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天長地久, 천장지구, |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
天地所以能長且久者, 천지소이능장차구자, |
하늘과 땅이 너르고 또 오래갈 수 있는 것은, |
以其不自生, 이기부자생, |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故能長生. 고능장생. |
그러므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
그러하므로 성인은 그 몸을 뒤로 하기에 몸이 앞서고, |
外其身而身存. 외기신이신존. |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 |
非以其無私邪? 비이기무사야? |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故能成其私. 고능성기사. |
그러므로 오히려 그 사사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
1. 영화 ‘천장지구’에 붙은 심오한 이름(天長地久)
‘천장지구(天長地久)!’ 『노자』의 일곱째 가름은 이 말로 시작하고 있다. ‘천장지구(天長地久)!’ 우리에게 퍽으나 낯익은 이름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덕화(劉德華, 리우 떠후아)가 나오는 홍콩 액션무비의 이름이라는 것은 알아도, 이것이 정확하게 『노자』에 출전을 둔 심오한 철학적 개념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드물다. 불량소년의 폭력적 삶과 사랑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제목의 이름은 분명 『노자』 제7장의 첫머리에서 따온 것이다.
이와 같이 고전이라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삶 속에 스며있다. 고전은 결코 우리의 삶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불량배 유덕화와 청순한 오천련(吳倩蓮, 우 치엔리엔)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제목이 ‘천장지구(天長地久)’인가? 주윤발의 『영웅본색』이나 정우성
의 『비트』나 다 같은 주제의 영화들인데 여기에 왜 이렇게 심오한 이름이 붙었을까?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철학이 우리 삶의 문제를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갖가지 양태가 저지르고 있는 문제들이 아무리 천박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반드시 심오한 철학적 주제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을 붙들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문제들이, 어느 순간엔가 몽롱한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 한 구절에서 해결되는 체험을 할 때도 있다. 철학이 나의 삶을 리드할 수는 없다. 나의 삶의 본연에서 우러나오는 나 자신의 생각들이 철학이라고 하는 사유체계를 리드하는 것이, 오히려 철학이 생성되는 정당한 과정일 것이다.
사실 진목승(陳木勝)감독이 붙인 이 ‘천장지구’라는 이름은 별로 심각한 의미부여가 없다. 보석상을 터는 과정에서 우연하게 피치 못할 운명으로 맺어진 두 젊은 남녀의 사랑, 날카롭고 정의로운 인상을 주는 아화,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가냘프고 청순한 죠죠, 이 두 어린 생명들의 극적인 사랑의 순간이야말로 ‘천지처럼 장구하다’. 즉 ‘영원하여라’라는 예찬의 율로지(eulogy, 찬사)에 불과한 것이다. 피튀기는 칼싸움에서 태연하게 죽어가는 아화는 하늘에서의 영원[天長]을 희구했을 것이다. 그 순간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천주교 성당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죠죠는 이 땅에서의 영원[地久]을 갈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빌고 있는 순간의 영원은 사실 가장 비노자적인 천장지구였다. 그러나 이러한 찰나적인 비극적 정조의 배면에 깔린, 인간이 동경하는 보편적 정서 속에는 분명 하늘과 땅의 장구함이 배어있다.
꿈꿔왔던 청춘이
바람에 흩날리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엔
슬픔만이 가득찼네.
자연의 변화가
새 생명을 만든다지만,
처량한 비는
날 고독하게 만드네.
청춘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는데,
슬픔의 그림자가
그대 얼굴에 드리워지네.
계절의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자연의 은혜가 없었다면
생명이 없었을 거예요.
의리를 위해 피투성이가 된
이를 보라!
사랑하는 연인이여
청춘은 죽음이 두렵지 않네.
청춘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는데,
슬픔의 그림자가
그대 얼굴에 드리워지네.
2. 시간 속에 공간이, 공간 속에 시간이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표현은 옛 한문의 레토릭 구사법의 한 전형을 이루는 스타일이다. ‘천지(天地)’와 같이 하나의 개념을 이루는 단어를 분리시켜 그 사이사이에 형용사를 삽입하는 것이다. ‘천지장구(天地長久)’를 ‘천장지구(天長地久)’라 한 것이다. 정확한 댓귀는 아니지만, 우리가 쓰는 ‘일취월장(日就月將)’ 같은 표현도 ‘일월(日月)로 취장(就將)한다’고 말해도 될 것을, 취(就)와 장(將)을 분리시켜 일(日)과 월(月) 사이사이에 끼어넣는 것과 유사한 용법이다.
