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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변(文變) - 3. 고대부터 조선 성종까지의 문장의 부침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문변(文變) - 3. 고대부터 조선 성종까지의 문장의 부침

건방진방랑자 2020. 7. 3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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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대부터 조선 성종까지의 문장의 부침

 

성현(成俔)

 

 

고대부터 고려 초까지의 상황

以我朝之事觀之, 之世, 鴻荒朴略無所考, , 崔孤雲登第, 文名大著, , 崔承老上書陳弊, 其文可觀.

 

고려 후기의 상황

至于中葉, 鄭知常金克己李奎報李仁老林椿陳澕洪侃之徒, 皆以富麗爲工, 文雅莫盛於斯.

其後益齋稼亭牧隱陶隱三峯陽村諸先生, 斸崖岸而改爲之, 專務篤實, 不爲虛美之辭, 可以笙鏞世道. 朝不用, 遽終其運, 以啓我聖代文明之治.

 

조선전기 문장이 부흥되다

三峯陽村掌文衡, 春亭繼其蹤, 春亭以後, 斯文大廢, 久而不擧.

世宗集賢殿, 貯養文士, 一時儕輩, 轢駕代而能之者非一.

成宗世宗之志, 力於爲學, 專以成就人材爲急務. 內則弘文館, 外則成均四學, 誘掖多方而隆眷匪常, 又多裒書籍, 印頒而廣布之. 由是, 業文者皆探古文根本之文, 盡擺俗儒胡蘆之習, 文體大變, 趨於正閫, 非若曩時之碌碌猥瑣也.

 

 

 

 

 

 

해석

 

고대부터 고려 초까지의 상황

 

以我朝之事觀之, 之世,

우리 조선의 일로 보자면 단군과 기아의 시대에

 

鴻荒朴略無所考,

매우 멀고 질박하며 생략되어 있어 상고할 게 없고

 

, 崔孤雲登第, 文名大著,

신라 말기에 최고운이 당나라에 들어가 급제하여 문명이 크게 드러났으며

 

, 崔承老上書陳弊,

고려 초기엔 최승로가 글을 올려 폐단을 진술했으니

 

其文可觀.

문장이 볼 만하였다.

 

 

 

고려 후기의 상황

 

至于中葉, 鄭知常金克己李奎報李仁老林椿陳澕洪侃之徒,

고려 중엽에 이르러 정지상ㆍ김극기ㆍ이규보ㆍ이인로ㆍ임춘ㆍ진화ㆍ홍간의 무리가

 

皆以富麗爲工, 文雅莫盛於斯.

모두 넉넉하고 화려함을 기교로 삼았으니 문장의 우아함이 이때보다 성대한 적이 없었다.

 

其後益齋稼亭牧隱陶隱三峯陽村諸先生,

그 후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가정(稼亭) 이곡(李穀),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양촌(陽村) 권근(權近) 등의 여러 선생이

 

斸崖岸而改爲之, 專務篤實,

벼랑을 깎아 고쳐 지어 오로지 독실함을 힘써

 

不爲虛美之辭, 可以笙鏞世道.

공허한 찬미의 말을 하지 않았으니 세도를 불러일으킬생용(笙鏞): ()은 생황(笙簧)이고 용()은 큰 종인데, () 임금 때에 악관(樂官)인 기()가 생용으로 연주를 하니, 조수(鳥獸)들도 감동하여 서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 만했다.

 

朝不用, 遽終其運,

그러나 고려의 조정은 사용하질 못했고 갑자기 운수를 마쳤기에

 

以啓我聖代文明之治.

우리 성대한 문명의 다스림을 열게 되었다.

 

 

 

조선전기 문장이 부흥되다

 

三峯陽村掌文衡, 春亭繼其蹤,

삼봉과 양촌이 문형을 담당했고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자취를 계승하였으며

 

春亭以後, 斯文大廢, 久而不擧.

춘정 이후로는 사문(斯文)의 인재가 크게 폐해졌고 오래도록 천거되지 않았다.

 

世宗集賢殿, 貯養文士,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여 문사들을 모아 양성하니

 

一時儕輩, 轢駕代而能之者非一.

한 때에 무리들이 고려 시대를 짓누르며 능가하였으니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成宗世宗之志, 力於爲學,

성종은 세종의 뜻을 체득하여 힘써 학문을 했고

 

專以成就人材爲急務.

오로지 인재를 성취시키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았다.

 

內則弘文館, 外則成均四學,

안으론 홍문관을 설치하고 밖으론 성균관과 사학을 설치하여

 

誘掖多方而隆眷匪常,

다방면으로 끌어들여 은혜를 내려줌을 비상하게 했으며

 

又多裒書籍, 印頒而廣布之.

또한 많이 서적을 모아 인쇄하여 반포함으로 널리 배포했다.

 

由是, 業文者皆探古文根本之文,

이 때문에 문장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모두 고문과 근본이 되는 문장을 탐구하고

 

盡擺俗儒胡蘆之習,

속유들의 모방하는호로(胡蘆) : 조롱박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사하기만 하고 자신의 창작이 없는 것을 뜻한다. 송나라 때 도의(陶毅)는 학식이 깊고 문장이 출중하였는데,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서는 재주는 높은데 직위가 낮은 것을 불만으로 여기었다. 이에 친구들로 하여금 태조(太祖)의 면전에서 진언하게 하였는데, 태조가 말하기를, “한림학사들이 문장을 지으면서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글을 베끼기만 할 뿐이니, 이는 이른바 호로의 모양새를 보고 호로를 그리는 격이다. 무슨 공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도의가 원망하는 시를 지어 옥당(玉堂)의 벽에 걸어 놓았는데, 태조가 그 말을 듣고는 끝내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동헌필록(東軒筆錄)1 습속을 다 제거하여

 

文體大變, 趨於正閫,

문체가 크게 변하여 바른 경지에 나아가

 

非若曩時之碌碌猥瑣也.

전 시대의 평범하여 협소한 이들과 같지 않았다.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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