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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 2부 자람,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동양사 - 2부 자람,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건방진방랑자 2021. 6. 3.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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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1. 무한 내전의 출발

 

 

모방의 한계

 

645년의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을 통해 일본은 비로소 고대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당대의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7세기 중반이면 한참 늦은 출발이기는 하지만, 중국 문화권의 한반도보다 800년이나 늦게 신석기시대를 졸업한 일본 민족으로서는 비약적인 발전이라 하겠다. 그런 성과를 이룬 데는 섬나라라서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는 지리적 여건과 아울러 일본 민족 특유의 뛰어난 모방 솜씨가 큰 역할을 했다섬이란 사실 양면적인 조건이다. 외부의 침략을 막기에는 더없이 좋지만 동시에 외부의 영향마저 가로막혀 폐쇄적으로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양면적 조건은 주체의 역량에 따라 좋게 작용할 수도 있고 나쁘게 작용할 수도 있다. 고대의 일본 민족은 열도 안에 갇혀 지내려 하지 않고 외부의 영향, 특히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고 모방하고자 노력했다. 그 덕분에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중세까지 일본의 성장에 플러스 요인이 된다.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면 일본은 외부에 위협 요소로 등장하는데, 여기에도 섬의 조건이 암암리에 작용했다.

 

당시 중국의 당 제국은 동북아시아의 패자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선진국이었으므로 일본이 모방의 모델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한반도가 고대 삼국으로 분리되어 있을 무렵, 일본은 가까운 백제를 통해 당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을 이룬 뒤부터는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일본은 신라와의 교류를 끊지는 않았으나 신라를 상국으로 받들지는 않았다).

 

무역과 거래에서 수익을 올리려면 가급적 중간의 유통 과정이 적은 편이 좋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부터 일본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당의 문물과 제도를 직수입하기 시작했다. 당의 제도를 모방해 율령을 만들고, 당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해 나라(奈良)에 새 수도인 헤이조(平城)를 건설했다(이때까지 일본은 특정한 수도가 없고 천황이 사는 곳이 수도의 역할을 했으므로 천황이 바뀔 때마다 수도가 달라졌다. 나라에 도읍을 정한 이때부터를 나라 시대라고 부른다). 또한 귀족들은 당의 문화라면 무조건 수입하고 모방했다. 가장 중국적인 것일수록 가장 크게 환영받았다. 천하의 중심 대당국(大唐國)’의 이미지는 일본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제도와 문물을 모방할 수는 있어도 역사와 전통까지 모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본의 한계는 바로 그것이었다. 우선 수도인 헤이조(‘평평한 성이라는 뜻)의 이름에도 ()’이라는 글자가 버젓이 들어가 있지만, 그 성은 여느 성과 크게 달랐다. 헤이조에는 건물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 한 나라의 수도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성벽이 없었다. 성벽이란 외적의 침입을 막아 수도를 보위하는 한편 성 안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 근거지와 바깥의 일반 농촌 사회를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일본에는 중국이나 한반도와 달리 이민족이 없어 침입할 만한 외적이 없었고, 수도라고 해야 정치 행정만을 위한 장소일 뿐 시민 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성벽이 애초에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헤이조의 성은 순전히 중국의 문물을 그대로 모방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그보다 더 큰 모방의 한계는 율령이었다. 4장에서 보았듯이, 당의 율령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한 제국과 남북조시대에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싹이 트고 잎이 자란 결실을 당 태종이 거둔 것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율령은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와 관료제를 조화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하지만 일본에는 천황이라는 전제군주는 있어도 관료제는 없었다(게다가 천황도 고대까지는 상징적 중심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 통치를 담당하지는 않았다). 관료제를 발달시키려면 행정 실무자인 관료를 발탁하는 제도가 필수적이다. 그것이 과거제(科擧制)이지만 이런 제도가 없다면 최소한 중국의 고대처럼 외척이나 환관 같은 관료의 역할을 맡아줄 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에는 그런 세력이 부재했다.

 

게다가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은 당 제국처럼 전대의 왕조를 실력으로 타도하고 들어선 게 아니라 예전의 지배 세력이 쿠데타로 명패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유지되면서 국가 체제를 바꾼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관리 임용제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그래서 일본의 율령제는 필수 요소인 과거제가 없는 기형적인 제도에 불과했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율령제는 일본의 중앙집권화에 제법 기여했지만 당시 일본의 체제상 그것이 꼭 율령제일 필요는 없었다. 결국 그런 모방의 한계는 이후 일본의 역사를 동북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게 된다.

 

 

헤이조의 성문 새 수도 헤이조의 남쪽에 있는 주작문(朱雀門)이다. 헤이조는 당의 수도 장안을 모방한 성이지만 성벽도 없이 성문만 있는 어설픈 성이었다. 문 앞에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공간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방비보다는 제례의 구실이 더 컸던 듯하다.

 

 

귀족이 주도한 율령제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으로 탄생한 율령 체제의 경제적 토대는 모든 토지가 국가, 즉 천황의 것이라는 공지제(公地制)였다앞에서 보았듯이, 왕토 사상은 동북아시아 문화권에 내재해 있었다. 일본의 공지제가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 어느 왕조는 개국 초에는 왕토 사상을 철저히 지키게 마련이다. 사회적 원리의 면에서도 그렇지만 지배층에게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이전 왕조의 경제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개국 공신을 비롯한 새 정치 세력에게 토지를 분급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를 접수한 고려, 고려를 타도한 조선은 초기에 왕토 사상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러나 처음에는 관리들에게 독봉으로 토지의 점유권만 인정하지만 얼마 못 가서 점유권은 사실상 소유권이 되어버린다. 왕토 사상이 이념적으로만 유지될 뿐 현실적으로는 무력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기쯤 되면 예외 없이 대토지 겸병이 일어나면서 경제가 붕괴하게 된다. 나중에 보겠지만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영주들이 구분전을 겸병하면서 부지런히 장원의 토지를 늘려갔다.

 

그러나 처음에는 기세 좋게 시작했어도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면 모든 토지에는 사실상의 소유자가 생겨나게 된다. 공지제가 무너지면서 이 사실상의 토지 소유자인 묘슈(名主)가 늘어나자 형식상의 토지 소유자인 국가에서도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차라리 토지소유를 현실로 인정하고 조세를 부과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국가는 점차 묘슈를 과세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실상 율령제의 경제적 기초를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때부터 일반 백성 가운데서도 제법 토지를 모은 묘슈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유력 가문과 지방 호족 들이 소유하는 장원이 확대되면서 율령은 법제화된 지 50년도 채 안 되어 변질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율령 체제의 문제점은 중국의 모방에 있지 않았다. 만약 제대로 모방했다면 일본의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유용하게 기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율령 체제를 확립한 주체는 다이카 개신에서 공을 세워 일약 스타가 된 후지와라(藤原) 가문이었다(천황은 다이카 쿠데타의 일등공신 가문인 나카토미 씨족에게 후지와라라는 새 성을 하사했다). 귀족계급관료제를 핵심으로 하는 율령 체제의 주역이라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지만 이는 앞서 말한 기형적 모방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일본의 정치는 귀족 지배 체제였다. 천황은 물론 절대적 권위를 지닌 존재였지만, 현실 정치에 관한 권력을 가졌다기보다는 상징적인 권력자에 가까웠다. 그래서 천황은 실력 가문과 결탁하지 않으면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실은 천황의 등극에도 귀족들의 입김이 거셌다. 최고 실력자인 후지와라 가문은 천황을 등에 업고 자기들끼리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모처럼 정한 수도도 여러 차례의 반란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784년에는 교토(京都)에 헤이조와 똑같은 헤이안(平安) 성을 지어 그곳으로 옮겼다(이때부터 교토는 400년간 정치ㆍ문화의 중심이 되는데, 이를 헤이안 시대라고 부른다).

 

 

집 안의 사원 8세기 일본의 귀족들에게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생활 자체였다. 후지와라 가문과 같은 최상류 귀족들은 집 안에 불당을 짓고 그곳을 별당처럼 이용했으며, 승려들을 아예 상주시키면서 경문을 읽게 했다. 9세기 초 당에 유학을 갔던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는 각 각 천태종과 진언종을 창시했는데, 두 종교는 밀교적인 성격이 강했으므로 호국불교이면서도 나라(奈良) 시대와 달리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장원제의 발달은 경제적인 측면에만 관련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이후 일본의 토지제도는 반전제(班田制)였다. 이것은 농민들 개개인에게 구분전(口分田)이라는 토지를 할당하는 제도였다. 누구에게나 갈아먹을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이므로 어찌 보면 국가의 시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고 귀족들의 사치스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였다. 무엇보다 조용조(租庸調)의 세금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세금의 비율은 얼추 수확량의 2할가량 되었는데, 당시의 농업 생산력에 비추어볼 때 구분전을 경작해 이 세금을 내면서 멀쩡히 살아갈 수 있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

 

조용조(租庸調) 가운데 특히 가혹한 것은 용(), 즉 요역(徭役)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병역의 폐해였다. 요역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여기저기서 구분전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실정법을 위반하는 셈이었다. 구분전을 경작하는 일은 농민의 권리라기보다 의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780년에는 징병제도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병역 의무제가 사라지면 귀족의 사병(私兵)이 활성화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어쩌면 당시 중국의 당이 무너지는 과정과 그리도 똑같을까? 당의 부병제(府兵制) 역시 성립될 당시에는 획기적이었으나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달아나면서 무너졌다. 그 결과로 지방 호족의 군벌인 번진(蕃鎭)이 생겨났고 이 번진들의 반란 때문에 당은 결국 멸망하지 않았던가?

