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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 4장 불교에서 말하는 효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 4장 불교에서 말하는 효

건방진방랑자 2023. 3. 29.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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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효

 

 

불교와 유교의 충돌

 

 

효의 문제는 기독교의 격의(格義)의 틀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지만 이미 불교가 한자문화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민중 속에 그 정체성을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거치지 않을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나라의 스님 승우(僧佑)가 찬한 홍명집(弘明集)이나 당()나라의 스님 도선(道宣, 596~667)이 증보한 광홍명집(廣弘明集)에 이미 불교와 유교의 가치의 충돌이 잘 묘사되어 있다. 우선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그 자체로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윤회한다는 신불멸(神不滅)의 생각은 음양ㆍ귀신ㆍ혼백의 자연주의적 논리로 볼 때 매우 황당한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유자들은 신멸론(神滅論: 인간의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멸한다)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출가인이 삭발을 한다는 것도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이라고 한 효경』 「개종명의장의 종지(宗旨)에 어긋난다.

 

그리고 출가한다는 것 자체가 음양의 근본을 어기는 것이요, 효의 마당인 가정을 꾸리지 않고 독신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효 중의 불효일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종법(宗法)의 훼멸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출가자가 머리를 삭발하고, 가사를 입고, 군왕(君王)에게도 경례하지 않고, 부모에게도 절하지 않는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의 문제는 요즈음 여호와의 증인 사람들이 군복무문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보다도 더 중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세속권위 거부의 행태는 모두 효의 대본을 파괴하는 짓이었다.

 

이러한 불교의 행태는 유교문명에 대한 일대 도전이었으며, 역설적으로는 효의 개념을 확대시키는 계기도 되었던 것이다. 대정대장경 제3(No.156)에 실려있는, 79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은 이미 후한(後漢) 때 번역된 책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보다 후대에 유교의 도전을 받으면서 중국에서 구성된 한문경전임이 확실하다. 오늘의 형태로 완성된 것은 10세기 즈음으로 추정된다.

 

아난(阿難)이 탁발하기 위하여 왕사성에 나왔다가 6사 외도의 한 바라문으로부터 너의 스승 고타마 싯달타(瞿曇)는 아주 불효한 놈이라고 비난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세상에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하였으니 어찌 악인이 아닐소냐! 장성하여서는 궁성의 담을 뛰어넘어 몰래 출가하니 부왕은 괴로워하며 미칠 듯한 마음으로 괴로워하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부왕은 얼굴에 물을 뿌려 7일 만에야 깨어나서 큰 소리로 통곡하고 슬피 울며 말했다: “이 나라는 네 것이고 나에게는 오직 너 하나만 있을 뿐인데 어째서 나를 버리고 깊은 산으로 들어간단 말이냐!”

 

또 부왕이 궁전을 지어주고 야쇼다라(瞿夷, yaçodharä, 耶輸陀羅)에게 장가까지 들게 하였으나 부부의 예도 제대로 행하지 아니 하였으니 참으로 은혜를 모르는 인간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불교에서 말하는 은()의 의의를 설하는 경전이 바로 이 대방편불보은경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은(報恩)개념은 중국적 효()에 대한 불교의 아폴로지(apology, 변명)인 것이다. 그 요점인즉슨, 윤회전생(輪廻轉生)의 기나긴 시간에서 보면, 부처님을 망은(忘恩)의 무리로서 비방하는 것은 현세에 일어난 일만에 국한하여 보는 매우 편협한 견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모든 중생의 부모가 되었으며, 모든 중생도 또한 부처님의 부모가 되었다. 부처님의 출가는 모든 중생을 고뇌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의 출가야말로 가장 큰 보은행이라고 설파한다. 참된 보은(報恩) 즉 대효(大孝)는 큰 자비심을 가지고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각 품() 안에서 부처님의 전생의 인물들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효행을 하고, 은혜를 갚는 모습을 보여준다.

