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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7. 난중의 명가(이호민)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7. 난중의 명가(이호민)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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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난중(亂中)의 명가(名家)

 

 

정작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은 조선전기 마지막 단계의 사단(詩壇)을 황량(荒凉)하게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전쟁의 아픈 체험을 직접 노래한 이호민(李好閔)김상헌(金尙憲)이안눌(李安訥) 같은 시인(詩人)이 있는가 하면, 어려운 현실의 고경(苦境)을 직접 체험하면서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시를 쓴 시인(詩人)들도 있다. 차천로(車天輅)권필(權韠)이춘영(李春英)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이민구(李敏求)정두경(鄭斗卿) 등은 임병(壬丙) 양란(兩亂)이 지나간 뒤의 황량(荒凉)한 시단에서 일어나 이 시기의 공백(空白)에 섬광(閃光)을 발하기도 했다.

 

이호민(李好閔, 1553 명종8~1634 인조12, 孝彦, 五峰)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의주까지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였으며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여 평양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도 하였거니와, 난중에 그는 특히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그의 문재(文才)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의 시는 난중에 직접 체험한 여러 정황과 감회를 형상화한 것으로 우국충정이 그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용만행재 문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 聞下三道兵進攻漢城)임진왜란(壬辰倭亂)을 직접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가장 뛰어난 것이며 남용익(南龍翼)신위(申緯)김택영(金澤榮) 등 제가들에 의해서도 고평(高評)을 받은 명작이다.

 

이민구(李敏求)오봉선생집서(五峯先生集序)에서 이호민(李好閔)의 문장이 전인(前人)을 답습하지 않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였으며[爲文章, 不肯襲前人其軌轍, …… 自成一家], 이식(李植)옥봉선생집발(玉峯先生集跋)에서 그의 문장은 실질이 있으면서도 문채가 있어서 법식에 얽매이지 않고서도 문의(文意)와 문리(文理)가 명창하여 스스로 진부한 누습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또 그의 시는 상조(常調)를 없이 하고 더욱이 죽은 시어(詩語)를 꺼려하여 기이하면서도 빼어나서 두보(杜甫)의 음조를 얻었다고 하였다[其文有質有華, 雖不囿於格, 而意明理暢, 自不墮陳言臼壘中, 其詩絕去常調, 尤忌死語, 奇峭挺拔, 得老杜夔峽之音].

 

이것은 이호민(李好閔)의 시문이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참신한 시세계를 구현하고 있음을 호평한 것이다.

 

 

이호민(李好閔)의 대표작인 용만행재 문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 聞下三道兵進攻漢城)은 선조(宣祖)를 모시고 의주로 피란갔을 때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삼도(三道) 병사들이 한양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을 치기 위하여 북진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 감회를 읊은 것이다.

 

干戈誰着老萊衣 전쟁 중에 그 누가 노래자의 옷을 입으랴??
萬事人間意漸微 인간 만사 점차 뜻이 희미해지네.
地勢已從蘭子盡 지세는 이미 난자도에서 다 하였고
行人不見漢陽歸 한양에서 돌아오는 행인은 찾아볼 수 없네.
天心錯漠臨江水 임금님의 마음은 아득히 압록강까지 다달았는데
廟筭凄凉對夕暉 조정의 대책은 처량하게 석양만 쳐다보네.
聞道南兵近乘勝 남도병이 거의 승승장구한다는 말 들었건만
幾時三捷復王畿 어느 때에 세 번 이겨 한양성을 회복할까?

 

이 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의 기막힌 정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호민(李好閔)은 의주 행재소까지 임금을 모셨기 때문에 임금의 몽진(蒙塵)도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극한 상황을 직접 목도(目睹)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함련(頷聯)의 직절한 표현도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용익(南龍翼)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이 시의 경련(頸聯)은 당시의 동년배로서는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수작이라고 평하였으며 김택영은 그의 문집에서 이 시는 고금에 드문 훌륭한 작품으로 이백(李白)두보(杜甫)라도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극찬하였다.

 

 

다음은 이호민(李好閔)난후필운춘망(亂後弼雲春望)이다.

 

荒城無樹可開花 황폐한 성곽엔 꽃 핀 나무마저 없고
惟有東風落暮鴉 애오라지 봄바람에 저녁 까마귀만 내려앉네.
薺苨靑靑故宮路 냉이풀만 푸릇푸릇한 고궁 길 가
春來耕叟得金釵 봄이 되자 밭 갈던 늙은이 금비녀를 줍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난 뒤에 인왕산 자락에 있는 필운대(弼雲臺)에서 봄경치를 보면서 지은 시이다. 필운대 부근의 인가에는 꽃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으므로 서울 사람들의 봄꽃 구경은 이곳을 항상 으뜸으로 쳤다고 한다.

 

그러나 전란이 끝난 뒤에는 봄이 와도 꽃을 피울 나무마저 없고 궁인들이 드나들던 고궁의 길가엔 냉이만이 우거져 있을 뿐이다. 시인은 밭가는 늙은이가 비녀를 줍는 모습을 상정(想定)하여 전쟁 중에 왜구에 죽임을 당했거나 혹은 황급히 달아나다 금비녀를 잃어버린 어느 궁인의 참사로까지 시적 상상력을 확장하여 전쟁의 참상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참모습이 이런 것임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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