 

반전제가 무너지고 장원이 발달한다. 징병제가 무너지고 사병 조직이 늘어난다. 그렇잖아도 활발한 반란과 내전으로 호전성을 키워온 중앙 귀족과 지방 호족이 이런 호조건을 놓칠 리 없다. 더구나 장원은 9세기부터 면세의 특권까지 얻으면서 국가의 지배로부터 거의 반독립적인 상태가 되었다. 물론 고쿠시(國司)라는 지방 행정의 수령이 중앙에서 파견되었지만 지방 호족들은 이미 고쿠시의 지배를 벗어나 있었다. 호족들은 자기 장원 내의 백성들을 무장시켜 사병 조직을 강화했는데, 이것을 로도(郞黨)’라고 불렀다. 말 자체로도 사나이들의 패거리라는 뜻이고 실제로도 깡패 집단이나 다를 바 없었다(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왜색용어로 낭인郞人이라고 부르는데, 일본어 발음으로는 로닌이다. 구한말 일본의 로닌 집단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독자적인 경제력과 무장력을 합법적으로갖추게 된 전통의 씨족 세력, 귀족 가문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치열한 세력 다툼에 나섰다. 바야흐로 일본 특유의 내전의 역사는 이때부터 한층 강도 있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사무라이의 군장 귀족들 간의 권력 다툼이 전개되는 동안 그 수면 밑에서는 장차 미래에 일본의 정치를 주도할 무사 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서 사무라이라는 말이 나왔다. 위 사진은 사무라이가 무장을 갖추는 여러 단계를 서양인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순수 무장의 집권

 

천황의 지위는 쇠락 일로에 있었다. 당대의 실력가인 후지와라 가문은 자기 딸을 황후로 집어넣어 외손을 천황으로 즉위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외척 정치와 같은 셈인데, 차이가 있다면 그래도 실권을 가진 중국의 천자에 비해 일본의 천황은 한층 초라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후지와라 가문의 독재라고 할 수 있었으나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 분열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내 후지와라도 네 가계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일삼았다(그 가운데 북가北家의 세력이 가장 컸다). 마침내 858년에 섭정이 된 후지와라 요시후사(藤原良房, 804~872)는 천황을 완전히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황족이 아닌 사람이 섭정에 오른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섭정 정치가 지속되자 아예 제도로 자리 잡았다. 원래 섭정은 천황이 어릴 때에만 둘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요시후사의 대를 이은 후지와라 모토쓰네(藤原基經, 836~891)는 그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냈다. 천황이 성장한 다음에도 섭정이 예전과 같은 권력을 지닐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렇다면 그 섭정은 명칭이 달라져야 할 게다. 이리하여 간바쿠(關白)라는 직위가 탄생했다. 이제 후지와라 가문의 맏아들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들여보낸 다음 천황이 어릴 때는 섭정으로 군림하고, 어른이 되면 간바쿠로 집권을 연장하는 새로운 전통을 열었다. 말하자면 상징적 권력인 천황과 실질적 권력인 섭정-간바쿠가 모두 세습되는 식인데, 이것을 셋칸(攝關) 체제라고 부른다.

 

이렇게 중앙 권력을 완전히 틀어쥔 후지와라 가문은 폭정으로 내달렸다. 적수가 될 만한 귀족 가문이 상급 관료들을 모두 제기하고, 황족과 상층 귀족에게 지방에서 생산된 수입을 분배하는 지쿄코쿠(知行國)()’는 원래 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일을 맡는다는 뜻이다. 우리 역시 고려와 조선 시대에 전대 원이 유고되었을 경우 후임 왕은 중국의 책봉을 받기 전까지 정식 왕이 이닌 신분에서 나랏일을 임시로 맡아서 한다는 뜻으로 권지국지(權知國事)라고 불렀는데, 이때의 ()’도 같은 뜻이다. 오늘날 도지사(道知事)라는 직책에 있는 ()’도 마찬가지다라는 제도를 시행한 것까지는 여느 역사에서도 볼 수 있는 전제정치다. 그러나 후지와라 가문은 더 나아가 일본 특유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확립한다. 그들이 사병 조직으로 거느린 무사단이 바로 사무라이(). 사무라이란 옆에서 받드는 자라는 뜻이니 원래는 그리 명예로운 이름이 아니었지만, 이후 무사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무사 계급, 나아가 일본 전제의 대명사가 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독재와 전횡을 일삼던 후지와라 가문에게도 이내 만만찮은 적수가 등장한다. 섭정이든 간바쿠든 천황을 등에 업어야만 가능하다(그래서 친황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주나라 왕실처럼 실권은 없어도 상징적 의미가 컸다). 물론 천황의 외척이라는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후사가 계속 나와야만 하는데, 이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적 문제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윽고 황실의 대가 끊기는 상황이 생겼다. 1068년 후지와라와 외척 관계가 없는 고산조(後三條, 1034~1073) 천황이 즉위했다. 즉위하기 전까지 후지와라의 심한 견제를 받은 그는 천황이 상징 권력에 머물지 않고 현실 권력을 가지려면 후지와라 가문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우선 후지와라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는 장원 정리 사업에 착수하고 별도의 행정 기구로서 원정을 설치했다.

 

물론 그런 잽 정도의 주먹을 맞고 후지와라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산조의 뒤를 이은 다음 천황 시라카와(白河, 1053~1129)는 후지와라에게 카운터블로를 안긴다. 그는 셋칸 체제 자체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절묘한 방책을 구사했다. 천황이 성장한 뒤에도 섭정이 간바쿠로 권력을 유지한다면 천황도 그렇게 하자! 시라카와는 재위 13년 만에 천황위를 양위하고 상황(上皇)이 되었다. 아무리 셋칸이라 해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전임 천황만은 못하다. 상황이 원청에서 원정(院政)을 실시하자 마침내 후지와라의 독재는 무너지고 실권이 다시 천황 세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상황의 선례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천황이 병에 걸리거나 너무 연로할 경우에는 제위를 양위하고 태상(太上) 천황, 즉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비록 명칭은 달라도 이런 사례는 중국과 한반도, 유럽의 역사에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직접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은 일본의 역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희귀한 현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체제가 아니라 정치의 내용이다. 3대째 상황의 원정이 지속되었어도 전혀 개혁 정치는 없었고 셋칸 시대와 달라진 것도 없었다. 정치가 현저하게 퇴보와 후진성을 보이자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은 더욱 치열해졌다. 후지와라 독재가 끝난 뒤 형세는 황실과 후지와라 셋칸 가문, 귀족, 그리고 여기에 유력 사찰들이 조직한 무장 승병 집단 세력까지 더해져 더욱 오리무중에 빠졌다. 일본 전역에서 이들 세력의 사병 조직들 간에 무장 충돌이 빈발했다.

 

난세에는 무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마련이다. 혼란의 와중에 후지와라의 무사단(사무라이) 이었던 미나모토() 가문과 천황 측의 사병 조직인 다이라 가문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무력을 제공하는 역할이었으나 세상이 혼탁해지자 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점차 그들은 실력에 걸맞은 지위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156년에 그들의 실력을 가늠할 기회가 생겨났다. 상황 세력과 천황 세력이 황위 계승권을 놓고 격돌한 호겐(保元)의 난에서 미나모토와 다이라는 최초로 진검 승부를 펼친다. 승리는 천황 세력이었으나 진정한 승자는 다이라 가문의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 1118~1181)였다. 이 사건은 사실상 상황과 천황이 싸운 게 아니라 전통의 황족 귀족 세력과 신흥 강자인 무사 세력이 벌인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무사 계급이 황족 귀족의 용병이었으나 불과 3년이 지나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1159년 설욕을 꾀한 미나모토 가문은 헤이지(平治)의 난을 일으켰으나 다시 한 번 기요모리에게 패하고 집안이 풍비박산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성격이 다르다. 호겐의 난까지만 해도 귀족들의 들러리였던 무사 세력은 자기들끼리 싸운 이 헤이지의 난을 계기로 일약 정치 무대의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승자인 기요모리는 유명무실해진 귀족 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전까지의 일본 역사에서도 순수한 관료 정치를 찾아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순수 무장이 집권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 그것은 일찍이 어느 민족에게도 없었던 격심한 반란과 내전의 역사다공교롭게도 일본에서 무장 세력이 집권할 무렵 한반도에도 무신 정권이 성립했다. 1170년 고려의 무신인 정중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 정권을 열었고, 이후 이의민과 최씨 정권을 거치면서 100여 년 동안이나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13세기에 몽골이 침략하지 않았다면 무신 정권은 더 연장되었을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반도와 일본에서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다.

 

 

무사들의 대결 귀족들의 휘하에서 대리전을 수행하던 무사들이 최초로 자기들끼리 패권을 겨룬 전쟁이 헤이지의 난이다. 이 전쟁에서는 다이라 가문이 이겨 권력을 손에 넣지만, 여기서 살아남은 미나모토 가문의 열세 살 소년 요리토모는 훗날 다이라에게 복수하는 것은 물론 최초의 쇼군이 되어 최초의 바쿠후 권력을 수립한다.

