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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야담 인륜편, 창기 - 1. 황진이와 서경덕, 그리고 이생원 본문

문집/어우야담

어우야담 인륜편, 창기 - 1. 황진이와 서경덕, 그리고 이생원

건방진방랑자 2019. 8. 2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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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륜편(人倫篇) 창기(唱妓)

 

 

1. 황진이와 서경덕, 그리고 이생원

 

 

嘉靖初, 松京有名唱眞伊, 女中之倜儻任俠.

徐花潭敬德高蹈不仕, 學問精粹. 欲試之, 束縚帶挾大學往拜曰: “妾聞禮記: ‘男繫革女繫絲妾亦志學帶絲而來.” 先生笑而誨之. 眞伊乘夜相昵, 摩登之拊摩阿難者累, 而花潭終不少撓.

眞伊聞金剛爲天下名山, 欲一辨淸遊, 無可與偕. 時有李生員者宰相子也, 爲人跌宕淸疏, 可共方外之遊. 從容謂李生曰: “吾聞中國人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 況我國人, 生長本國 去仙山咫尺而不見眞面目可乎? 今吾偶奉仙郞, 正好共做仙遊, 山衣野服恣討勝賞而還不亦樂乎?” 於是使李生止僕偅勿隨, 布衣草笠親荷粮. 眞伊自戴松蘿圓頂穿, 葛衫帶布裙, 芒鞋杖竹枝而髓. 入金剛無深不到, 乞食諸刹, 或自賣其身, 取粮於僧, 而李生不之尤. 兩人遠涉山林, 飢渴困悴, 非復舊時容顔. 行到一處, 有村儒十餘人會宴于溪上松林, 眞伊過拜焉. 儒曰: “舍長亦解飮?” 勸之酒不辭, 遂執酌而歌, 歌聲淸越, 響震林壑. 請儒深異之, 餉以酒肴, 眞伊: “妾有一僕, 飢甚請饋餘瀝乎?” 與之李生以酒肴. 時兩家客失所往, 不知影響者殆半歲餘, 一夕鶉衣黎面而返, 隣里見之大驚.

宣傳官李士宗善歌. 嘗出使松都, 御鞍川壽院川邊, 脫冠加腹而臥, 高唱數三曲. 眞伊有所如, 亦歇馬于院側, 耳聞之曰: “此歌曲甚異, 必非村家俚曲. 吾聞京都有風流李士宗當代絶唱, 必此人也.” 使人往探之, 果士宗也, 於是移席相近, 致其款. 引至其家, 留數日: “當與子六年同住.” 翌日盡移家産, 三年之資于士宗家, 其父母妻子仰事俯育之備, 皆辦自家. 親着臂鞲, 盡妾婦禮, 使士宗家不助錙銖. 旣三年士宗眞伊一家, 一如眞伊餉士宗, 以報之者適三年. 眞伊: “業已遂, 約期滿矣.” 辭而去.

眞伊病且死, 謂家人曰: “吾生時性好紛華, 死後勿葬我山谷, 宜葬之大逵邊.” 今松都大路邊, 有松都名唱眞伊墓. 林悌爲平安都事, 過松都爲文祭于其墓, 卒被朝評.

 

 

 

 

해석

嘉靖初, 松京有名唱眞伊, 女中之倜儻任俠.

가정(嘉靖)가정(嘉靖) : 중국 명나라 세종 때의 연호(1522~1566). 초에 개성에 명창 진이(眞伊)이란 이가 있었으니 계집 중에서 기개가 있고 의리를 알았다.

 

徐花潭敬德高蹈不仕, 學問精粹.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 은거한 채[高蹈] 벼슬하지 않지만 학문은 정채롭고 정통했다는 걸 들었다.

 

欲試之, 束縚帶挾大學往拜曰: “妾聞禮記: ‘男繫革女繫絲妾亦志學帶絲而來.”

그를 시험하고자 해서 끈을 묶고 대학끼고 가서 절하며 첩은 예기남자는 혁대를 매고 여자는 실띠를 멘다는 걸 듣고서 첩 또한 배움에 뜻을 둬 띠를 띠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先生笑而誨之.

서경덕 선생은 웃고서 그를 가르쳤다.