그런데 보통 천지 코스몰로지(T'ien-ti Cosmology)에서 천(天)은 시간을 나타내고 지(地)는 공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여기서 ‘장(長)’은 앞의 2장에서 ‘장단상교(長短相較)’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공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길다’라고 표현치 않고 ‘너르다’라는 역어를 썼다. 그에 비하면 ‘구(久)’는 분명 지속을 나타내는 말로서 시간적 개념이다. ‘오래 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분명 ‘천구지장(天久地長, 하늘은 오래 가고 땅은 너르다)’라 해야 옳다. 시간을 나타내는 하늘에는 시간적 형용사가 붙어야 하고, 공간을 나타내는 땅에는 공간적 형용사가 붙어야 마땅할 것이다.
天(하늘)=시간 | 久(구)=시간 | 天(시간) 長(공간) | 道 |
地(땅)=공간 | 長(장)=공간 | 地(공간) 久(시간) |
그러나 옛사람들은 ‘천구지장(天久地長)’이라 하지 않고 ‘천장지구(天長地久)’라 표현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여기 벌써 명백하게 천지코스몰로 지적 사고에는 음양의 착종(錯綜)이라고 하는 음양론의 기본적 사유패턴이 개입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서 ‘천구(天久)’ ‘지장(地長)’이라고 하면 하늘이라는 시간과 땅이라는 공간이 실체적으로 유리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하늘은 하늘로서 하늘이 되는 것이 아니고, 땅은 땅으로서 땅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땅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고, 땅은 하늘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하늘 속에 땅이 들어있고, 땅속에 하늘이 들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라는 시간 속에 땅이라는 공간이 들어있고, 땅이라는 공간 속에 하늘이라는 시간이 들어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시ㆍ공의 불가분을 상대론적으로 증명하기 이전에 이미 고대 중국인들은 소박하게나마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는 것, 『주역(周易)』의 괘상모양으로 착종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공간은 공간으로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전제로 해서 존재한다는 것, 시간 역시 공간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동양인들은 소박하게나마 인식하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은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 모두 인간의 인식의 측면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동양인들의 건축양식이나 회화 등의 예술적 경지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3. 인간의 어떠한 장난도 천지 앞에서 무기력하다
그런데 노자는 여기서 왜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말을 했을까? 나는 이 말은 매우 구체적인 세계관의 함의를 지닌다고 본다. 우리가 현재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천체물리학의 지식에 비추어 본다면, 고대 중국인들이 말한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근 솥뚜껑과 같고 땅은 네모난 거대한 평지같은 모습)의 천지 코스몰로지(T'ien-ti Cosmology)란, 우선 천동설을 모델로 한 것이며, 그것도 지구생명체를 중심으로 생각한 것일 뿐이다. 이것을 지동설적인 모델로 바꾸어 생각하면 실제로 이들이 말하는 천(天)이란 대기권의 규모를 벗어나지 않는다. 지(地)란 대기권에 둘러싸여 있는 지구다. 물론 천(天)의 개념 속에는 태양을 비롯한 전 우주의 갤럭시들이 포섭되지만, 이들이 생각한 ‘천지’란 실제로 지구생명체의 작동에 필요한 에너지의 순환체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천장지구(天長地久)’란 우리 존재의 근원으로서 가장 장구(長久, 영원한)한 최종적인 근거는 천지(天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천지(天地)를 생각할 땐, 미생물학자며 세계적인 환경론자인 르네 드보(René Dubos)가 편집한 유엔보고서, ‘한 작은 혹성에 대한 관심과 관리(The Care and Maintenance of a Small Planet)라는 소제가 붙은, 『단 하나뿐인 지구(Only One Earth)』라는 명저의 제목을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아주 소박하게 말하자면 동양인들이 말한 천지(天地)는 관념적인, 비그뱅(Big Bang)으로부터 진화된 그런 거창한 시공계라기보다는, 우리 이 지구라는 태양계의 한 혹성을 둘러싼 바이오스페어(Biosphere)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천(天)ㆍ지(地)ㆍ인(人) 삼재(三才)가 모두 하나의 바이오스페어인 것이다.