 

 

모방을 버리고 독자 노선으로

 

일본이 진통을 겪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동북아시아 전체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국제 질서의 핵심이었던 당 제국은 8세기 중반 안사의 난 이후 당말오대의 말기적 증상에 시달렸다. 당의 율령제가 붕괴하는 시기와 일본의 율령제가 붕괴하는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일본은 율령제의 성립만이 아니라 붕괴까지도 모방한 셈이다. 아니면 율령제의 한계가 그랬거나.

 

그러나 중국의 동요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한반도와 일본은 서로 달랐다. 통일신라는 당과 함께 중앙 권력이 무너지고 혼란기에 빠졌으나신라는 당과 함께 말기적 증상을 보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난 8세기 중반의 혜공왕(재위 765~780)부터 당이 수명을 다하는 9세기 말 진성여왕(재위 887~897)까지 신라 왕들은 무려 열네 명이나 되었으며(평균 재위 기간은 10년이 못 된다), 그 가운데 네 명이 반란으로 살해되었고 여섯 명이 병사나 의문사 등 비정상적으로 죽었다. 이 시기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불길한 징조가 많이 나오는데, 정변이나 반란이 그렇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당과 결별하고 독자 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9세기 말에 당의 붕괴가 확실시되자 일본은 더 이상 중국에서 배울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때까지 10여 차례나 파견한 견당사(遣唐使, 당에 보내는 공식 사절단)도 보내지 않았으며, 이 시기에는 무역량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중국에 유학하는 학생도 없었다. 백제가 망할 무렵 한반도에서 배울 게 없다고 여기고 재빨리 손을 빼 한반도와의 교류를 끊은 것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그에 따라 한동안 중국풍을 모방하는 것만이 최고라고 여겼던 일본의 문화도 궤도를 급선회했다. 종전의 풍조를 당풍(唐風), 새로운 풍조를 국풍(國風)이라 부른다(국풍은 야마토풍大和風이라고도 한다). 일본 고유의 문화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다.

 

 

선진국으로 가는 배 그림은 8세기에 당과 일본을 오갔던 견당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뱃길이 무척 험했으므로 이들을 태운 배는 풍랑에 휩쓸려 침몰하기도 부지기수였을 뿐만 아니라 오가는 데도 몇 달씩 걸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항해술은 이후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불교의 성격도 확연히 달라진다. 불교가 도입된 초창기인 쇼토쿠 태자 시절의 불교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 불교였어도 종교의 성격이 명확했다. 그러나 다이카 개신 이후 귀족 지배기를 거치면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귀족들의 개인적 질병이나 재앙을 막아주는 주술적 용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주술과 기도를 특징으로 하는 진언종(眞言宗)이 널리 퍼졌고, 천태종(天台宗)이 밀교처럼 변질되었다. 훗날 일본의 불교가 무속이나 민간신앙, 혹은 일본 고유의 신사(神社) 신앙과 뿌리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언제 중국의 것을 모방하기에 급급했느냐는 듯이 일본의 정치적ㆍ문화적 노선 전환은 순식간이었다. 그 덕분에 일본은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매우 귀중한 유산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일본 문자인 가나(假名).

 

한자를 간소화해 일본어를 표기하는 표음문자로 처음 사용한 것은 5세기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의 노래책인 만요슈(萬葉集)에 나오는 만요 가나는 훗날 가나 문자의 모태가 된다. 국풍이 등장한 9세기 중반에는 수백 년 동안 조금씩 발전되어오던 가나가 총정리되어 정식으로 일본어를 표기하는 문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일본의 학자들은 한글이 15세기에 생겼다는 이유로 가나가 중국을 제외한 중국 문화권에서 최초로 만든 문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문제가 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말은 있어도 표기할 문자는 없었던 한반도에서는 고대부터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吏讀) 문자를 사용했다(이두를 신라의 학자 설총이 창안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가나는 비록 한자를 간소화했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한자체를 그대로 사용하는 문자이므로 새롭게 창안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두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두의 역사로 보면 일본이 결코 먼저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가나에 비해 한글은 한자와는 상관없이 우리말을 표기하는 체계라는 점에서 훨씬 더 독창적이다.

 

가나는 처음부터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한동안 여러 가지 표기 방식이 사용되다가 점차 하나의 발음에 하나의 문자가 대응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나 문자는 여전히 중국풍에 젖어 있던 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물론 공문서를 작성할 때도 사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자를 배우지 못한 하층민이나 여인네 들이 애용하면서 가나는 점차 일본인들의 생활 속에 자리 잡았다(이 점은 한글의 운명과 비슷하다. 한글도 만들어진 세종 대에만 경전의 번역에 이용되었을 뿐 공식 문자로 대우받지 못했고 평민과 여성 들이 애용하면서 발달했다). 특히 가나 문자를 사용한 새로운 문학 장르인 모노가타리(物語)는 일본 전통 문학의 시초가 되었다.

 

9세기부터 일본 역사에서 국제 관계의 맥락이 거의 사라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때부터 일본은 중국과 비공식적으로 무역을 했고 왜구로서만 동양의 역사 무대에 등장했을 뿐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는 무대 뒤에서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하게 된다(13세기에 몽골의 침략을 두 차례 받은 게 대외 관계의 전부다).

 

이후 일본은 치열한 내전의 시대를 거치면서 통일을 이루고 힘을 키워 16세기에 국제 무대에 다시 등장하는데, 나중에 보겠지만 이때도 정상적인 국제 관계를 도모한 게 아니라 그동안 한껏 키운 무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정복을 꾀한 것이었다.

 

 

최초의 일본 문학 11세기 초 일본 귀족 사회의 모습을 잘 묘사한 소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 수록된 그림이다. 일본의 문화가 당풍에서 국풍으로 바뀌면서 일본의 독창적인 문학 형식이 생겨났다. 가나 문자를 사용한 최초의 문학인 모노가타리는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일본 문장으로 손꼽힌다.

 

 

 2. 무인들의 세상이 열리다

 

 

권좌에 오른 무사들

 

미나모토를 무찌르고 권력의 핵심에 오른 다이라 기요모리는 순수한 무장이었으니 정치와 행정의 경험이 있을 리 없다. 모르면 베껴라. 그는 바로 전까지의 권력 구조였던 칸 정치를 흉내 내기로 한다. 우선 천황의 외척이 되면 부족한 권력의 정통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천황부터 갈아치워야 한다. 그래서 그는 1169년에 자신의 조카, 즉 고시라카와(後白河, 1127~1192) 천황과 자기 처제의 여덟 살짜리 어린 아들을 내세워 다카쿠라(高倉, 1161~1181) 천황으로 삼고 자기 딸을 황후로 들였다이 천황 부부는 서로 이종사촌인 셈인데, 고대에는 어느 나라 역사에서는 왕실 내에 근친혼이 잦았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는 서로 장인-사위이자 처남 - 매부였고(김유신의 누이동생이 김춘추의 아내였는데 나중에 김춘추가 딸을 김유신에게 주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과 고려 태조 왕건도 그랬다(경순왕은 왕건에게 누이를 시집보냈고 왕건은 그보답으로 자기 딸을 경순왕에게 주었다). 우리 역사에서 근친혼이 사라지는 것은 유교 문화가 꽃피우는 조선시대부터다. 12년 뒤 다카쿠라의 세 살짜리 아들을 안토쿠(安德, 1178~1185) 천황으로 옹립함으로써, 기요모리는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다.

 

권력을 쟁취하는 것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기요모리가 능한 부분은 권력을 차지할 때까지였다. 그는 권력자로서의 권위는 있었어도 정치가로서는 신통치 않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셋칸 체제를 거의 바꾸지 않고 답습했다. 결국 정권의 임자만 바뀌었을뿐 정치도 달라지지 않았고 경제적 토대도 변함없이 장원과 지쿄코쿠(知行國)였다.

 

새로운 정권이라고 부를 만한 점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무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던 촌놈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예고했다. 힘으로 권좌에 오를 수 있다면 더 힘센 자가 나타날 경우에는 권좌를 내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여러 가지 면에서 다이라 가문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할 게 뻔했다.

 

다이라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 이런 말이 나돌 정도로 다이라 가문은 독재와 폭정으로 일관했다. 자연히 정권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이라는 300명의 소년들을 교토 시내에 풀어놓고 불만분자를 색출하려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저항세력이 더욱 결집했다. 이윽고 저항 세력에도 핵심이 생겼다. 한때 맞수였던 미나모토 가문이었다.

 

 

 

 

일찍이 후지와라의 무사 집단으로 출범한 미나모토는 주군인 후지와라 가문이 몰락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된 데다 호겐, 헤이지의 난 시절에 다이라와의 2연전을 모두 패한 이후 군소 가문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면 기회는 오게 마련이다. 헤이지의 난에서 체포되었다가 열세 살의 어린 나이 덕분에 처형을 모면하고 유배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가 수장이 되면서 미나모토 가문은 다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다이라와 더불어 양대 무가를 이루었던 미나모토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다이라와 맞붙은 싸움에서 또다시 패했다. 호겐과 헤이지까지 합치면 3연패를 당한 셈이었다. 더 이상 정면대결을 벌여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요리토모는 먼저 자신의 세력부터 튼실하게 구축하는 작전으로 바꾸고, 1180년에 교토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간토 지방의 가마쿠라(鎌倉, 지금의 요코하마 남쪽)에 근거지를 차렸다.

