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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우리 한시를 읽다 목차 이종묵(李鍾默) 프롤로그. 시를 읽고 즐기는 법 정조 - 綱目講義 湘素雜記 - 推敲 이규보 - 驅詩魔文 이황 - 陶山十二曲跋 이종묵 - 16~17세기 한시사 연구 1. 시를 소리 내어 읽는 맛 을지문덕 - 與隋將于仲文 정법사 - 詠孤石 고운 - 十二乘船渡海來 / 최치원 - 巫峽重峯之歲 최치원 - 秋夜雨中 이백 - 獨坐敬亭山 도연명 - 詠貧士 최치원 - 題伽倻山讀書堂 김종직 - 紅流洞 홍만종 – 소화시평 상권65 황정욱 - 送人赴遂安郡 2. 잘 빚은 항아리와 잘 짜인 시 김지장 - 送童子下山 정법사 - 詠孤石 박인량 - 使宋過泗州龜山寺 박인범 - 徑州龍朔寺 정지상 - 開聖寺 八尺房 정지상 - 題邊山蘇來寺 최치원 - 登潤州慈和寺 김부식 - 觀瀾寺樓 惠文 - 普賢院 3. 시 속에 울려 ..
프롤로그. 시를 읽고 즐기는 법 ① 시의 본령은 아름다움이며 음풍농월이다 (정조의 『강목강의(綱目講義)』) 정조가 주자(朱子)의 『자치통감절목(資治通鑑綱目)』을 열람하고 그 가운데 의문스러운 것들을 뽑아 문목(問目)을 만들었는데, 모두 695개 항목이었다. 그것을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한 사람이 각기 한 항목씩 조목별로 답을 짓도록 하고, 다시 초계문신(抄啟文臣) 심진현(沈晉賢) 등에게 답한 말을 산삭(산삭)하고 요약하여 문목 밑에 붙여 책자로 만들게 한 것이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5年 5月 3日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무늬가 되고, 산과 천과 풀과 나무는 땅의 무늬가 되니, 글에도 무늬가 있음이 또한 그러하다. 반드시 씻어내고 닦아 윤택하게 하며 환하게 노출시키며, 찬란하게 드..
16~17세기 한시 문학의 양상 이종묵(정문연) 목차(目次) 1. 서론 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1) 송풍(강서시풍)의 전개 양상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3) 삼당시인, 강서시풍 넘어서기 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3) 기세를 높이기 위해 복고풍을 차용하다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feat. 장유와 이식)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feat. 김창협)7) 17세기 말에 다시 등장한 송시8) 17세기 후반 조선적 당풍의 대두 4. 결론 5. 토론문 인용한시사한문 논문한시를 읽다존당파ㆍ존송파..
5. 토론문 정민(한양대) 1. 16세기 후반 당시풍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해동강서시파의 공이 적지 않다고 했다. 해동강서시파 또한 두보에 대한 연구가 깊었던 점을 그 증거로 들었다. 그리고 박순, 백광훈, 이달 등과 해동강서시파 사이의 사승과 교류를 지적했다. 단순히 해동강서시파의 시인이 두보를 존숭한 사실과 16세기 후반 당시풍의 성향은 그 성격면에서 판연히 다르다. 우리의 관심은 그들이 강서시풍과는 전혀 다른, 두시풍과도 구분되는 낭만적 당시풍으로 선회했다는 점일 뿐인데, 단순히 강서시파와의 계기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변별이 명확해지지 않는다. 공이 많았다는 말은 16세기 당시풍의 성립에 해동강서시파가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인가? 아니면 해동강서시파의 바탕을 딛고 그 극복과 계기선상에서..
