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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건방진방랑자 2023. 3. 29.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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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행실도(行實圖)의 역사

 

 

조선왕조의 불교탄압, 대한민국의 반공교육

 

 

주자학의 교조주의적 성행으로 조선왕조는 불교를 탄압했다[崇儒抑佛]. 그 탄압의 수준이 이승만박정희 정권하에서 좌파지식인을 탄압하는 것보다도 더 악랄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탄압은 물리적 탄압 그 자체로 유지될 수가 없다. 반드시 성공적인 반공교육이 수행되어야만 한다. 정신적인 가치관의 전환이 대중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으면 탄압은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권력의 압제란 부정적인 방법만으로는 무기력한 듯이 보이는 대중 속에서도 곧 한계를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교육이란 추상적인 논리로써는 가능하지 않다. 대중에게 격조 높게 역사 필연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을 설파하는 칼 포퍼(Karl R. Popper, 1902~1994)식 반공논리를 가르쳐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서민들에게 주자학의 이기론적 배불론(拜佛論)이라는 것은 포퍼 논리의 느낌 이상으로 다가올 수가 없었다. 대중은 비근한 구체적 사례와 상상의 실마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이미지ㆍ영상을 필요로 한다.

 

박정희시대의 가장 성공적인 반공교육의 사례는 아마도 이승복 어린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순결한 아동의 애절한 절규가 있고, 처참한 희생이 있고, 또 무한한 감정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린이라는 입지가 있다. 그에 반하여 무자비한 빨갱이의 만행과 잔인함이 부각되고 극적인 장면들이 듣는 이들의 가슴을 서늘케 만든다. ‘이승복 어린이라는 영웅은 거국적인 대규모의 대중세뇌자료로 곧 활용된다. 전국의 국민학교 운동장에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이 만들어지고, 이승복의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리며, 그를 소재로 한 만화ㆍ드라마가 만들어지고 또 글짓기대회ㆍ웅변대회가 조장된다.

 

세종 10(1428) 927, 진주(晋州)에 사는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그 아비를 살해했다는 사건이 형조에 의하여 계(: 임금께 보고함)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세태를 한탄했다.

 

 

계집이 남편을 죽이고, 종이 주인을 죽이는 일은 혹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제 아비를 죽이는 자까지 있다고 하니, 이것은 반드시 내 덕이 비색(否塞)하여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婦之殺夫, 奴之殺主, 容或有之. 今乃有殺父者, 此必予否德所致也.

 

 

이 사건을 놓고 조정의 대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핵심은 이하범상(以下犯上)’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하극상의 현실이 아버지까지 죽이는 데까지 이른다고 하면 모든 금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면, 임금이 잘못했다고 임금을 죽이는 일까지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차마 아버지를 죽일 수 없듯이, 차마 임금에게는 거역 못한다고 하는 어떤 윤리적 장벽이 없으면, 인간의 합리적 판단만으로는 세상의 질서는 무너지고 만다고 보는 것이 유교 모랄리스트(moralist)들의 생각이다.

 

그 사건이 보도된 후 며칠 후 103, 세종은 신하들과 이 사건에 관한 대책을 논한다. 이때 판부사(判府事) 변계량(卞季良)효행록(孝行錄)등의 책들을 광포(廣布) 시켜서 여항(閭巷)의 보통사람들이 항상 생활 속에서 독송(讀誦)하게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효제와 예의의 마당[孝悌禮義之場]’으로 그 몸이 젖어들어가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세종은 직제학(直提學) 설순(偰循)에게 효행록(孝行錄)의 간행을 명한다.

 

 

 

 

 효행록삼강행실도

 

 

효행록(孝行錄)이란 어떤 책인가? 이것은 고려 말 충목왕 2(1346) 경에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주자학의 보급에 혁혁한 공을 세운 문신 권부(權溥, 1262~1346)가 그의 아들 권준(權準, 1280~1352)과 함께 효행에 관한 기록을 모아 엮은 책이다. 늙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권준이 중국의 효자 24명에 관한 이야기를 화공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한 뒤, 그것을 당대의 명문장가였던 이제현(李齊賢, 1287~1367)에게 찬()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여 만들었다. 이것이 전찬(前贊)이다. 이 전찬을 보고 아버지 권보는 자기 스스로 또 다시 38명의 효행을 골라 다시 이제현의 찬을 지어 받았다. 이것이 후찬(後贊)이다. 이 전ㆍ후편을 합하여 여기에 다시 이제현의 서문을 더해 한 책으로 만든 것이 효행록(孝行錄)이다.