 

요리토모는 이 일대의 다이묘(大名, 영주)와 무사 들을 고케닌(御家人)이라는 무사 집단으로 결속시키고, 이를 통제하는 기관으로 사무라이도코로(侍所, 사무라이의 처소)를 설치하는 등 다이라와의 일전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시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사촌인 미나모토 요시나카(源義仲)가 북부에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일으켰다. 이로써 일본의 세력 판도는 다이라 가문과 두 미나모토 가문이 정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더구나 이들 가문과 무관한 중소 가문들도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일본 전역이 서서히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마침내 요리토모에게 기회가 왔다. 중대한 고비를 맞아 1181년 다이라 기요모리가 병사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다이라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기요모리는 요리토모의 목을 내 무덤 앞에 바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으나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리토모와 요시나카가 다툼을 벌이는 동안에는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명맥을 좀 더 연장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 요리토모가 승리하면서 다이라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준결승을 KO로 이기고 결승에 오른 요리토모는 다이라를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다이라는 안토쿠 천황과 고시라카와 상황을 데리고 서쪽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어려운 판에 예상치 못한 사태가 터졌다. 고시라카와가 가문에 등을 돌리고 몰래 진영을 도망쳐 나와 미나모토 측에 붙은 것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그는 상황이라는 자격을 이용해 다섯 살짜리 손자인 고토바(後鳥羽, 1180~1239)를 천황위에 올렸다. 다이라와 미나모토 두 가문이 별도의 천황을 옹립했으니, 같은 시대에 두 명의 천황이 공존하는 희한한 사태다.

 

 

첫 쇼군의 위용 일본 역사상 최초의 쇼군인 요리토모의 초상화다. 파란만장한 전투 끝에 바쿠후를 세우고 무사 계급의 정권을 연 그는 이 그림처럼 위풍당당하고 위엄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 위엄 뒤에는 적의 가문을 몰살하고 자기 동생들마저 죽인 일인자의 냉혹함이 숨어 있다.

 

 

이 비정상적인 국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1185년 요리토모의 동생 요시쓰네(義經, 1159~1189)가 지휘하는 군대가 단노우라(, 지금의 시모노세키 부근 해협)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다이라와 최후의 해전을 벌여 마침내 적을 궤멸시켰다. 여덟 살의 어린 천황 안토쿠를 비롯해 다이라 측 황족들 대부분이 바다에 투신하는 비극으로 끝난 단노우라 해전은 일본 역사상 가장 비장한 전투로 꼽힌다.

 

오랜 전란이 끝났다. 후지와라 시대부터 따지면 근 한 세기에 걸친 내전이었다(물론 내전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최후의 승자, 즉 새로이 일본의 패자가 된 요리토모는 다이라 기요모리보다 훨씬 치밀하고 냉정한 데다 정치적 수완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제 두 번 다시 내전이 없도록 하겠다는 결심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내전으로 권좌를 내주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을까? 그는 비정하게도 자신의 동생들이자 자신을 권좌에 올려준 일등공신들인 요시쓰네와 노리요리(範賴)를 죽여 권력 다툼의 싹을 없앴다.

 

이런 각오라면 요리토모가 철저한 개혁의 길로 나아갈 것은 뻔하다. 과연 그랬다. 그는 지방마다 슈고(守護)를 두어 반역자 처단의 임무를 맡기는 한편, 각 지방에서 유사시에 군량미를 징집하던 지토(地頭)라는 직책의 권한을 확대시켜 이들에게 경찰권과 징세권, 토지 관리권까지 부여했다. 요리토모의 친위대인 고케닌, 그리고 지방의 행정을 담당한 슈고와 지토는 모두 무사들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명실상부한 무사 국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앙 권력이었다. 앞서 기요모리는 천황을 등에 업은 전통적체제를 답습했는데, 이것을 바꾸지 않는다면 권력을 유지할 수도 없고 개혁을 지속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요리토모는 과거와 근본적으로 다른 무사 계급의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미처 몰랐겠지만 그가 만든 새로운 체제는 이후 1000년 가까이 지속된다. 그것이 바로 바쿠후(幕府) 정치다. ‘()’은 군막을 가리키므로 이미 명칭에서부터 군대가 정치 일선에 나섰음을 선언하는 체제다.

 

가마쿠라에 최초의 바쿠후를 연 요리토모는 1192년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올랐다. 이 거창한 직책을 줄이면 쇼군(將軍)이 된다이때부터 쇼군 직이 반드시 세습된 것은 아니었지만 왕위처럼 대를 이어가게 된다. 이는 셋칸 시대부터 일본적 전통으로 자리 잡은 권력의 대물림이라 할 수 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의 한 축과 실권자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권력의 축이 병존하는 기묘한 이중권력은 일본 역사만의 특징이다(하지만 같은 시대에 천황 측과 바쿠후 간에 세력이 엇비슷한 이중권력이 성립된 것은 잠시뿐이고 권력은 결국 바쿠후 측으로 넘어간다). 게다가 상황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면서 천황 측에도 천황과 상황의 이중 권력이 성립되니 이것도 묘한 일이다. 게다가 바쿠후 시대에도 천황은 계속 존재했고 그 상징적 지위는 (쇼군조차 해마다 문안 인사를 드릴 정도로) 굳건히 인정되었으니 이것도 묘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쇼군조차 한때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권력이 바쿠후 내부에서 과점되었다는 점이다. 이름뿐인 천황, 또 이름뿐인 상황, 또 이름뿐인 쇼군, 그러면서도 계속 유지되고 세습되는 천황과 쇼군, 이점은 일본 역사 특유의 복잡한 상징 권력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현상이다. 유명무실해진 천황은 이후의 역사에서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결집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하게 되며, 19세기에 바쿠후가 무너지면서 다시 현실 정치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는 초대 바쿠후의 지배자인 초대 쇼군이었다.

 

물론 기존의 천황 세력도 아직 만만치 않았다. 당시 일본의 권력은 전통적인 교토의 천황 세력과 신흥 권력인 가마쿠라 바쿠후가 양분하는 형세였다. 완전한 바쿠후의 시대가 되는 것은 그로부터 200년 뒤의 일이지만, 그 문은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바쿠후가 연 것이다.

 

 

고대 일본의 중심지 세력 가문들의 권력 다툼이 치열했던 당시 일본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지명으로 말하면 교토 일대의 간사이 지방이었다. 지금 일본의 수도인 도쿄가 있는 간토 지방은 12세기 이후에 지역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며, 17세기 에도 시대부터 일본 전체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자유경쟁을 통해 독점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지도자가 죽고 나면 혼란이 뒤따르는 법이다.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초대 쇼군 요리토모가 1199년 쉰셋의 나이로 죽자 신생 바쿠후 정권은 위기를 맞았다. 바쿠후 체제의 수립에 공을 세운 지방 호족들이 점차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요리토모의 치세에 그들은 요리토모의 고케닌으로서 철저히 복종했으나 그의 아들 요리이에(賴家, 1182~1204)2대 쇼군이 되자 태도가 달라졌다. 특히 호조(北條) 가문의 도키마사(時政, 1138~1215)와 그의 아들 요시토키(義時, 1163~1224)는 요리토모의 미망인이자 요리이에의 어머니인 마사코(그녀는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으나 남편의 후광으로 여승 쇼군이라 불리며 여전히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를 등에 업고 요리이에에게서 재판권을 얻어내려 했다. 도키마사는 마사코의 아버지였으니, 또다시 일가붙이들 간에 치열한 정쟁이 벌어진 것이다.

 

한 세기에 걸쳐 타오른 내전의 불길이 한 세대 만에 완전히 꺼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내전의 불씨가 되살아나자 바쿠후의 성립에 기여한 가지와라(梶原), 히키(比企), 하타케야마(畠山) 등의 호족 가문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일어났다. 그 와중에 요리이에가 피살되고 그의 동생 사네토모(實朝, 1192~1219)가 열두 살의 소년으로 3대 쇼군이 되었다. 그렇다면 미나모토 가문의 권력은 유지된 걸까? 하지만 그 소년을 쇼군으로 만든 게 호조 가문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쿠후의 실권은 호조 가문에게 넘어갔다. 토끼를 잡은 마당에 어차피 유명무실해진 다른 성 씨의 쇼군을 살려둘 필요는 없다. 때마침 사네토모는 성장하면서 교토의 귀족 문화를 동경하게 되었고 교토의 천황 세력에게 접근해 호조 가문을 견제하려 했다. 결국 호조 요시토키는 요리이에의 아들인 구기요(公曉)를 시켜 사네토모를 죽이게 한 뒤 구기요마저 제거해버렸다. 이로써 쇼군의 가문은 요리토모의 사후 20년 만에 대가 끊기고, 바쿠후는 완전히 호조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한편 바쿠후 세력 내부에 분란이 일어난 것은 교토의 천황 세력으로서는 바라 마지않는 바다일본 역사에서는 바쿠후 정권이 생긴 이후부터 교토의 천황과 전통적 귀족 세력을 구게(公家, 공가)라고 부른다. 당시 교토에서는 고토바 상황이 원정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그는 바쿠후를 제거할 호기가 왔다고 믿었다. 때마침 요리토모의 대가 끊기자 호조 요시토키는 상황의 아들을 쇼군으로 모시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바쿠후를 제거하려는 판에 자기 아들을 적의 손에 넘길 바보는 없다. 그러자 요시토키는 요리토모의 핏줄을 이은 어느 귀족의 두 살배기 아들을 쇼군으로 옹립했다. 물론 요시토키 자신이 직접 쇼군으로 나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영웅 요리토모가 죽은 지 20년밖에 되지 않은 데다 미망인인 마사코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쇼군 가문의 성 씨까지 바꾸는 것은 그에게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이었을 것이다.