천지 (天地) |
= | 바이오스페어 (Biosphere) |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천지(天地)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천지(天地)야말로 우리 생명체들의 최종적 근거일 뿐이다. 이 지구는 단 하나의 지구일 뿐이다. 이 하늘은 단 하나의 하늘일 뿐이며, 이 땅은, 단 하나의 땅일 뿐이다. 이 땅과 하늘의 에너지를 다 고갈시켜 먹고 딴 곳으로 도망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스페이스 커넥션(space connection)의 망상을 우리는 하루속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21세기에 와서 어김없이 다시 『노자(老子)』를 배워야 하는 소이연이 있는 것이다.
천(天)은 장(長)하고 지(地)는 구(久)하다! 이것은 아화(유덕화)와 죠죠(오천련)의 사랑의 장구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화와 죠죠의 사랑을 포함한 모든 사랑, 그러한 사랑을 잉태시키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공동체 의식, 그 공동체 의식의 근거로서의 장구(長久)한 천지(天地)를 노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과 같은 환경론적 불안감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천지(天地)는 장구(長久)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인(Sein)이 아닌 졸렌(Sollen)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아닌 당위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모든 당위가 구극적으로는 사실이다. 천지(天地)는 장구(長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구(長久)하고, 또 장구(長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어떠한 장난도 천지(天地) 앞에서 무기력한 것이다.
4. 동일성을 주장하지 않기에 장구할 수 있다(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그렇다면, 천지(天地)는 어떻게 해서 장구(長久)할 수 있는가? 노자는 말한다. 천지(天地)가 장(長)하고 또 구(久)할 수 있는 것은[天地所以能長且久者], 바로 ‘불자생(不自生)’하기 때문이다.
문법적인 설명을 좀 하자면 ‘기불자생(其不自生)’ 앞에 있는 ‘이(以)’라는 글자는 ‘~때문이다(because)’라고 새기면 된다.
‘자생(自生)’하면 ‘스스로 생한다’의 뜻이 됨으로 노자사상의 맥락에서 좋은 뜻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자생(自生)’이란 그와 반대되는 뜻으로 ‘자기를 고집한다.’ 즉 ‘자기라는 동일성의 체계를 고집한다’는 뜻이다. ‘생이불유(生而不有)’가 아닌 ‘생이유(生而有)’의 ‘자생(自生)’이다. ‘생이불유(生而不有)’의 뜻이 되려면 ‘불자생(不自生)’ 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노자 7장의 ‘자생(自生)’의 문제는 후대에 중국에 들어온 불교 철학에서 그대로 ‘자성(自性, svabhāva)의 문제로 둔갑되었다. 이 ‘자성(自性)’이란 존재하는 것들이 항상 자기 동일성과 고유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독립적으로 고립하고 있는 실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소승불교 즉 부파(部派)불교의 대표적인 학파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매크로한 사물은 무아(無我)일지라도, 그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마이크로한 법(法, dharma)은 자성(自性)을 지나고 있다고 본다. 대승불교는 바로 그 법, 다르마조차 무자성(無自性), 즉 자성이 없다 라고 비판하는 데서 출발하는 이론인 것이다. 어떠한 존재도 자기 동일성의 절대적 유지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존재의 궁극은 공(空)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론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승불교의 무자성(無自性)의 이론이 이미 『노자』 7장의 ‘불자생(不自生)’의 언어에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5. 자연은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장구할 수 있다
노자는 말한다. 천지(天地)가 장구(長久)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천지(天地)가 자기를 고집해서 생성(生成)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러한 대로 자기를 맡길 뿐이다. 스스로 그러한 대로 자기를 맡기는 것을, 왕필은 ‘천지임자연(天地任自然)’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명(明)나라 때의 탁월한 고승이었던 감산대사(憨山 德淸, 1546~1623)는 이를 주해하여 ‘이기불자사기생 고능장생(以其不自私其生, 故能長生)’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천지는 그 삶을 이기적으로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장생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가을이면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진다. 그러나 그 나무는 낙엽을 자기만을 위하여 사유[自私]하지는 않는다. 그냥 땅에 떨어져 굴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뿐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스스로 그러한 낙엽이 쌓여 다시 그 나무의 거름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만의 목적을 위하여 그 낙엽을 긁어간다. 이것도 정도껏 인간과 자연이 공유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자사(自私, 자기만을 이롭게 함)의 목적을 위하여 남김없이 낙엽을 긁어가고, 그것도 모자라 나무를 베어가고, 또 그것도 모자라 땅까지 파 가버린다. 인간은 너무도 지나치게 천지(天地)라는 생태계의 에너지를 사유하여 자기만의 문명(文明)을 건설해온 것이다. 노자는 다시 말한다. 천지(天地)가 장구(長久)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사(自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사(自私)한 인간들이여! 어찌 천지(天地)처럼 장구(長久) 하기를 바랄손가!
