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바로 여기다, 더 나아가지 말라!
하나 이야기
‘세계의 어떤 것도 가을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태산은 작다고 여길 수 있다. 세계의 그 누구도 일찍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은 없으니, 팽조는 요절했다고 여길 수 있다.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으니,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
夫天下莫大於秋豪之末, 而太山爲小; 莫壽乎殤子, 而彭祖爲夭. 天地與我並生, 而萬物與我爲一.
이미 하나라고 여긴다면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이미 하나라고 말했다면, 말이 없을 수 있을까? 하나와 (하나라는) 말은 둘이라 여겨야 하고, 또 그 둘과 하나는 셋이라 여겨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무리 숙련되게 계산 잘하는 사람도 그 끝을 잡을 수 없는데, 평범한 사람은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없음’으로부터 ‘있음’으로 나아가는 경우에도 셋에 이르게 되는데, 만일 우리가 ‘있음’에서부터 ‘있음’으로 나아간다면 상황은 얼마나 나쁘겠는가! 그 이상 나아가지 말고 이것에 따를 뿐이다.
旣已爲一矣, 且得有言乎? 旣已謂之一矣, 且得無言乎? 一與言爲二, 二與一爲三. 自此以往, 巧曆不能得, 而况其凡乎! 故自無適有, 以至於三, 而况自有適有乎! 無適焉, 因是已! 「제물론」 14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
『장자』에는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 매력의 이유는 장자가 묘한 지적인 해방감을 준다는 데 있습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통념에 대해 장자는 쓸모가 없어 베이지 않고 크게 자란 나무를 이야기합니다. 거목 이야기입니다. 혹은 사랑에 진심이면 그 사랑은 이루어진다는 통념에 대해 장자는 최선을 다하는 사랑이 상대방을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닷새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장자가 우리에게 해방감이나 상쾌함을 주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생각과 삶을 무겁게 만드는 ‘모든주의’나 ‘본질주의’에 대해 코웃음을 치기 때문입니다. “잘도 그러겠다!” 이것이 장자 사유의 표어입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주의’나 ‘본질주의’를 무력화시키는 사례, 즉 반례를 찾는 장자의 감각입니다. 이 정도면 장자는 삐딱선을 타는 장난꾸러기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장자가 찾아낸 반례는 반박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깊이와 울림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장자가 통념에 사로잡혀 자기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 파괴하는 인간들에게 한없는 연민과 애정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를 읽다 보면 매혹적인 반례를 찾아 근사한 이야기를 만드는 장자의 능력은 단순히 타고난 것일 뿐만 아니라 어떤 철학자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바로 제자백가의 숨겨진 보석, 혜시입니다.
성심 이야기에는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과 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今日適越而昔至]”라는 주장도 『장자』 「천하(天下)」편을 보면 혜시의 것입니다. 이만큼 장자의 뇌리에 혜시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사실 장자 사유의 백미 「제물론」 편을 보면 장자가 혜시를 비판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자의 혜시 비판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장자는 혜시를 따르다 어느 결정적인 지점에서 그와의 동행을 포기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방금 읽어본 「제물론」 편의 ‘하나 이야기’가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혜시와 동행하다 갈림길에서 자기 길을 가는 장자의 모습이 언뜻 보입니다. 그래서 장자를 철학사적으로 이해하려는 지적인 독자들에게 「제물론」 편의 하나 이야기만큼 의미심장한 것도 없을 겁니다. 장자와 같은 최고 지성도 나름 인정했던 혜시의 사유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문제는 혜시의 사유가 담긴 그의 저서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장자』 「천하」과 「제물론」 편에 간접 인용되는 단편들이 전부입니다. 다행히도 『순자』 「정명(正名)」편에서 혜시의 사유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순자는 혜시를 비판하면서 “용실이난명(用實而亂名)”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혜시가 “사실을 이용해 이름을 어지럽혔다”는 의미입니다.