 

효행록입학도설(入學圖說)의 저자로 유명한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정몽주정도전과 함께 활약한 고려 문신으로 조선왕조 개국공신이 주해를 달고권근의 후서(後序)는 태종 3(1403)이다 태종 5(1405)에 간행되었는데, 주해자 권근은 바로 권보의 증손자이다.

 

김화시부(金禾弑父) 사건을 놓고 세종이 대신들과 토론하는 내용을 보면 대신들은 이러한 이하범상(以下犯上)의 죄는 도저히 형률(刑律)의 조문을 가감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길이 없으므로 효행록을 중간(重刊)하여 널리 보급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종은 불만이 많았다. 왜냐하면 효행록에 실린 사례가 전편 24, 후편 38인 모두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태종 131230실록기사에 보면, 서연관(書筵官)에서 병풍을 만드는데 효행록에서 뽑아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이제현의 찬과 권근의 주()를 쓰게 하였고, 그것이 이루어지자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하여금 그 뜻을 풀이케 하였는데 충녕이 그 뜻을 곡진하게 다 해석해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니 세종(충녕)효행록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효행록을 중간하자고 건의한 것에 대한 세종의 반응을 기록한 내용을 정확히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세종 10103일 기사).

 

 

현재 우리나라의 풍속이 너무 각박하고 사악하게 되어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가 생겨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효행록을 간행하여 우매한 백성을 깨우치고자 한다.

今俗薄惡, 至有子不子者, 思欲刊行孝行錄, 以曉愚民.

 

이러한 방식이 시폐를 구하는 급선무는 아닐지라도 실상 이러한 문제는 교화를 우선으로 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땅히 이미 찬술된 24인의 효행에다가 또 다시 20여 인의 효행을 보태어 편집해야 할 것이다. 고려조와 삼국시대에 효행으로 특출한 사례들을 또한 모두 수집하여 한 책을 찬성(撰成)토록 하되, 그것을 집현전(集賢殿)이 주관케 하라.

此雖非救弊之急務, 然實是敎化所先, 宜因舊撰二十四孝, 又增二十餘孝. 前朝及三國時孝行特異者, 亦皆裒集, 撰成一書, 集賢殿其主之.

 

 

실록의 기사는 자세히 뜯어보면 매우 부정확한 기록이다. 효행록은 이미 24()에다가 38효를 더한 책이므로, ‘24인의 효행에다가 또 다시 20여 인의 효행을 보태어 편집하라는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시 보태는 20여 인의 효행이 중국 것이 아니라, 고려조와 삼국시대의 효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지도 문맥상 명확하지는 않다. 그리고 기존의 효행록을 중간(重刊)하라는 명령인지, 효행록외로 새로운 책을 별도로 출판하라는 명령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세종 연간에 효행록은 기존의 효행록의 모습대로 간행되었고선덕계축추팔월(宣德癸丑秋八月)의 발문(跋文)이 있는 세종 15년의 중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현존한다, 효행록의 핵심적 내용을 흡수하고 거기에 우리나라의 사례를 첨가한 새로운 방대한 책이 집현전(集賢殿)에서 편찬되었다. 이 편찬작업은 세종 14(1432) 6월에 마무리 되었고, 교정작업을 거쳐 세종 16(1434)에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를 마쳤다. 세종은 종친과 신하들에게 이 책을 하사하고 전국의 각 수령에게 배포하였다. 세종 164272번째 기사에서 세종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삼강(三綱)이란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의 큰 벼리이다. 군신ㆍ부자ㆍ부부가 마땅히 먼저 알아야 할 바이다. 이제 내가 집현전의 유신들에게 명하여 고금의 사례들을 편집하고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그림을 덧붙였다. 이 책을 이름하여 삼강행실(三綱行實)(실록에서 삼강행실은 모두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의미한다)이라 하고, 상재하여 서울과 지방으로 널리 유포하고 우선 학식있는 자를 선발하여 그들을 훈도하고 부추기어 권면하고, 어리석은 남정네와 아녀자들이 모두 깨달음이 있게 하여 그 삼강의 도리를 다하도록 만들게 하고자 한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하뇨?

