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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51. 분석보단 이해의 중요성을 알려주다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51. 분석보단 이해의 중요성을 알려주다

건방진방랑자 2021. 10. 2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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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보단 이해의 중요성을 알려주다

 

 

소화시평권하 51에선 권하 50의 글과는 달리 서로 경쟁적으로 글을 짓는 분위기는 아니다. 왜 이런 시를 짓게 됐는지에 대한 배경은 생략된 채 처음부터 양경우의 시가 인용되어 있다.

 

 

殘花杜宇聲中落 쇠잔한 꽃은 두견새 소리 속에 지고
芳草王孫去後靑 향기론 풀은 왕손이 떠난 후에 푸르네.

 

여기까지만 보면 매우 일반적인 이야기인 것만 같다. 누군가 어떤 환경에서 시를 지었다는 정도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듯 누군가 애써 지은 작품에 대해 바로 그 앞에서 평가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긴 하다. 서로의 관계도 있지만 시의 우열로 인해 너무 기고만장한 사람으로 비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런 것조차도 허물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친했던가 보다. 양경우의 시를 듣고서 이안눌은 웃었으니 말이다. 이런 경우 만족하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는 뉘앙스보다는 지금 그걸 작품이라고 지은 거야?’라는 식의 놀림의 울음이라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그러고선 곧바로 이안눌도 시를 읊조리기 시작한다.

 

 

海棠花下逢僧話 해당화 아래서 스님과 만나 대화하고
杜宇聲中送客愁 두견새 소리 속에 나그네를 보내고 시름겨워하네.

 

이런 경우 자신의 시에 대한 자신감이 있지 않고서야, ‘내 시가 너의 시보다 낫지라는 생각이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안눌은 아주 기세등등하게 목청 높여 자신이 지은 시를 자랑이라도 하듯, ‘나의 대단한 시를 들어봐라라는 심정으로 읊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매우 드라미틱하게 묘사되어 있기에 그 다음에 매우 궁금해진다. 과연 저 시를 들은 양경우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정말 엄지 척 들어 보이며 님 좀 짱인 듯하는 표정을 지었을까? 그게 아니면 뭐 별 거 없구만이란 생각에 썩소를 지었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일화는 이안눌이 읊은 시를 끝으로 인용이 끝나 있다. 양경우의 반응을 보며 어떤 분위기가 흘렀는지 보고 싶었는데, 마치 인셉션이란 영화에서 열린 결말로 영화를 마무리 짓듯, 멋진 하루라는 영화에서 두 사람의 후일담이 매우 궁금해진 상태에서 갑자기 끝나듯 이 일화도 여기서 끝나버린 것이다. 열린 결말을 지닌 영화의 단점은 마무리를 지어주지 않아 다 보고나면 허탈해진다. 그처럼 이 일화를 보던 나 또한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열린 결말을 지닌 영화의 장점은 여운이 짓게 감돌며 수많은 소설을 나의 시각으로 써나갈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처럼 이 두 사람의 일화에 대한 결말도 내가 쓰고 싶은 방식으로 얼마든 써나갈 수 있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이건 단순히 그들만의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의 현재의 감정까지 담긴 시간을 초월한 대하드라마가 되는 셈이니 나쁘지만도 않다. 그들의 뒷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열린 결말의 내용에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이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로써 우린 홍만종이 생각하는 두 사람의 일화에 대한 감상을 들어볼 수 있고 어떤 시각으로 보고자 하는지 유추해볼 수가 있다.

 

 

인셉션의 열린결말처럼 이번 글에서도 결말은 열려 있다. 어떻게 볼 것인가? 

 

 

하지만 홍만종도 마치 이야기를 써나가면서 은밀히 드러내 흥미라도 유발시키고 싶었는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작법이 절로 교묘하고 졸렬함이 있다[作法自有巧拙]’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이다. 딱 집어서 어떤 작품이 교묘하고 졸렬한지 말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건 두 작품엔 잘 된 것과 못 된 것이 확실히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를 배우는 사람이 여기에서 환하게 소견이 있다면 함께 시를 말할 수 있으리라[學詩者於此, 灼有所見, 則可與言詩].’라고 결말을 짓는다. 이 말은 공자가 자하에게 했던 말인데, 홍만종도 위와 같이 우회적인 결말을 내려놓고선 자하 같은 시적 감식안을 지닌 사람을 찾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한 것이다. 그만큼 정답이 아닌 생각할 거리를 줬다는 점에서 좋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권상 49에서도 이미 쓴 적이 있었다. 아마도 홍만종은 이런 식으로 서술하면서 내가 생각이 뭔지 맞춰봐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넌지시 말하지만, 그럼에도 생각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자신과 같이 생각할 거란 기대심리가 있었을 것이다.

 

난 홍만종이 던진 질문을 듣고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50이나 권상 37에서 볼 수 있다시피 이안눌보단 양경우의 시풍을 좋아하고 있으며, 그의 핍진한 시를 매우 사랑하고 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기서도 이안눌보단 양경우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소화시평의 여러 편에 나타난 정감으로 이렇게 판단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은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주더라. 그건 바로 홍만종이 말했다시피 작법에 방점을 찍고 볼 필요도 있다는 점이었다. 양경우의 시는 한시의 띄어읽기 단위인 4/3을 무시하고 5/2로 구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이안눌은 4/3을 잘 지키고 있다. 작법으로만 보자면 양경우는 기본적인 질서를 무너뜨린 경우이고, 이안눌은 충실히 따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교묘함과 졸렬함이 있다는 말은 기본 질서까지 무너뜨리며 꾸며댔기 때문에 ()’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고, 이안눌은 기본질서를 지키며 내용을 순조롭게 전달했기 때문에 ()’하다고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홍만종은 양경우의 시보다 이안눌의 시가 더 좋다고 생각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 보면 다른 답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건 이안눌이 지닌 한계를 통해 보는 것이고 50번의 글과 연장선에서 보는 것이다. 이안눌은 정두경과 마찬가지로 의고파다. 그러니 50번 글에서 나타나다시피 두보의 시구를 그대로 자신의 시에 쓰기도 했던 것이다. 홍만종은 그런 의고파의 시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물흐르듯 순조로울지라도 독특한 시상 전개로 기세 있게 시를 써나가는 양경우의 시가 더 낫다고 봤을 거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식의 이해가 가능하려면 한문학사적인 지식, 한시사적인 지식이 밑바탕에 있어야 가능하다. 결국 교수님 또한 결론을 확 내리진 않고 두 가지 가능성은 모두 있다고 이야기해주며 마무리 지었다. 이번 편이야말로 어찌 보면 정답을 찾는 세태에게 한시란 무엇인지를 알려준 명편이란 생각이 든다. 정답이 아닌 정감이고, 분석이 아닌 이해라는 깨달음. 그걸 알려준 이번 편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내용이 담긴 편이다.

 

 

 

 

홍만종도 공자처럼 회사후소할 수 있는 사람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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