순자의 비판에 따라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혜시의 생각을 이해해보죠. 오늘 월나라에 갔다면 사실 어제 원나라에 도착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어제 어떤 사람이 월나라에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월나라의 풍경과 그곳 사람들을 그려봅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월나라에 도착해 있는 겁니다. 오늘 드디어 그는 월나라로 들어가는 국경을 지납니다. 어제 몸이 아니라 마음이 월나라에 도착한 것도 사실이고, 오늘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월나라에 간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을 시적으로 압축하면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말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전후 사정과 문맥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궤변처럼 들립니다. ‘오늘 월나라에 간’ 주어나 ‘어제 도착한’ 주어가 가리키는 것이 동일하게 마음이라 보거나 아니면 동일하게 몸이라고 보면, 혜시의 이야기는 분명 궤변입니다. 반면 ‘오늘 월나라에 간’ 것이 몸이고 ‘어제 도착한’ 것이 마음이면 그의 말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쨌든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말은 어제와 오늘에 대한 통념을 해체하는 무언가 심오한 철학적 명제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몸은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마음은 도착했다”로 이해하면 사실 혜시의 말은 특별히 새로울 게 없습니다. 무언가 심오한 듯하지만 전후 문맥을 헤아리면 새로울 게 없다는 것! 혜시 사유의 한계입니다. 그렇지만 ‘나’의 구체적 경험을 환기시키는 매력은 혜시에게 분명 존재합니다. 오늘 그(그녀)를 만나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은 사흘 전에도, 이틀 전에도, 그리고 어제도 그(그녀)를 만난 셈이니까요. 혜시의 일인칭주의 혹은 ‘나’주의입니다.
혜시의 ‘나’주의
『장자』 「천하」 편에는 혜시의 유명한 명제 10개를 역물(厤物)이라는 테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명제도 그중 하나입니다. 역물이라는 말은 ‘겪는다’는 뜻의 역(厤)과 ‘사물’이라는 뜻의 ‘물(物)’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역(厤)’이라는 특이한 한자는 역사라는 단어의 ‘역(歷)’과 같은 뜻입니다. 결국 역물은 ‘통념과는 달리 사물을 직접 겪어보자’는 의미입니다. “하늘도 땅만큼 낮고[天與地卑], 산도 연못의 높이와 같다[山與澤平]”는 혜시의 다른 명제를 보죠. 통념에 따르는 사람은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고, ‘산은 높은 데 있고 연못은 낮은 데 있다’고 말할 겁니다. 바로 이 순간 혜시는 지평선과 산정의 호수를 가리킵니다. 지평선에서 하늘은 땅만큼 낮아지고, 산정의 호수에서 산의 높이는 연못의 높이와 거의 같아 지니까요. 하늘은 땅보다 높다는, 혹은 산이 무조건 연못보다 높다는 통념은 여기서 해체됩니다. 여기서도 혜시의 ‘나’주의가 빛납니다.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중앙유라시아 고원지대에 서 있는 혜시, 혹은 티베트로 가는 고지대에 있는 청해(靑海) 호수, 높은 산맥과 나란한 그 바다처럼 넓은 호숫가에 서 있는 혜시가 떠오르니까요. 장자만큼 혜시도 여행의 귀재였던 겁니다. 순자는 “사실을 이용해 이름을 어지럽혔다”고 혜시를 비판합니다. 여기서 혜시가 이용했다는 사실은 자연과학적 사실이나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혜시가 체험한 경험, ‘나’라는 일인칭의 생생한 경험이 모든 통념을 해체하는 그의 사유의 힘입니다. 어쨌든 통념을 반박하는 반례를 찾는 혜시의 감각은 장자의 그것과 묘하게 공명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 이야기에서 장자가 혜시와 어떻게 결별하는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역물의 10개 명제 이외에 혜시의 것으로 보이는 3개 명제를 더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어떤 것도 가을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태산은 작다고 여길 수 있다. 세계의 그 누구도 일찍 죽은 아이보 다 더 오래 사는 사람은 없으니, 팽조는 요절했다고 여길 수 있다.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으니,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 먼저 “세계의 어떤 것도 가을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태산은 작다고 여길 수 있다”는 첫째 명제를 보겠습니다. 짐승들은 가을이 되면 털갈이를 하지요. 털갈이 후 새로 돋는 가느다란 털이 추호(秋毫), 즉 가을 털입니다. 그런 추호의 끄트머리이니 얼마나 작고 가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혜시는 가을 털끝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부드럽고 섬세한 가을 털 한 올이 내 손에 있다고 해보세요.