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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경 - 등능한음주(登凌漢飮酒) 본문

한시놀이터/조선

정두경 - 등능한음주(登凌漢飮酒)

건방진방랑자 2021. 4. 13.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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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한산성에 올라 술을 마시며

등능한음주(登凌漢飮酒)

 

정두경(鄭斗卿)

 

 

使君風流天下無 春日邀我登山隅

五馬追風龍有種 長歌入雲鳳將雛

却胡何用漢公主 携妓遠勝秦羅敷

酒䦨更奏出塞曲 城頭月出驚棲烏

 

山勢崚嶒地勢孤 眼前空闊九州

樓看赤日東臨海 城到靑天北備胡

共賀使君兼大將 何勞一卒敵千夫

鯨觬寂寞風濤穩 朱雀門開醉酒徒

 

使君雄略動乾坤 大將權兼節制尊

沙塞風塵春欲暗 邊城鼓角暮多喧

參差城勢隨山勢 突兀轅門對海門

安得從軍投筆去 長纓一丈繫烏孫 東溟先生集卷之七

 

 

 

 

해석

使君風流天下無
사군풍류천하무
사또의 풍류는 천하에 다신 없을 지경이라
春日邀我登山隅
춘일요아등산우
봄날 나를 맞아 산 모퉁이에 올랐네.
五馬追風龍有種
오마추풍룡유종
오마는 바람 따르고 용종엔 씨 있으며곽산 수령이 타고 있는 말이 아주 훌륭하다는 뜻이며, 또한 곽산 수령의 인물이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마(五馬)는 말 다섯 마리가 끄는 수레로, 태수가 부임할 적에 이 수레를 타고 갔으므로, 한 고을의 수령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용종(龍種)은 뛰어난 말을 가리킨다.
長歌入雲鳳將雛
장가입운봉장추
긴 노래는 바람에 들고 봉황을 새끼 거느렸네악부(樂府) 상화가사(相和歌辭)에 봉장추(鳳將雛)가 있는데, 그 내용은 봉이 새끼를 거느리고 있는 것을 노래하였다..
却胡何用漢公主
각호하용한공주
오랑캐 물러났으니 어찌 한나라 공주를 쓸 것이며
携妓遠勝秦羅敷
휴기원승진라부
기녀 데려간 이 아득히 진나라 나부보다 낫네.
酒䦨更奏出塞曲
갱주출새곡
술 거나해져 다시 출새곡을 연주하니
城頭月出驚棲烏
성두월출경서오
성 어귀에 달 나와 까마귀 놀라 깃드네.

 

山勢崚嶒地勢孤
산세릉증지세고
산세는 험하고 지세는 외져
眼前空闊九州
안전공활구주무
눈앞에 확 트여 온 세상마저 없는 듯하네.
樓看赤日東臨海
루간적일동림해
누대에서 붉은 해를 보이고 동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城到靑天北備胡
성도청천북비호
성은 푸른 하늘에 다달았고 북으론 오랑캐 방비하지.
共賀使君兼大將
공하사군겸대장
함께 사또와 대장에게 하례하니
何勞一卒敵千夫
하로일졸적천부
어찌 한 병졸을 수고롭게 하여 천 장부를 대적하리오?
鯨觬寂寞風濤穩
경예적막풍도온
오랑캐[鯨觬]는 적막하고 바람과 파도도 온화하니
朱雀門開醉酒徒
주작문개취주도
주작문을 열고 술무리를 취하게 하네.

 