三綱, 人道之大經, 君臣父子夫婦之所當先知者也. 肆予命儒臣編集古今, 幷付圖形, 名曰三綱行實, 俾鋟于榟, 廣布中外, 思欲擇其有學識者, 常加訓導, 誘掖獎勸, 使愚夫愚婦皆有所知識, 以盡其道, 何如?

 

 

이렇게 해서 탄생된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의 출판역사상 민중에게 가장 심원한 영향을 끼친 책이 되었다. 삼강행실도는 조선왕조를 뒤흔든 막강한 책이었다.

 

오늘날에도 정권이 교체되면 KBSMBC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장악하느냐를 놓고 실갱이를 벌인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라디오도 없었고, 신문도 없었다. 국민의 통제수단으로서의 매스컴이 부재하던 시대에 출판은 국가 권력의 상징이었다. 조선왕조가 하나의 거대한 출판사였고, 왕은 출판사 사장이었다고 생각을 해도 과히 틀린 유비(類比)는 아니다. 물론 요즈음 같이 민영화된 자유로운 출판계와는 달리 거의 독점적 출판권을 국가가 소유했고, 그 출판물의 유통구조가 법제화된 권력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과는 다를 뿐이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와 조선왕조 텔레비젼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를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들에게 배포하면서, 학식 있는 자들을 구하여 먼저 그 내용을 숙지케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반 백성에게 강습하도록 하였으나 이러한 하달방식의 강습이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향교에 일반백성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한다는 것도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또 이렇게 구차스러운 일에 지방 수령들이 열심일 까닭이 없었다. 국민들은 상부로부터 일방적으로 하달되는 도덕교육이라는 것에 신물이 날 뿐이었다.

 

그러므로 예조(禮曹)에서는 지방수령들이 삼강행실도를 통한 국민교화를 자기 임무 이외의 귀찮은 일로 여기는 풍조가 생겨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관찰사로 하여금 수하 수령들이 삼강행실도의 보급에 얼마나 열성적인가를 세밀히 살펴서 근무평가의 근거자료로 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의 구체적인 제도가 바로 효자ㆍ열녀의 포상이었다. 효자ㆍ열녀를 배출하는 집안이라야 여러 가지 우대적인 이익과 성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 획득의 체인과 맞물려 들어가게 되면 삼강행실도는 무서운 속도로 확산될 뿐 아니라 실제로 그 가치가 일반백성의 뇌세포 속으로 침투하게 마련이고 행동거지를 지배하게 된다. 삼강행실도의 영향으로 우리사회는 양계(兩系)사회에서 친계(親系)사회로, 이성(異姓) 양자에서 동성(同姓) 양자로, 혈통에서 종법으로, 불교에서 유교로 급속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주영하 외,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86~99.

 

얼마 전에 작고한 백남준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백남준: 옛날에도 비디오 아트가 있었다.

김용옥: 조선시대에도 테레비가 있었단 말이요?

백남준: 암 있었구 말구. 고조선시대에도 테레비는 집집마다 다 있었지.

 

그러면서 그는 한밤중의 둥그런 저 보름달을 가리켰다. 백남준의 설명에 의하면 동네방네 밤중이면 마당에 평상 펴놓고 모기불 피우며 모든 사람들이 KBS 테레비 화면과도 같은 보름달을 다 쳐다본다. 꼭 중앙방송을 전 국민이 똑같이 시청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 테레비는 리드아웃(read-out)하는 테레비가 아니라 리드인(read-in)하는 테레비인 것이다. 할머니가 손자 데리고 달나라 옥토끼 이야기를 해주는데 천차만별 그 버젼이 달라지는 것이다.