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나는 그 한 올의 털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당연히 내게 그 털은 가장 큰 것, 그 소중하게 여기는 털이 훅 날아가면 아마도 모든 게 다 없어진 것 같이 느낄 정도로 큰 것입니다. 당연히 이 상태에서는 세계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태산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제 둘째 명제를 살펴볼까요. “세계의 그 누구도 일찍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은 없으니, 팽조는 요절했다고 여길 수 있다.” 일찍 죽은 아이는 상자(殤子)를 번역한 말입니다. 포대기로 업을 시간도 주지 않고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를 이릅니다. 그런데 3개월 안에 죽으리라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한 달여를 더 살게 되었다고 해보세요. 그 한 달은 아이 어머니에게는 팽조(彭祖)가 살았다는 800년보다 더 길게 여겨질 정도로 축복과 기적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마지막 셋째는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으니,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는 명제입니다. 마지막 남은 박쥐 한 마리가 죽어가고 있다고 해보죠. 박쥐는 초음파로 느끼던 세계에서 자신만 쏙 빠져나온다고 믿을 겁니다. 초음파로 느끼던 세계는 자신이 없어져도 그대로 객관적으로 있으리라 믿지요. 그러나 마지막 박쥐가 사라지는 순간, 초음파로 느끼던 그 세계도 사라지는 겁니다. 박쥐와 그의 세계는 함께 갑니다. 최후의 박쥐 사례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박쥐의 세계와 두루미의 세계, 나아가 소나무의 세계 중 어느 것이 진짜 세계일까요? 인간의 경우에도 유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안경을 쓰고 보는 세계와 맨눈으로 보는 세계 중 어느 것이 진짜 세계일까요? 다섯 살 어린이가 사는 세계와 서른 살 직장인이 사는 세계 중 어느 것이 진짜 세계일까요?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경험하는 세계와 그 어머니를 돌보는 아버지가 경험하는 세계 중 어느 것이 진짜 세계일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혜시의 ‘나’주의, 혹은 일인칭주의가 다시 빛을 발합니다. 이인칭이든 삼인칭이든 그것은 모두 일인칭과 함께 간다는 발상입니다. 모든 인식, 모든 판단 그리고 심지어 모든 말에는 단독적인 나, 특정한 일인칭이 전제되어 있다는 이야기죠. 세계는 나의 세계일 뿐, 모든 존재가 동의하는 객관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혜시의 근본 입장입니다. 당연히 세계에 속하는 만물도 나의 만물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혜시는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없다면 내가 경험하는 만물도 사라질 테니까요.
그 이상 나아가지 말고
장자는 혜시의 세 명제를 소개한 다음 혜시와는 다른 길로 방향을 미묘하게 틉니다. 먼저 장자는 혜시의 세 번째 명제를 검토합니다.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 고전 한문에서는 “이(以)A위(爲)B”라는 어법이 있습니다. “A를 B라고 여긴다”는 뜻입니다.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로 번역한 원문은 ‘만물여아위일(萬物與我爲一)’입니다. 장자의 메스는 “하나라고 여긴다”는 표현에 가해집니다. 만물과 내가 하나라고 혹은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면, 우리는 만물에 대해 아니면 나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구별과 차이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말합니다. “이미 하나라고 여긴다면 말이 있을 수 있을까?” 만물과 내가 하나라면 말 즉 언어가 작동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혜시는 만물과 자신이 하나라고 말하고 맙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혜시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언어는 기표와 기의라는 원초적 구별, 혹은 지시와 지시 대상이라는 구분을 전제합니다. 결국 ‘하나’라는 말을 쓰는 순간 혜시는 ‘하나’라는 말과 그 말이 가리키는 ‘하나’라는 상태를 구분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와 (하나라는) 말은 둘이라 여겨야[一與言爲二]” 하기 때문이죠. 이는 만물과 내가 하나라는 입장과는 모순됩니다. 당연히 혜시는 자기의 원래 입장을 유지하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그는 첫째로 하나라는 말, 둘째로 하나라는 말로 지시된 상태, 그리고 셋째로 만물과 내가 실제로 하나인 상태를 구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혜시는 만물과 자신이 하나라고 주장하느라 하나를 유지하기는커녕 둘을 넘어 셋이라는 구분을 사유하게 되는 지적인 파국을 초래한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불가피합니다. 