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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송시학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 송시학의 수용, 3) 한림제유와 사원의 흥기(유승단&이공로&이윤보)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송시학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 송시학의 수용, 3) 한림제유와 사원의 흥기(유승단&이공로&이윤보)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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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한림제유(翰林諸儒)와 사원(詞苑)의 흥기

 

 

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

沖基對策 光鈞經義 良經詩賦

試場긔 엇더하니잇고

琴學士玉荀文生 琴學士玉筍文生

위 날조차 몃부니잇고

 

 

이는 고종(高宗) 때의 한림제유(翰林諸儒)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한림별곡(翰林別曲)의 첫 장이다. 의종(毅宗) 때의 무신란(武臣亂)으로 한때 문신(文臣)들이 지기(志氣)를 잃고 산림(山林)에 자복(雌伏)하는 퇴영적인 풍조가 미만(彌滿)하였으나 사장(詞章)을 숭상한 전시대(前時代)의 안정기반에 힘입어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전횡(專橫)하던 신종(神宗)ㆍ고종(高宗) 연간에 이르러 현량(賢良)과 문학지사(文學之士)가 일시에 성황을 이룬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 중의 일부다.

 

 

원순문(元淳文)의 원순(元淳)은 유승단(兪升旦, 1168 의종22~1232 고종19)의 초명(初名)이다. 유승단은 특히 고문(古文)에 조예가 깊어 원순문(元淳文)’으로 불리었으며 석전(釋典)까지도 두루 통하였다고 한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그의 시작(詩作)10()을 넘지 못하지만 그의 시()는 대체로 말이 굳세지만 뜻은 부드러우며 용사함이 정밀하고도 간이하다[語勁意淳, 用事精簡]’고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권중 3에서 평하고 있다.

 

그는 특히 율시(律詩)에 재능을 보여, 조상국독락원(趙相國獨樂園)(五律), 혈구사(穴口寺)(五律), 숙보령현(宿保寧縣)(五律) 등의 명편(名篇)을 남기고 있다.

 

숙보령현(宿保寧縣)은 다음과 같다.

 

晝發海豐郡 侵宵到保寧 낮에 해풍 고을을 떠나 밤 이윽하여 보령에 이르렀네.
竹鳴風警寢 雲泣雨留行 대나무 울리는 바람은 잠을 깨우고 구름 눈물 짓게 하는 비는 갈 길을 머무르게 하네.
暮靄頭還重 朝暾骨乍輕 저녁 노을에 머리 도리어 무겁더니 아침 햇살에 몸이 금새 가벼워지네.
始知身老病 唯解卜陰晴 비로소 알겠구나, 이 몸이 늙고 병들어 날 흐릴지 갤지를 미리 점칠 수 있음을.

 

유승단(兪升旦)의 시는 대개 단련(鍛鍊)에 공교(工巧)하여 부착(斧鑿)의 흔적이 없다고 한 청구풍아(靑丘風雅)의 논평이 일찍이 있어 왔거니와, 이 작품의 함련(頷聯)은 특히 수사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공로(李公老, ?~1224 고종11, 去華)는 고종(高宗) 때에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으로 왕이 심복으로 알아 크게 쓰려 하였으나 아깝게도 요절(夭折)하여 그의 시문(詩文)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최자(崔滋)보한집(補閑集)권중 3에서 말이 굳세고 고와 더욱 임금의 조령(詔令)에 초()하는 일과 대우의 문장에 뛰어났다[辭語遒麗 尤長於演誥對偶之文]’이라 하여 공로사륙(公老四六)’의 특장(特長)을 다시 확인케 한다.

 

 

이 밖에도 이윤보(李允甫, ?~?)는 학론(學論)이 정박(精博)하여 시문(詩文)이 근대(根帶)가 있었으며 이규보(李奎報)도 그의 무장공자전(無腸公子傳)을 보고 근세에 글을 잘 짓는 사람으론 이윤보가 참으로 훌륭한 사관의 재주로다[近得能文者, 李允甫眞良史才也].’라 한 것을 보면 그도 사한(史翰)에서 솜씨를 보인 능문(能文)의 학사(學士)임을 알 수 있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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