 

 

 

 

 목련존자와 우란분회: 초윤리와 일상윤리의 접합

 

 

이러한 불교의 아폴로지는 표면적인 불효(不孝)를 본질적인 대효(大孝)로 한 차원을 높이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는 맥락에서 보편주의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불교는 본시 가족윤리나 세속윤리를 초월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효와 같은 세속윤리는 근원적으로 고해(苦海)의 한 원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초윤리적(trans-ethical) 주장만으로는 민중의 삶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기가 불가능했다. 보편적 가치는 일상적 가치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이러한 초윤리와 일상윤리의 접합을 위하여,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해내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의 목련존자(目連尊者, MahāMoggallāna)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 이야기에 기초하여 715일 우란분회(盂蘭盆會)라는 중요한 불교제식이 성립한다. 실제로 이 우란분회는 효()를 중시하는 중국문화 속에서 성립한 제식이며 한국과 일본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보시(布施)의 공덕을 선조공양(先祖供養)과 연결시킨 것으로 쉽게 말하자면 불교화된 조상제사라고 말할 수 있다.

 

우란분이란 산스크리트어 울람바나(ullambana)의 속어형에서 파생된 역어인데, 오람바나(烏藍婆拏)라고 음역하기도 한다. ‘도현(倒懸)’이라고 한역(漢譯)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거꾸로 매달린 자의 고통을 의미한다. 우란분이란 생전의 악업으로 인해 거꾸로 매달린 듯한 부자유와 고통을 겪는 선망부모와 시방의 유주무주 고혼들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부처님의 위신력과 청정승가의 수행력에 의한 가피(加被: 구원의 힘을 얻음)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산자가 죽은 이의 명복을 기원하는 우란분재의 기도는 효행으로 인식되어 대중의 삶 속으로 깊게 울려퍼졌다.

 

목련경은 강창문학(講唱文學)으로서 당대(唐代)에 크게 성행하여, 그 뒤로도 꾸준하게 한ㆍ중ㆍ일 효문화권의 대중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불교가 유교나 기독교나 여타 어느 종교에 비하여 돋보이는 점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화려한 문학성이다.

 

 

 

 

 양주동 작사의 어머님 마음부모은중경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기억하고 잘 부르는 노래에 어머님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 양주동이 작사하고 이흥렬이 작곡한 것이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시며

손발이 다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무엇이 넓다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양주동의 작사는 바로 우리나라 정조 때 간행된 화산(花山) 용주사(龍珠寺) 판본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정종분(正宗分)속에 나오는 십게찬송(十個讚頌)에 기초한 것이다. 우선 그 게송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일 회탐슈호은(懷耽守護恩)
나를 잉태하여 지켜주신 은혜
제이 님산슈고은(臨産受苦恩)
해산에 즈음하여 고통을 감내하신 은혜
제삼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
제사 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어 먹여주시는 은혜
제오 회간취습은(廻乾就濕恩)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는 은혜
제육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
젖을 먹여 키워주시는 은혜
제칠 셰탁불뎡은(洗濯不淨恩)
깨끗하지 않은 것을 씻어주시는 은혜
제팔 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
자식이 먼 길 갔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
제구 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
자식을 위해서라면 악업이라도 지으시는 은혜
제십 구경련민은(究竟憐感恩)
자식을 늙어 죽도록 끝끝내 애처롭게 여기시는 은혜

 

노래가사에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시며라는 것은, 언뜻 젖은 기저귀를 갈아준다는 의미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런 뜻이 아니다. 옛날에는 집이라도 허술한 곳간 같아서 비도 새고, 구들에 불을 때도 젖은 곳이 많았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항상 자식을 마른 자리에 뉘이시고 당신 자신은 젖은 자리에 눕는다는 이야기다. 그 정경(情景)이 매우 절절하다. 제구의 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을 주석가들이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를 꺼려하지만, 부모마음의 극단적 사례를 표출한 것으로 있는 그대로 자식을 위해서라면 악업이라도 짓는 것이 엄마의 마음이라고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자식 위해 닭 한마리 잡아도 악업이지 않겠는가?