6. 몸을 내던지는 희생적 행위는 결과적으로 그 몸을 보존시킨다(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이 지구상에서 장구하지 못하고 단멸(短滅)할 수밖에 없는가? 그럴 수 없다! 여기에 노자(老子)는 천지(天地)를 본받아 사는 성인(聖人)의 모습을 제시한다. 성인은 어떻게 하는가?
그러하므로 성인은 항상 그 몸을 뒤로 하기에[後其身] 오히려 그 몸이 앞서고[身先], 항상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外其身] 오히려 그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身存]. ‘그 몸을 뒤로 한다’는 것은, 잘난 체하면서 항상 앞장 서고, 뭘 자기가 꼭 앞서서 리드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러한 인격자세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몸을 밖으로 던진다’는 것은 자기 일신만을 지키는데 급급하지 아니하고 내 몸을 내던져 희생할 줄 아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요즈음같이 몸을 도사리기만 하며, 앞에 서서 자기현시(顯示)하기만을 좋아하는 시대풍조에 정말 노자의 말씀은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그런데 그 몸을 뒤로 하는 것은 뒤로 함으로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몸이 앞서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내 몸을 내던지는 희생적 행위는 희생으로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몸이 보존되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멋’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자사(自私)’ 함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인간의 ‘멋’이란 ‘손해볼 줄 아는 것,’ ‘희생할 줄 아는 것’에서 생겨난다. 『천장지구(天長地久)』와 같은 모든 깡패영화에 공통된 주제는, 주인공 깡패의 삶의 자세가 항상 범인을 초월하여 ‘후기신(後其身)’하고 ‘외기신(外其身)’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이 비록 사회적으로는 불량한 행위의 범주 속에 분류되고 있지만, 무엇인가 인간에게 안타까운 느낌을 주는 ‘멋’을 발한다는데 있다. 『비트』 속의 정우성 역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즉 사회적 악의 범주 속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선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대개 갱스타 무비장르의 제1주제인 것이다.
7. 살겠다는 전제 없이 몸을 던지다
그런데 여기 노자철학의 아주 중요한 한 테마가 등장한다. ‘후기신(後其身)’의 ‘후(後)’는 신(身)을 목적어로 갖는 타동사이다. 그런데 ‘신선(身先)’의 ‘선(先)’은 신(身)을 주어로 갖는 자동사인 것이다.
타동사(vt) | 목적어(o) | 주어(s) | 자동사(vi) |
後 | 其身 | 身 | 先 |
이것은 무슨 뜻인가? 다시 말해서 ‘신선(身先)’은 ‘후기신(後其身)’의 스스로 그러한 결과라는 것이다. 자동사라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을 나타내는 동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身)을 목적어로 갖는 타동사는 후(後) 밖에 될 수 없으며 선(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신선(身先)을 위하여, 신선(身先)의 목적을 위하여 후기신(後其身)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우성이가 『비트』 속에서 싸우러가는 순간, 자기가 살기 위해서 그 몸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살겠다는[身存] 전제가 없이 그 몸을 던지는 것[外其身]이다. 이것은 비록 불량한 깡패의 영화일지라도, 그 사회적 선ㆍ악의 평가라는 장(場)을 떠나 생각해 볼 때, 그 주제는 바로 모든 종교정신(religious spirit)에 공통된 주제를 설(說)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이것을 ‘무아(無我)’라 표현했고, 기독교는 이것을 ‘희생이라 표현했고, 유교는 이것을 ‘살신(殺身)’이라 표현했고, 도가는 이것을 ‘후기신(後其身)ㆍ외기신(外其身)’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희생정신이 없이는, 그 종교의 고등성을 확보할 길이 없다.