使君雄略動乾坤
사군웅략동건곤
사또의 웅장한 전략은 천지를 움직이고
大將權兼節制尊
대장권겸절제존
대장의 권한 겸했으니 절제함으로 존귀하다네.
沙塞風塵春欲暗
사새풍진춘욕암
모래 변방의 바람과 먼지가 봄을 어둡게 하고
邊城鼓角暮多喧
변성고각모다훤
변방성의 불나팔은 저녁에 많이들 시끄럽구나.
參差城勢隨山勢
참치성세수산세
울퉁불퉁한 성세는 산세를 따랐고
突兀轅門對海門
돌올원문대해문
튀어나온 수레 출진하는 군문원문[轅門] 수레에 멍에를 세워 만든 문. 전하여 군문(軍門)을 말한다. 주례(周禮) 천관(天官) 장사(掌舍) 주에 수레를 세워 그 멍에로 문을 표하는데, 두 수레의 멍에를 마주 세워 문처럼 만들므로 원문이라 한다.”라고 하였다은 바다의 관문을 마주했네.
安得從軍投筆去
안득종군투필거
어찌 중군처럼 붓을 던지고 떠나
長纓一丈繫烏孫
장영일장계오손
긴 끈 한 장으로 오손을 메어둘 수 있으려나종군(從軍)하여 오랑캐들을 평정하고 싶다는 뜻이다. ()나라 무제(武帝) 때 종군(終軍)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상소를 올려서 오랏줄을 하나 주면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서 남월 왕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漢書64 終軍傳오손(烏孫)은 한나라 때 서역(西域)에 있었던 나라 이름으로, 여기서는 청나라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漢書96 西域傳 烏孫國」】? 東溟先生集卷之七

 

 

참고

이 시의 두 번째 시에 대해 조동일은 그의 한국문학통사에서 북한산 성벽에 올라가 지었다고 하는 정두경의 등능한산성(登凌漢山城)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를 극복하고 왕조의 위엄을 다시 이룩하며, 태평성대의 풍류를 자랑하자는 의지를 굳센 필력으로 나타냈다. 한층 복잡해진 시상으로 건국 초에 수도 서울을 찬양한 노래를 이었다고 하겠으나, 정두경이 자기 임무를 어떻게 의식했는지 알 수 있다.”라고 하면서, 이 시를 산세는 삐죽하고 지세는 외로우나, 눈앞이 넓게 트여 구주를 업신여기리로다. 다락에서 붉은 해를 보며 동해를 임하고, 성은 하늘까지 닿아 북으로 오랑캐를 막는구나. 함께 사군을 하례하고 대장을 겸할 일이지, 어찌 한 사람 사졸을 힘들여 일천 군사를 막으랴. 고래는 고요하고 바람과 물결 일지 않는데, 주작문 열린 곳에 술 취한 무리 있네.”라고 번역하였으며, 이어 동해를 바라본다는 것은 일본을 의식한 말이고, 북쪽 오랑캐는 청나라를 지칭했지 다른 뜻일 수 없다. 그런데 사군을 하례하고 대장을 겸한다는 대목에서는 외교 노력과 군사 양성을 함께하면 그만이라고 했고, 그다음 줄에서는 군사들을 수고롭게 하는 전쟁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민족의 저력은 찾지 않은 채 집권층이 나라의 위엄을 빛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라고 하였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3, 지식산업사, 1994, 68~69

정두경에 대한 조동일의 이런 평가에 대해서 남은경은 정두경의 이 시는 최근의 문학사가에 의해서 오해되어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이로 인해 정두경의 문학 세계가 왜곡되고, 정두경의 문인으로서의 이미지가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다.”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남은경은 이 시에 대해 김득신(金得臣)정두경의 이 시는 필력이 장건(壯健)하여 다른 사람이 미칠 수가 없다. 내가 일찍이 정두경에게 그대의 이 시는 옛사람에게 비한다면 누구에게 견줄 수가 있겠는가?’ 하자, 정두경이 웃으면서 답하기를, ‘이백과 두보는 감당할 수 없으나, 고적(高適)이나 잠삼(岑參)에 대해서는 어깨를 견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평한 것을 근거로 들어 정두경의 이 시에 대해 당대 시평자(詩評者)들은 정두경의 필력을 높이 평가하였고, 정두경 스스로도 이 시에 대해 대단히 자부하였다.”라고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59

 

 

해설

이 시는 평안북도 중부지역에 있으면서 곽산(郭山)의 진산(鎭山)인 능한산(凌漢山)을 두른 능한산성(凌漢山城)에 올라, 능한산성의 험준한 지세를 壯健하게 묘사하고 뛰어난 대장과 일당천의 병사들이 있어 흉악한 아이 조용함을 기뻐하는 노래이다.