 

천황의 입장에서는 바쿠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천황은 그저 바쿠후의 힘에 굴복하는 것뿐이다. 천황과 바쿠후의 잠재된 갈등은 작은 계기만 주어져도 균열로 터져 나온다.

 

 

농민들의 생활 말을 이용해 곡식을 실어 나르는 일본의 농민들, 전통의 지배 귀족이 무너지고 신흥 무사 계급이 득세하면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되었다. 그 결과 농민들 가운데서도 점차 백성 묘슈들이 성장했다. 하지만 대다수 농민들은 종래의 영주만이 아니라 지토에게도 착취를 당해 나날이 궁핍해졌다.

 

 

마침 고토바는 자신의 애첩이 소유한 장원에 지토를 두지 말라고 바쿠후에 부탁했다가 거절당해 체면을 구겼다. 개인적인 원한과 정치적인 원한이 쌓여 1221년 고토바는 전국의 무사들에게 호조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모든 무사가 바쿠후 편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바쿠후조차 내분이 있었으니 지금이야말로 좋았던 옛날’, 천황 독주 시대를 되살릴 기회다. 이게 고토바의 생각이었는데, 실은 완전한 착각이었고 과거 천황의 권위에 대한 환상이었다. 바쿠후의 내분은 무사 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순수한 무사 정권으로 도약하기 위한 진통일 따름이었다. 말하자면 가마쿠라 바쿠후의 탄생에 기여한 실력 가문들이 무력을 통한 자유경쟁을 벌여 승자인 호조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요시토키는 교토의 선전포고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대군을 거느리고 교토로 진격했다. 또한 각지에서 들고일어나 바쿠후와 맞서주기를 기대한 전국의 무사들은 오히려 바쿠후의 휘하로 모여 들었다. 요시토키는 가마쿠라를 출발한 지 불과 20여 일 만에 별다른 싸움 없이 교토를 점령했는데, 이것을 조큐(承久)의 난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비록 반란이지만 실상은 진정한 실권자(바쿠후)가 명분상의 실권자(천황)를 누른 것이니 반란이라 할 것도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토와 바쿠후로 나뉘어 있던 이중권력은 사라지고 바쿠후 독재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바쿠후는 천황과 공가의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어졌다(압도적인 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쿠후는 천황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바쿠후는 천황 측이 또다시 반기를 드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교토의 슈고를 강화하고, 이를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라고 부르며 출장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바쿠후는 전국의 요충지에 탄다이를 두고 감시 활동을 했다).

 

이때부터 천황은 실권을 모두 잃었다. 심지어 제위의 계승이나 연호의 제정과 같은 중요한 사항마저 바쿠후의 결재를 얻어야 했다. 또한 창업자의 가문을 잃은 쇼군의 직위는 이때부터 황족 가운데서 선출해 대를 잇게 되었다. 이리하여 전통의 지배자인 천황에 이어 신흥 지배자인 쇼군까지 유명무실해지고 권력은 바쿠후의 중심인 호조 가문의 수장들이이 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바쿠후는 그때까지 손을 댈 수 없었던 황실과 공가 귀족들의 장원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절대 권력에 대한 추인으로, 바쿠후는 1232년에 조에이시키모쿠(貞永式目)라는 51개조의 독자적인 헌법마저 제정함으로써 일본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절대 권력의 천황이 중앙집권적 관료 기구를 통해 전일적으로 지배한 고대 천황제와 달리 바쿠후 시대에는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이 바쿠후 중앙 정부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영지를 독자적으로 지배했다. 바쿠후는 그들의 지배 방식이나 수탈의 정도에 대해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를 일본의 봉건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유럽이나 중국의 역사에서도 고대의 절대 권력을 거쳐 중세의 봉건시대에 이르고 다시 근대의 절대 권력이 다른 형식으로 재등장하는 과정은 일본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러나 유럽의 중세에 봉건영주들 지배했고 중국의 중세에 사대부 사회가 전개된 것에 비하면, 무사 정권으로 일관한 일본의 중세는 확실히 특이한 면이 있다.

 

 

 

 

시련과 극복

 

가마쿠라 바쿠후의 새 주인이 되고 나서도 호조 가문은 몇 차례 고비를 더 넘어야 했다. 호조는 가문의 이름도 도쿠소(得宗)’로 바꾸고 가문의 수장을 싯켄(執權)’이라고 불렀지만, 현실은 마냥 도쿠소와 싯켄으로 머물게 놔두지 않았다도쿠소나 켄이나 말뜻으로는 권력을 장악했다는 의미다. 도쿠소는 원래 요시토키의 법명(法名)이었으나 호조 가문의 대명사가 되었고, 켄은 도쿠소의 지배자라는 직책의 명칭이었으나 호조 가문이 세습함으로써 이 가문의 우두머리를 가리키게 되었다. 쇼군은 형식상으로 여전히 바쿠후의 서열 1위였지만 바쿠후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호조의 켄이었다. 조큐의 난 이후 호조에 반대하는 호족 가문들이 단결해 도전해오는가 하면 심지어 쇼군이 바쿠후를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쇼군은 원래 바쿠후의 수장이었으나 자기부정인 셈이다).

 

바쿠후는 그때마다 그럭저럭 도전을 물리치고 문제를 해결했으나 늘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신적인 권위를 지닌 과거의 천황과 달리 바쿠후는 실력만을 밑천으로 삼았으므로 같은 독재라도 천황 시대만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이런 허점을 정신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무사들은 불교와 신사라는 두 가지 신앙을 발달시켰다. 12세기 말에 호넨(法然)이 창시한 정토종은 종래의 귀족 불교와 달리 계율과 교의에 집착하지 않고 염불만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폈다. 정토종은 무사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또 신사는 천황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무사들을 정신적으로 단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조에이시키모쿠의 제1조는 바로 신사 숭배였다. 특히 호족들을 비롯한 고케닌들은 바쿠후에 종전과 같은 결집된 충성을 보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운도 영 따르지 않았다. 1231년의 기록적인 대기근을 비롯해 대규모의 지진과 태풍, 전염병 등이 잇따르면서 굶어 죽는 사람과 유랑민이 넘쳐나고 도둑 떼가 들끓었다. 유랑민을 잡아 노비로 팔아넘기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자 1240년에는 인신매매 금지법을 제정할 정도였다.

 

 

이것만 해도 끔찍한 사태였으나 진짜 최악의 위기는 바깥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대의 세계 최강 몽골 제국의 침략이다.

 

유사 이래 일본은 외부에서 도움은 받았어도 침략을 받은 적은 전혀 없었다(외부의 도움은커녕 무수히 외침만 겪은 우리 역사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고대에 일본에 문명의 빛을 전해준 것도 한반도의 도래인들이었고, 중국의 당 제국 시대에는 일본이 스스로 나서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입했다. 굳이 외부와의 관계에서 입은 피해를 따진다면 7세기 중반 백제가 멸망할 무렵 함선 400척을 파견했다가 전멸당한 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일본은 난생처음으로 외적의 침입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 외적이란, 아시아는 물론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진출해 유럽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은 세계 최강의 몽골군이었다.

 

30년에 가까운 고려의 치열한 항쟁을 물리치고 1258년에 고려를 정복한 몽골의 원 제국은 하찮게 본 한반도의 잠재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가 이렇다면 일본은 또 어떨까? 더구나 일본을 공격하려면 물살이 거센 현해탄을 건너야 한다. 원의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는 일단 손대지 않고 코 풀 생각으로 1268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자고 한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바쿠후는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오랜 내전을 겪으며 실력이 는 것이라고는 싸움 기술밖에 없다. 게다가 무사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아닌가? 바쿠후는 회의 끝에 그 요구를 거부하기로 결정한다. 몽골은 몇 차례 더 사신을 보낸 뒤 1270년에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당시 약관의 청년으로 막 바쿠후의 켄 자리에 오른 호조 도키무네(北條時宗, 1251~1284)는 결연히 전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대몽 항쟁 고려에서 제작된 커다란 몽골군의 군함을 일본군이 작은 배를 타고 와 기습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막강한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데는 병사들의 활약보다는 때마침 불어닥친 태풍의 덕이 컸다. 2차 세계대전에서 자살 특공대로 악명을 떨친 가미카제라는 명칭은 바로 이 태풍에서 비롯되었다.

