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6/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노자가 옳았다, 59장 - 아낌의 미덕 본문

고전/노자

노자가 옳았다, 59장 - 아낌의 미덕

건방진방랑자 2021. 5. 11. 08:20
728x90
반응형

59

 

 

治人事天, 莫若嗇.
치인사천, 막약색.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
아끼는 것처럼 좋은 것은 없다.
夫唯嗇, 是以早服.
부유색, 시이조복.
대저 오로지 모든 것을 아낄 줄 알면
모든 것이 일찍 회복되는 것이다.
早服謂之重積德.
조복위지중적덕.
일찍 회복되는 것
그것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重積德, 則無不克;
중적덕, 즉무불극;
덕을 거듭 쌓으면 못 이루는 것이 없고,
無不克, 則莫知其極.
무불극, 즉막지기극.
못 이루는 것이 없으면 그 다함을 알지 못한다.
莫知其極, 可以有國;
막지기극, 가이유국;
그 다함을 알지 못하면 나라를 얻을 수 있다.
有國之母, 可以長久.
유국지모, 가이장구.
나라를 얻는 그 어미는 너르고 오래가는 것이니
是謂深根固柢·長生久視之道.
시위심근고저·장생구시지도.
이것을 일컬어
뿌리깊고 단단한 도,
오래 살고 오래 보는 도라고 한다.

 

 

자연세를 섬기다

 

노자의 정치철학을 매우 아름답게 요약한 장이다. 나는 이 장을 매우 사랑한다. ‘심근고저(深根固柢)’라든가 장생구시(長生久視)’ 같은 말 때문에 신선단도(神仙丹道)의 사람들이 이 장을 잘못 주석하여 왜곡시켜 놓은 사례도 허다 하지만 이 장은 매우 순결한 노자의 위정지도(爲政之道)를 말하고 있다.

 

처음에 치인사천(治人事天)’이라는 말부터가 충격적이다. 치인(治人)은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니, 곧 정치다. 그런데 치인(治人)이 사천(事天), 즉 하늘을 섬기는 일과 동격이 되어있다. 치인은 사천이고, 사천은 치인이다. 즉 치인을 바르게 하려면 사천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천(事天)이라니? 하나님을 섬기란 말이냐? 치인과 사천이 동격이라니 중세기 암흑시대로 돌아가란 말이냐? 요즈음 말로 사고하면, 이런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사천(事天)’이란 인격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도법자연(道法自然)의 도를 섬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세를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자연세를 섬기는 것과 똑같은 가치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낌의 철학

 

그렇다면 치인사천의 핵심은 무엇이냐? 어떻게 치인하고, 어떻게 사친하란 말이나? 노자는 말한다.

 

莫若嗇!

 

()’이라는 글자를 보면 위에 래() 자가 있고 밑에 회() 비슷한 것이 있는데, 올 래[]라는 글자는 본시 곡식, 농작물의 모양이고, 그 밑에 있는 네모난 것은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창고를 가리킨다. ‘()’이란 우리말에 인색(吝嗇)’이라는 말을 잘 쓰듯이 본시 애색(愛嗇)’ 아낌의 뜻이다. 동방 고전에서 애()는 사랑의 뜻이 아니라 아낌의 뜻이라는 것은 내가 누누이 설파한 것이다. 농작물을 거두어들인 창고관리야말로 아낌이 아니고 무엇이랴!

 

보통 색부(嗇夫)’라 하면 농부를 가리킨다. 자연의 순한, 도법자연의 삶은 사는 농부들이야말로 무엇이든지 아끼지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아낌으로씨 미래를 대비하고, 아낌으로써 과거의 성과를 보존하고, 아낌으로써 현재의 삶은 순환시킨다.

 

치인(治人)의 요지가 무엇이냐? ‘아낌이다! 아낌으로써 동시에 하늘을 섬기게 되는 것[事天]이다. 치인과 사천, 즉 사회적 가치와 자연적 가치, 자인(Sein)과 졸렌(Sollen)을 연결하는 것은 바로 아낌이다. 그래서 노자는 아낌만한 것이 없다[莫若嗇]라고 말한 것이다.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아낌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아낌이란 무엇이냐?

 

우리는 세칭 경제학자니 미래학자니 하는 미치광이들이 하는 말에 계속 속아왔다: ‘소비는 미덕이다!’ 아낌은 모든 것을 위축시킨다! 소비하라! 낭비하라! 그래야 경제가 돈다.

