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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송시학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 송시학의 수용, 4) 이규보의 종의분방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송시학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 송시학의 수용, 4) 이규보의 종의분방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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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규보(李奎報)의 종의분방(縱意奔放)

 

이규보(李奎報, 1168 毅宗 22~1241 高宗 28, 春卿, 白雲居士止軒三酷好先生)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리었지만, 한미(寒微)한 가계(家系)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 시절부터 시주(詩酒)를 좋아하고 스스로 구속받기를 싫어하여 40대 초반까지도 신통한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한 채 불우하게 청년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일시도 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시()를 좋아했다고 하지만 시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어 시()를 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시()ㆍ주()ㆍ금()을 너무 좋아하여 스스로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부르기도 하였지만, 벼슬에 대한 집착도 과상(過常)할 정도로 대단했다. 고위관료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자신의 시재(詩才)를 과시하기도 하고 직접 글을 올려 벼슬을 구하기도 했다. 최충헌(崔忠獻) 부자(父子)에게 접근하게 된 것도 시문(詩文)의 교섭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렇게 하여 출세 가도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학자(學者)들은 도()를 행하기 위하여 벼슬을 한다지만, 이규보(李奎報)는 문장(文章)을 세상에 행하게 하기 위하여 벼슬을 한 문인 관료의 전형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시문집(詩文集)을 생전에 완성하여 유루(遺漏)없이 후세에까지 전하게 하였는지 모른다.

 

이규보(李奎報)는 자신이 쓴 글을 통하여 자기를 과시한 것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이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이다. 한 마디로 이 글은 이규보(李奎報)의 문장(文章)과 시()와 그리고 그의 위인(爲人)까지도 함께 읽게 해주는 본보기로서도 중요하게 값할 수 있는 것이다.

 

 

이규보(李奎報)의 문장(文章)이 자유분방(自由奔放)하고 웅장(雄壯)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은 세론(世論)이 공통적으로 일컬어 온 일이거니와,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는 특히 그러한 증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충분하고 남는다. 일필(一筆)에 삼백운(三百韻)을 뽑아내는 장편(長篇)의 구사력(驅使力)이 이 글에서도 그대로 발휘되고 있다. 편지 한 편에 일천수백언(一千數百言)을 거침없이 쏟아 내는 힘과 기상(氣象)은 그의 권능(權能)임에 틀림없다.

 

문선(文選)()이 모범 문장(文章)으로 통행하고 있던 당시의 속상(俗尙)에서 빠져나와 당송(唐宋) 고문(古文)의 간결한 매력에 미련을 갖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명쾌(明快)를 특징으로 하는 고문(古文)의 구속은 본질적으로 감내(勘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로잡힘이 없이 자유롭게 붓가는 대로 내리갈겨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굴레란 처음부터 가당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육경(六經)ㆍ자사(子史)를 읽었으되 섭렵만 하였을 뿐 그 궁원(窮源)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했다. 동파(東坡)를 근세의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켜 올리면서도 끝내 그는 동파(東坡)를 본받았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설사 동파(東坡)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천성(天性)으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정도다.

 

죽어도 남의 글을 훔치거나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신어(新語)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남의 글을 훔쳐서 쓰려고 해도 원래 읽은 글이 없으므로 훔치려고 해도 훔칠 수가 없다고 합리화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옛 사람은 조의(造意)만 하고 조어(造語)는 하지 않았는데 자신은 뜻과 말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세상의 빈축을 받았다고 자만하고 있다. 그러나 어()와 의()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언어학의 상식에 걸려 그는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신경(新警)과 기발(奇拔)을 좋아하여 신어(新語)신의(新意)를 창출한 것은 이규보(李奎報) 문장(文章)의 장처(長處)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발(奇拔)과 기괴(奇怪)가 같은 속성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 그의 글 도처에서 창출한 신조어(新造語)들이 이러한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그의 다른 글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에서도 의기론(意氣論)을 개진하고 시의 함축미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의 시는 대체로 ()’보다는 ()’에 가깝다. 말의 뜻은 깊지만 시의 뜻은 깊지 못하다는 것이 적평(的評)이 될 것이다.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기승(氣勝)한 시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도 모른다.

