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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3. 기속시인의 낭만(이학규)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3. 기속시인의 낭만(이학규)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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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학규(李學逵, 1770 영조46~1835 헌종1, 醒叟, 洛下生)이용휴(李用休)의 외손으로 그 계보는 남인계 실학자에 이어져 있는 문인이다. 일찍이 정조의 지우를 받으면서 문명을 얻었으나, 신유사옥(辛酉事獄)에 연루되어 24년간이란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낙하생의 문학세계는 바로 이러한 유배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를 갖게 된다.

 

낙하생이 교유한 인물들로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신위(申緯)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특히 정약용(丁若鏞)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낙하생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각기 유배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편지와 시를 주고받으면서 교유하였다. 8살 아래인 낙하생은 다산이 유배지 김해(金海)로 보내오는 시작에 크게 고무되어 왕성한 시작활동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낙하생은 다산의 탐진농가(耽津農歌)를 읽고 창강농가(江滄農歌), 다산의 탐진악부(耽津樂府)를 읽고 영남악부(嶺南樂府), 다산의 전간기사(田間紀事)를 읽고 기경기사(己庚紀事)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낙하생의 문학관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특히 강조되는 정()의 표현을 중시하는 문학논리와 일치하고 있다. 낙하생은 촌녀(村女)나 가아시동(街兒市童)들이 흥에 겨워 절로 발하는 것들이 곧 천지간의 불탁지시(不琢之詩)’이며 불절지영언(不節之永言 因樹屋集, 與或人書).’이라 하였는데, 이 말은 결국 시는 마음에서 느낀 것을 밖으로 드러내면 그만이라는 정()의 표현을 중시하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학적 논리에서 낙하생은 당시의 민요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아울러 민요적인 정취가 풍기는 한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향낭(香娘)의 생애를 노래한 산유화(山有花), 영남지방에서 메나리곡으로 불리워지는 모내기 노래를 한역한 앙가오장(秧歌五章)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曾聞主紇嶺 上峯天西陬

일찍이 들으니 주흘령은 꼭대기는 하늘 서쪽가에 있다네.

雲亦一半休 風亦一半休

구름도 한 차례 쉬어야 넘고 바람도 한 차례 쉬어서 분다네.

豪鷹海靑鳥 仰視應復愁

날쌘 보라매, 해동청도 바라보면 응당 다시 걱정하리라.

儂是弱脚女 步履只甌寠

나는야 약한 다리 여자몸이라, 걸어본 곳, 다만 좁은 곳일 뿐이네.

聞知所歡在 峻嶺卽平疇

임이 있는 곳을 들어서 알면 높은 고개도 편편한 밭이라.

千步不一喙 飛越上上頭

천 걸음에 한번도 숨쉬지 않고 날듯이 달려가 꼭대기에 오르리라.

 

위 작품은 앙가오장(秧歌五章)중 제4장으로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 구름이라도 쉬어 넘는 고개……로 전해지는 사설시조나 민요의 사설을 한역한 작품이다. 한 구 한 구마다 서민사회의 여성적 정조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한편 낙하생은 김해 유배시인 1808년 장편의 영남악부(嶺南樂府)를 지었다. 영남악부(嶺南樂府)는 자서(自序)68수의 본시(本詩)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 시는 각기 산문으로 된 시서(詩序)를 두어 그 내용을 개괄한 뒤 이를 다시 잡언체(雜言體)로 읊고 있다.

 

낙하생은 영남악부(嶺南樂府)를 짓기 위해 영남의 역사와 유적, 풍물과 인물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 고려사등의 사서를 비롯하여 자신의 견문을 풍부하게 활용하고 있다. 영남악부(嶺南樂府)는 그 자서에서 내가 이것을 지은 것은 대체로 체재와 성율의 엄정함을 가리지 않고 다만 그 본사(本事)를 서술하여 진정(眞情)을 전달할 뿐이다[余之作此, 蓋不擇乎體裁之正聲律之嚴, 只以敍其本事, 達其眞情].”라 하였듯이, 실제의 작품들은 형식보다 내용에 치중해 있다.

 

다음은 영남악부(嶺南樂府)철문어(鐵文魚)라는 작품이다.

 

鐵文魚

철문어야

何不把人畬 而反爲人漁

왜 묵은 밭은 파지 않고 도리어 사람에게 잡혔느냐.

三叉屈折如指爪

세 갈래 굽어진 손톱으로

爬民之肉吮民腴

백성의 살을 파고 기름을 빠는구나.

而輸爾田廬 又敝我牛車

너의 시골집에 실어가면서 또 우리 우거(牛車)까지 부수는구나.

鷄林自此鐵無餘

계림은 이로부터 쇠붙이란 남은 것이 없으니

抨弓去射水文魚

활을 당겨 수문어(水文魚)를 쏘아 맞추네.

 

위 작품은 고려 때 배원룡(裵元龍)이란 자가 계림부윤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의 쇠스랑까지도 모두 거두어 간 것을 두고 철문어부윤(鐵文魚府尹)이라 불렀다는 내용을 보고 지은 노래이다. 백성들을 심하게 수탈하는 관리를 고도의 해학적인 수법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조선후기 지방관의 횡포에 대해서도 은연중 풍자하고 있다. 낙하생은 영남악부외에 금관죽지사(金官竹枝詞), 해동악부(海東樂府), 능주기속희작체배민(綾州紀俗戲作體排悶)등의 기속적 성격의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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