장자는 혜시의 세 번째 명제를 폐기해버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장자는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는 주장만 비판할 뿐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다”는 혜시의 생각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바람 소리를 떠올려보세요. 바람 소리는 바람과 구멍이 마주쳐서 생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람 소리가 나야만 우리는 바람과 구멍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람 소리가 절대적 출발점입니다. 구멍이 의식되거나 바람이 의식되는 것은 그 다음 일입니다. 세계가 바람이고 구멍이 나라면 “바람은 구멍과 더불어 태어났다”는 말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바람과 구멍은 하나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바람과 구멍이 하나라면 혹은 같은 것이라면, 마주침도 불가능하고 당연히 바람 소리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장자는 “만물과 나는 하나로 여길 수 있다”는 혜시의 말을 해체한 겁니다. 사실 만물과 내가 하나라면, 혜시의 강력한 ‘나’의 일인칭주의도 무력화되고 맙니다.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다”는 주장에는 ‘나’주의가 관철되지만,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는 주장에서는 ‘나’주의가 해체되고 맙니다. 장자의 섬세함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장자는 혜시가 잘못된 형이상학적 사변에 빠지는 지점을 예리하게 간파합니다. ‘하나로 여긴다’라고 번역되는 ‘위일(爲一)’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생생한 경험을 무력화시키기 쉬운 ‘~로 여긴다’는 사변, 즉 ‘위(爲)’의 위험성일 겁니다. 자신의 첫 번째 명제와 두 번째 명제에서도 혜시는 ‘위’의 위험성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가을 터럭이 너무나 소중해 가장 큰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태산은 작다고 여길 수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일찍 죽을 줄 알았던 아이가 한 달을 더 살아내면 그 한 달은 내게 영원의 시간처럼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팽조는 요절했다고 여길 수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경우든 나의 절절한 경험은 생기를 잃으니까요. 가을 터럭만 마음에 품은 사람은 태산이나 궁궐의 크기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고, 다행히 조금 더 살게 된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에게 팽조의 나이든 고목의 수명은 신경 쓸 대상이 아닙니다.
결국 첫 번째 명제에서 “작다고 여기는” 추론과 두 번째 명제에서 “요절했다고 여기는” 추론이 문제입니다. 이는 세 번째 명제에서 문제가 “하나라고 여기는” 추론이 문제였던 것과 마찬가지 구조입니다. “하나로 여기는” 추론이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다”는 생생한 경험을 잿빛으로 만드니까요. 가을 터럭에서 태산으로, 혹은 일찍 죽은 아이로부터 팽조로 추론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낳게 됩니다. 가을 터럭보다 크다는 모든 것들로 추론이 진행될 것이고, 일찍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모든 것들로 추론이 진행될 테니까요. 그만큼 가을 터럭의 소중함은 희석될 것이고, 일찍 죽은 아이의 하루하루 살아 있음이 주는 감동도 희미해질 겁니다. 그래서 장자는 말했던 겁니다. “우리가 ‘없음’으로부터 ‘있음’으로 나아가는 경우에도 셋에 이르게 되는데, 만일 우리가 ‘있음’에서부터 ‘있음’으로 나아간다면 상황은 얼마나 나쁘겠는가!” 여기서 “나아간다”고 번역한 ‘적(適)’이라는 글자가 중요합니다. 나와 세계 사이의 기적과도 같은 관계, 나와 가을 터럭 사이의 절절한 관계 혹은 나와 일찍 죽은 아이 사이의 안타까운 관계를 넘어서, 잿빛 사변의 세계 혹은 형이상학적 세계로 나아간다는 의미니까요. 이제야 장자의 마지막 충고가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그 이상 나아가지 말고 이것에 따를 뿐이다[無適焉, 因是已]” “세계의 어떤 것도 가을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느껴지는 그 충만한 상황, “세계의 그 누구도 일찍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은 없다”고 느껴지는 그 애절한 상황, 그리고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다”고 느껴지는 그 경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말고, 이런 상황에 따르라는 이야기입니다. 혜시가 “태산은 작다고 여기고, 팽조는 요절했다고 여기고, 혹은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기는” 사변의 세계로 나아갈 때, 장자가 그와의 동행을 멈추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바로 여기서 장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멀어져가는 혜시에게 손을 흔듭니다. “굿바이! 내 친구, 혜시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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