신선(身先)을 목적으로 해서 후기신(後其身)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천지불인(天地不仁)’ 장에서 이야기한 바 이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뜻과도 통하는 것이다. 지나친 목적론적 세계해석,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사주의(自私主義)의 모든 해악의 연원이라고 노자(老子)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8.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에 담긴 법가와 노자의 차이
그러나 만약 신선(身先)을 목적으로 해서 후기신(後其身)하면 어떠할까? 신재(身在)를 목적으로 외기신(外其身)한다고 뭐가 덧나는가? 뭐가 그리 크게 안 될 일이 있는가? 어차피 후기신(後其身)하고 외기신(外其身)하는 인간의 행위 자체는 동일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러한 사유의 트랙을 따라가다 보면 바로 병가(兵家)와 만나게 된다. 중국의 모든 병가(兵家)의 ‘전술전략’이 이러한 사상의 왜곡된 해석으로(사실 왜곡이라 할 수도 없다)부터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신선(身先)하기 위해서 후기신(後其身)의 전술전략을 펴고, 신존(身存)하기 위해서 외기신(外其身)의 전술전략을 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병가(兵家)ㆍ법가(法家)류의 ‘술수(術數)’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7장을 이러한 병가(兵家)의 술수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왕필은 여기에 쐐기를 하나 박는다.
스스로 생한다 하는 것은 사물과 더불어 다툰다 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저절로 그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은, 즉 내 몸에 있어서 함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스스로 그 몸이 앞서고 보존되는 것이니, 그래서 노자가 결과적으로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씀한 것이다.
自生, 則與物爭. 不自生, 則物歸也. 無私者, 無爲於身也, 身先身存, 故曰能成其私也.
그런데 이 왕필의 말에 대해서 우리는 좀 보조적 자료를 동원할 필요를 느낀다.
9. 20살 정도의 주역을 주해한 왕필
『노자』를 생각할 때 영원히 빼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인물, 중학교 3학년의 나이에 이 위대한 영원불멸의 노작 『노자』를 남긴 우리의 주인공, 왕필이 쓴 책은 이 『노자』가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 왕필의 고전해석으로서 우리의 서재를 장식하고 있는 유명한 저서로서 『노자 주(注)』 외로 동양의 코스몰로지(Cosmology)의 가장 위대한 경전이라고 할 『주역(周易)』을 주석한 『주역(周易)』가 있는 것이다. 『주역』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주역(周易)』이라는 책을 우리가 읽으려 할 때 또 다시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관문이 바로 『주역왕필주』인 것이다. 『노자』에 대해 『노자왕필주』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주역』에 대해 『주역왕필주』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주역왕필주』는 또 다시 『주역』의 해석의 역사 전체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불멸의 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왕필은 분명 틀림없는 대천재요, 틀림없는 대석학이요, 또 역사적으로 매우 구체적인 불후의 명작을 남긴 인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왕필의 저작 연표에 있어서 『노자주』가 앞서는가, 『주역주』가 앞서는가에 대해서도 학자에 따라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노자주』가 『주역주』에 앞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그렇다면 왕필이 『주역주』를 쓴 것은 20세 전후로 측정된다. 대학교 1학년 정도 나이의 역작이다). 다시 말해서 『노자주』의 생각이 『주역(周易)』 속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왕필의 『주역(周易)』 해석학의 문제점으로 비판의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즉 『주역(周易)』의 세계관을 너무 노자화(老子化)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역(周易)』이란 무엇인가? 『주역(周易)』이란 주(周)나라 『역(易)』이다. 그렇다면 ‘역(易)’이란 무엇인가? 역(易)이란 ‘변화’를 뜻한다. 변화란 무엇인가? 변화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의 모습이다. 