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技癢)
구양수(歐陽修)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놓고 볼 때마다 이를 고쳤는데, 마지막 완성되고 나면 처음의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赤壁賦)」를 지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단숨에 이를 지은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를 짓느라 버린 초고가 수레 석 대에 가득하였다 했으니 그간의 고초를 헤아려 무엇하랴. 『사문유취(事文類聚)』에 나온다.
송자경(宋子京)이란 이가 “나는 번번이 예전에 지은 문장을 볼 때마다 그것을 미워하여 반드시 불태워 버리고 싶어진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매요신(梅堯臣)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그대의 글이 진보하는 것입니다. 나의 시 또한 그러합니다.” 매요신(梅堯臣)은 앞서 여러 시인이 그랬듯 시(詩)에 고질(痼疾)이 들었던 시인으로, 그는 아예 「시벽(詩癖)」을 제목으로 시를 지은 것이 있다.
人間詩癖勝錢癖 | 인간의 시벽(詩癖)이 돈 욕심 보다 더하니 |
搜索肝脾過幾春 | 애간장 졸이며 시구 찾느라 몇 봄을 보냈던고. |
囊槖無嫌貧似舊 | 주머니 비어 가난해도 개의하지 않았고 |
風騷有喜句多新 | 새로운 시구 많은 것만 기뻐했었다. |
但將苦意摩層宙 | 다만 괴로이 층층의 하늘을 치달았을 뿐 |
莫計終窮涉暮津 | 곤궁 속에서 저승 갈 일은 따지지도 않았다. |
시에 대한 고질도 이쯤 되면 편작(扁鵲)이 열이라도 고칠 방도는 없게 되고 만다.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시와 무관한 것이 없고 보니, 시를 짓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 매 순간 순간을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한유(韓愈)는 시를 향한 자신의 병적인 몰두를 두고 “슬프다. 유익함도 없는 일에 정신을 낭비하니[可憐無益費精神].”라고 자조한 바 있다. 이수광(李晬光)은 또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대체로 사람의 정신을 피폐케 하고 진기(眞氣)를 소모하게 만드는 것은 시라는 마물(魔物)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간혹 감흥이 일어난 때에 짓는 것은 좋으나 어찌 마땅히 남에게 좇아 나의 심신의 알맹이를 손상하겠는가[夫弊人精神以耗眞氣, 詩魔之爲也. 其或遇興爲之則可矣, 豈宜徇人而喪吾實乎].”라는 충고를 남기기까지 하였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체하기 힘든 표현 욕구를 옛 사람들은 ‘기양(技癢)’이란 말로 표현했다. ‘양(癢)’이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바로 기양(技癢)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어, 정신을 피폐케 하고 진기(眞氣)를 온통 소모해 가면서까지 순단월련(旬鍛月鍊), 시구의 조탁에만 힘 쏟게 하는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마물(魔物)이 있으니, 옛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마(詩魔)라 했다.
이규보와 시마
이규보(李奎報) 또한 매요신(梅堯臣)과 마찬가지로 「시벽(詩癖)」이란 제목의 긴 시를 남긴 바 있다.
年已涉縱心 位亦登台司 | 나이 이미 칠십을 지나 보냈고 지위 또한 삼공(三公)에 올라 보았네. |
始可放雕篆 胡爲不能辭 | 이제는 시 짓는 일 놓을 만도 하건만 어찌하여 능히 그만 두지 못하는가. |
朝吟類蜻蛚 暮嘯如鳶鴟 | 아침엔 귀뚜라미처럼 읊조려 대고 저녁에도 올빼미인양 노래 부르네. |
無奈有魔者 夙夜潛相隨 |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이 아침저녁 남몰래 따라 와서는, |
一着不暫捨 使我至於斯 | 한 번 붙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
日日剝心肝 汁出幾篇詩 |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도려내 몇 편의 시를 쥐어 짜내지. |
滋膏與脂液 不復留膚肌 | 내 몸의 기름기와 진액일랑은 다 빠져 살에는 남아 있질 않다오. |
骨立苦吟梞 此狀良可嗤 |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나니 이 모습 정말로 우스웁구나. |
亦無驚人語 足爲千載貽 | 그렇다고 놀랄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만한 것도 없다네. |
撫掌自大笑 笑罷復吟之 | 손바닥을 부비며 홀로 크게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 본다. |
生死必由是 此病醫難醫 | 살고 죽는 것이 필시 시 때문일 터이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렵도다. |
아쉬울 것 없는 일흔을 넘긴 노인이 피골이 상접하도록 시작(詩作)에만 몰두하는 가긍한 정황을 적고 있다. 죽고 사는 것이 시에 달려 있다 했으니 이쯤 되면 병도 중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시 때문에 생긴 증세를 자가(自家) 진단하는 마당에서도 시로써 그 처방을 내리고 있으니, 과연 시를 떠나서는 단 하루도 삶의 보람은 없게 되고 말 것이 아닌가.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시마(詩魔) 때문이라 하였는데, 이 시마(詩魔)란 놈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김득신과 시마
김득신(金得臣) 또한 고음(苦吟)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에 몰두할 때면 멍하니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한 번은 점심상에 상치를 얹어 내오면서 일부러 초장을 놓지 않았다. 작시에 골몰한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초장이 없는데 싱겁지도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응응! 모르겠어.” 했더란다. 『동시화(東詩話)』에 보인다.
그도 「시벽(詩癖)」시 한 수를 남기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爲人性癖最耽詩 | 이 내 성벽이 시 짓기를 좋아하여 |
詩到吟時下字疑 | 시 지어 읊을 제면 글자 놓기 망설이네. |
終至不疑方快意 | 끝내 의심 없어야만 비로소 통쾌하니 |
一生辛苦有誰知 | 일생의 이 괴로움 알아줄 이 그 누구랴. |
한 글자라도 바로 놓이지 않으면 마음에 쾌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평생 스스로를 이렇게 괴롭히니, 그 사이의 괴로움을 누가 알겠느냐는 넋두리다. 이어 그는 “아! 오직 아는 자라야 이러한 경계를 더불어 말할 수 있으리라. 지금 사람들은 얕은 배움으로 경솔하게 시를 지으면서도 남을 놀래킬 말만 지으려 든다.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噫! 唯知者, 可與話此境. 今人以淺學率爾成章, 便欲作驚人語. 不亦踈哉]?”라는 말을 덧붙였다. 『종남총지(終南叢志)』에 보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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