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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태어남 - 1장 중국이 있기까지, 최초의 통일을 향해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태어남 - 1장 중국이 있기까지, 최초의 통일을 향해

건방진방랑자 2021. 6. 3.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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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통일을 향해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의 막이 오른 계기는 남방의 초()와 대립하던 전통의 강국인 진()이 와해된 것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종법 봉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혈연관계가 희박해져 붕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진은 일찍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주 왕실의 혈연관계를 대폭 제거했으므로 주 왕실과는 다른 성의 귀족들이 세력 가문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다 결국 내분을 빚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진()은 한()ㆍ위()ㆍ조(), 세 성씨의 세력가들에게 분할되었다. 이로써 가장 강대한 제후국이던 진은 사라지고 한ㆍ위ㆍ조의 3국이 생겨났다.

 

춘추시대에 춘추 5패가 있었다면 전국시대를 주도한 나라들은 전국 7웅이라고 부른다. 7웅이란 진이 붕괴하면서 생긴 한ㆍ위ㆍ조를 비롯해 연()ㆍ제()ㆍ진()ㆍ초()의 일곱 나라를 가리킨다()이나 노() 같은 약소국들도 존재했으나 이들은 대세를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 춘추 5패는 서로 맞교대 형식으로 패권을 장악했던 반면, 전국 7웅은 같은 시대에 공존하면서 서로 활발하게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다양한 국제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춘추시대에는 그래도 각국이 주 왕실에 충성하는 제후국의 위상을 버리지 않았지만, 전국시대의 제후국들은 확고한 영토와 주권을 가진 독립국의 성격이 더욱 강했다.

 

춘추시대 전국시대
춘추 5 전국 7
서로 맞교대 형식으로 패권을 장악 서로 활발하게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다양한 국제 관계를 맺음
주 왕실에 충성하는 제후국의 위상 제후국들은 확고한 영토와 주권을 가진 독립국의 성격

 

 

각국의 세력 판도도 전국시대에 들어 크게 달라졌다. 전국 7웅의 무대는 춘추시대보다 한결 넓어져 중국 대륙 전역을 아울렀다. 또 하나 춘추시대의 판도와 달라진 점은 신흥국 진()이 서쪽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이제 중원은 초의 북상과 더불어 진의 동진으로도 위협을 받게 되었다. 한편 전국시대에도 여전히 강대국으로 남은 초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호적수인 진()이 약화된 대신 이번에는 변방에서 중원으로 접근하는 진()의 진출을 막아야 하는 대표 주자의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따라서 전국시대는 진과 초, 양강의 대립을 중심으로 각국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일곱 개의 나라가 맞서는 형국인 만큼 전국시대에 천하의 정세는 춘추시대와 사뭇 달랐다. 전국(戰國)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시대의 중국에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복잡하고 치열한 전쟁이 잇달았으며 정교하고 화려한 외교술이 등장했다.

 

우선 전국시대의 전쟁은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면전이 많았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주로 각국의 지배 귀족들 간에 벌어졌지만, 전국시대에는 각국이 직접 백성들을 징집해 전쟁에 임했다. 말하자면 춘추시대에는 지배 엘리트들의 전쟁이었던 반면, 전국시대에는 본격적인 군대가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술도 춘추시대에는 차전(車戰)이 위주였지만 전국시대에는 보병과 기마병 중심으로 바뀌었다. 전쟁의 목표도 달랐다. 춘추시대에는 적국을 복속시키는 데 주안점이 있었지만, 전국시대에는 토지를 빼앗고 적국의 병력을 말살하는 게 전쟁의 목표였다. 무기도 청동제에서 철제로 바뀌어 전쟁은 더욱 잔인해졌다.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도 다양하게 개발되었고이 시기에 손빈이 지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오늘날까지 유명세를 떨친다, ()이나 대부(大夫) 등 귀족들이 전쟁을 수행했던 춘추시대와 달리 오로지 전쟁만을 치르기 위한 순수한 무장(武將) 집단도 출현했다.