 

삼강행실도는 조선왕조의 가장 강력한 텔레비젼 방송이었다. 삼강행실도는 효자ㆍ충신ㆍ열녀를 각각 110 케이스를 모았다. 그러니까 330개의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330개의 스토리마다 전면에 판화가 있다. 그리고 후면에 한문으로 스토리가 적혀있고, 또 그 스토리에 대한 시()가 붙어있고 또 찬문()이 있다()와 찬() 중 하나만 있는 상황도 많다.

 

판화가 한 페이지의 전면(全面)을 차지하기 때문에 요즈음의 만화와 같이 다양한 스토리를 커트들의 시퀀스로써 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면의 판화 속에 다양한 시ㆍ공간의 사건들이 동시에 다 표현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냥 봐서는 잘 모르지만, 뒤의 스토리를 읽으면 그 판화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최초에 스토리를 판독하는 사람은 지식인이어야 하지만, 한번 스토리를 들은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판화만 보고서도 그 스토리를 대강은 엮어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판화의 효과는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에 따라 다양한 버젼의 이야기들이 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가(私家)에서도 아이들의 교육용으로 이 판화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담론의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330개의 채널을 가진 텔레비전였다.

 

 

 

 

 삼강행실도다이제스트 언해본의 등장

 

 

그러나 330설화의 한문본 삼강행실도3() 3()으로 그 분량이 방대하기 때문에, 대량으로 인출(印出)하여 대중에게 보급하기가 힘들었다.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동국여지승람등 각종의 문화서적을 편찬하여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고, 또 도학이념에 충실하면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새로운 사림세력에 의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성종(成宗)삼강행실도의 민중보급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세종삼강행실도를 만든 것은 훈민정음 반포 이전의 사건이었다. 따라서 성종은 삼강행실도를 간략화시키고 그것에 언해를 첨가하여 포퓰라 다이제스트(popular Digest)판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경기 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을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 구체화된다. 박승질이 임지로 떠나기 전에 하직인사를 하며 말한다(성종 20[1489] 61일 기사).

 

 

신이 근년에 상을 당하여 시골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백성이 자기 부모와 더불어 서로 힐난하며 사는 자도 있고, 또 형제가 서로 불화한 자도 보게 됩니다. 주상께서 이루어놓으신 태평성세에 이와 같은 풍속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마땅치 못한 일입니다.

臣近年遭喪在鄕, 見愚民與父母相詰者有之, 兄弟不和者有之, 不宜盛時有此風俗也.

 

세종조에 이미 삼강행실도를 경향 각지에 반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관부에는 아직 이 책이 구비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 허다하니 하물며 민간은 어떠하겠습니까?

世宗朝以三綱行實頒諸中外, 使人興起善心. 然官府尙未有此書, 況民間乎?

 

제가 생각하건대 삼강행실도라는 책은 앞면에 그림을 그렸고 뒷 면에 그 실제상황을 기술해놓고 있는, 사람 마음을 쉽게 끄는 좋은 책입니다. 이 책으로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면 풍속이 변할 수가 있으며 사람들의 가치관이 개혁될 수 있습니다.

臣意以爲三綱行實之書, 圖形於前, 記實於後. 若敎之以此, 則風俗可變, 人心可改.

 

단지 이 책은 너무 한만(汗漫: 분량이 많고 정돈된 맛이 없다)하여 어린 백성들이 이 책을 두루 다 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 방만한 사례들 중에서 특이하고 절실한 것들만 골라 다이제스트판을 만들어 인쇄하여 시골구석에까지 배포한다면, 여염의 보통 백성들까지도 그 내용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될 것이니 조선 풍속의 혁신(風化)에 크게 보탬이 될 것입니다.

但此書汗漫, 愚民未易編覽. 其中擇節行特異者, 抄略刊印, 頒諸村野, 使閭閻小氓, 無不周知, 庶有補於風化矣.