『역(易)』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의 모습을 몇 가지 도상으로 정리ㆍ요약해 놓은 것이다. 그 목적은 일차적으로 점을 치기 위한 것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은 중국인의 우주에 대한 생각을 종합해 놓은 가장 위대한 우주론서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왕필이 중국역사에 있어 최초로 이 『주역(周易)』을 본격적인 우주론서로 인식하고 체계적인 해석작업을 벌린 사람일 것이다. 이 최초의 공로 때문에 『주역(周易)』은 오늘의 『주역(周易)』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때 『주역(周易)』이라는 텍스트의 심한 변형ㆍ교정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그러한 변형ㆍ교정작업의 결과가 오늘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현 『주역(周易)』이라는 텍스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늘 보통 『주역(周易)』이라고 말하는 텍스트는 왕필에 의해 그 모습이 개조된 것이다. 왕필은 『주역(周易)』의 본경(本經)에 해당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주해를 했고, 「계사(繫辭)」나 「설괘(說卦)」, 「서괘(序卦)」, 「잡괘(雜卦」의 소위 전(傳)에 해당되는 부분은 주석을 가하지 않았다. 왕필은 이 전들이 이미 경에 대한 주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의 부분에 대해서는 한강백(韓康伯)이라는 사람이 주한 것을 쓴다. 그래서 우리가 『주역(周易)』의 주를 말할 때, 보통 그 책 이름이 『주역왕한주(周易王韓注』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왕필(王弼)과 한강백(韓康伯, 한 캉뿨)의 주(注)가 합본되어 있기 때문이다.
10. 왕필의 『주역약례(周易略例)』와 『노자지략(老子指略)』
내가 지금부터 『주역(周易)』 왕필주 얘기만 하려 해도 한 일년의 세월은 소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하겠지만, 우리가 『주역(周易)』 왕필주를 말할 때 꼭 같이 기억해야 할 명저가 바로 『주역약례(周易略例)』라는 희대의 논저다. 주(注)라는 것은 고경(古經)의 문장 한 구절 한 구절에 즉해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는 있지만 때로 그 전체의 논리적 얼개를 파악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천재 소년 왕필은 『주역(周易)』에 대한 주(注)를 달아놓고 난 후, 그 자신의 주해에 대한 전체적 입장을 경문(經文)과 상관없이 밝히는 체계적 논문을 따로 쓴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주역약례(周易略例)』라는 희대의 명저다. ‘주역약례’라는 뜻은 ‘주역 전체를 개략적으로[略] 예[例]를 들어 밝힌다’는 뜻이며, 아마도 요새 말로는 ‘아우트라인(Outline)’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현재 『주역약례(周易略例)』는 보통 『주역왕한주』 끝에 붙어 있어, 우리가 쉽게 그 논문을 읽어볼 수 있다.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글이 아름답고 명료하며, 왕필철학의 전체적 모습이 드러나 있다. 『주역(周易)』 해석학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이 이로써 시작된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왕필이 『노자』를 주해한 사실에 관하여,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은가? 『주역주』에 대해 자기 주해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밝히는 『주역약례』를 썼다면, 또한 『노자주』에 대해서도 자기 『노자』 주해의 전체적 입장을 밝히는 『노자약례』를 썼음직하지 않은가? 썼는가??? 썼다! 그럼 그 책이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썼다는 것을 아는가?
우리가 왕필이라는 역사적 인물(Historical Wang Pi)을 알 수 있는 전기자료는 이십오사(二十五史)중의 하나인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그러니까 소설 『三國誌』와는 구분되는 것이다)에 들어있는 『위서(魏書)』의 전기 부분에 실려있는 왕필전기가 유일한 것이다. 그런데 그 『위서(魏書)』의 열전(列傳) 부분에 해당되는 곳에 왕필(王弼)의 친구였던 종회(鍾會)라는 사람의 전기가 있는데, 그 전기의 말미에 친구 왕필(王弼)에 대한 언급이 있어, 그 언급 밑에 하소(何劭)라는 사람이 쓴 왕필전(王弼傳)이 주(注)의 형식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사(正史)의 정식항목으로 끼어 있지도 못한 셈이지만, 비교적 하소(何劭)의 왕필전(王弼傳)은 그 내용이 상세하다. 그런데 그 하소(何劭)의 왕필전(王弼傳)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왕필은 『노자』를 주하였고, 또 『지략』을 지었다. 그리하여 정연한 이론체계를 갖추는데 이르고 있다.