 

 

드디어 1274년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은 900척의 함선과 33000명의 병력으로 원정을 출발했다(우리 역사에는 이것을 여몽 연합군이라고 부르지만 고려군은 몽골에 징발된 것이니 옳은 명칭이 아니다)당시 몽골은 점령지의 군대를 징발해 정복 전쟁을 계속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예를 들면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킬 때도 몽골은 남송인들을 써먹었다. 일본 침략을 준비할 때는 한술 더 떠서 고려에 병선의 제작을 맡겼는데, 이에 동원된 인부와 목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고려로서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젖기도 전에 남의 나라의 전쟁 준비에 제 나라 백성들의 피와 땀을 바친 것이니, 커다란 치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측에서 보면 고려는 몽골에 부역해 침략을 도운 용병인 셈이다. 일본 원정군의 고려 측 지휘자는 그전 해인 1273년 몽골이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할 때 책임을 맡은 김방경이었는데, 과연 그는 어떤 심정으로 일본 원정에 임했을까? 20세기 후반 아무런 이해 관계도 없는 베트남에서 미군과 함께 싸운 한국군 병사들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원정군은 쓰시마와 이키를 순식간에 정복하고 규슈에 상륙했다.

 

단 하루만의 교전으로 일본 무사들의 자신감은 허망한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아무리 무림의 고수라 해도 정규군을 이기지는 못하는 법이다. 개인 전술에 능숙한 일본의 무사들은 몽골군의 집단 보병 전술에 속수무책이었으며, 더구나 생전 본 적이 없는 철포라는 신무기는 가히 경악의 대상이었다. 몽골군의 공격이 하루만 더 계속되었더라면 일본이 견뎌낼 수 있었을까?

 

날이 저물자 몽골군은 일단 공격을 멈추고 배로 돌아갔는데, 그때 일본의 구세주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몽골군이 생전 본 적도 없는 신무기, 바로 태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태풍은 산더미 같은 해일을 동반하면서 정박해 있던 몽골군의 선박을 궤멸시켜버렸다. 군대는 남은 함선들을 추슬러 간신히 귀환했다.

 

하지만 원 세조는 원정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송을 정복한 뒤 그는 1279년에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태풍의 도움을 잘못 해석해 신이 대일본을 수호하고 있다.”라고 믿은 도키무네는 그 사신을 참수해버렸다. 이로써 2차 원정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제 몽골도 지난번과 같은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그래서 세조는 아예 일본 원정을 전담하는 임시 조직을 구성했다. 1280년 고려에 설치된 정동행성(征東行省, 여기서 이란 물론 일본을 가리킨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철저한 준비와 더불어 이번에는 병력을 증강하고 남송의 군대도 동원했다. 4만 명의 몽골과 고려 연합군이 선발대였고, 남송군 10만 명이 후발대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원정군이 하카타(博多)에 상륙했을 때 공교롭게도 또다시 하늘이 일본을 도왔다. 때마침 불어닥친 태풍과 폭풍우로 4000척의 함선 중 200척만 남고 모조리 침몰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신이 일본을 지켜주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강적을 물리친 바쿠후는 그 태풍을 신이 보내준 바람, 즉 신풍(神風)이라고 불렀다. 신풍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가미카제(かみかぜ)가 되는데, 이것은 20세기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을 공격한 자살 특공대의 명칭이기도 하다.

 

유라시아 거의 전역을 정복한 대몽골군이 일본이라는 조그만 섬나라를 정복하지 못해 쩔쩔 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사실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지만). 그 뒤에도 원 세조는 몇 차례 일본을 침략하고자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행하지 못했다. 결국 1294년 세조가 사망함으로써, 일본 원정은 완전히 백지화되었다.

 

 

 

 

곪아가는 바쿠후 체제

 

비록 태풍의 덕이었으나, 일본 역사 전체를 통틀어 최대의 위기라 할 몽골 침략마저 물리친 바쿠후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일본 역사를 굴절시킨 것은 바깥의 적이 아니라 안에서 곪는 상처가 아니었던가? 바쿠후 체제도 안에서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무사 계급은 전쟁을 기본 기능으로 한다. 전쟁이 없는 평화기에는 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 그전까지는 새로 생겨난 바쿠후 체제가 안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진통과 후유증, 그리고 몽골이라는 대적의 침략 등으로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바쿠후 권력이 안정을 찾으면서 무사 계급 자체에 내재된 문제점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찍이 반전제가 무너지면서 탄생한 소규모 자영, 백성 묘슈들은 수백 년 동안 정치 상황이 격동하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성장해왔다. 14세기에 이르러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라는 결합체를 이루고 다이묘와 지토를 상대로 저항과 교섭을 벌일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이제 농민들은 과거와 같은 무지렁이가 아니며, 지역 사회도 예전처럼 무력만으로 쉽사리 제압할 수 있는 만만한 환경이 아니다. 장원의 다이묘들도 예전처럼 촌민들을 자기 수족 부리듯 대하지 못하고 그들과 적절히 타협해야만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판에 싸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순진한무사들이 지역에서 자리 잡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쿠후의 물리적 토대인 고케닌들은 전쟁이 끊기면서 본업이 사라지자 지역에서 각자 알아서 활로를 찾아야 했다. 물론 바쿠후는 친위대인 그들을 최대한 지원했으나 이제 고케닌 개인의 성공 여부는 그 자신의 능력에 달렸다. 사회의 변화에 잘 적응한 일부 고케닌은 다이묘로 성장해 지역에 터전을 잡기도 했으나 물정에 어둡고 씀씀이만 사치스럽고 헤픈 대부분의 고케닌은 몰락했다.

 

게다가 무사들 특유의 가부장적 질서가 흔들리는 조짐도 현저해졌다. 원래 무사 집안의 상속 제도는 가문을 잇는 적자(嫡子), 즉 소료(總領)가 다른 아들들(대개는 서자들)과 일족을 통제하도록 되어 있었다. 소료는 형제들에게 가문 소유지의 점유권만을 할당해주었는데, 막상 권리를 양도 받은 형제들은 사실상 그 토지를 자기 소유물로 여기게 되었다일찍이 반전제가 무너진 과정도 그와 비슷했는데, 더 크게 보면 이것은 왕토 사상이 흔들리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에서도 초기에 관리 급료 제도로 시행된 과전법(科田法)이 그런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모든 토지는 왕, 국가의 소유였으므로 완전한 사유화는 불가능했고 수조권(收租權)만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양반 가문에서 급료로 받은 과전을 가문의 소유지로 사유화하게 되자 과전이 부족해졌다. 원칙적으로는 토지 사유가 불가능하고 현실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 이런 이중성은 동양식 토지제도의 고질적인 현상이었다. 가부장적 질서가 튼튼하던 바쿠후 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그 문제점은 돌출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소료는 자신의 끗발이 서지 않게 되자 모든 재산을 단독으로 상속받으려 했고, 이는 당연히 형제들의 불만을 사 집안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끝나면서 할 일도 없어진 데다 이래저래 궁핍해지고 피폐해진 무사들은 점차 집단을 이루어 일종의 깡패 조직으로 변해갔다. 다이묘들은 이러한 무사들의 집단과 농민들이 조직한 저항체인 소를 악당(惡黨), 즉 아쿠토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했다.

 

 

 

 

바쿠후는 이런 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곳곳에서 제기되는 무사 집안의 상속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권위가 실추되었고, 호조 일족의 독재가 오래 지속되면서 내분이 점차 심화되었다. 몽골을 물리치고 나서 10여 년 동안에만도 바쿠후 내에서 대규모 반란 사건이 세 차례나 잇달았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세력은 해묵은 이념을 되살리고 상징을 중심으로 뭉치게 마련이다. 그 이념이자 상징은 바로 천황이었다.

 

때마침 당시의 천황인 고다이고(後醍醐, 1288~1339)는 바쿠후를 타도하겠다는 뜻을 품고 남몰래 세력을 키워오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에게는 바쿠후에 반대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문제는 수십 년 전인 1259년 고사가(後嵯峨, 1220~1271) 천황이 둘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준 데서 싹텄다. 당연히 맏아들과 둘째 사이에 대립이 생겨났다(당시 천황은 황실령이라는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과거와 같은 권력 다툼만이 아니라 밥그릇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자 바쿠후가 중재에 나서 두 천황이 번갈아 제위를 잇도록 했는데, 그렇다면 적법하게 제위를 물려받은 둘째로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고다이고는 바로 이 둘째 계열의 천황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과거 천황제를 복원하려는 굳은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고다이고는 꿈을 드러내기도 전에 내부의 배신으로 바쿠후에게 발각되어 유배되고 말았다. 고다이고가 발뺌하면서 사건은 얼추 무마되었으나 이것을 신호탄으로 각지에서 바쿠후를 타도하려는 공공연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방 호족과 다이묘의 봉기, 게다가 농민들의 소와 몰락한 무사들의 아쿠토 등도 여기저기서 들고일어나면서 전국은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었다.

 

이에 힘입어 고다이고는 유배지에서 도망쳐 나와 바쿠후 타도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바쿠후로서는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결국 150년간 일본을 지배하던 가마쿠라 바쿠후는 1333년 아시카가(足利) 가문과 닛타(新田) 가문에 의해 멸망했다. 둘 다 미나모토의 일족들이었으니 결국 가마쿠라 바쿠후는 미나모토 가문이 시작과 끝을 장식한 셈이다.

 

 

풍운아 고다이고 고다이고는 천황이 신적인 존재이자 절대 권력자였던 좋았던 옛날을 되살리려 노력했으나 시대착오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가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지는 데는 그의 노력이 일조했다. 바쿠후 타도를 위해 비밀공작을 벌이고 남북조시대라는 희한한 이중권력 체제까지 일궈낸 그의 개인적 능력과 파란만장한 생애는 흥미진진한 역사소설 감이다.