 

  춘추시대 전국시대
주도국 춘추 5 전국 7
패권장악 서로 맞교대 형식으로 패권을 장악 서로 활발하게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다양한 국제 관계를 맺음
각국위상 주 왕실에 충성하는 제후국의 위상 제후국들은 확고한 영토와 주권을 가진 독립국의 성격
전쟁주역 각국의 지배 귀족들 간에 벌어짐 백성들을 징집해 전쟁함
()이나 대부(大夫) 등 귀족들이 전쟁 수행 백성 및 전쟁만을 위한 무장집단 출현
전쟁양상 지배 엘리트들의 전쟁 본격적인 군대의 전쟁
차전(車戰)이 위주 보병과 기마병 위주
전쟁목표 적국을 복속시키는 게 목표 토지를 빼앗고 적국의 병력을 말살하는 게 목표
전쟁무기 청동제 무기 철제 무기

 

그러나 전쟁 양식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다양한 외교술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전통의 제후국들은 세력이 약화되었고, 춘추시대를 거치며 이들의 대열에 초가 합류한 가운데 신흥국 진()이 동진(東進)을 꾀하고 있었다. 이런 극도로 미묘한 국제 정세는 술책에 가까운 교묘한 외교술과 권모술수, 수많은 책략가를 낳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소진(蘇秦)이 제기한 합종책(合從策)장의(張儀)의 연횡책(連橫策)이다. 합종책은 7웅 가운데 6국이 연합해 진의 진출을 막자는 것이었는데, 초의 회왕(懷王)이 제안하고 주동했다. 연횡책은 그 합종책에 맞서기 위해 진이 채택한 책략으로, 6국이 진과 평화로이 공존하자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비롯된 합종과 연횡이라는 말은 오늘날 복잡한 정치 상황을 묘사할 때도 흔히 사용된다. 그 밖에도 온갖 술책이 난무했으나 결국 국력에서뿐 아니라 술수에도 능한 진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대륙을 통일하게 된다.

 

전국 7웅 가운데 가장 후진국이었던 변방의 진이 중국을 통일하게 된 과정은 사뭇 극적이다. 춘추시대에 남중국의 초나라조차 오랑캐로 여긴 중원의 나라들은 당연히 진을 오랑캐로 간주했다. 그러나 진의 효공(孝公)은 위나라에서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한 책략가 상앙(商鞅)을 받아들여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과 쇄신을 단행했다(당시의 책략가들은 여러 제후국을 떠돌면서 자신의 지략을 팔고 다녔다. 공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것을 상앙의 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가족 제도에서 군사, 조세에 이르기까지 온갖 제도를 개선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대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조치였다.

 

이런 부국강병책에 힘입어 진은 일약 강국으로 성장했으며, 전국시대 중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급속히 중원 진출을 꾀했다. 합종책과 연횡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진은 멀리 있는 나라와는 친선을 도모하고 가까이 있는 나라들부터 하나씩 정복하는 전술을 전개했다. 이것이 이른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전술인데, 쉽게 말하면 각개격파다. 이에 따라 진은 먼저 인근의 한ㆍ위ㆍ조를 고립시켜 차례로 멸망시켰다. 이제는 호적수인 초나라와 마음 놓고 전면전을 벌일 수 있었다. 이윽고 초마저 정복한 이후에는 진에 맞설 상대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동북쪽의 연과 제를 정복하는 것으로, 진은 마침내 전란으로 얼룩진 오랜 분열기를 끝내고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했다.

 

 

잔인해지는 전쟁 왼쪽은 전국시대의 전투 장면이고 오른쪽은 춘추시대의 전쟁에서 사용하던 전차의 모습을 복원한 것이다. 춘추시대에는 전차를 이용한 차전(車戰)이 많았고 장수들 간의 싸움이 중요했지만, 전국시대에는 기마병 전술이 많이 구사되면서 전쟁이 더욱 잔인해졌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신화와 역사의 경계

구름 속의 왕조를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

기나긴 분열의 시대

최초의 통일을 향해

동양 사상의 뿌리(유가 / 묵가 / 법가 / 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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