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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3. 때 지난 임용 낙방기를 쓰는 이유 임용시험을 처음으로 봤던 게 2006년이고 마지막으로 봤던 게 2010년이다. 한문교육과에서 들어오면서부터 모든 임고생들의 목표가 그러하듯 나의 목표도 ‘졸업과 동시에 합격’이었다. 그건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기도 했지만, ‘꼭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이기도 했다. 집에 별로 돈이 없어서 사립대학교에 다니는 것도 부담이 컸기에,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고, 졸업함과 동시에 취업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맘과 같지 않아 연거푸 떨어졌고,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 임용 합격의 꿈을 키웠던 곳. 하지만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사람은 밤하늘과 같다 2010년에 마지막 임용시험을 봤으니, 그 후로 어느새 ..
12. 10년 임용: 10년지기 친구들과 만나 즐기다 세훈이는 피곤했는지 계속 자고 난 일찍 일어나 미국판 ‘응원단’이란 게임을 했다. 가혜가 정성껏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동물농장이란 티비 프로그램을 같이 보며 한 바탕 웃고 놀다가 집을 나섰다. 10년 지기 친구와 맛난 점심을 강남으로 간다. 일전에 서울에 올라오면 진규네 집에서 자려고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데, 상황이 있어서 안 된다는 대답을 들었기에 이번엔 별도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너무 폐를 끼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전화가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늘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것이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있지만 이른 시간임에도 거리로 나섰다. 정훈이 형, 충원이와는 강남역에서 헤어지고 무작정..
11. 10년 임용: 시험이 끝나자 찾아온 활기 작년엔 시험을 보고 절망을 맛봤다면, 이번엔 시험을 보고 희열을 느꼈다. 마지막 시험이기에 좀 더 느긋하게 이 순간을 즐기잔 생각으로 교실에서 맨 마지막에 나왔다. ▲ 온고을 중학교는 나와 징한 인연이 있다. 시험 끝나자 활기가 찾아오다 복도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경수 누나와 미연이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 다들 오랜만에 만났기에 반가운 마음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시험이 끝난 것이기에 한껏 들뜬 모습이 스민다. 미연이의 남자친구는 미연이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더라. 처음 보지만 훈훈한 모습이 맘에 든다. 신기하게도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사귀고 있다던 남자친구다. ..
10. 10년 임용: 오수생 마지막 임용시험을 보다 마지막 시험이다. 임용 공부를 시작하면서 끝을 기약한 적은 없다. 처음 시험 볼 땐 곧바로 합격할 줄 알았고, 그게 재수, 삼수로 이어지자 ‘끝없는 싸움을 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달려들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수까지 시험을 봤고, 급기야 오수를 하게 됐다. ▲ 공고문이 변경된 경우는 처음이다. 그 덕에 한문교사는 한 명이 늘었다. 마지막 시험이라 외치다 어느 해건 심간 편하게 임용공부를 한 적은 없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언제나 돈이었다. 집에서 임용공부를 한다고 해서 돈을 보태주거나 지지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단순히 ‘돈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막상 돈을 벌어야 할 나이에 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다’는 실..
9. 10년 임용: 마지막 시험에 임하는 자세 09년 임용은 나의 무능을 폭로한 것이자, 어리석음을 까발린 것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풀지도 못했으며,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에 바빴으니 말이다. ▲ 작년엔 시험을 다 본 후에 무작정 모악산을 올랐었다. 그러지 않으면 미처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임용시험 3일 전, 마지막 시험을 코앞에 둔 심정 그러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임용 공부만 해오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니, 다른 것을 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건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깡’이 필요한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시 공부를 하게 됐고 지금은 2010년 임용을 3일 앞두게 된 것이다. 어제 모의고사를 보고 느..
8. 09년 임용: 반란은커녕 뒤꽁무니 치다 올해는 처음으로 임용을 전북에서 본다. 여태껏 경기, 광주, 경기 총 3번의 시험을 보면서 전북에선 절대 볼 생각이 없었다. 29년간 살아왔던 전북이란 홈그라운드를 떠나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전북에서 3명의 한문교사를 뽑는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에서 교사를 하기 위한 도전이 시작된다. 전북에서 시험을 보게 된 이유 그런데 작년에 경기도에서 떨어지면서 ‘전북에서라면 붙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실제로 전북이 커트라인이 좀 더 낮아 붙을 수 있었던 점수였는데 경기도였기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만약이란 건 언제나 아쉬움을 토로할 때나 쓰는 것이기에, 그게 어리숙한 사람의 변명이라는 건 충분히 안다..
7. 09년 임용: 국토종단으로 반란의 꿈을 키우다 아~ 2009년을 어찌 잊으랴? 너무도 가슴 벅찬 일 년이었고, 나의 가능성을 실제로 알게 된 가슴 뭉클한 일 년이었다. 그만큼 나의 삶 중에서 가장 밀도가 높았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 2009년에도 운 좋게 임고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임고반에 공부하며 한 컷. 미래를 현재로 만들러 국토종단을 떠나다 2009년엔 새해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용산 참사’라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다. 돈이 사람을 짓누르다 못해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권력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기보다 돈의 흐름에 따라 생명체를 짓밟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생각을 바로 잡아야 했고, 그저 예전에 하던 대로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라며 성공을..