 

眞伊乘夜相昵, 摩登之拊摩阿難者累, 而花潭終不少撓.

진이는 밤을 타고서 서로 가까이 가길 마치 마등(摩登)이 아난(阿難)을 어루만지길 여러 번 한 것처럼 했지만마등가(摩登伽)는 인도의 음탕녀. 능엄경(楞嚴經)에 음탕녀인 마등가가 아난을 어루만지며 유혹하였으나, 아난은 끝내 동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화담은 끝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眞伊聞金剛爲天下名山, 欲一辨淸遊, 無可與偕.

진이는 금강산이 천하의 명산임을 듣고서 한 번 두루 풍취 있는 놀이청유(淸遊): 풍취 있는 놀이. 속진(俗塵)을 떠나 자연(自然)을 즐김.를 하고자 했지만 함께 할 이가 없었다.

 

時有李生員者宰相子也, 爲人跌宕淸疏, 可共方外之遊.

이때 이생원이란 이는 재상의 자식으로 사람됨이 방탕하면서도 맑고도 트여 있어 함께 규범의 바깥에서 유람할 만하였다.

 

從容謂李生曰: “吾聞中國人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 況我國人, 生長本國 去仙山咫尺而不見眞面目可乎?

조용히 이생에게 말했다. “저는 중국사람도 고려국에서 태어나 한 번이라도 금강산을 보는 걸 원한다는 걸 들었는데 하물며 우리나라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태어나 선산(仙山)을 지척에 거리 두고서 진면목을 볼 수 없다는 게 말이나 되나요?

 

今吾偶奉仙郞, 正好共做仙遊, 山衣野服恣討勝賞而還不亦樂乎?”

이제 저는 신선 같은 그대를 받들어 바로 함께 신선의 유람을 하기에 좋으니 산의(山衣)와 야복(野服)으로 맘대로 명승지의 감상을 탐구하다가 돌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습니까?”

 

於是使李生止僕偅勿隨, 布衣草笠親荷粮.

이에 이생에게 머슴[僕偅]을 그치게 하여 따르지 말라하고 베옷에 초립을 쓰로 친히 식량을 메게 했다.

 

眞伊自戴松蘿圓頂穿, 葛衫帶布裙, 芒鞋杖竹枝而髓.

진이는 스스로 둥글게 뚫린 송라림송라(松蘿): 송라림. 여승이 쓰는 모자. 소나무 겨우살이로 짚주저리 비슷하게 엮어 만든 모자.을 이고 칡 적삼 띠로 치마를 감싸고 짚신 신고 대나무 가지 지팡이를 끌고서 따랐다.

 

入金剛無深不到, 乞食諸刹, 或自賣其身, 取粮於僧, 而李生不之尤.

금강산에 들어가 깊숙한 곳에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고 사찰에서 빌어먹는데 간혹 스스로 그 몸을 팔아 식량을 스님에게 취했지만 이생은 나무라지 않았다.

 

兩人遠涉山林, 飢渴困悴, 非復舊時容顔.

두 사람이 먼 숲까지 다니는데 주리고 목 마르며 피곤에 절어 초췌함으로 다시는 옛날의 얼굴이 아니었다.

 

行到一處, 有村儒十餘人會宴于溪上松林, 眞伊過拜焉.

다니며 한 곳에 이르르니 마을 선비 10여명이 시냇가 소나무숲에서 잔치를 열어 모였기에 진이는 지나가다 절을 했다.

 

儒曰: “舍長亦解飮?”

선비가 사장(舍長)사장(舍長): 절의 중을 이르는 말. 또한 한 없이 마실 수 있소[解飮]?”라고 말했다.

 

勸之酒不辭, 遂執酌而歌, 歌聲淸越, 響震林壑.

술을 권했지만 사양치 않았고 마침내 대작하다가 노래하자 노랫소리가 맑고도 가락이 높아 울림이 숲과 골짜기를 진동시켰다.

 

請儒深異之, 餉以酒肴, 眞伊: “妾有一僕, 飢甚請饋餘瀝乎?” 與之李生以酒肴.