 

 

 3. 통일과 분열, 분열과 통일

 

 

그래도 답은 바쿠후

 

각고의 노력 끝에 권력을 잡은 고다이고 천황은 연호를 건무(建武)로 고치고 천황 정치를 부활하려 애썼다. 그러나 100여 년 전 고토바(後鳥羽)의 노력이 그랬듯이, 좋았던 옛날로 복귀하려는 고다이고의 꿈도 환상이었다.

 

우선 고다이고는 무사들의 반발을 고려해 이전의 고쿠시(國司)슈고(守護) 제도는 그대로 두고 그 지위에 자기 사람을 앉혔다. 다분히 절

충적인 방식이니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에게는 불만이다. 게다가 그는 바쿠후 타도에 앞장선 무사들의 논공행상에서 실패한 탓에 그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천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규모 건축 사업을 일으킨 것도 커다란 실책이었다. 고다이고의 중흥 정치는 1년도 못 되어 파탄에 이르렀다.

 

이런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인물은 바로 아시카가 가문의 수장인 다카우지(尊氏, 1305~1358)였다그의 원래 이름은 高氏였는데, 바쿠후 타도의 공으로 황족만이 사용하는 자를 하사받았다. 바쿠후를 타도하기 전부터 권력을 꿈꾼 다카우지는 호조를 무너뜨리면서 이미 로쿠하라탄다이를 손에 넣고 이곳을 통해 교토의 정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거병할 명분이 생겼다. 1335년 호조 가문의 잔당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다카우지는 반란의 진압을 빌미로 자연스럽게 가마쿠라를 점령하고 그곳에 아예 눌러앉아 교토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이리하여 가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진 지 불과 2년 만에 전국은 다시 전란에 휩싸였다. 잠시 동안 부활한 천황 체제에서 좋았던 옛날을 전혀 실감하지 못한 무사 세력들은 위기에 처한 고다이고를 도우려 들지 않았다. 다카우지는 천황 세력의 호족들을 손쉽게 제압하고 교토를 점령해 고다이고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1336년 교토에서 3년 만에 다시 바쿠후를 수립했다. 가마쿠라에 이어 두 번째로 들어선 무사 정권, 무로마치(室町) 바쿠후다.

 

 

바쿠후의 교체 가마쿠라 바쿠후로 바쿠후 시대는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무사들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가마쿠라를 타도하는 데 공을 세운 다카우지(위 그림)는 다시 교토의 천황 세력을 굴복시키고 이번에는 아예 전통의 귀족 도시인 교토에서 무로마치 바쿠후를 열었다. 일본의 바쿠후 교체는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 왕조 교체에 해당한다.

 

 

그러나 풍운아 고다이고는 아직 날개를 완전히 접지 않았다. 그해 12월 그는 교토를 탈출해 남쪽의 요시노에 터를 잡고 측근들을 모아 새 조정을 구성했다. 이로써 일본의 조정은 다카우지가 옹립한 고묘(光明, 1322~1380) 천황과 고다이고 천황의 두 개로 나뉘었다. 이때부터 바쿠후가 지원하는 북조와 아시카가를 반대하는 일부 가문들이 뭉친 남조가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이를 남북조시대라고 부른다남북조시대는 중국과 한반도, 일본 등 동양 3국의 역사에 모두 등장한다. 중국의 남북조시대는 4에서 보았듯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250여 년간이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통일 이후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발해 왕조가 들어선 시대를 가리켜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른다(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발해가 빠져 있어 한동안 발해사는 우리 역사에 포함되지 못했으나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노력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일본의 남북조시대는 중국이나 한반도의 경우와 달리 국가적 차원의 대립이 아닌 정권 간의 대립이며, 따라서 기간도 수십년에 불과하다. 국가를 넘어선 민족적 차원의 대립까지 포함시킨다면, 앞서 살펴본 남송 시대의 중국도 북부에 금, 남부에 남송이 있었던 남북조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는 서로 어느 정도 맞상대가 되었으나 점차 남조의 약세가 두드러졌다. 결국 3년 만에 고다이고는 영욕에 찬 세월을 뒤로하고 산중에서 병사하고 만다. 그러나 신중한 성격의 다카우지는 남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굳이 모험하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남조 세력은 북조의 일부 일탈 세력과 손잡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래서 남북조시대는 예상외로 약 6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다 1392년에 무로마치의 3대 쇼군인 요시미쓰(義滿, 1358~1408)의 강요로 남조의 천황이 북조에 제위를 넘기는 형식으로 전격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이 해는 공교롭게도 한반도에서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해이기도 하다. 혹시 이 사건이 일본의 정국에 다소나마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요시미쓰의 시대는 무로마치 바쿠후의 전성기였다. 그는 힘센 슈고들의 반란과 저항을 진압하고 바쿠후의 권력을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바쿠후 체제의 안정에 필요한 여러 가지 행정 기구들을 정비했다. 1378년 요시미쓰는 교토의 무로마치에 화려한 저택을 짓고 바쿠후를 이곳으로 옮겼는데, 아시카가 가문의 바쿠후를 무로마치 바쿠후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시대에 생겨난 일본의 전통적인 문화로 다도(茶道)가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무사들을 중심으로 불교의 선종이 크게 유행했다. 명상을 중시하는 선종에서는 아무래도 졸음이 가장 큰 적이었다. 그래서 졸음을 쫓는 수단으로 차를 마시는 것이 널리 퍼졌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이것이 발달해 다도가 되었다. 다도는 원래 차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차 품평회를 하던 차 모임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그 행위 자체를 즐기게 되면서 나름의 예법이 발달했다.

 

 

차를 마시는 무사의 모습 무로마치 시대에는 집 안에 다실을 갖추고 다도를 행했는데, 특히 쇼군들이 다도를 즐겨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림처럼 무사들은 조용한 다실에서 차를 마시며 세상의 번뇌를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다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1401년 요시미쓰는 중국 명 제국과 국교를 맺고 일본 국왕이라는 책봉을 받았다. 사실 여기에는 왜구의 활약이 크게 기여했다. 12세기부터 동북아시아의 해상에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일본의 남북조시대 동안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 무렵부터는 일본 서부 해안 지역 주민들의 상당수가 왜구로 변하면서 중국과 한반도의 해안 지대를 수시로 침탈했다.

 

이에 견디다 못한 명은 일본의 지배자인 무로마치 바쿠후에 왜구를 근절하는 조건으로 조공 무역을 허락했다. 일본으로서는 당제국 시대 이후 실로 오랜만에 중국과 정식 교류를 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명분으로나마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관계를 주창한 고대 천황 시대와는 달리 바쿠후는 이라는 중국의 책봉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답신에서 자신을 일본 국왕 신() 미나모토라고 자칭했다요시미쓰가 중국의 책봉과 의 칭호에 만족한 데는 천황이 상징적 존재로 남아있다는 사실도 한몫했을 것이다. 천황은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물러앉든 늘 일본 역사 속에 존재했다. 사실 무로마치 바쿠후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일본의 일반 국민은 천황의 존재조차 몰랐으나, 천황이라는 상징은 지배층에게 늘 일본이 중국과 대등한 제국이라는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를 맞은 것도 천황이 아닌 쇼군이었다. 조선의 국왕에 걸맞은 일본의 지배자는 천황이 아니라 그 아래의 쇼군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중국과 일본의 군신 관계200년 뒤 동북아시아에 피바람을 부르는 전란으로 이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해상의 깡패들 무로마치 시대에는 왜구가 극성을 부렸다. 중국과 한반도는 물론 무로마치 바쿠후도 왜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으나, 그 덕분에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무역 허가를 받아냈으니 왜구는 적어도 본국에는 애국한 셈이다.

 

 

하극상의 시대

 

바쿠후의 권력이 안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전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책봉으로 확보된 외부의 권위도 무사 정권 특유의 불안정성을 말끔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전통의 적인 세력 가문들의 도전은 그럭저럭 물리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지역 사회에서 성장한 슈고들이 바쿠후의 권력을 위협할 만큼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무로마치 바쿠후는 권력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슈고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슈고를 휘하에 복속시키면 유사시에 군사를 모으기도 쉬울뿐더러, 대개의 반란을 슈고가 일으키므로 위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의미도 있었다. 따라서 바쿠후는 슈고들을 배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슈고들은 전통의 장원 영주들을 잠식하면서 대영주로 성장했다. 슈고 출신이 다이묘가 되었기에 그들을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라고 부른다.

