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선덕여왕의 자격지심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편에 보면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란 항목이 있다. 그녀가 재위 16년 동안 미리 알아 맞춘 세 가지 일을 적은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당 태종이 붉은빛과 자주빛, 그리고 흰빛 등 세 가지 빛깔의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 서 되를 보내왔는데, 여왕은 그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꽃이 피었는데 그 말과 같았다. 여러 신하가 어떻게 그럴 줄 알았느냐고 묻자, 여왕은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당나라 황제가 나의 혼자 지내는 것을 조롱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신하들을 탄복시켰다.
그런데 예전부터 모란꽃을 그릴 때에는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았다. 모란(牡丹)은 부귀(富貴)를 상징하는데, 나비는 80 늙은이를 나타내므로 모란에 나비가 곁들여지면 80이 되도록 부귀를 누린다는 뜻으로 의미가 제한되어 버린다. 나비는 왜 팔십늙은이가 되는가? 나비 ‘접(蝶)’자는 중국음은 ‘디에’인데, 80 늙은이 ‘질(耋)’자의 발음이 또한 같으므로 서로 쌍관(雙關)된 것이다. 욱일충천하던 대제국의 제왕이 변방의 조그만 나라 신라의 여왕이 시집가고 안 가고에 무슨 관심이 있었겠는가? 그저 모란꽃 그림으로 귀국의 부귀영화를 바란다는 의례적 인사를 보내온 것이었는데, 재치가 넘쳐흘렀던 여왕은 자격지심에 그만 오버센스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적어도 모란꽃 그림에 굳이 나비를 그려 넣어 80 먹도록 시집도 안 가고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식의 격조 없는 농담을 청할 당 태종은 아니었을 줄로 안다. 일연 또한 이를 대서특필한 것으로 보아 쌍관의 원리로 전개되는 이러한 독화(讀畵)의 원리를 몰랐던 듯하다.
흔히 모란에 나비를 그릴 양이면 으레 고양이도 함께 등장하는데 고양이는 또한 70 늙은이를 의미한다. ‘묘(猫)’자의 발음이 70 늙은이 ‘모(耄)’자와 발음이 ‘마오’로 같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변상벽의 고양이 그림을 보면 고목(古木) 등걸 아래 고양이가 새끼 세 마리와 함께 앉아 있고 까치와 참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구도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자식을 셋 둔 70세를 맞은 노인의 고희(古稀)를 축하하기 위한 축화(祝畵)이다. 고목(古木)은 수명장수를, 까치와 참새는 ‘작(鵲)’과 ‘작(雀)’으로 음이 같아 기쁨을 상징하며, 고양이가 70 늙은이를 지칭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림 | 쌍관의 원리 | 의도 |
나비 그림 | ‘蝶=耋’ / 발음의 유사성 | 80세까지 살 것 |
모란 그림 | ‘牡丹=富貴’ / 상징 | 부귀하게 살 것 |
고양이 그림 | ‘猫=耄’ / 발음의 유사성 | 70세까지 살 것. |
▲ 김홍도, 「황묘농접(黃猫弄蝶)」, 18세기, 46.1X30.1cm, 간송미술관
고양이와 나비, 패랭이꽃과 제비꽃, 그리고 바위는 합쳐서 하나의 문장을 이룬다.
작호도(鵲虎圖)와 노안도(蘆雁圖)의 속뜻
인사동 거리를 지나다 보면 흔히 표범을 그려놓고 그 배경에 소나무와 까치를 그려 둔 민화와 마주하게 된다. 이 그림은 일종의 세화(歲畵)로서 정월에만 붙이는 것이다. 반드시 표범이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표범을 본 일이 없어 슬며시 호랑이로 둔갑해 그려져 있기도 한다. 이를 작호도(鵲虎圖)라 하여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호랑이와 까치를 친근하게 여겨왔고 운운하는 설명이 친절하게 붙어 있기도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표범과 소나무와 까치는 상황을 상징하는 하나의 코드일 뿐이다. 표범을 나타내는 한자 ‘표(豹)’는 ‘빠오’로 읽혀지니, 알린다는 뜻의 ‘보(報)’와 발음이 같다. 까치는 ‘희작(喜鵲)’이라 하여 ‘기쁜 소식’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까치와 표범이 합쳐지면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뜻이 된다. 소나무 ‘송(松)’은 보낼 ‘송(送)’과 발음이 같으니, 결국 이 그림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송구영신(送舊迎新), 신년보희(新年報喜)의 의미로 읽히게 되는 것이다.
