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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그림과 시 - 3.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그림과 시 - 3.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1. 12. 5.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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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

 

 

과장과 왜곡으로 본질을 강조하다

 

이왕 그림 이야기가 나왔으니, 몇 가지 더 보기로 하자. 형호(荊浩)화론(畵論)을 보면 장수는 목이 없고, 여인은 어깨가 없다[將無項, 女無肩].”이란 말이 나온다. 무슨 말일까? 목이 없는 장수가 어디 있는가. 여인은 어째 어깨가 없을까.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그릴 때, 장수의 기상은 목을 없는 듯 짧게 그리는 데서 드러나고, 미인의 가녀린 모습은 어깨 없이 부드럽게 흘러내린 곡선을 통해 강조된다는 말이다.

 

또 왕유(王維)원안와설도(袁安臥雪圖)를 그렸는데, 고사(高士) 원안(袁安)이 눈 쌓인 파초 아래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실제 파초는 남국(南國)의 식물이므로, 눈 내리는 추위 속에서는 시들고 만다. 그러니까 왕유의 그림은 사리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왕유는 사리에 어긋남을 감수하면서 푸른 파초 위에 흰 눈을 그려 넣음으로써 원안(袁安)의 맑고 시원한 정신의 풍격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유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가 은중감(殷仲堪)의 초상화를 그리려 하였는데, 은중감은 평소 눈병이 있었으므로 한사코 거절하였다. 그러자 고개지는 눈동자를 또렷이 그린 다음 그 위에 흰 색을 흩날려, 마치 엷은 구름이 달을 가린 듯하게 하여 은중감의 눈에 낀 백태를 처리하였다. 이는 사실에 대한 미화이기는 하지만 그의 눈병을 은폐한 것은 아니었다. 또 그가 배해(裵楷)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그림을 다 그린 후 뺨 위에 터럭 세 개를 덧 그렸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배해는 명철하여 식견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식견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신채(神采)가 아연 살아났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

 

이런 몇 예화는 화가가 살아 있는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실을 일부 과장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설사 사실을 일부 왜곡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화가는 사실을 무시해도 좋은가. 그것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이러한 과장과 변형은 의경(意境)의 함축에 목적이 있다.

 

고시(古詩)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라 한 것이 있다. 도대체 삼천장이나 되는 백발이 어디 있는가. 어느 날 시인은 거울을 보다가 어느덧 세어 버린 자신의 백발을 보고 놀란 마음을 삼천장이라는 길이의 개념으로 환치해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라니, 삼천척이나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산폭포(廬山瀑布) 아래서 귀가 멍멍할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주는 압도감은 삼천장(三千丈)의 길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방불하게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시가(詩歌) 언어(言語)의 과장과 함축이다. 그러고 보면 의자왕의 삼천 궁녀도 많은 수효의 범칭이지 꼭 세어 삼천 명은 아닌 것이며, 천리마(千里馬)란 빨리 달리는 말이라는 뜻이지 정말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은 아닌 것이다. 무슨 말이 하루에 서울서 진주까지 달려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시를 읽는 독자는 시인이 쳐 놓은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식견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연암 박지원(朴趾源)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인을 보면 시를 알 수 있다. 그녀가 고개를 숙임은 부끄러운 것이다. 턱을 괸 것은 한스러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눈썹을 찌푸림은 근심스러운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림이 있을 때에는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원망하는 바가 있을 때엔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觀乎美人, 可以知詩矣. 彼低頭, 見其羞也; 支頤, 見其恨也; 獨立, 見其思也; 顰眉, 見其愁也. 有所待也, 見其立欄干下; 有所望也, 見其立芭蕉下.

 

 

화가가 굳이 미인의 심리를 묘사하지 않더라도, 동작 하나만 보면 그녀의 심리 상태는 다 알 수가 있다.

 

 

 

노새에게 덧붙여진 짐

 

유몽인(柳夢寅)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이런 시가 실려 전한다. 한 사나이가 길을 가다가 나귀를 타고 가는 미인을 만났다. 선녀가 적강(謫降)한 듯 아름다운 모습에 그는 그만 발길이 얼어붙었다. 연정의 불길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즉석에서 시를 써서 그녀에게 보냈다.

