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한 기운을 한시로 표현하는 방법
田園蕪沒幾時歸 | 전원이 거칠어졌으니, 어느 때에 돌아갈꼬? |
頭白人間宦念微 | 머리 세니 인간세상 벼슬생각이 옅어지네. |
寂寞上林春事盡 | 적막해라. 상림원에 봄 풍경 끝났지만, |
更看疎雨濕薔薇 | 보슬비가 다시 장미를 적셨구나. |
懕懕晝睡雨來初 | 나른한 낮잠은 비온 처음에 |
一枕薰風殿閣餘 | 배게엔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 전각엔 여운이 있구나. |
小吏莫催嘗午飯 | 아전들아 일찍이 점심 먹으라 재촉하지 말게, |
夢中方食武昌魚 | 꿈속에서 곧 무창의 물고기를 먹으려던 참이니, |
『소화시평』 권하 41번에 나오는 「초하성중작(初夏省中作)」이라는 시는 위의 시와 그닥 다르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1~2구에선 전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인다는 것에 대해 풀어냈다.
그런데 3~4구에 오면 위의 시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읽힌다. 위의 시에선 전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되 돌아갈 수 없는 모습을 드러냈는데, 여기선 마치 전원으로 돌아가 전원을 만끽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봄은 끝났지만 그럼에도 보슬비가 장미를 적셔주는 걸 보고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보슬비에 적신 장미는 윤기가 흐르며 ‘아 살 것 같다’라는 마음일 테니 말이다.
5~6구에선 한가한 관아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낮잠 한숨 자고 나니 베개 맡으로 꽃향기가 들어온다. 꽃향기에 잠이 깼는지, 잠이 깨고 나니 향기가 느껴진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자연 속의 인간, 그러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이 한껏 잘 그려져 있다.
그러니 7~8구에선 자연스럽게 그런 향기로운 잠을, 모처럼 나른한 오후의 분위기를 만끽하는 시간을 망치지 말라고 주위 아전들에게 전하는 말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어느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런 행복을 망치지 말아달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읽고 나면 ‘관리가 근무 중에 낮잠이나 자고 말야. 그러니 조선이 망한 거지’라는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관점으론 매우 정확한 지적인 것 같아도, 그건 이전 시대의 분위기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딴지에 불과할 뿐이다. 권상 34번 글이나 권상 56번 글에서도 밝혔다시피 관리의 나태함은 태평성세의 모습을 표현하는 하나의 기법일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하나라도 더’라거나 ‘빨리 빨리’가 아닌 되도록 여유롭게, 되도록 품위 있게 일처리하길 바랐던 시대의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선 관리의 무능을 보기보단 그 시대의 태평한 기운을 느끼면 된다.
이런 허균의 시적 재능에 대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 아무리 졸작이라 해도 화려한 보석 같이 빛이 난다고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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