 

능한산성의 구조는 계산기정(薊山紀程)』 「능한산성조에 의하면, “이 성은 고려 때에 쌓은 것으로 지금은 별장(別將)이 그곳을 관할한다. 읍 사람의 말에 의하면 땅이 좁아서 많은 군사를 수용하기 어렵고, 또 산중에는 수원(水源)이 아주 적어 만약에 병란이 생기면 여러 날 동안 버티고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곽산(郭山) 땅에 들어가니 높은 산과 가느다란 성벽이 멀리서 시야에 들어온다[城是高麗所築 今有別將治之 聞邑人言 則地窄而難容衆兵 且山中水源甚少 設有兵亂 不可多日拒守云 入郭界 峻嶺細堞 ].”라 기록되어 있다.

 

김득신(金得臣)종남총지(終南叢志)에서, “필력이 장건하여 남들이 미칠 수 없다. 내가 일찍이 군평 정동명(鄭東溟)에게 그대의 시는 옛날이라면 누구와 견줄 수 있습니까?’라 물었더니, 동명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백(李白)두보(杜甫)는 감히 감당할 수 없지만, 고적(高適)과 잠삼(岑參)의 무리라면 아마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筆力壯健 人不可及 余甞問於東溟君平曰 子之詩 於古 可方何人 君平笑曰 李杜則不敢當矣 至於高岑輩 或可比肩].”라 하여, 위의 시에 나타난 장건(壯健)한 기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정두경이 견줄 수 있다고 한 고적과 잠삼은 모두 성당(盛唐)의 시인들로 종군(從軍) 체험을 바탕으로 변새시(邊塞詩)에 뛰어난 시인들이다. 이러한 정두경의 언급은 변새시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정두경이 성당시(盛唐詩)를 숭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동명시설(東溟詩說)에서, “대우와 음률 또한 문사 가운데 정수한 것이므로, 마땅히 성당의 여러분을 본받아야 한다. 조송의 여러 시인 가운데 에는 비록 대가가 많지만, 시의 정종이 아니므로 반드시 배우지 않아도 된다. 처음 배우는 사람이 송시를 익혀서 젖어 버리면 체제와 격조가 점차 낮아진다. 사람이 비록 늦게 태어났더라도 옛것을 배우면 높아지므로 반드시 낮은 것에다 힘쓸 것은 없다[對偶音律, 亦文辭之精者, 當以盛唐諸子爲法. 趙宋諸詩, 雖多大家, 非詩正宗, 不必學也. 初學之士, 熟習浸淫, 則體格漸墮. 人雖生晩, 學古則高, 不必匍匐於下乘].”라 하여, 성당시를 본받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두경의 경향은 김창협(金昌協)농암잡지(農巖雜識)의해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는다.

정동명이 늦은 때에 태어났지만, 한위의 고시와 악부를 본받을 만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행과 장편은 이백(李白)두보(杜甫)를 본받았고, 율시와 절구의 근체시는 성당을 본뜨고 만당의 시인과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을 따르려 하지 않았으니, 꾀함이 또한 크다. 그러나 그 재주가 기력을 갖추었지만, 실질은 읍취헌 박은(朴誾)과 같은 여러분에 미치지 못한다. 또한 일찍이 세심하게 글을 읽어 시도를 탐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터득하여 변화를 확충하여 개척하지 못하고, 다만 한때의 의기로 선인의 그림자와 메아리를 좇았다. 그러므로 시가 비록 청신하고 호준하여 세속의 악착스럽고 용렬한 기운은 없지만, 정교한 언어와 오묘한 시사(詩思)는 옛사람의 심오함을 엿보기에 부족하고, 옆으로 두루 달림 또한 시가의 변화를 다하지 못하였다. 요컨대 그가 성취한 것은 석주 권필과 동악 이안눌을 넘어서 위로 올라가지 못하였다[鄭東溟出於晩季, 能知有漢魏古詩樂府爲可法. 歌行長篇, 步驟李杜; 律絶近體, 摸擬盛唐, 不肯以晩唐蘇黃作家, 計亦偉矣. 然其才具氣力, 實不及挹翠諸公. 又不曾細心讀書, 深究詩道, 沈潛自得, 充拓變化, 徒以一時意氣, 追逐前人影響. 故其詩, 雖淸新豪俊, 無世俗齷齪庸腐之氣. 然其精言妙思, 不足以窺古人之奧, 橫騖旁驅, 又未能極詩家之變. 要其所就, 未能超石洲東岳而上之也].”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 208~210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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