 

그는 외로운 시인(詩人)이요 문장가(文章家)였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백락천(白樂天)을 경모(敬慕)하였지만 이때는 이미 그의 모든 것이 지쳐 있었던 것 같다. 색마(色魔)ㆍ주마(酒魔)시마(詩魔)가 그를 괴롭힌 친구[三魔], 이 중에서도 시마(詩魔)는 그가 죽을 때까지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은 마귀였다고 자술(自述)하고 있지만 이때는 시도 이미 기력을 상실한 듯이 보인다.

 

 

이규보(李奎報)는 그의 시문집(詩文集)2,000수가 넘는 시편(詩篇)을 남기고 있으며 선발책자(選拔冊子)에 수록된 작품도 80편을 상회한다. 이 가운데서도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그의 시작(詩作) 중에서도 비평의 초점이 된 하일즉사(夏日卽事)(七絶)를 비롯하여 북산잡영(北山雜詠)(五絶), 영정중월(詠井中月)(五絶), 춘일방산사(春日訪山寺)(七絶), 구품사(九品寺)(五律), 우용암사(寓龍巖寺)(五律), 숙덕연원(宿德淵院)(五律), 부녕포구(扶寧浦口)(七律), 강상월야망객주(江上月夜望客舟)(七絶), 칠월칠일우(七月七日雨)(七古) 등이 그것이며 특히 경구(警句)으로써 화제가 된 것은 다음과 같다.

 

송김선배등제환향(送金先輩登第還鄕)은 다음과 같다.

 

落日愁行色 孤烟慘別腸 지는 해에 행색(行色)이 시름겹고 외로운 연기에 이별이 서럽네.

 

하녕사(下寧寺)는 다음과 같다.

 

野荒偏引燒 江暗易生雲 들이 거치니 불 붙기 일쑤요, 강이 어두우니 구름이 쉬 생기네..

 

구품사(九品寺)는 다음과 같다.

 

虛閣秋來早 危峰月上遲 텅 빈 누각에 가을이 일찍 오고 가파른 봉우리에 달도 늦게 오르네.

 

숙덕연원(宿德淵院)은 다음과 같다.

 

竹虛同客性 松老等僧年 대나무 빈 것은 나그네 성질을 닮았고 소나무 늙은 것은 중의 나이와 같네.

 

기오덕전(寄吳德全)은 다음과 같다.

 

黃稻日肥雞鶩喜 누른 벼 날로 살찌니 닭ㆍ오리 기뻐하지만
碧梧秋老鳳凰愁 벽오동 가을에 늙어서 봉황새 시름짓네.

 

부녕포구(扶寧浦口)는 다음과 같다.

 

湖淸巧印當心月 호수가 너무 맑아 한복판에 비친 달 정교하게 도장 찍고
浦濶貪吞入口潮 갯벌이 하도 넓어 들어오는 조수를 탐내듯 삼키네.

 

우거천룡사(寓居天龍寺)는 다음과 같다.

 

竹根迸地龍腰曲 땅에 흩어진 대 뿌리는 용의 허리인 양 구부러지고
萬葉當窓鳳尾長 창을 막은 파초 잎은 봉의 꼬린 양 길기만 하네.

 

위의 경구(警句) 가운데서도 서거정(徐居正)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卷上) 20에 나타나듯 기오덕전(寄吳德全)두보(杜甫)紅稻喙餘鸚鵡粒, 碧梧棲老鳳凰枝 秋興八首를 도습(蹈襲)한 것이 사실이고 보면, 죽어도 남의 것을 훔치지 않겠노라고 외치던 이규보(李奎報)의 장담도 여기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부녕포구(扶寧浦口)에서 보여준 동적(動的)인 미감의 표현은 이규보(李奎報)의 욕심과 기상(氣象)을 함께 읽게 해주는 전형이다.

 

 

그의 대표작 하일즉사(夏日卽事)제포구소촌(題浦口小村), 칠월칠일우(七月七日雨)를 차례로 보인다.

 

하일즉사(夏日卽事)는 다음과 같다.