 

 

 

 용주사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효심

 

 

양주동이 왜 부모은중경을 가지고 노래를 지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조선후기부터 부모은중경이 대중에게 보편화되어, 누구나 그 가사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모은중경은 대부분이 정조 때 용주사에서 간행한 판본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좀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11세에 체험하였다. 그리고 과묵하고 시세를 외면한 듯한 현명한 행동거지로 위험에 대처하며 어려운 세월을 견디어 내었다. 그리고 25세에 등극한다(1776). 정조는 등극한 후 가슴앓이로만 간직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고,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하여 새로운 국가기풍을 진작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는 우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위호만 얻은 아버지를 장헌(莊獻) 세자라고 추존하였고 정조 13(1789)에는 방치되었던 아버지의 묘를 옮기는 일에 착수한다.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새 묘소를 현륭원(顯隆園)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실려있는 내용에 의하면, 정조는 우연한 기회에 장흥(長興) 보림사(寶林寺)의 보경(寶鏡)이라는 승려를 만났는데, 그가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을 정조에게 바치었다고 한다. 정조는 워낙 성리학에 해박하고 심오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기에 불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자세를 지니고 있었고 탄압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은중경을 읽자마자 마음에 크게 동하는 바가 있었다. 이에 보경 스님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임명하고,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보경은 팔로도승통(八路都僧統)과 용주사도총섭(龍珠寺都摠攝)을 겸직하게 되었고 부모은중경을 각()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그 경판(經板)을 용주사에 보관하게 하였다.

 

속설에 의하면 정조가 현륭원을 만들고,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극진하여 수차례 능행(陵幸)을 하던 중, 지나는 길목에 작은 암자가 눈에 띄어 그 암자를 중창하고 내세에서의 부모님 명복을 빌기 위해 부모은중경을 목각하여 봉안토록 했다 하나, 이러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용주사는 기존의 작은 사찰을 중창한 것이라기보다는 거의 새로운 창건이며, 시기적으로도 거의 현륭원의 묘역공사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용주사는 현륭원을 지키는 능침사찰(陵寢寺刹,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설치된 사찰)로 창건된 것이다. 용주사는 17941월에 착공되어 17969월에 완공된 수원화성과 행궁(行宮)보다도 훨씬 먼저 창건되었다.

 

1790219일에 터를 닦는 불사를 기점으로 같은 해 929일에는 대웅보전의 불상이 점안되었다고 하니대웅보전 닫집 속에서 발견된 원문(願文)에 의하면 101일에 점안재(點眼齋) 거행, 불과 7개월 만에 총 147칸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의 대가람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정조가 대규모의 인력을 투여하고 전국의 시주를 격려하여보시금의 총액이 87,505냥으로 수원성 축조 금액의 10분의 1 정도 거국적인 사업으로 자기 아버지 무덤의 재궁(齋宮)을 지은 것이다.

 

한마디만 역사적 사실을 첨기하면 용주사가 창건되기 전에는 이 곳에 성황산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는데 이 절은 신라 문성왕 16(854)에 염거(廉居)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조선금석총람에 실려있는 원주 흥법사염거화상탑지(興法寺廉居和尙塔誌)에 의하면 염거 화상이 입적한 해는 844년이다. 연대상의 착오가 있다, 염거는 가지산문의 제2대 조사였다. 가지산문은 한국 선불교를 대표하는 선문이며 그 개산조가 선덕왕(宣德王) 5(784)에 입당(入唐)하여, 마조(馬祖) 도일(道一)의 정통제자인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의 서당지장대사(西堂智藏大師, 735~814), 그리고 마조 도일의 종풍을 진작시킨 또 하나의 입실제자인 백장회해선사(百丈懷海禪師, 749~814)에게 직접 남종선을 배운 우리나라 최초의 선사 도의(道義)였다. 염거는 양양 진전사(陳田寺)에서 도의에게 배웠고, 그 도통을 체징(體澄, 804~880)에게 물려주었는데, 체징은 전남 장흥 보림사(寶林寺)에 주석하면서 가지 산문의 제3대 조사가 되었다. 그러나 가지산문은 체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규모를 갖추고 선승을 배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체징이야말로 가지산문의 실제적 개창주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장흥 보림사가 자리잡고 있는 산이 바로 가지산이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정조에게 부모은중경을 선사한 인물이 장흥 보림사의 보경(寶竟)이라는 스님이었다는 사실이다. 시대적으로 1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격하고 있지만 장흥의 보림사와 화산의 갈양사는 우리나라 조계종의 가지산문이 개창될 때부터 이미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고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천년을 지속하여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부모은중경이야말로 가지산문이 인류사에 제시한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인도의 경전도 아니요, 중국의 경전도 아니다. 가지산문에서 나온 우리나라 토착경전인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주체적 학문적 성과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추론에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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