弼注『老子』, 爲之『指略』, 致有理統.
여기서 『지략(指略)』은 분명히 『주역약례(周易略例)』와도 같은 『노자지략(老子指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자지략』은 세상에 전해지질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책이 이름만 남아있을 뿐 일서(佚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짜자잔! 또 위대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11. 무(無)를 더 숭상한 왕필의 『노자지략(老子指略)』
1956년, 대만(臺灣)에 이주해 사시던 금세기 『노자(老子)』 서지학 연구의 최고봉이라 말할 수 있는 엄영봉(嚴靈峰, 엔 링훵) 선생께서 『정통도장(正統道藏)』이라는 방대한 서물의 더미 속에서(正一部 鼓字號)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이라는 저자연대 미상의 한 책을 발견해낸 것이다.
엄영봉선생은 나의 대만대학 석사논문 지도교관 중의 한 분이셨다. 나는 선생의 서재를 자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방대한 고서(古書)들의 서향(書香)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미지예략(微旨例略)』의 둘째 넷째 글자를 합치면 『지략』이 된다. 가 말한 『략(略)」은 바로 『미지예략(微旨例略)』이었던 것이다. 지(旨)와 지(指)는 통(通)한다. ‘약례(略例)’(『주역(周易)』의 경우)와 ‘예략(例略)’(『노자』의 경우)은 같은 뜻이다. 『정통도장(正統道藏)』이라는 것은 불교의 대장경을 모방하여 도교에서 편찬한 도교의 대장경인데 당(唐)ㆍ송(宋) 대를 거쳐서 나라 영종(英宗) 정통(正統) 연간에 그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그 방대한 서물의 더미 속에 바로 잃어버린 왕필의 노자지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문자의 비교검토를 통해 도장경 본(本)의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이 바로 왕필의 『노자지략(老子指略)』이라는 것이 의심할 바 없이 드러났다. 그래서 요즈음은 왕필의 『노자주』와 더불어 같이 참고하는 책이 바로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인 것이다. 그 책을 열면 다음과 같은 왕필의 무(無)의 선언문이 펼쳐지고 있다.
대저 사물이 생겨나고, 공이 이루어지는 것은 반드시 무형에서 생겨나는 것이요, 무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형무명이라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하느님이다.
夫物之所以生, 功之所以成, 必生乎無形, 由乎無名. 無形無名者, 萬物之宗也.
그것은 따뜻할 수도 없고 차가울 수도 없는 것이요, 궁음으로 한정될 수도 없고 상음으로 한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고,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아니하고, 맛을 보아도 맛보아지지 않는 것이다.
不溫不涼, 不宮不商. 聽之不可得而聞, 視之不可得而彰, 體之不可得而知, 味之不可得而嘗.
그러므로 그것의 물됨이란 혼돈스러울 뿐이요, 모습됨이란 형체가 없을 뿐이요, 음됨이란 소리가 없을 뿐이요, 그 맛됨이란 드러남이 없을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형체를 가진 만물의 종주가 될 수 있는 것이며,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어 그를 거치지 않음이 있을 수 없다.
故其爲物也則混成, 爲象也則無形, 爲音也則希聲, 爲味也則無呈. 故能爲品物之宗主, 苞通靡使不經也.
이것을 읽는 즉시 전문가라면 이것은 피치 못하게 왕필(王弼)의 문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생각의 기조가 『노자왕필주』의 문장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현학(玄學)의 선언문과도 같은 것이다. 위진현학(魏晉玄學)이 바로 이 선언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현학(玄風)의 주 테마를 우리는 보통 ‘숭무론(崇無論)’이라고 말한다. 유(有)에 대하여 무(無)를 더 본원적인 것으로 숭상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왕필의 무(無)는 유(有)와 대적적으로 군림하는 상대적인 무(無)가 아니라 유(有)를 포통(苞通)하는 무(無), 유(有)를 통하여 자기를 드러내는 무(無)인 것이다. 즉 무(無)는 유(有)의 비한정적 형태인 것이다.