 

한비자(韓非子)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색이라는 것은 낭비를 줄이라는 의미이다. 이 색(아낌)의 방법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모두 도()의 이치에서 생하는 것이다. 아낄 줄 안다는 것이야말로 도에 따르는 것이요. ()에 순복하는 것이다[少費之謂嗇. 嗇之謂術也, 生於道理. 夫能嗇也, 是從於道而服於理者也]. (해로(解老))

 

 

맑시즘과 코로나

 

산업혁명 이래, 과학과 산업체제가 상보적으로 결합한 이래, 서구권 이외의 모든 자연세계가 자본주의라는 미네르바의 먹잇감이 된 이래, 대량사회의 대중교육과 과학이 결합하고, 그것이 또다시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모든 20세기 개화의 정언명령적인 명분이 된 이래, 우리는 소비의 경제, ‘낭비의 미덕을 배워오고 예찬해왔다. 아니 예찬의 대상도 아니었고 오장육부 속으로 그냥 들어와 버린, 체화된 가치의 일부가 되었다. 서구의 계량화된 과학에 대한 우리의 맹신도 같이 체화되어 왔다.

 

물밀듯이 휩쓸고 내려가는 이 홍류에 강력한 저항을 제시한 사상이 바로 맑시즘이었다. 그러나 맑시즘은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반동이었을 뿐, 그러한 불평등을 형성한 문명 그 자체에 대한 반문명적 사고를 제시하지 못했다. 단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혁명을 통해 그 홍류를 막는 댐을 형성했을 뿐이다. 그러나 댐은 금이 가면 금방 터져버린다. 그 댐은 한 반세기를 버티다가 사라지고 그 자본주의 횡포와 과학의 만능은 더 강력한 격류(激流)가 되어 천지를 휩쓸고 있었다.

 

이때 천지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현은 천지의 반격이다. 맑시즘이 세운 로칼한 댐과는 전혀 다른 무형무명의 도의 출현이다. 전 지구를 휘덮는, 아니 인간 생명 전체의 내면에까지 파고드는 정신혁명이다. 공산혁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혁명의 총칼이나 깃발이 없이도 인간개체 모두를 송연(悚然)하게 만드는 공포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 공포는 억압이나 강제의 공포가 아니요, 상생과 건강과 협동과 절제를 촉구하는 아름다운 우환(憂患)으로 우리를 휘몰아간다.

 

미래학자라고 자처하는 지식인들의 망언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오직 오늘을 생각하라! 이 오늘 속에 과거가 들어있고 미래가 들어있다. 미래에 대한 망상으로 오늘의 현실을 조작치 말라! 그래서 존 레논도 렛 잇 비(Let it be)’를 말했고 리빙 훠 투데이(Living for today)’를 말하지 않았던가? 과학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과학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라! 과학은 선()이 아닌 불선(不善)일 수도 있고, 인류의 미래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개악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과학은 나쁜 것이라는 카운터과학적인 사유(counter-scientific thinking)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교육적 업무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문명적 사유를 현대인의 근원적 가치로서 체화시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횡포를 인류문명이 체크하지 못한다면 결국 인류 그 자체가 공멸해갈 것이다. 우주는 더 이상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허()가 없는 것이다. 사회도 자연도 자정(自淨)의 허가 상실된 것이다.

 

치인사천, 막약색은 결국 문명의 사이즈를 줄이라는 것이다. 인위의 폭을 무위 속에 가두라는 것이다. 유명을 무명에 접근시키라는 것이다.

 

아낌이 있을 때만이 조복(早服)’한다고 노자는 말한다. ‘조복이란 빨리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 ()’이란 ()’이다. ‘복기견천지지심(復其見天地之心)’(, )이다. 코로나사태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것도 (, 아낌)’을 통하여 조복(早服, 일찍 회복됨)’에 도달하는 길밖에는 없다. ‘아낌이란 결국 ()의 확대이며, 허의 확대라는 것은 결국 생명의 순환을 말하는 것이며, 생명의 순환이란 결국 조복(早服)’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복한다는 것은 거듭 덕을 쌓는다[重積德]’는 것을 의미하며, 거듭 덕을 쌓게 되면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다[無不克].’ 여기 무불극(無不克)이란 무불위(無不爲)요 무불성(無不成)을 의미한다. 결국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37, 48)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이 무궁한 이유

 

막지기극(莫知其極)’사람들이 그 한계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뜻으로 도의 개방적인 무궁성, 도법자연(道法自然)을 말하는 것이다. 한비자가 해로(解老)에서 해석하듯이 술수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심근고저(深根固柢), 장생구시(長生久視)’7천장지구(天長地久)’를 연상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부자생(不自生)’이라 했다. 즉 자기를 위하여 생하지 않는 것이다. 공생공화(共生共和)를 도모하는 것이다. 치인사천의 핵심은 결국 부자생(不自生)에 있고, 정치가 그럴 수 있을 때 우리 인간사회도 장구한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한마디를 기억하자! 노자가 옳았다.

 

 

 

인용

목차 / 지도 / 전문 / 59 / 노자한비열전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