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고파 시의 특징과 이안눌의 시가 굳센 이유
『소화시평』 권하 54번의 주인공도 앞에서부터 쭉 살펴봤다시피 이안눌(1571~1637)이다. 아무래도 홍만종(1637~1688)의 입장에선 그나마 2세대 위의 선배로 가장 많은 이야기들이 돌고 있고 많은 자료들도 남아 있는 이안눌에 대한 글을 쓰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러니 권하 50번부터는 계속해서 이안눌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며 그의 시적 재능을 평가하고 그와 관련 있었던 양경우 시와의 비교(50번, 51번)를 했었고, 이번 편에선 석주 시와의 비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50번 감상글에서도 썼다시피 이안눌은 의고파다. 의고파는 ‘문장은 반드시 진나라와 한나라 때의 문장으로 짓고 시는 반드시 성당의 시체로 짓는다[文必秦漢, 詩必盛唐].’를 핵심적인 기치로 걸고 있다. 중국의 전후칠자가 이런 복고주의를 천명한 이래 우리나라에선 정두경, 이안눌 등이 이어받았다. 그래서 정두경은 아예 ‘처음 배우는 선비가 송시를 열나게 익히고 점점 젖어들면 시체와 격조가 점점 추락할 것이다. 사람이 비록 태어난 게 후대이더라도 옛 것을 배우면 고상해지리니, 낮은 수준에서 포복할 필욘 없는 것이다[初學之士, 熟習浸淫, 則體格漸墮. 人雖生晩, 學古則高, 不必匍匐於下乘. 『東溟詩說』]’라고 강도 높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글에 인용된 이안눌의 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두 구만을 실어놓았기에 그리고 신집 어머니의 팔순 잔치에 갔다가 지었다는 배경을 알고 있으면 해석이 되니 말이다. 물론 이 시를 보기 전에 고전번역원DB를 통해 이안눌이 지은 두 수의 시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해석할 엄두가 나지 않아 해석을 하지 않고 그대로 스터디에 참석한 것이다. 그런데 교수님은 이 두 수의 시를 모두 봐야지만 의고파 시의 특징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이진이 ‘참으로 육경의 문장이로구나[眞六經文章也].’라고 평가한 것과 동명이 ‘매우 깊고 굳세다[甚淵伉]’라고 평가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두 시를 프린터해서 가져오셨으며 그 자리에서 해석해보게 하며 풀이해주셨다.
▲ 작년 11월 14일에 있었던 김형술 교수 특강. 한시를 더 친근하게 느끼도록 안내해준 시간이었다.
雪晴公館暖如春 | 눈 갠 공관은 따스하기가 봄 같고 |
絲管訇天粉黛新 | 음악소리 하늘을 울리고 미녀들이 새로워. |
卿月遠臨都護府 | 경월은 멀리 도호부에 임했고 |
壽星高捧太夫人 | 수성은 높이 태부인을 받들었네. |
曾玄兒列肌皆玉 | 증손자와 현손자가 열 지었으니 피부가 모두 옥 같고, |
八十年踰鬢未銀 | 80세가 넘도록 머리는 희어지질 않았구나. |
手獻九霞觴拜賀 | 손수 구하상을 받들고 절하며 경하드리니 |
尙書家慶冠朝紳 | 재상집의 경사가 조정 진신 중 으뜸이라네. |
八袠親隨六袠兒 | 80세 어머니를 60세 아이가 따르니 |
靑雲器出白雲司 | 청운의 기량이 형조에서 나왔다네. |
養求列鼎輸誠孝 | 봉양하러 외직 구해 진수성찬 차려 정성스런 효를 다하고, |
榮許專城荷寵私 | 영화로이 전성의 봉양을 허락하시니 은총의 사사로움을 입었구나. |
兄弟却聯金虎重 | 형제들 도리어 서쪽 방면에서 중임을 이었고 |
子孫仍繼石麟奇 | 자손은 기린아의 기이함을 계승했다네. |
建牙此日眞堪詫 | 건강한 이는 오늘 참으로 자랑할 만하니, |
霜髮升堂捧壽巵 | 흰 머리로 당에 올라 축수(祝壽)의 잔을 바친다네. |