여러 선비들이 매우 기이하게 여거 술과 안주를 대접하니 진이가 첩에겐 한 명의 머슴이 있지만 굶주림이 심하니 청컨대 남은 찌꺼기를 먹여주시겠나요?”라고 말하니 이생에게 술과 안주를 주었다.

 

時兩家客失所往, 不知影響者殆半歲餘, 一夕鶉衣黎面而返, 隣里見之大驚.

이때 두 집안에선 나그네가 간 곳을 잃어 그림자와 메아리도 알지 못한 지 거의 반 년였는데 어느 날 저녁엔 메추라기 옷에 검은 얼굴로 돌아오니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서 크게 놀랐다.

 

宣傳官李士宗善歌.

선전관(宣傳官) 이사종(李士宗)은 노래를 잘 불렀다.

 

嘗出使松都, 御鞍川壽院川邊, 脫冠加腹而臥, 高唱數三曲.

일찍이 개성으로 나갔다가 천수원(川壽院) 냇가 근처에서 안장을 매어두고 갓을 벗을 배에 얹어 누운 채 높이 2~3 곡조를 불렀다.

 

眞伊有所如, 亦歇馬于院側, 耳聞之曰:

진이는 갈 곳이 있어 또한 천수원 근처에서 말을 쉬게 하다가 귀로 그 소릴 듣고 말했다.

 

此歌曲甚異, 必非村家俚曲. 吾聞京都有風流李士宗當代絶唱, 必此人也.”

이 가곡은 매우 기이해 필시 시골의 속된 가곡이 아니야. 내가 듣기로 개성의 풍류객인 이사종(李士宗)이 당대의 절창이라던데 틀림없이 이 사람일 거야.”

 

使人往探之, 果士宗也, 於是移席相近, 致其款.

사람에게 가서 찾도록 하니 과연 사종이었고 이에 서로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 정성껏 대접했다.

 

引至其家, 留數日: “當與子六年同住.”

이사종을 이끌고 자기 집에 이르러 며칠을 머물게 하고 마땅히 그대와 6년을 함께 살겠어요.”라고 말했다.

 

翌日盡移家産, 三年之資于士宗家, 其父母妻子仰事俯育之備, 皆辦自家.

다음날 가산을 모두 옮겼는데 사종의 집에서 3년 간 쓸 돈이었고 부모와 처자식을 우러르며 섬기고 굽어 기를 비용은 모두 자기 집에서 갖추었다.

 

親着臂鞲, 盡妾婦禮, 使士宗家不助錙銖.

친히 팔찌[臂鞲]를 착용하고 첩과 아내의 예를 다했고 사종의 집에선 푼돈이라도 돕지 못하게 했다.

 

旣三年士宗眞伊一家, 一如眞伊餉士宗, 以報之者適三年.

이윽고 3년 동안 사종이 진이 일가를 먹인 것이 한결 같이 진이가 사종을 먹인 것과 같이 그들에게 보답한 것이 마침 3년이었다.

 

眞伊: “業已遂, 約期滿矣.” 辭而去.

진이가 업은 이미 완수되었고 약속된 기일이 찼습니다.”라고 말하고 사양하며 떠났다.

 

眞伊病且死, 謂家人曰: “吾生時性好紛華, 死後勿葬我山谷, 宜葬之大逵邊.”

훗날 진이가 병들어 죽으려 할 때 집 사람에게 생전엔 성벽이 분잡하고 화려한 걸 좋아했으니 사후엔 나를 산골에 장례지내지 말고 마땅히 대로 변에 장례지내주오.”

 

今松都大路邊, 有松都名唱眞伊墓.

지금 개성의 대로변에 송도의 명창인 진이의 무덤이 있다.

 

林悌爲平安都事, 過松都爲文祭于其墓, 卒被朝評.

임제가 평안도사(平安都事)가 되어 개성을 지나다 문장을 지어 무덤에서 제사지냈는데 마침내 조정의 평가를 당해야 했다.

 

 

 

 

인용

작가 / 목차 / 한시사 / 한시미학

1. 네모난 마음을 지닌 이

2. 분방한 문인적 기질과 장자의 영향

3. 전란의 체험과 시화로 인한 파직

4. 금강산 은거와 최후의 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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