4. 결론 이상에서 16세기 강서시풍(江西詩風)이 문단의 중심에 서 있다가, 후반부터 강서시풍이 당풍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피고, 17세기 초반 다시 당풍 중에서도 명 의고파의 영향으로 의고성이 강해졌다가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적인 당풍과 새로운 기풍의 송시가 등장하게 되는 한시사의 변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이어 17세기 후반 의고풍을 반대하고 조선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풍이 개진되어 18세기 새로운 시풍의 선성이 되고 있는 양상을 살폈다. 본고에서는 시풍의 변화 양상을 중심에 두고 논하였기에 특히 17세기의 시단의 활동적인 면모는 고찰하지 못하였다. 특히 인왕산 아래의 침류대, 청풍계, 백운동, 삼청동, 필운대 등지나 한강 일대에서 벌어진 시회의 멋진 풍류와 같은 문학 활동에 대한 연구는 훗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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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7세기 후반 조선적 당풍의 대두 송풍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한 복고풍 주자의 존숭이 생활되면서 큰 유행이 되었던 구곡가 계열이나 그 밖의 연작시 중 상당수가 주자학의 내재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거니와, 이 같은 근체시 자체가 성정(性情)을 자연스럽게 유로(流露)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들어, 고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17세기 후반 시단의 한 경향이었다. 물론 만당을 극복하고자 한 복고풍의 시인들에 의하여 가행체나 악부 등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또 다른 양상에서 『시경(詩經)』과 『문선(文選)』이 주자학적 문인들에 의하여 숭상된 것이다. 학자풍의 문인들은 17세기에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시교를 다시 강조하게 되는데 이때 전범이 되는 시가 바로 『시경(詩經)』과 『문선(文選)』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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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7세기 말에 다시 등장한 송시 당시의 무개성에 다시 대두된 송시 이러한 주장은 앞서 본 대로, 이식(李植), 장유(張維) 등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거니와, 당시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을 거부하는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는 점차 한나라와 당나라의 시를 부화하게 본뜨는 명시에 싫증을 느끼고 송시를 표창하는 분위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비평에서도 이러한 주장이 점차 강해지고 시단의 풍상도 점차 송시를 배우는 이들이 많아졌다. 당시를 모범으로 생각했던 홍만종(洪萬鍾)조차 『시평보유』(하)에서 세상에 당시를 하는 사람들은 송시가 비루하여 배울 만하지 못하다고 하고 송시를 배우는 사람들은 당시가 위약하여 배울 필요가 없다고 배척하는 풍조를 비판한 바 있거니와, 실..
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 김창협의 의고주의 비판 장유(張維)와 이식(李植)에 이어 17세기 후반 무렵 본격적인 의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강서시(江西詩)나 의고주의에 대한 비판의 공통점은 眞에 있거니와 이러한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은 17세기 말엽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에 이르러 논리화된다. 김창협(1561-1708)은 진시(眞詩)를 주장하면서 자연(自然)과 천기(天機)를 거듭하여 강조하였다. 김창협(金昌協)은 이반룡이 당나라 이후의 시어를 쓰지 못하게 한 것을 비웃었다. 그는 이반룡이 옛것을 배운다면서 언어의 모방만 하여 당시를 배우고자 하면서도 당시의 시어만을 썼으니, 당 이후의 것으로 용사를 하면 그 말이 당시와 같지 않을까 금제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러..
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 장유, 17세기 초부터 다양한 시풍의 수용 주장 17세기 한시사는 복고풍의 시대다. 비평에서도 17세기 후반까지 당시풍을 존숭하는 일련의 시화가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 비평서들은 대부분 실제 비평을 중심으로 한 것이며, 작품의 우수성은 당시에 얼마나 핍진(逼眞)한가가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시사의 중심적인 흐름 이면에 18세기 새로운 시학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17세기 초반부터 싹트고 있었다. 명나라 복고파가 수용되기 시작하는 17세기 초반 장유(1587~1638), 이식(1584~1647) 등은 복고풍을 비판하고 다양한 시풍을 개성에 맞게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장유는 당시 문단의 폐해가 명시를 배우는 데서 발생하였다면서, 명나라 시문이 애초에 나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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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세를 높이기 위해 복고풍을 차용하다 지명과 인명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복고파의 방법 명 복고파의 시를 수용한 것도, 시의 기세를 높게 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다. 명 복고파들은 두보의 웅장한 시를 흉내내어 기세를 강하게 하려 하였는데, 그때 가장 손쉬운 방안이 인명과 지명을 시어로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것이었다. 성당의 시인들이 지명의 구사를 즐겨하여 시의 기상을 높였는데, 명 의고파들이 성당의 시를 배울 때 이를 첩경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른바 “여지지지(輿地之志)”, 혹은 “점귀지부(點鬼之簿)”가 이러한 시풍의 단적인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명대의 복고파(復古派)를 배운 시인들은 고유명사를 적극 구사하고 있다. 17세기 한시에는 지명과 인명을 구사하는 것이 큰 유행이 되었다. 17세기 시에는 한..