 

 

성종은 곧(206월 을사乙巳)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허침(許琛)과 이조정랑(吏曹正郞) 정석견(鄭錫堅) 두 사람에게 삼강행실도의 산정(刪定)을 명한다. 이 두 사람은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충신, 열녀를 각각 35명씩만 추려(105, 그러니까 330명에서 105명으로 줄은 것이다) 3() 1()의 형태로 편찬하였다. 그리고 상단에 언해를 가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또 언해를 읽어가면서 한문공부를 하는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성종 214월 계미조에, “삼강행실도를 경성(京城) 5(五部)8도 군현에 골고루 나누어주어 우부우부(愚夫愚婦)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1490년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490성종조에 완성된 삼강행실도산정언해본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알고있는 조선문명의 가치관을 형성시킨 가장 결정적인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경기관찰사 박승질의 말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1)

성종조 때까지만 해도 조선사회의 풍속이 충분히 효사상에 물들어있지 않은 사회였다는 것이다. 부모자식간에 서로 힐난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없는 상황이 비일비재한 자유로운 모랄의 사회였다는 것이다.

 

2)

세종조 때에 반포된 삼강행실도가 어떠한 고차원의 성리학 책보다도 민중의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 효율적이었다는 사실이다.

 

3)

판화의 효과가 대단히 우수했다는 사실이다.

 

4)

풍화(風化)’라는 표현이 입증하듯이 삼강행실도는 대중교육에 매스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바람에 쓸리듯 교화된다는 뜻의 풍화(風化)효경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은 본시 바람이면서 노래라는 뜻이다. 효경이 매장마다 ()의 인용으로 끝나는 것은 매장을 하나의 노래로서 인식했다는 뜻이다. 주희효경에서 의 인용을 제거한 것은 가장 큰 실수였다. 효경의 실제적인 한국판은 효경대의가 아니라 삼강행실도였다. 삼강행실도에는 매 일화마다 시()가 붙어 있는 것이다.

 

 

 

 

 중종의 시대는 삼강행실도의 전성기

 

 

삼강행실도산정언해본을 만든 성종 본인은 물론 위대한 군주였지만 어우동과의 스캔들도 야사에 남길 정도로 삼강행실에 어긋나는 로맨스를 즐길 줄도 아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투기가 심한 부인 윤씨의 감정처리를 잘못하여 결국 연산군의 폭정과 무오사화갑자사화라는 엄청난 비극의 씨를 남기었다.

 

연산군의 패륜행위를 문제삼아 그를 몰아내고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대장금이라는 드라마의 배경이 된 임금)은 초기에 공신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급진적 개혁론자인 신진 사림의 거두 조광조를 끌어들여 지치주의(至治主義)적 도학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조광조는 너무도 형식주의적 도덕정통론에 치우쳤고 중종은 훈구대신들의 입지를 살려가면서 세력의 밸런스를 취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조광조는 제거되어 능주의 붉은 꽃이 되었고(기묘사화) 다시 정국은 혼란에 빠졌지만, 그럴수록 중종은 삼강행실도와 같은 대중교화야말로 치세의 첩경이라고 굳게 믿었다. 중종의 시대야말로 삼강행실도의 전성기였다.

 

우선 중종 6(1511) 828일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지를 내린다.

 

 

근래에 풍속이 불미하도다. 삼강행실을 많이 인쇄하여 서울과 지방 각지에 반포하라. 여항의 소민(小民: 보통사람)들도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近來風俗不美, 三綱行實多印頒布中外, 使閭巷小民, 無不周知.

 

국초 이래의 열녀ㆍ효자 중에서 삼강행실도에 언급되지 않은 자들도 편찬하여라. 또한 그들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시()와 찬()까지 지어 간행하여 일반 백성들이 쉽게 알도록 하라.

國初以來, 烈女孝子之不及與者, 亦令撰集圖寫, 竝述詩贊, 刊以行之, 俾民易知.

 

 

이러한 명령이 떨어진 지 불과 2개월만(10203번째 기사)삼강행실도2,940질을 찍어 중외(中外: 서울과 지방, 전국)에 반포하였다는 기사가 실록에 실려 있다. 불과 2개월만에, 새로 편찬한 뉴에디션(new edition)삼강행실도를 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종조의 산정언해본 목판을 다시 인출한 것이다.