 

輕衫小簟臥風櫺 대닢자리 가벼운 적삼으로 바람 난간에 누웠다가
夢斷啼鶯三兩聲 꾀꼬리 울음 두세 소리에 꿈이 깨었네.
密葉翳花春後在 나무 잎에 꽃이 가리어 꽃은 봄 뒤에도 남아 있고
薄雲漏日雨中明 엷은 구름에 해가 새어나와 비 속에서도 밝구나.

 

이 작품은 한결같이 완려(婉麗)한 것으로 정평(定評)되어 있지만, 전구(轉句)와 결구(結句)에서 사출(寫出)한 그의 정감(情感)은 무엇을 쓸 것인가를 분명히 하느라 말을 많이 한 결과가 되고 있다.

 

 

다음은 칠율(七律)의 대표작 가운데 흔히 부녕포구(扶寧浦口)로 알려져 있는 제포구소촌(題浦口小村)이다.

 

流水聲中暮復朝 흐르는 물소리에 아침저녁 지나고
海村籬落苦蕭條 어촌의 민가는 쓸쓸하기만 하네.
湖淸巧印當心月 호수가 하도 맑아 한복판에 공교하게 달을 찍어 놓았고
浦闊貪呑入口潮 포구가 넓어서 들어오는 조수를 탐욕스레 삼켰네..
古石浪舂平作礪 낡은 돌이 물결에 닳아 숫돌처럼 평평하고
壞船苔沒臥成橋 부서진 배가 이끼에 묻혀 누운 채 다리가 되었네.
江山萬景吟難狀 강산의 온갖 경치 읊어내기 어려우니
須倩丹靑畵筆描 화가의 솜씨 빌려야 묘사할 수 있겠네.

 

이 작품은 이규보의 기상과 조어(造語)의 솜씨를 함께 읽게 해준다. 처음 일으킨 시인의 뜻이 긴장으로 연결되고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호청교인당심월(湖淸巧印當心月)’()’()’으로 고치고 있으나 포활탐탄입구조(浦闊貪呑入口潮)’()’()’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이것들은 모두 동적(動的)인 미감을 고려한 것이다. 뜻과 말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포활탐탄입구조(浦闊貪呑入口潮)’의 기상이야말로 이규보의 것임을 확인케 한다.

 

 

그러나 그의 무서운 저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역시 고조(古調) 장편(長篇)이며 그의 초기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초기작 가운데 칠석우(七夕雨)로도 널리 알려진 칠월칠일우(七月七日雨)(七古)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銀河杳杳碧霞外 은하수 아득히 푸른 노을 밖에
天上神仙今夕會 천상의 신선이 오늘 저녁에 다 모이네.()
龍梭聲斷夜機空 베 짜는 소리 끊어지고 밤 베틀도 텅비었는데
烏鵲橋邊促仙馭 오작교 가에는 신선 행차 재촉하네.()
相逢才說別離苦 만나자마자 서로 이별의 괴로움만 나누고
還導明朝又難駐 도리어 내일 아침 또 만나기 어렵다 하네.()
雙行玉淚洒如泉 두 줄기 눈물이 샘물처럼 흘러 내리는데
一陣金風吹作雨 한바탕 가을 바람 비를 내리네.()
廣寒仙女練帨涼 광한궁 선녀들 명주 수건 서늘한데
獨宿婆娑桂影傍 홀로 계수나무 가에서 조용히 잠자네.()
妬他靈匹一宵歡 저들 한쌍 하룻밤 즐기는 것 샘나서
深閉蟾宮不放光 월궁을 깊이 닫고 빛을 내보내지 않네.()
赤龍下濕滑難騎 적룡은 몸이 젖어 미끄러워 타기 어렵고
靑鳥低霑凝不飛 청조는 날개가 젖어 날아가지 못하네.()
天方向曉汔可霽 바야흐로 새벽이라 아마도 개일 듯한데
恐染天孫雲錦衣 직녀성의 비단옷을 더럽힐까 두렵네.()

 

