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李達, ?~?, 자 益之, 호 蓀谷)은 시재(詩才)가 삼당시인(三唐詩人) 가운데 가장 뛰어날 뿐 아니라 조선중기 제일의 비평대가로 손꼽히는 허균(許筠)에게 시를 가르쳐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이 일찍 세상을 떠나 그 재주를 다 펴기 어려웠던 데 비해 그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지날 때까지 살아 있었으며, 특히 만년에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스스로 일가의 격을 이루었고 허균(許筠)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유장경(劉長卿)에 비견될 만큼 높이 평가했다.
최경창ㆍ백광훈ㆍ이달(삼당시인)의 시는 모두 바른 소리를 본받았다. 최경창은 맑고도 굳세며, 백광훈은 마르고 담백하니 모두 귀중하다 할 만하다. 그러나 기력이 미치지 못해 조금 일의 두터움에서 잃었다. 이달은 풍부하고 요염하니 두 작가에 비교하면 자주 매우 뛰어났으니 모두 중당시인인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의 울타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최경창과 백광훈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달은 만년에 문장이 크게 진일보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화려함과 고움을 수렴하여 평탄하고 내실 있는 데로 귀의했다. 둘째 형님께선 자주 칭찬하며 말씀하셨다. “유장경【수주(隨州): 당 나라 중당(中唐)의 시인 유장경(劉長卿)이 수주자사(隨州刺史)를 지냈으므로 부르는 이름임. 자는 문방(文方), 개원(開元) 21년에 진사(進士)가 됨. 『유수주집(劉隨州集)』11권이 있다】과 어깨를 견줄 만하니 또한 많이 사양할 게 없다.”
崔白李三人詩, 皆法正音. 崔之淸勁, 白之枯淡, 皆可貴重. 然氣力不逮, 稍失事厚. 李則富豔, 比二氏家數頗大, 皆不出郊ㆍ島之藩籬. 崔白早世, 李晩年文章大進, 自成一家, 斂其綺麗, 歸於平實. 仲氏亟稱曰: “可與隨州比肩, 亦不多讓.”
이달(李達)을 특히 높이 평가한 것은 허균(許筠)과 허봉(許篈) 형제였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62에서 그의 재주가 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을 아우른다고 하였고, 『성수시화(惺叟詩話)』 53에서 허봉(許篈)의 말을 인용하여 당시를 배운 이로는 신라 이래로 그를 넘어설 자가 없다고까지 극찬했다고 전했다.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고절(孤絶)’로 평가를 받은 바 있는 그의 시작(詩作) 중에는 「산사(山寺)」(五絶), 「강릉별이예장((江陵別李禮長)」(五絶), 「육언(六言)」(六絶), 「양양곡(襄陽曲)」(七絶), 「채련곡차정대간운(采蓮曲次鄭大諫韻)」(七絶), 「장신사시궁사(長信四時宮詞)」(七絶), 「사시사청평조(四時詞淸平調)」(七絶), 「파산망고죽장(坡山望孤竹庄)」(七絶), 「양양도중(襄陽道中)」(五律), 「상강릉양명부(上江陵楊明府)」(五律), 「귀성증임명부식(龜城贈林明府植)」(七律), 「조령문두견(鳥嶺聞杜鵑)」(七律), 「만랑무가(漫浪舞歌)」(七古)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고정절조(孤情絶照)’라는 평가를 받은 이달(李達)의 「강릉별이예장지경(江陵別李禮長之京)」을 보인다.
桐花夜煙落 海樹春雲空 | 오동꽃은 밤안개에 지고, 바닷가 나무는 봄구름에 성글다. |
芳草一杯別 相逢京洛中 | 훗날 한잔 술로, 서울에서 다시 만나세. |
이달(李達)의 경박한 사람됨을 염려하여 손님으로 맞지 말 것을 권유한 허엽(許曄)에게 양사언(楊士彦)이 ‘동화야인락 해수춘운공(桐花夜姻落, 海樹春雲空)’의 이달(李達)이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蓬萊宰江陵, 賓遇益之, 益之爲人不檢, 邑人訾之. 先子貽書勗之. 公復曰: “‘桐花夜煙落, 梅樹春雲空’之李達, 設若踈待, 則何異於陳王初喪應劉之日乎?” 『鶴山樵談』].
『지봉유설(芝峰類說)』 시평 126에선 최경창(崔慶昌)이나 이달(李達)의 시에 고인(古人)의 시구(詩句)를 모의한 것이 많다고 비난했거니와, 이 시 또한 그러한 혐의를 엿볼 수 있다. 즉 왕유(王維) 「조명간(鳥鳴澗)」의 ‘인한계화락 야정춘산공(人閒桂花落, 夜靜春山空)’과 허혼(許渾) 「송객남귀유회(送客南歸有懷)」의 ‘장안일배주 좌상유귀인(長安一杯酒, 座上有歸人)’ 등의 구법과 매우 비슷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악부제(樂府題) 「양양곡(襄陽曲)」을 가져와 칠언절구로 제작해 낸 이달(李達) 「양양곡(襄陽曲)」이다.
平湖日落大堤西 | 잔잔한 호수에 해가 큰 뚝 서쪽으로 떨어지니, |
花下遊人醉欲迷 | 꽃 아래 노는 남정들 술에 취해 헤매이네. |
更出敎坊南畔路 | 다시 교방의 남쪽 길을 나서니, |
家家門巷白銅鞮 | 골목길 집집마다 백동제(白銅鞮) 노래로다. |
「양양곡(襄陽曲)」은 청상곡사(淸商曲辭) 서곡가(西曲歌)의 이름으로 남조(南朝) 송(宋)의 수왕탄(隨王誕)이 처음 지은 것이다. 이백(李白)이 지은 악부에 「양양가(襄陽歌)」가 있는데, 이달(李達)의 이 작품은 이백의 그것을 전반부만 차운(次韻)한 것이기도 하다.
이백의 “落日欲沒峴山西, 倒着接䍦花下迷. 襄陽小兒齊拍手, 攔街爭唱白銅鞮. 旁人借問笑何事, 笑殺山公醉似泥”에 보이는 ‘백동제(白銅鞮)’는 양(梁) 무제(武帝) 때 아이들이 “襄陽白銅蹄, 反縛揚州兒”라 불렀다는 동요의 이름으로 여기에서 「양양곡(襄陽曲)」이라는 제목이 나온 것이다.
허균(許筠)은 이 작품에 대해 ‘풍류 문체가 천고를 비춘다[風流文采, 照映千古]’고 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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