6. 08년 임용: 기분 좋은 떨어짐 더욱이 예년 임용과는 달리 경기도에서 충원이가 함께 시험을 보기에 잘 곳을 따로 구하지 않아도 됐다. 충원이가 서울에서 집을 구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함께 잠을 자고 다음 날 수원으로 함께 출발하면 됐으니 말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토요일엔 맹렬히 공부를 했고 서울로 출발했다. 내가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고 세훈이도 나와 맞이해줬다. 내 생각 같아선 좀 쉬고 싶었는데,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친구들을 따라 쉬지도 못하고 돌아다녀야 했다. 첫 임용 때에 비하면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니 마음은 편하고 어색함도 덜했지만, 또한 그게 안 좋기도 했다. 저녁으로 고기까지 구워 먹고 세훈이가 가는 것을 보고 들어와 조금이라도 책을 보..
5. 08년 임용: 시린 어둠과 찬란할 빛 2008년도는 파란만장한 해였다. 거시적으론 한국이란 나라도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고, 미시적으론 한 개체에 불과한 나도 어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 2008년에도 경기도에서 한문교사를 선발하니 다행이다. 암울하게 시작된 2008년 대통령이 바뀌며 보란 듯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대통령 부시를 위해 카트를 손수 운전해주며 굴욕적인 쇠고기 졸속 협상으로 30개월 이상 소의 뇌나 부산물까지 수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건 미국에서 잘 먹지 않기에 미국은 한국에게 덤터기를 씌운 것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이니 굳이 ‘광우병’ 운운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우리 세대 먹을거리의 안전망이 무너졌다고 생각했고 광장으로 몰려나와 재협상을 외치며 ..
4. 07년 임용: 광주에 시험 보러 와서 한계를 느끼다 07년도 임용은 광주에서 봤는데, 06년에도 군대 동기에게 부탁하여 하룻밤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처럼 이때도 광주에 살고 있는 군대 동기에게 부탁을 하여 하룻밤 머물 수 있었다. ▲ 군대인연으로 하룻밤 묵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목사가 되어 열심히 사는 친구. 광주에서의 인연, 그리고 악연 그러고 보면 예전의 나라면 ‘민폐 끼치기 싫다’라는 마인드로 절대 하지 않을 일들을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꾸준히 연락하며 지냈던 것도 아님에도 무작정 연락을 하여 잠자리 부탁을 하는 것이니 ‘이기적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이젠 어떻게든 어우러져 돕고 도우며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그리기 때문에 할..
3. 07년 임용: 한바탕 노닐 듯 시험 볼 수 있을까? 2007년은 전반적으로 모든 것에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다. 섶나무를 베고 의기를 다졌던 부차처럼, 쓸개를 잘게 잘게 씹으며 의지를 불태우던 구천처럼, 천하를 주유해야 했던 공자처럼 깊게 침잠해야 했던 시기였다. ▲ 학교도 졸업했고 이젠 완전한 사회인이 되었다. 곤지중학교에서 한자급수 강사를 하던 때. 2007년은 변화의 때 생각의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재검토를 해야 했다. 그 결과 26년 간 별다른 고민 없이, 어떤 의문도 없이 절대적으로 믿어왔던 기독교란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건 필연적으로 불변의 진리를 좇아 완전한 것만을 추구하던 생각을 버리고 변화무쌍한 세상을, 감정이 들쭉날쭉하는 사람을 긍정하게 만들었다. 변화야..
2. 06년 임용: 내가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하다 시흥에 사는 민호는 군 시절 후임으로 들어와 나에게 엄청난 갈굼을 당했었다. 군이란 시스템이 멀쩡한 사람도 이상한 사람으로, 잘 하려는 의욕적인 사람도 어설픈 사람으로 만든다. 나도 그 피해자고 민호도 그 피해자지만, 더욱 웃긴 점은 내가 민호보다 선임이란 이유로 짓누르고 바보로 만들었단 사실이다. 제대한 이후로 그랬던 과거들이 무척이나 후회가 됐지만, 그래서 민호도 내가 미울 법 한 데도 자기 집에 기꺼이 초대해주고 하룻밤 잘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무척이나 고맙고 미안했던 순간이었다. ▲ 민호를 만나기 전에 시흥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다 밤엔 자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냈고 아침이 밝자 차려준 밥을 먹고 수원..
1. 06년 임용: 첫 시험의 불안감을 안고 경기도에 가다 어느덧 나도 오수생이 되었다. 장수생이라 할 수 있는데 나도 이렇게 긴 시간동안 공부를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고 솔직히 이런 느낌이 매우 생소하기까지 하다. 어느덧 오수생이 되다 처음 임용을 볼 때만 해도 동기 여학생들은 사수생이었다. 그땐 동기들을 보며 ‘무척 길게도 공부한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그렇게 막연히만 생각했던 상황에 닥치게 된 것이니 놀랍다고 하는 말 밖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무신경한 만큼이나 시간은 흐르고 흘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아 제발 돌아와줘’라고 외칠 건 아니다. 흘러버린 시간이 ‘임용합격’이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5년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