범 찾듯 했고 알아줌을 만나면 신선 만난듯 했지. |
유소우(劉昭禹)는 「풍설시(風雪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句句夜深得 心從天外歸 | 구절마다 깊은 밤에 얻은 것이니 마음은 하늘 밖에서 돌아온다오. |
밤마다 작시(作詩)에 골몰하느라 넋이 아득한 하늘 밖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즐거운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배설(裵說)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苦吟僧入定 得句始成功 | 입정(入定)에 든 스님처럼 괴로이 읊조리니 시구를 얻어야만 공을 이루리. |
아예 시도(詩道) 삼매(三昧)를 선정(禪定)에 든 고승(高僧)의 삼매경(三昧境)에다 견주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미친 듯한 몰두 끝에 얻어진 시이고 보니, 그 시에 대한 애착 또한 유난스럽기 짝이 없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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