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개성이 사라지다
소단(騷壇)의 풍상을 당시로 옮겨 놓은 공을 인정받은 삼당시인이지만, 그 한계 또한 지적되었다. 삼당시인은 만당을 배웠다는 것으로 주로 비판되었다. 부분적으로 최경창(崔慶昌)이 초당이나 중당, 혹은 성당의 풍격이 있다고 한 바 있지만【余嘗聞諸先輩, ‘我東之詩, 唯崔孤竹終始學唐, 不落宋格,’ 信哉! 『소화시평(小華詩評)』 상권 107번】, 전체적으로는 만당의 기습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비평가들에 의하여 만당의 증거로 들고 있는 것은 기력의 부족이며, 특히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에 비교되었다【『학산초담(鶴山樵談)』 2b】. 그들의 시에 빈번히 나타나는 곤궁과 비애의 주제가 이러한 비판을 낳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하면서, 삼당시인과 그와 비슷한 길을 갔던 일군의 시인들이 가진 한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지나친 모의(模擬)로 인하여 개성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삼당시인들이 당시의 시구를 즐겨 습용하였거니와, 이후 당시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경향도 역시 그러하였다. 특히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명 복고파가 소개되면서 의고적 성향은 더욱 기승을 더하였다. 특히 의고적 성향이 강하였던 인물들은 시의 경우 당나라 이전의 것만 읽고 그 이후 것은 아예 읽지 않았다. 송시가 눈에 거치지 않도록 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두경(鄭斗卿)이 김득신(金得臣)의 시를 읽고 송시의 기운이 있음을 단번에 알아보았던 것은, 스스로 당 이후의 시는 읽지 않았는데 김득신의 시에서 낯선 시어가 있기 때문이라 근거를 대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현호쇄담(玄湖瑣談)』 14번】.
당시를 존숭하였던 허균(許筠)이지만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이달(李達)의 시를 두고 10편 이상 넘어가면 지겹다고 하였으며, 김창협(金昌協)은 「잡지(雜識)」에서 선조 이후의 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하여 개성이 부족하게 되었음을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다. 사실 노수신(盧守愼), 황정욱(黃廷彧), 최립(崔岦)의 시는 절로 개성이 읽히지만, 삼당시인이나 비슷한 시기 당시를 배운 시인들의 작품은 그 개성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절구의 선택으로 위약해지다
둘째 선택한 절구라는 양식 자체의 속성으로 인하여 시가 위약해졌다는 한계가 있다.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시가 위약(萎弱)하다는 비판은 그들의 시가 음악성을 추구한 결과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율조에서 강건한 힘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의 기세를 주장하는 것은 송시의 전통이다. 만당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나온 송시가 취한 것은, 산문적인 구법과 흐트러진 율격 등을 통하여 억색함을 취하였기에, 이를 다시 극복하고자 한 당풍에서 절로 부드러운 가락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하곤(李夏坤)은 홍세태의 문집에 서문을 쓰면서, ‘노수신(盧守愼)과 황정욱(黃廷彧)이 스케일이 크지만 우아함과 비리함을 겸하고 체재가 순정하지 못하여 잡(雜)스러운 그 폐단이 있었는데, 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이 청신(淸新)과 수경(秀警)함으로 이를 고치려 하였으나, 정신이 차고 골격이 엷으며 기상이 촉급하여 협소함이 그 폐단이 되었다[蘇齋ㆍ芝川, 才具宏蓄, 氣力昌大. 然雅俗兼陳, 體裁未純, 故其弊也雜; 孤竹ㆍ玉峰, 以淸新秀警矯之. 然神寒骨薄, 氣象急促, 故其弊也隘.]’고 하였다. 곧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의 시가 스케일이 작고 기세가 약함을 지적한 말이라 하겠다.
이와 함께 당시를 추구한 이들이 특히 절구를 애호하였기 때문에 힘을 바탕으로 하는 장편고조에 명편을 내기도 어려웠다. 삼당시인을 중심으로 선발한 『악부신성』에서 전대의 악부시가 고체 중심인 데 비해, 여기서는 거의 70%가 칠언절구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실제 16~17세기 대부분의 악부풍의 한시는 절구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임제(林悌)가 그러하고, 이수광(李睟光)이 그러하였다. 웬만한 시인의 시집은 상당수가 악부시로 채워져 있고, 시선집에도 이 시기 한시 중 상당수가 악부시이지만, 그러나 따로이 고시에 진력한 몇몇 시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칠언절구로 채워져 있다. 이와 함께 악부시의 내용에서도 남성적인 출정가 계열보다는 여성적인 화자의 입을 빌어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대부분의 당시를 추종하는 시인의 시가 유약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어 있다.
울림에만 신경 쓴 나머지 내용이 공허해지다
셋째 음향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거꾸로 시 자체의 내용이 공허해져버린 문제점이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증귀곡시서(贈龜谷詩序)』, ‘삼당시인이 오로지 향(響)에만 힘쓰고 리(理)는 몰랐다[崔ㆍ白ㆍ李專以響爲務, 不知其理]’고 하면서, 당시 사람들이 ‘황정욱의 시가 리(理)는 있지만 향(響)이 없어 싫어하지만, 그러나 리(理)가 있고 향(響)이 없는 것이, 향(響)만 있고 리(理)가 없는 것보다 훨씬 낫다[芝川之詩, 有理無響, 世或絀之. 然有理無響, 大勝於有響無理].’고 하였다. 여기서 리(理)는 논리(論理)나 주제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곧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삼당시인을 위시한 당시를 배운 시인의 작품은 내용에 현실성이 부족하다. 그들이 즐겨 지은 의고적인 악부시 자체가 조선인의 정감이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악부시가 아니더라도 실생활상을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명편은 찾기 어렵다. 태평성세에 음풍농월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민족사의 비극에 모의적인 당풍의 창작방법은 뚜렷한 대응을 보여주지 못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용
1. 서론
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
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
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
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
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feat. 장유와 이식)
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feat. 김창협)
4.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