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드러난 유몽인의 반반정 정신과 숨겨진 의미
『소화시평』 권하 47번에 소개된 이 시를 보면 이미 유몽인은 현실의 벼슬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다는 걸 지레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직접적으로 드러내선 안 되고 이와 같이 좀벌레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사화(士禍)의 시대엔 관직에 있지 않은 유학자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여러 가지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해야 했지만, 당쟁이 본격화되는 시대엔 어느 당파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그리고 변화무쌍한 권력지형의 요동침을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줄을 타느냐에 따라 출세와 질시, 삶과 죽임이 갈린다. 유몽인이 볼 땐 이런 정치지형은 매우 나쁜 것으로 보였고, 매우 공적이어야할 정치활동이 사적인 정치활동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눈에 끊임없이 거슬렸던 그런 ‘사(私)’만이 남은 정치에 대해 환멸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묻어버린’ 진시황의 분서갱유란 제재를 차용하여 한 편의 시를 쓴 것이다.
秦王餘魄化爲蟫 | 진시왕의 남은 넋이 변하여 책벌레가 되었는지 |
食盡當年未盡書 | 당년에 못 먹은 책을 죄다 먹어 치우네. |
等食須知當食字 | 똑같이 먹더라도 모름지기 마땅히 먹어야 할 글자를 알아야 하니, |
一篇私字食無餘 | 한 권의 사(私)자를 남김없이 먹어 치우거라. |
1구~2구에선 이 좀벌레는 진시황의 남은 넋이 변한 것인지, 그 당시엔 모조리 없애지 못한 책을 지금이라도 다 없애려는 듯 바쁘게도 먹어치운다고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생각하면 ‘분서=진시황’, ‘책 먹음=좀벌레’의 단순한 등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3~4구를 읽는 순간, 이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3구에선 진시황처럼 책 자체를 없애더라도 좀벌레는 없애는 정도에 그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바로 4구에 나오듯 한 책에 쓰여 있는 ‘사(私)’라는 글자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공당(公黨)이 사당(私黨)이 되고 공익이 사익이 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엔 숨겨진 의미까지도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건 바로 진시황이란 모티프를 끌고 올 때부터 태생적으로 갖게 되는 ‘유학자를 파묻다[坑儒]’라는 연상 작용 때문이다. 그는 ‘사(私)도 당연히 다 먹어 치워야 하지만, 저런 사익만을 추구하는 유학자들을 모두 파묻어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유몽인과 정확히 반대지점에 서 있던 사람에겐 말하지 않아도 절로 알게 되는 연상작용이었을 것이고, ‘유몽인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라는 인상을 갖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이 인조반정을 거행한 이후 억지로 유몽인을 연루자로 끼워 넣어 죽이게 되는 데엔 이 시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갱유(坑儒)’의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은 아닐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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