 

그러나 불과 2개월 만에 2,940질을 간행한다고 하는 것은 조선왕조의 출판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3천 질 이상의 책이 일시에 간행된 사례는 정조 20(1796)에 간행된 규장전운(奎章全韻)의 예가 있기는 하지만, 전운이덕무(李德懋) 등이 동음(東音: 조선의 한자음)과 화음(華音: 중국의 본토음)을 함께 표시한 한자 운서이며, 오늘날로 치면 특수한 사전이다. 이 사전은 특수한 학술기관, 도서관, 사고, 대신, 고급관료들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며(4,705책을 인쇄), 널리 보급되지도 않았고 대부분은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일반서민들을 대상으로 3천 질의 책을 만든다는 것은 요즈음의 인쇄기술로 유추하여 별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당시의 제지ㆍ인쇄ㆍ제본의 공정을 생각하면 참으로 막대한 수공을 요하는 사업이었다. 요즈음으로 치면 30만 혹은 300만 부의 책을 일시에 보급하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속삼강행실도이륜행실도를 연이어 펴낸 중종

 

 

중종 6828일의 조령의 내용에, 국조 이래의 열녀ㆍ효자 중에서 삼강행실도에 언급되지 않은 자들을 편찬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명령은 중종 9(1514) 10월 신용개(申用漑, 1463~1519: 김종직의 문인) 등에 의하여 간행된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로써 구현되었다.

 

기존의 삼강행실도가 우리나라 사람보다는 중국사람의 윤리실천 사례를 들고 있다면효자의 경우 35명 중 31명이 중국인, 4명만이 한국사람이다. 누백포호(婁伯捕虎), 자강복총(自强伏塚), 석진단지(石珍斷指), 은보감오(殷保感烏)4 케이스, 속삼강행실도는 조선왕조의 윤리실천사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효자의 경우 36명이 실렸는데 중국인이 3명뿐이고 33명이 조선왕조의 사람이다우리나라의 사대주의를 나타내는 극단적 용어 용례를 하나 소개하면, 삼강행실도에서 국조(國朝)’라는 것은 명나라를 의미한다. 그리고 속삼강행실도의 용례에서 본조(本朝)’는 명나라를 의미하고 본국(本國)’은 조선왕조를 뜻한다. 명나라가 본 조정이고, 조선왕조는 그 조정에 속한 제후국이라는 뜻이니 과도한 아부이다. 보다 비근한 우리나라의 사례를 수록함으로써 일반백성들이 자기들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로 느껴 쉽게 본받게 하려 함이었다우선 지명이 진주, 거창, 동래, 청주, 춘천, 목천, 풍기, 안악 등으로 나오니까 친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편제에 있어서도 충신을 5명만 수록함으로써, ()ㆍ충()ㆍ열() 중에서 충의 덕목을 대폭 줄여버렸다. 이 책의 보급대상이었던 일반백성들이 군주에게 직접적으로 충성할 기회는 많지 않으므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 순종하는 가치관에 집중하는 것이 대중세뇌에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중종의 대중세뇌작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광조와 더불어 김굉필(金宏弼)의 동문인(同門人)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정원(政院)에 재직할 때, 경연에서 중종에게 오륜 중에서 삼강(부자, 군신, 부부)삼강행실도에 다루어졌으나 그 나머지 이륜, 즉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윤리가 다루어진 책이 없으니, 이러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도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계(上啓)하자 중종은 예조(禮曹)에 명하여 따로 국()을 설치하여 찬진(撰進)케 한다.

 

그러나 김안국은 이 일이 실현되기 전에(중종 12) 경상도 관찰사로 나간다. 그래서 김안국이륜행실도의 편찬사업의 책임을 전사역원정(前司譯院正) 조신(竈神)에 맡긴다. 김안국은 조신에게 형제도(兄弟圖)에 종족(宗族) 항목을 부속시키고, 붕우도(朋友圖)에 사생(師生) 항목까지 부속시켜 전체 4항목으로 만들라고 당부한다형제 25ㆍ종족 7ㆍ붕우 11ㆍ사생 5, 4 항목 48 케이스.