 

처음에 무로마치 바쿠후는 신흥 세력인 슈고 다이묘의 성장을 반기면서 이들을 통해 지역 사회의 무사와 농민 들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예전의 슈고와는 명칭만 비슷할 뿐 질적으로 다른 슈고 다이묘는 바쿠후의 통제마저 달갑게 여기지 않을 만큼 힘이 커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찍이 가마쿠라 바쿠후를 붕괴시키는 데 일조한 무사들의 아쿠토나 백성 묘슈들이 결성한 ()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아졌다. 사회적 계층 분화로 성장하고 신품종 벼와 삼모작 등 농업 기술의 발달로 부유해진 백성 묘슈들은 예전처럼 다이묘의 지배에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고 걸핏하면 들고일어났다. 15세기 초까지 그들은 거의 해마다 봉기와 폭동을 일으켰는데, 그 와중에 전국적으로 중세식 장원제도의 잔재가 제거되었다. 심지어 1459~1461년간에는 가뭄과 홍수의 천재지변이 몇 년간 계속되자 각지의 백성들이 교토로 몰려와 바쿠후에게 덕정(德政)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바쿠후는 이에 굴복해 13차례나 덕정령이라는 특별 조치를 발표해야 했다덕정령은 가마쿠라 시대에도 있었지만 무로마치 시대에는 내용이 달라졌다. 가마쿠라 시대의 덕정령은 생활이 어려워진 고케닌의 채무를 파기해주는 것이었는데, 초기에는 고케닌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그들을 더욱 궁지로 몰았다(근본적으로는 화폐경제로 바뀌는 시대적 추세에 고케닌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이 컸다). 고케닌이 가마쿠라 바쿠후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와 달리 무로마치 시대의 덕정령은 고케닌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재정난을 해소해주는 내용이었으므로 일종의 빈민 구제책이었다.

 

 

슈고 다이묘의 저택 일부 유력 슈고들은 강화된 권한을 바탕으로 바쿠후에 도전했다. 이 무렵부터 슈고에 지방 유력자라는 뜻의 다이묘가 붙어 슈고 다이묘라는 말이 생겼다. 바쿠후는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토에 거주하도록 강제했다. 그림은 낙중낙외도 병풍에 묘사된 슈고 다이묘 호소카와씨 저택이다.

 

 

이렇게 사회 전반적으로 동요가 심해지자. 마침내 바쿠후 권력 상층부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무사 권력답게 대응책은 역시 싸움이었다. 남북조시대 이래 50여 년간 소규모의 반란 외에는 비교적 평화와 안정을 누린 바쿠후는 1467년에 둘로 편을 갈라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쇼군 직의 계승을 둘러싸고 당시 바쿠후의 세력 가문인 호소카와(細川)와 야마나(山名)가 맞붙은 것이다.

 

이것을 오닌(應仁)의 난이라고 부르는데, 단순한 권력투쟁에서 비롯되었지만 때가 때인 만큼 삽시간에 일파만파로 번졌다. 전국 각지의 슈고 다이묘들이 복잡하게 연루되면서 이 사태는 무려 11년간이나 질질 끌었다. 결국 나중에는 싸움에 참가하는 무사들이 없어 흐지부지되었으나, 이 와중에 그나마 꺼져가는 불씨와 같은 처지였던 천황이나 쇼군 같은 전통적 권위는 완전히 잿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권위의 실체와 상징이 사라지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졌다. 다이묘와 무사 들은 천황만이 아니라 쇼군조차 이빨 빠진 호랑이로 보았다. 백성 묘슈들마저도 지역의 다이묘나 중앙의 바쿠후를 우습게 여겼다. 당시에 생겨난 말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일상용어로 사용되는 하극상이다. 오닌의 난으로 시작된 하극상과 전란의 회오리는 다이묘와 무사 들의 영토 전쟁으로 바뀌면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한 세기 동안 일본 전역은 전란으로 얼룩진 센고쿠(戰國) 시대로 접어든다.

 

기존의 전통이나 서열, 권위 등이 모조리 몰락했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슈고 다이묘든, 고쿠시든, 백성 묘슈든 경제적 부와 대세를 읽는 눈을 가진 자들은 누구나 대영주가 될 수 있었다. 그 반면 그런 실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은 무로마치 바쿠후와 함께 급격히 몰락했다. 심지어 조정과는 다른 별도의 연호를 만들어 쓰는 지방도 생겨났다(연호는 단일 정부의 상징이다), 1502년에 고카시와바라(後柏原, 1464~1520) 천황은 돈이 없어 즉위식도 치르지 못하게 되자 헌금을 명했으나 담당 관리가 거부하는 굴욕을 당했다. 일본 역사상 센고쿠 시대만큼 천황의 권위가 실추된 적은 없었다.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고 했던가? 하극상이 지배하는 센고쿠 시대에는 출신도 배경도 알 수 없는 무수한 영웅들이 출현했다. 당시 일본의 야사를 장식하는 사이토 도산(齋藤道三)이나 호조 소운(北條早雲) 등의 센고쿠 다이묘들이 그들이다. 이들의 생활 수칙은 무시무시하면서도 황당했다. “강도질은 무사의 습성이다.” “부부가 한자리에 있을 때에도 칼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시대를 거치면서 발달한 일본 특유의 무사도 정신은 하극상의 시대에 도둑 떼의 처세술로 변질되고 말았다1950~1960년대에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는 센고쿠 시대를 주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대하소설을 썼다. 일본에서 얻은 큰 인기를 바탕으로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도 대망(大望)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1980년대까지도 정치가와 기업가는 물론 사회운동가들도 역사의 지혜를 배운다는 의도에서 이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도대체 그들은 난세를 지배한 일본의 무뢰패들에게서 무엇을 배우려한 걸까? 냉전 시대, ‘대망이라는 허황한 제목, 작가의 극우적 성향이 열렬한 반응을 얻었던 그 시대 우리 사회는 16세기 일본의 센고쿠 시대처럼 황폐했다.

 

 

센고쿠 시대의 출발 오닌의 난의 전투 장면이다. 살얼음 같은 평화가 유지되던 남북조시대가 끝나자마자 150년에 걸친 전란,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림에서와 같은 치열한 전투는 초기에만 있었을 뿐 오닌의 난은 미적지근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질질 끌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천황이나 쇼군의 전통적 권위가 약화되면서 하극상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떠오르는 별, 노부나가

 

하극상의 시대가 한동안 지속되면서 점차 실력의 우열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저마다 대권 후보로 나서겠다고 외쳤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어지러이 벌어졌다. 그 결과 남은 후보들은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라는 한 가지 용어로 통일되었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누구나 대권을 꿈꾸었으나 이들 간에도 점차 떠오르는 별이 생겨났다. 가장 빛나는 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였다.

 

노부나가는 능력도 출중했으나 인재를 보는 안목도 뛰어났다. 그는 고향인 오와리(尾張, 지금의 나고야 동쪽)에서 일어나 인근 미카와(三河)의 다이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를 휘하에 끌어들였다. 그 덕분에 불과 스물여덟 살인 1560년에 도카이(東海) 최고의 다이묘인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물리치면서 실력자로 떠올랐다. 계속해서 그는 주변의 경쟁 다이묘들을 차례 차례 쓰러뜨리고 1568년 마침내 교토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중앙 권력을 틀어쥐었다는 대외적 선언이 필요했다. 노부나가는 즉각 현직 쇼군인 요시히데(義榮)를 끌어내리고 그의 동생 요시아키(義昭, 1537~1597)를 새 쇼군으로 옹립했다. 쇼군의 가문인 아시카가는 오래전부터 허수아비였으니, 새 쇼군은 노부나가의 정치적 선언을 대신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교토에 입성해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둔 노부나가에게는 세 가지 적이 있었다. 첫째는 대규모 승병대를 거느리고 교토 남쪽에 자리 잡은 대사원인 엔랴쿠사(延曆寺), 둘째는 경쟁 관계에 있는 전국의 다이묘들, 셋째는 오사카의 혼간사(本源寺)를 중심으로 하는 농민 봉기 세력이었다. 그 세 가지 적은 모두 대권 선두 주자인 오다 노부나가를 반대하고 쇼군 요시아키와 결탁했다. 노부나가는 이 세 적을 각개격파하기로 결정했다.

 

1571년에 노부나가는 사원 세력을 공격해 그들의 거점인 엔랴쿠사를 불태워버렸다. 이에 반발해 쇼군인 요시아키가 거병했으나 이미 적수가 아니었다. 노부나가는 저항을 간단히 제압하고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요시아키를 폐위해버렸다. 이로써 두 번째 바쿠후인 아시카가 가문의 무로마치는 130여 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다음에 노부나가는 한때 그에게 패배의 쓴잔을 안겨준 강호 다케다(武田) 세력을 1575년의 나가시노(長條) 전투에서 궤멸시켜 사실상 단일 대권 후보로 등록했다. 마지막 남은 경쟁자인 혼간사는 1570년부터 장기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엔랴쿠사의 몰락으로 대세가 결정되는 것을 본 혼간사는 마침내 1580년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노부나가는 한 세기에 걸친 센고쿠 시대를 끝내고 전 일본의 통일을 눈앞에 두었다.

 

16세기 중엽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에 철포를 전한 덕분에 당시는 이미 총과 화약이 전쟁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량의 조총과 탄약을 조달할 수 있는 경제력이 전쟁의 관건이었다. 이 점은 노부나가가 승리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또한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들은 대규모 상비군을 필요로 했으며, 군대의 지휘관만이 아니라 하급 무사까지도 농민들로 대충 충당하지 않고 전문 전투 집단으로 충원했다. 조총을 비롯한 무기의 발달, 역사상 최초의 열도 통일, 게다가 전후 남아도는 대규모의 상비군, 이 세 가지 변수는 향후 일본의 거취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라는 난폭한 방식을 통한 대외 진출이었다.

 

 

무장하지 않은 오다 노부나가 센고쿠 시대 최대의 영웅 노부나가의 모습, 세력 가문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무로마치 바쿠후마저 철폐하는 데 성공했으나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통한의 죽임을 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에도 바쿠후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모두 당시 노부나가의 부하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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