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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24. 사랑의 슬픔, 정시의 세계 - 1. 담장가의 발자욱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4. 사랑의 슬픔, 정시의 세계 - 1. 담장가의 발자욱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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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사랑이 어떻더냐

 

 

1. 담장가의 발자국

 

 

사랑은 아름답다.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프다. 평소 한시를 고리타분하게만 생각하다가 막상 가슴 저미는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한 정시(情詩)를 대하고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많다. 흔히 염정시(艶情詩) 또는 향렴체(香匳體)라고도 불리는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정시(情詩)를 감상해보기로 하자.

 

凌波羅襪去翩翩 비단 버선 사뿐 사뿐 가더니만은
一入重門便杳然 중문을 들어서곤 아득히 사라졌네.
惟有多情殘雪在 다정할 사 그래도 잔설이 있어
屐痕留印短墻邊 그녀의 발자욱이 담장 가에 찍혀 있네.

 

강세황(姜世晃)노상소견(路上所見)이란 작품이다. 길을 가다 앞서 가는 어여쁜 아가씨의 뒷모습에 넋을 놓고 만 연모의 노래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아가씨의 모습에 그만 저도 모르게 뒤를 쫓아왔건만 무정하게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대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굳게 닫힌 대문 앞에 무연히 갈 길도 잊은 채 그는 서 있다.

 

혹시 다시 나오지는 않을까. 담장 너머로나마 그 모습을 한 번 더 볼 수는 없을까. 두근대는 마음으로 서성이다가, 채 녹지 않은 담장 밑 그늘의 잔설 위로 너무나 또렷이 찍혀 있는 그녀의 발자국을 보았다. 눈 위의 발자욱, 그녀가 남기고 간 발자국. 그러나 그녀가 밟고 간 것은 눈 아닌 그의 철렁 내려앉은 가슴은 아니었을까. 4구의 낮은 담장이란 표현에는 까치발로 돋워 들여다보고픈 설레임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녀는 바깥문만이 아니라 중문까지 닫아걸었으니. 잔설 위에 선명하게 남겨진 무심한 사랑의 모습 앞에 연모의 불길만 조용히 타오르고 있다.

 

淸晨纔罷浴 臨鏡力不持 맑은 새벽 목욕을 겨우 마치고 거울 앞에 앉아서 몸 가누지 못하네.
天然無限美 摠在未粧時 천연스레 너무나 고운 그 모습 화장하지 않았을 때 더욱 어여뻐.

 

최해(崔瀣)풍하(風荷)란 작품이다. 유물급인(由物及人)하는 연상과 교묘한 암유가 담겨 있다. 이른 아침 물을 덥혀 목욕을 마친 아가씨는 단장을 하려고 거울 앞에 앉았다. 그러나 나른하게 힘이 쪽 빠져 그녀는 거울 앞에 넋을 놓고 앉아 있다. 거울에 비치는 갓 목욕한 함초롬히 젖은 살결과 촉촉한 머리결은 마치 연못 위로 봉긋 꽃망울을 터뜨린 연꽃의 환한 아름다움을 연상시키기에 족하였다. 그 청초한 아름다움은 오히려 화장을 하면 지워질 것만 같다.

 

작품의 제목은 연꽃이고, 시의 내용은 목욕 후에 거울 앞에 앉은 여인의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시의 연상과 암유이니 이를 두고 여인에 비겨 연꽃을 노래한 것인지, 연꽃에 비겨 여인을 노래한 것인지를 따지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제목과 내용 사이에 의도적 단층을 둠으로써 시의 함축이 그만큼 유장하게 되었다.

 

劈去秋千一頓空 그네 줄 발을 굴러 공중에 솟구치니
飽風雙袖似彎弓 바람 받은 두 소매 당긴 활등 같구나.
爭高不覺裙中綻 높이높이 오르려다 치마 자락 타져서
倂出鞋頭繡眼紅 수놓은 꽃신 끝이 드러난 줄 몰랐네.

 

박제가(朴齊家)춘사(春詞)이다. 오월이라 단오를 맞아 그네 뛰는 아가씨. 발을 동동 구를 때마다 그네는 점점 높아만 간다. 한 번 구르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의 세상은 벌써 저만치 발아래고, 지난 겨우내 이런 저런 근심과 봄날의 노곤하던 설레임도 앞섶을 헤적이는 바람 앞에는 이미 간 곳이 없다. 아가씨는 흥이 나 몸을 잔뜩 도사린다. 재겨 구르는 그녀의 소매는 한껏 바람을 머금어 시위를 놓으려는 활인 양 팽팽하다. 마치 가위로 천을 경쾌하게 가르듯 허공을 가르며 솟구치는 그 신명. 더 높이 하늘 끝까지 솟구쳐 보자꾸나. 신명에 빠진 마음은 아뿔싸 바람이 치마자락을 헤집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 틈에 드러난 새로 신은 당혜(唐鞋)의 붉고 고운 수(), 그 선연한 붉은 빛. 치마자락이 펄럭였으니 신발의 코끝만 보였을까 마는, 여운이 있으면서도 절제하는 시선 속에 풋내 나는 연정이 익어가고 있다. 수사의 묘는 바로 이렇듯 말할 듯 다 말하지 않는데서 생겨난다.

 

 

 

 

인용

목차

1. 담장가의 발자욱

2. 야릇한 마음

3. 보름달 같은 님

4. 진 꽃잎 볼 적마다

5. 까치가 우는 아침

6. 내가 죽고 그대가 살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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