시 전문을 보는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빼곡하게 실려 있는 전고(典故)들이 기가 질리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매구마다 전고가 있을 완전한 ‘전고 파티’일 정도였다. 그건 곧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겐 편안히 읽을 수 있고 이진처럼 ‘참으로 육경의 고전미가 가득한 문장이다’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친근하고 익숙한 시로 보였겠지만, 지금 우리에겐 낯설고 어려워 알아야만 하는 배경지식이 많은 진입장벽이 높은 시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정두경은 동악의 시에 대해 ‘기세가 굳세다’라는 평가를 한 것일까? 바로 그런 평가엔 의고파 시가 지닌 특징이 들어 있다. 정두경이 쓴 송별연에서 준 시를 보고 김창흡은 ‘이 분은 매번 지을 때마다 이렇게 웅장한 말이로구[每作此雄大語].’라고 혹평한 적이 있다. 배경지식이 없이 이 평가만 듣고 보면 ‘그거 칭찬한 거 아닌가요?’라는 물음이 생길 법도 하지만 김창흡처럼 천기가 자연히 드러나는 시를 옹호하고 그런 시를 지으려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변방=험난하며 깎아지른 산등성이가 즐비한 곳’이란 인상만 가지고 지은 시는 결코 좋아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막상 변방에 가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외에 다양한 정감들도 담길 수 있는데, 고정과념에 빠진 사람처럼 하나의 이미지만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린 재밌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김창흡이 정두경의 시를 평가한 ‘차웅대어(此雄大語)’라는 말과 동명이 동악을 평가한 ‘심연항(甚淵伉)’이란 말의 뜻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의고파 시의 특징이야말로 바로 이 두 마디인 ‘굳센 기상’, ‘웅장한 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은 굳이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담아내지 않더라도 이미 과거에 문장의 전범이 따로 있으니 그 문장들을 적재적소에 섞어가며 시를 지으면 됐던 것이다. 그러니 기세는 높아지고 말은 웅장해질 수밖에 없었다.
동명(1597~1673)은 홍만종의 한 세대 윗 선배에 해당한다. 그런 그에게 홍만종은 석주와 동악의 시에 대해 평가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자 동명이 했던 말이 참 재밌다. 불가의 용어를 굳이 섞어가며 석주는 갑자기 깨달은 듯한 시재(頓悟)를 발산한 것임에 반해 동악은 천천히 배워간 후에 깨달음에 이르렀고 바로 그와 같은 시재(漸修)를 발산했다는 것이다.
의고주의는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전범을 성당시기로 두고 있다. 그러니 그런 시재를 뽐내기 위해선 성당시를 모범적인 시의 전범으로 삼아 끊임없이 갈고 닦으며 연습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배경지식으로 동명의 동악에 대한 평가를 보자면 동악은 치열하게 성당시를 연구하고 써내며 이런 경지에 이르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석주는 천성적인 시재를 타고나 이미 자신 안에 재능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애쓰지 않아도, 연구하지 않아도 성당시에 가까운 시들을 써낼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돈오나 점수는 과정상의 이야기일 뿐, 결국 깨달음에 이르러선 한 가지다. 일순간에 깨닫게 되었느냐, 수많은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르렀느냐의 차이만 있다. 이처럼 이 두 사람이 시를 잘 쓰게 된 과정은 같지는 않지만, 석주나 동악이나 지금은 좋은 시를 쓰게 된 것은 마찬가지인 거다. 그렇기 때문에 동명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말을 하며 두 사람의 시적 재능에 대한 비평을 마친 것이다.
▲ 의주에 있는 통군정 사진. 변방하면 험난하고 위험하단 인상이 있는데 통군정에서 쓴 시들엔 이런 이미지가 잘 드러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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