뜻은 깊지만 말이 거칠어 힘만 느끼게 한다. 구도(構圖)가 넓고 크지만, 그가 말한 대로 말이 원숙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말을 너무 많이 한 작품이 되고 있다. 그는 압운(押韻)에 있어서도 법칙적(法則的)인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측성(仄聲) 태운(泰韻)으로 시작한 이 작품은 제2연에서 바로 우운(遇韻)으로 환운(換韻)하고 있다. 그래서 후대의 시인들은 제4구의 선어(仙馭)’비개(飛蓋)’로 고쳐 태운(泰韻)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만년(晩年)에 다시 같은 제명(題名)으로 제작한 칠석영우(七夕永雨)에서는 지난날의 넓은 구도와 기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七夕少不雨 予莫知其故 칠석에 비 오지 않는 날 적은데 나는 그 까닭을 모르겠네.
靈匹將成歡 雨師應自妬 신령한 짝이 사랑을 이루려 하니 비를 내리는 신이 응당 질투하리라.
欲敎烏鵲侶 霑重落中路 까마귀와 까치 짝으로 하여금 젖은 것이 무거워 도중에서 떨어지게 하고 싶어서라네.
假令橋未成 河水不可渡 만약 다리를 놓지 못한다면 은하수는 건널 수 없으리라.
寧且泳而歸 此夕難虛度 차라리 헤엄쳐 건너갈망정 이 밤을 헛되이 보내기는 어려우리라.
明年若復雨 忍可長懷慕 명년에 만약 다시 비가 온다면 차마 길이 마음으로 사모하기만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는 칠월칠일우(七月七日雨)에서 보여준 폭넓은 구도(構圖)와 달리는 힘을 찾아볼 수 없다. 평범(平凡)을 거부하고 비범(非凡)을 시험하던 이규보의 시작(詩作)도 이미 범상(凡常)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 줄 뿐이다. 신의(新意)신어(新語)를 제조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진부하기까지 하다. 특히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그의 저력을 과시하던 장편(長篇)의 구사력도 현저하게 감퇴(減退)하고 있다. 젊은 시절, 기호의활(氣豪意豁)동파(東坡)를 배우면서도 동파를 본받거나 그 휴경(畦徑)에 얽매이기를 거부한 이규보는 만년에 접어들면서 스스로 평담(平淡)백락천(白樂天)에 경도되고 있다후집(後集) 권십일(卷十一), 서백락천집후(書白樂天集後)참조. 백낙천의 삶의 방식과 자신의 모습을 포개어 보면서 자위(自慰)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차운화백락천병중십오수(次韻和白樂天病中十五首)가 그런 것에 속한다. 이에 이르러서는 그가 스스로 자부하던 자기 시의 창작은 물론, 한국시로서의 한시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규보(李奎報)26세 때 이미 백운시(百韻詩)를 제작하여 장편(長篇)의 저력을 과시하기 시작하였으며 환상적인 오언고시(五言古詩)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제작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장편이란 원래 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규보가 그렇게 많은 고조장편(古調長篇)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힘이 그렇게 한 것이다. 일필(一筆)에 삼백운(三百韻)의 기록을 이룩한 차운오동각세문정고원제학사(次韻吳東閣世文呈誥院諸學士)와 같은 작품 역시 28세의 젊은 나이에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물과 마주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호기심 때문에 무엇이 어떻게 있는지를 시로써 말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했다.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시를 쓰는 효용적인 시작(詩作) 말고도 전혀 전달할 뜻이 없이 그의 놀이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제작한 유희적(遊戱的)인 시작(詩作)들도 많다. 그는 앉아서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성급함 때문에 스스로 권귀(權貴)에게 나아가 시로써 벼슬을 구하기도 하여 시작(詩作)의 무절제를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벼슬길에 오른 40대를 지나면서 그는 주변의 관료들과 차운시(次韻詩)를 즐기고 있지만 예술적인 성취를 이룩한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음주(飮酒)로 허일(虛日)이 없었던 그는 주필(走筆)로써 명작(名作)의 천재를 과시하기도 하였지만 주필(走筆)’, ‘희작(戱作)’으로 낭비를 일삼은 시인(詩人)은 일찍이 있지 않았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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