그림 | 쌍관의 원리 | 의도 |
표범 그림 | ‘豹=報’ / 발음의 유사성 | 소식 |
까치 그림 | ‘鵲=喜鵲’ / 상징 | 기쁜 소식 |
소나무 그림 | ‘松=送’ / 발음의 유사성 | 보낸다. |
▲ 작자 미상, 「작호도(鵲虎圖)」.
머리는 표범이고 몸은 호랑이다. 소나무 가지에 앉은 까치와 서로 기세 싸움이 한창이다.
갈대숲에 기러기를 얹은 그림은 노안도(蘆雁圖)라 하여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때 갈대를 나타내는 ‘노(蘆)’는 ‘노(老)’와 기러기 ‘안(雁)’은 ‘안(安)’과 쌍관되어 늙어 편안하시라는 ‘노안도(老安圖)’가 된다. 또 버드나무 밑에 오리 두 마리를 그려 놓으면 이는 과거(科擧) 시험에 연달아 장원 급제하는 행운을 기원하는 그림이 된다. 버드나무 ‘유(柳)’자는 머문다는 뜻의 ‘류(留)’와 쌍관되고, 오리 ‘압(鴨)’은 파자(破字)하면 장원급제를 나타내는 ‘갑(甲)’의 뜻이 되는 때문이다. 두 마리는 초시와 복시에 잇달아 패스함을 뜻한다. 예전에 한시에서 버들가지 꺾는 것이 이별의 정표임을 말한 바 있는데, 이 또한 쌍관의 독법(讀法)으로 읽으면 떠나지 말고 머무시라는 의미로 파악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림 | 쌍관의 원리 | 의도 |
갈대 그림 | ‘蘆=老’ / 발음의 유사성 | 늙다 |
소나무 그림 | ‘雁=安’ / 발음의 유사성 | 편안하다. |
버드나무 그림 | ‘柳=留’ / 발음의 유사성 | |
두 마리 오리 그림 | ‘鴨=甲’ / 破子의 원리 | 초시와 복시에서 급제함 |
쌍관을 통한 언어유희로 시에 생명을 불어넣다
대개 동양화에서 이러한 쌍관의(雙關義)를 활용하여 입상진의(立象盡意)하는 수법은 연원이 매우 오래고 다분히 관습적이다. 이러한 관습은 너무나 일상화되어 뒤에 오면 그 본래 의미에 변질을 가져오기도 한다. 또한 실제 경물과는 동떨어진 인습적 화풍의 모방복제를 되풀이하는 폐단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물과 언어를 결합하여 쌍관할 줄 알았던 선인들의 정신이 낳은 상징과 함축의 예술임도 부인할 수 없다【동양화의 이러한 상징 원리에 대해서는 조용진 교수의 『동양화 읽는 법』(집문당, 1992)에 설명과 예시가 자세하다】.
이렇듯 한자(漢字)의 발음과 의미상의 연관을 통해 깊은 함축을 담는 쌍관의(雙關義)의 활용은 한시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를 노래하고 있는 민요 “갑오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과 같은 예도 모두 쌍관의(雙關義)의 활용이 돋보이는 예이다. 물론 시는 문자유희와는 엄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언어 예술로서 시가(詩歌) 언어가 이러한 유희적 성분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시가(詩歌) 예술 위에 신선한 호흡과 생동하는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 시인이 문자 유희에만 탐닉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 속에서 뜻밖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언어의 발랄한 생기를 일부러 멀리 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 강한정(江寒汀), 「춘류쌍압도(春柳雙鴨圖)」, 20세기, 135X65cm, 중국 상해미술관.
두 마리 오리는 소과와 대과에 급제하란 뜻이다. 버들가지는 그런 행운이 머물라는 의미. 수험생을 위해 그려준 그림이다.
인용
2. 장님의 단청 구경
3. 견우(牽牛)와 소도둑
5. 선덕여왕의 자격지심
'책 > 한시(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시미학, 17. 해체의 시학: 파격시의 세계 - 2. 눈물이 석 줄 (0) | 2021.12.07 |
---|---|
한시미학, 17. 해체의 시학: 파격시의 세계 - 1. 요로원의 두 선비 (0) | 2021.12.07 |
한시미학, 16. 시와 문자유희: 한시의 쌍관의 - 4. 뻐꾹새 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 (0) | 2021.12.07 |
한시미학, 16. 시와 문자유희: 한시의 쌍관의 - 3. 견우와 소도둑 (0) | 2021.12.07 |
한시미학, 16. 시와 문자유희: 한시의 쌍관의 - 2. 장님의 단청 구경 (0) | 2021.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