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세를 높이기 위해 복고풍을 차용하다
지명과 인명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복고파의 방법
명 복고파의 시를 수용한 것도, 시의 기세를 높게 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다. 명 복고파들은 두보의 웅장한 시를 흉내내어 기세를 강하게 하려 하였는데, 그때 가장 손쉬운 방안이 인명과 지명을 시어로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것이었다. 성당의 시인들이 지명의 구사를 즐겨하여 시의 기상을 높였는데, 명 의고파들이 성당의 시를 배울 때 이를 첩경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른바 “여지지지(輿地之志)”, 혹은 “점귀지부(點鬼之簿)”가 이러한 시풍의 단적인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명대의 복고파(復古派)를 배운 시인들은 고유명사를 적극 구사하고 있다. 17세기 한시에는 지명과 인명을 구사하는 것이 큰 유행이 되었다. 17세기 시에는 한 작품 안에 구사된 지명과 인명의 수가 매우 많다. 율시의 경우 대를 하는 함련과 경련에서 용사(用事)를 하면서 지명이나 인명을 구사하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작법이지만, 특히 절구에서 고유명사가 세 번 이상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찬한과 이식(李植) 등에 의하여 점귀부체(點鬼簿體)가 나온 것도 이러한 풍상을 반영한 것이다. 또 이안눌(李安訥)은 자신의 시작에서 인명과 지명을 특히 많이 구사하였거니와, 스스로도 이를 여지지체(輿地志體)라 하였다. 이러한 작품은 물론 희작에 가깝지만, 이안눌(李安訥)의 시는 이러한 여지지체(輿地志體)에 준할 만큼 조선의 지명을 자주 구사한다. 이와 같이 인명과 지명을 적극 구사하여 강한 기세를 추구한 것이 시단의 한 유행이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정두경(鄭斗卿)은 시의 시세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사기(史記)』와 같은 역사서에 나오는 지명을 크게 활용하였다. 「마천령(磨天嶺)」(『동명집』 권1) “마천령으로 말을 몰아가니, 층층 봉우리가 구름 속에 들어가네. 앞 숲에 큰 못이 있나니, 북해라 한다지[驅馬磨天嶺, 層峯上入雲. 前林有大澤, 盖乃北海云].” 자체가 『사기(史記)』의 문자를 구사하여 호탕의 미학에 이를 수 있었음은 이미 밝혀져 있다. 마천령(磨天嶺) 이외 대택(大澤), 북해(北海) 등과 같이 역사서에 바탕을 준 중국의 지명을 구사한 것이 이 시의 풍격을 호방하게 만들고 있다.
가행(歌行)으로 복고적 시풍을 재현하다
17세기 시단의 또 다른 특징은 고시에 대한 높은 관심을 들 수 있다. 이미 고시에 대한 관심은 권필과 이안눌에서 확인된 바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평호소지석시설(評湖蘇芝石詩說)」에서 ‘정사룡과 노수신, 황정욱 등 해동강서시파가 공통으로 부족한 곳이 가행(歌行)이었는데 권필은 율시뿐만 아니라 가행까지 뛰어나다’ 하였다. 권필(權韠)은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 장적, 왕건의 가행을 배웠으며(「학시준적(學詩準的)」 17a), 그의 시 중에 명편으로 후대 인구에 회자된 것이 대체로 그러한 작품이다. 권필(權韠)은 삼당시인의 단처였던 약한 기세, 개성적이지 못한 의경, 공소한 주제 의식을 가행체로 극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권필(權韠)의 가행체는 특유의 풍자적인 기법을 띤 것이 많다. 당대 권귀(權貴)를 풍자하여 죽음에까지 이르렀거니와, 그의 시는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 풍자라는 기법으로 당대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여, 현실을 외면한 삼당시인의 병폐를 극복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의 가행체는 강건한 기세를 자랑하고 있으며, 유약해지기 쉬운 악부시에서도 여성적인 정감을 억제하고 남성적인 호방함을 그 미학적 근거로 하였다. 이안눌(李安訥) 역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함락을 두고 읊은 「사월십오일(四月十五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국(憂國)과 애민(愛民)의 도시(杜詩)를 배우고, 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고시를 제작한 바 있다.
인용
1. 서론
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
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
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
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
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feat. 장유와 이식)
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feat. 김창협)
4.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