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훈(白光勳, 1537 중종32~1582 선조15, 자 彰卿, 호 玉峯)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시문으로 자적하며 평생을 보낸 시인이다. 당대에는 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최백(崔白)으로 불리웠고, 후일 이달(李達)을 포함하여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웠다.
후세의 평가(評家)에 따르면 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은 모두 당시(唐詩)를 배워 정도를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둘 가운데서는 최경창(崔慶昌)이 좀더 나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양자(兩者)의 시풍(詩風)은 각각 특징이 달라서 최경창(崔慶昌)의 시풍(詩風)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선 ‘청경(淸勁)’으로, 『성수시화(惺叟詩話)』 62에선 ‘한경(悍勁)’으로, 『호곡시화(壺谷詩話)』 1에선 ‘청숙(淸淑)’으로 평하여 『호곡시화(壺谷詩話)』 16에서 ‘밝게 남국에서 홀로 비추는 빛[炯然南國之孤照]’과 같다고 한 데 비해, 백광훈(白光勳)의 시풍(詩風)은 『성수시화(惺叟詩話)』 62에선 ‘고담(枯淡)’으로, 『호곡시화(壺谷詩話)』 1에선 ‘수랑(瘦朗)’으로 평하여 『호곡시화(壺谷詩話)』 16에서 ‘흰 머리가 될 때까지 가을 풀벌레소리나 내는 것[吟作秋蟲到白頭]’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경사(弘慶寺)」(五絶), 「낙중별우(洛中別友)」(五絶), 「송고종(宋高宗)」(七絶), 「삼차송월(三叉松月)」(七絶), 「서군수제(徐君受第)」(七絶), 「억고죽(億孤竹)」(五律), 「송심공직부춘천(送沈公直赴春川)」(五律), 「봉은사차이백생견기지운(奉恩寺次李伯生見寄之韻)」(七律) 등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백광훈(白光勳)의 특장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 「홍경사(弘慶寺)」이다.
秋草前朝寺 殘碑學士文 | 전조의 절에는 가을 풀 우거지고, 다 쓰러진 비석에는 학사의 글만 남았네. |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 | 천년을 두고 흐르는 물, 석양에 돌아가는 구름 보겠네. |
홍경사(弘慶寺)는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에 있는 절이다. 교통의 요지임에도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고 갈대가 무성하여 도적떼가 들끓자 고려 때 현종(顯宗)이 절을 세울 것을 명하여 병부상서 강민첨(姜民瞻) 등이 일을 감독해서 세웠다.
절이 완성된 후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고 이름을 내렸다. 또 절 서쪽에 객관을 세워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고, 한림학사 최충(崔沖)에게 명하여 비문(碑文)을 짓도록 했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6에 나온다. 백광훈(白光勳)의 시대에는 절은 없어지고 원(院)과 비석만 남아 있었다.
이곳을 지나던 시인이 전 왕조의 잔해만 남아 있는 절을 보고 느낀 감회를 담아 내었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는 노수신(盧守愼)의 「신륵사차각장로축운(神勒寺次覺長老軸韻)」에 쓰인 ‘신륵전조사 고승보제거(神勒前朝寺, 高僧普濟居).’를 가져온 것이다. 노수신의 시에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신륵사의 웅장한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쓰인 ‘전조사(前朝寺)’라는 표현이 이곳에서는 무한한 감개를 불러 일으키는 시어(詩語)로 쓰이고 있다. 이는 원래 당(唐) 사공도(司空圖)가 「경폐보경사(經廢寶慶寺)」에서 ‘황엽전조사 무승한전개(黃葉前朝寺, 無僧寒殿開)’로 사용했던 것이기도 한데, 노수신은 이 표현의 뜻을 뒤집어 사용했고, 백광훈(白光勳)은 이를 다시 원래의 의미로 돌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허균(許筠)은 ‘절창(絶唱)’이라 했고, 홍만종(洪萬宗)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108에서 ‘매우 우아하여 고조(古調)에 가깝다[雅絶逼古]’고 평하였다.
인용
'책 > 한시(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4. 당파의 광망(정지승) (0) | 2021.12.21 |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4. 당파의 광망(이달)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4. 당파의 광망(최경창)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4. 당파의 광망(박순)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3. 도선가의 명작 (0) | 2021.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