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 시의 기세를 올리기 위해 두보를 존숭하다 삼당시인이 일시를 풍미할 때 동시에 그들의 시가 갖고 있는 위와 같은 약점에 대한 인식도 보편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필(權韠)은 삼당시인의 한계가 약한 기세에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고, 정두경(鄭斗卿)은, 기가 쇠약하여 떨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평가된다【최석정, 「동명집서(東溟集序)」, 『동명집』】. 특히 명 복고파(復古派)가 수용된 이후에는 김득신(金得臣)이 「평호소지석시설(評湖蘇芝石詩說)」에서 “근래 학사대부의 무리가 모두 명나라의 시를 본받아서 권필의 시를 가지고 원기가 시들었다고들 생각한다.”고 증언한 것처럼, 권필의 시조차 기세가 약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만큼 1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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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개성이 사라지다 소단(騷壇)의 풍상을 당시로 옮겨 놓은 공을 인정받은 삼당시인이지만, 그 한계 또한 지적되었다. 삼당시인은 만당을 배웠다는 것으로 주로 비판되었다. 부분적으로 최경창(崔慶昌)이 초당이나 중당, 혹은 성당의 풍격이 있다고 한 바 있지만【余嘗聞諸先輩, ‘我東之詩, 唯崔孤竹終始學唐, 不落宋格,’ 信哉! 『소화시평(小華詩評)』 상권 107번】, 전체적으로는 만당의 기습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비평가들에 의하여 만당의 증거로 들고 있는 것은 기력의 부족이며, 특히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에 비교되었다【『학산초담(鶴山樵談)』 2b】. 그들의 시에 빈번히 나타나는 곤궁과 비애의 주제가 이러한 비판을 낳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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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당시인, 강서시풍 넘어서기 절구로 당시의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 쓴 당시풍 그러나 16세기 말 당시를 추구하였던 인물들은 전대의 대가인 호소지(湖蘇芝)를 극복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통의 당풍을 구사하려 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송시(강서시)가 혼효되지 않은 순수한 당시를 쓰고자 하였고,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시가 당시와 비슷하게 보이도록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호소지(湖蘇芝)로 대표되는 송시(강서시)와 다르게 시를 쓰기 위하여, 삼당시인을 위시한 당풍을 추구한 시인들은 율시보다 절구를 선호하였다. 송시, 특히 강서시는 시의 작법을 중시한다. 이 땅에 강서시가 널리 유포되게 된 것은, 강서시파가 천재적 재능이 아니라 학습에 의하여 좋은 시를 쓸..
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 16세기에 일어난 당시풍 추숭 16세기는 송풍, 특히 강서시풍이 문단이 주류를 형성하였지만, 그런 속에서도 당시풍을 추숭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16세기 전반 이주(李冑), 유호인(兪好仁), 신종호(申從濩), 신광한(申光漢) 등이 당시(唐詩)의 명맥을 이었다. 호소지(湖蘇芝)가 시대를 앞뒤로 하면서 활약하던 16세기 중반부터 박순(朴淳),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순인(李純仁), 이달(李達) 등 걸출한 시인이 등장하여 당시풍을 이끌면서 소단(騷壇)의 중심을 서서히 당시(唐詩)로 옮겨 놓게 된다.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엔 강서시파의 영향이 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 당시풍으로 시단의 움직임이 옮아갈 때, 강서시(江西詩)를 배운 시인..
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개성이 사라지다 소단(騷壇)의 풍상을 당시로 옮겨 놓은 공을 인정받은 삼당시인이지만, 그 한계 또한 지적되었다. 삼당시인은 만당을 배웠다는 것으로 주로 비판되었다. 부분적으로 최경창(崔慶昌)이 초당이나 중당, 혹은 성당의 풍격이 있다고 한 바 있지만【余嘗聞諸先輩, ‘我東之詩, 唯崔孤竹終始學唐, 不落宋格,’ 信哉! 『소화시평(小華詩評)』 상권 107번】, 전체적으로는 만당의 기습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비평가들에 의하여 만당의 증거로 들고 있는 것은 기력의 부족이며, 특히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에 비교되었다【『학산초담(鶴山樵談)』 2b】. 그들의 시에 빈번히 나타나는 곤궁과 비애의 주제가 이러한 비판을 낳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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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한시 문학의 양상 이종묵(정문연) 1. 서론 정두경(鄭斗卿)은 송시풍(宋詩風)이 주류를 이루다가 16세기 중반부터 당시풍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진단한 바 있으며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619면)에서 선초(鮮初)에 오로지 소식(蘇軾)의 시를 숭상하다가 16세기에 강서시풍(江西詩風)이 문단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16세기 말엽 점차 당풍(唐風)으로 변화하고, 다시 17세기부터 명 복고파(復古派)의 영향권에 들게 되는 조선 문단의 추이를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거시적인 흐름을 적시한 비평을 바탕으로 하여, 최근 몇 편의 우수한 논문이 보고되면서 16~17세기 문단의 풍상을 더욱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시사(詩史)의 본령 시풍은 유행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 앞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