 

心逐紅粧去 身空獨倚門 마음은 미인 따라 가고 있는데 이 몸은 부질없이 문 기대 섰소.

 

넋은 이미 그대에게 빼앗겨 버리고 나는 빈 몸뚱이만 남아 문에 기대 섰노라는 애교 섞인 푸념이었다. 그녀가 답장을 보내왔다.

 

驢嗔車載重 却添一人魂 노새는 짐 무겁다 투덜대는데 그대 마음 그 위에 또 얹었으니.

 

그녀의 대답은 도무지 뚱딴지같다. 당신이 내 마음을 온통 다 가져 가 버렸으니 책임지라는 말에 그녀는 나귀 걱정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늙은 나귀는 등에 태운 미인도 무겁다고 연신 가뿐 숨을 씩씩대며 몰아쉬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사람의 넋을 더 얹었으니 나귀만 더 죽어나게 생겼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마음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사나이의 발길을 묶어 꼼짝도 못하고 서게 만들었으니 대단한 무게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이 답장은 기실, ‘나를 향한 그대의 마음을 내 마음속에 접수했노라는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눈길에 내 마음도 철렁 내려앉았고, 그 내려앉은 무게만큼 노새만 더 괴롭겠다는 멋들어진 응수이다. 일상적인 예상을 빗겨가는 이러한 비약에는 참으로 사람을 미혹케 하는 예술적 매력이 넘쳐흐른다. 글자는 스무 자에 지나지 않는데,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감정과 씩씩대는 나귀의 숨소리, 그와 함께 커져 가는 두 사람의 맥박 소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지 않은가.

 

 

 

두 마리 개를 통해 감정을 극대화시키다

 

靑裙女出木花田 푸른 치마 아가씨 목화 따러 나왔다가
見客回身立路邊 길손과 마주 치자 길가로 돌아섰네.
白犬遠隨黃犬去 흰둥인 누렁이의 뒤를 따라 달리더니
雙還却走主人前 주인 아씨 앞으로 짝 지어 돌아오네.

 

신광수(申光洙)협구소견(峽口所見)이란 시이다. 푸른 치마 아가씨가 목화밭에 목화 따러 나왔다. 목화 바구니를 들고 가다가 저만치서 오는 낯선 남정네를 본 그녀는 부끄러워 내외를 하느라 길 가로 다소곳이 몸을 돌리고 서 있다. 그때 그녀가 함께 데리고 나온 누렁이란 녀석이 컹컹 짖으며 앞으로 달려 나오고, 흰둥이란 녀석도 질세라 누렁이를 뒤쫓아 간다. 그리고는 두 놈이 어우러져 뒹굴며 장난치다가 깜빡 생각났다는 듯이 주인 아가씨 앞으로 짝을 지어 달려들고 있다.

 

1.2구에는 푸른 치마와 흰 목화밭, 부끄러워 돌아선 그녀의 붉은 홍조가 빚어내는 색채의 선명한 대비 속에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시인이 만일 너무나 수줍은 아름다운 그 모습,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네와 같이 표현했다면, 이것은 시가 아니라 유행가의 가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돌연하게도 두 마리의 개를 등장시켰다. 멀리 떨어져 있던 누렁이를 흰둥이가 쫓아가서는 어느새 어우러져 이 보란 듯이 제 주인에게 돌아오듯, 멀리서 조금씩 가까워지며 설레어버린 마음을, 그 아가씨와 다정히 앉아 정겨운 대화라도 나누고픈 마음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녀는 흰둥이와 누렁이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나그네에게 들켜 버린 것만 같아 부끄러워 얼굴이 더욱 붉어졌을 테고, 가슴은 두방망이질 쳤을 게다. 2구와 3구 사이에 생긴 시상의 단절과 비약, 이 의도적인 의미의 단절과 암시적 결합 속에 바로 이 시의 참 묘미가 있다.

 

개기(改琦), 미인도(美人圖), 19세기, 57.5cmX25.2cm.

꽃송이 손에 들고 시선을 돌렸다. 어깨선이 아무 굴곡 없이 흘러내렸다. 가녀린 자태가 더욱 살아난다.  

 

 

 

인용

목차

1. 그리지 않고 그리기

2. 말하지 않고 말하기

3.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

4. 정오의 고양이 눈

5. 마음에서 얻어 뜻으로 깨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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