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엔 그 사람이 드러나며, 한 글자엔 미래가 보인다
『소화시평』 권하 49번은 권상 85번에서 봤던 것처럼 시참(詩讖)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미 85번 감상글에서 서술했다시피 시참은 너무도 결과론적으로 상황을 껴 맞추는 느낌이 나서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85번의 내용은 시참이라기보단 시를 보고 그 사람의 미래를 예언한 경우라 보아야 한다. 이미 벌어진 사태에 대해 결과론적으로 시를 껴맞추기보단 시에 드러난 그 사람의 기상을 보고 훗날의 일을 예상한 것이니 말이다. 홍섬이 모함에 의해 투옥되어 다들 걱정을 한아름 하고 있을 때 유독 소세양만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홍섬이 이전에 지은 시를 보니 어떤 극적인 상황이든 극복하려 애쓰지 않고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세양은 홍섬의 시를 보면서 ‘이런 마음가짐을 지닌 사람이라면 지금과 같은 고초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이겨낼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권하 19번에서 “최립 어르신이 아니라면 이 시어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네[非此老, 不能道此語].”라고 장유가 최립이 지었다는 걸 모르면서도 시를 본 것만으로도 최립의 시임을 유추할 수 있었던 것처럼 글이나 시엔 그 사람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지닌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 그리고 어떤 단어들을 주로 구사하는지,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물론 자기 검열을 투철하게 한 나머지 누구라도 할 법한 글을 쓰고 시를 쓰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에 대해 홍만종은 “사람이 되어 온 세상이 다 그를 좋아하기를 바란다면 올바른 사람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온 세상이 다 그걸 좋아하기를 바란다면 지극한 문장이 아니다[爲人而欲一世之皆好之, 非正人也; 爲文而欲一世之皆好之, 非至文也].”라고 그런 식으로 무미건조하고 그 사람이 드러나지 않는 글은 지극한 사람이나 지극한 문장이 아니라고 일갈하고 있다. 이처럼 홍섬에 대해 소세양이 예언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시엔 이미 그의 기상과 삶을 대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夜來雙月滿 曙後一星孤 | 밤이 되자 두 달이 가득 찼는데 날이 밝자 별 하나가 외롭구나. |
그에 반해 이번에 다루는 내용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시참에 대한 내용이다. 우선 처음에 시참의 예로 든 중국사람에 대한 얘기부터 살펴보고 가야 한다.
‘밤에 두 개의 달이 떴다’는 내용은 부부가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 구절에 ‘새벽이 밝아오자 하나의 별만이 외롭다’라는 구절은 전 구절의 내용을 확 뒤집어엎고 있다. 두 개의 달은 홀연히 사라졌고 하나의 별만이 반짝인다는 것이니 비극적인 이야기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시를 쓴 다음 해에 시인네 부부는 죽었고 그의 딸만이 홀로 남게 됐다고 한다. 여기에 더 재밌는 점은 이 시를 지은 사람의 이름이 ‘최서(崔曙)’이며 그의 딸 이름이 ‘최성성(崔星星)’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름을 두 번째 구절에 대입하여 시를 해석해보면 ‘최서가 죽은 후에 최성성이만 고아가 되었네.’라는 내용이 된다. 이렇게 완벽하게 앞뒤가 맞는 예화는 많지 않을 것이기에 예로부터 시참을 얘기할 땐 이 예화를 들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마치 최서라는 시인이 머지않아 자기가 죽을 줄 알고 마치 우회적으로 미래의 일을 예언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어마저도 자기와 딸의 이름을 넣어 구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홍만종이 우리나라의 예로 든 홍명구의 이야기는 이미 『우리 한시를 읽다』에서 본 내용이다. 이 내용이 소화시평에 나오는 줄 몰랐는데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들더라. 유몽인의 여동생인 학곡대부인이 손자인 홍명구의 시를 보고 품평을 한다. 시에 쓰여 있는 ‘락(落)’이란 글자를 보고 아이에게 훗날에 닥칠 상황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락(落)→개(開)’로 썼다면 많은 복들이 찾아왔을 텐데”라는 말을 썼다. 아마도 이런 말들이 가능한 데엔 단어가 원초적으로 지닌 긍부정에 따른 심리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긍정적인 생각만 해야 하고, 아름다운 말만 써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진 않지만 예나 지금이나 윤리적으로 좋은 것만을 말하고 아름답게 그려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런데 그런 말이 마치 하나의 예언이라도 되듯이 홍명구는 42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게 됐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 내용을 먼저 책에서 읽었을 때도 ‘42살이면 요절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살 만큼 살다 간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너무 껴맞춘 것 같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현종이도 교수님에게 “42세면 일찍 죽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묻더라. 그러자 교수님은 “그 당시에도 70~80살까지 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라고 말해주셨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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