12. 병가의 목적론을 와해시킨 왕필
그런데 내가 이 7장의 해설에서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을 운운한 것은 바로 『지략』의 말미부분에 7장과 관련된 왕필의 명연설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대저 강함을 미워한다는 것이 곧 강하지 아니함을 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강해질려고 하면 오히려 강함을 잃어버린다 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함을 끊어라 하는 것이 곧 인하지 아니함을 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인자해질 려고 하면 오히려 위선이 생겨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질서를 유지할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어지럽게 되어버리고, 평안함을 보지할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夫惡强非欲不强也, 爲强則失强也. 絶仁非欲不仁也, 爲仁則僞成也. 有其治而乃亂, 保其安而乃危.
노자가 ‘그 몸을 뒤로 하기에 몸이 앞서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때 몸이 앞선다 하는 것은 몸을 앞세움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또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때 몸이 보존된다 하는 것은 몸을 보존시킬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
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공이라 하는 것은 취할 수 없는 것이요, 아름다움이라 하는 것은 쓸 수가 없는 것이다.
後其身而身先, 身先非先身之所能也. 外其身而身存, 身存非存身之所爲也. 功不可取, 美不可用.
왕필은 명료하게 내가 말하는 자동사와 타동사의 논리를 인식하고 있지 아니한가? 신선(身先)은 선신(先身)의 소능(所能)이 아니다. 신존(身存)은 존신(存身)의 소위(所爲)가 아니다. 신선(身先)의 선(先)은 자동사요, 선신(先身)의 선(先)은 타동사인 것이다. 신존(身存)의 존(存)은 자동사요, 존신(存身)의 존(存)은 타동사인 것이다. 여기서 왕필은 병가적(兵家的) 논리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신선(身先)과 신존(身存)은 그냥 스스로 그러한 결과일 뿐인 것이다. 목적론적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13. 신선(身先)과 신존(身存) 구절의 왕필본과 백서본 비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신선(身先)과 신존(身存) 운운한 이 구절이 백서(帛書) 갑(甲)ㆍ을본(乙本) 다 실려 있고 왕본(王本)과 약간의 출입(出入)이 있다.
王本 |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
甲本 | 是以聲人芮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
乙本 | 是以耳口人退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
왕본(王本)은 기본적으로 백서(帛書) 갑본(甲本)과 일치한다. 갑본(甲本)의 ‘예기신(芮其身)’의 ‘예(芮)’는 을본(乙本)의 ‘퇴(退)’와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한다. ‘퇴기신(退其身)’과 ‘후기신(後其身)’이 결국 같은 의미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예(芮)’에는 ‘납(納)’의 의미가 있어 어떤 의미에서 외(外)와 상대적인 뜻으로 썼을 수도 있다. 예(芮, jui)‘와 퇴(退, t'ui)는 현재 발음으로는 첩운이 되지만 상고음에서는 첩운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발음상의 연결은 전혀 없다.
을본(乙本)에서 중간의 ’외기신이신선(外其身而身先)‘이 연문(衍文)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연문이 아닐 수도 있다. ‘芮其身而身先’을 ‘退其身而身先’으로 고치면서 ‘外其身而身存’과의 중간에 완충적 고리로서 한번 더 의미를 중복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왕필(王弼)은 ‘退其身而身先’을 아예 ‘後其身而身先’으로 명료하게 만들면서(先後관계로), ‘外其身而身先’을 연문(衍文)으로 간주, 생략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삼자(三者)간에는 갑본(甲本) → 을본(乙本) → 왕본(王本)으로의 발전경로가 생기지만, 물론 이것은 이 삼자(三者)의 초사(抄寫)의 원본이 모두 다른 데서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다. 하여튼 이렇게 다른 판본을 비교해보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다. 간본(簡本)에는 이 7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나의 7장 해설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겠지만, 우리가 새삼 다시 인식해야할 사실은 『노자』의 문장이 한장 한장 소략하고 단순하고 상식적이기 그지없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수천년의 쌓인 지혜로운 생각들이 끊임없이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노자』 하나의 이해를 통하여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사유의 형성경로를 정확히 더듬어볼 수 있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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