 

다음 해 중종 13년 이 편집이 완성되자, 김안국은 그것을 자기 관할 하에 있는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지금의 김천)에서 간행하였다. 그 초간본은 현재도 경상북도 월성군(月城郡)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이 간행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의 사건으로 조광조가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내용이 이런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의 간행에까지 미치고 있었으니 그들 비젼의 실상을 규탐하는 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더구나 이륜행실도에 실린 48 케이스가 전부 중국인이며 우리나라 사람은 한 명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조광조가 제거된 후 말년에도 중종삼강행실도의 보급에 박차를 가한다(중종 31), 그리고 중종 33(1538)에는 예조판서가 된 김안국이 이륜행실도를 많이 간행하여 반포하기를 건의하자 그대로 하라고 전교한다. 하여튼 중종은 삼강행실도의 보급에 가장 적극 대처했던 임금이라고 말할 수 있다.

 

 

 

 

17306월 영영개간(嶺營開刊), 연대 국학자료실 소장. 광진(光進)이 지극한 효자였기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3년상을 치룬 후에나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 광안(光顔)은 일찍 결혼하여 엄마를 생전에 모시었다. 광진이 부인을 들이게 되자, 제수씨가 가계부와 곳간열쇠를 새댁형님에게 보내었다. 그러나 광진은 생전에 엄마를 모신 제수가 열쇠를 갖는 것이 마땅하고 그것이 엄마의 뜻이었다고 하며 돌려 보내자, 형제가 부둥켜 안고 울었다.

우리나라 예산(禮山)의 의좋은 이성만 형제 이야기(형님 아우간에 서로 걱정하여 밤에 볏단을 갖다 놓는다)와 같은 미담이다. 요즈음 부모유산 싸움에 패가망신하는 꼴을 보면 이러한 형제의 우애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 하겠다.

 

 

 임란 직후 동국신속삼강행실도또 편찬

 

 

삼강행실도의 간행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 국난을 거치면서 조선왕조는 기강이 흐트러지고 민심이 이반된다. 왜적을 막지 못했고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으니 국가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질 수밖에, 그러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삼강행실도를 대규모로 증보하는 사업을 벌인다.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지 않고 헛치레로 역사의 과실을 땜방하는 치자의 꼬락서니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왜란 이후에 정표(旌表)를 받은 효자ㆍ충신ㆍ열녀를 중심으로 자그마치 1600여 명의 케이스를 모두 1717책으로 편찬하였는데 이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라 하였다. 이 증보판의 특징은 수록된 인물이 모두 조선사람이라는 것이다. 광해군 7(1615)에 편찬이 완성되었으나 워낙 방대한 내용이라서, 간행에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으니 각 도별로 분담하여 그 목각을 진행시켰다.

 

5도의 경제력에 비례하여 전라도 6, 경상도 4, 공홍도(共洪道: 충청도) 4, 황해도 3, 평안도 1책씩 분담하여 광해군 9(1617)에 그 간행이 완성되었다. 충신도는 11책으로 최소화시켰는데 그 마지막에 통제사이순신(統制使李舜臣)’이 한 커트 들어가 있는 것도 눈에 띈다. 88책이나 되는 열녀도에는 왜적들의 강탈에 정조를 지키느라고 처참하게 죽거나 자결한 무수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는데 열녀이야기라기보다는 무정부상태의 국가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한많은 여인들의 참혹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는 삼강행실도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 보편화 되어있는 효라는 덕목은 조선왕조 오백년을 통해 지속적으로 토착화되었는데, 그것은 효경이라는 경전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삼강행실도라는 만화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삼강행실도라는 만화책은 조선왕조라는 출판주식회사의 빅 히트작으로서 화려한 역사를 연출했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 중심책은 고려말 권씨가문에서 만들어진 효행록이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본, 홍문각 영인본.

이씨는 전라도 광주(光州)에 사는 미모의 처녀였는데 충의위(忠義衛) 이활(李活)의 딸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들어와 처녀 이씨를 겁탈하려고 쫓았는데, 이 처녀는 당당하게 하늘을 가리키며 내가 죽을지언정 너희 도적놈에게 정절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고, 왜적들을 향해 준엄하게 꾸짖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指天誓死, 罵不絶口]. 그리고 왜적의 칼에 버히었다.

518광주민중항쟁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400년을 격해도 민중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효경』」 20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불의를 당하면 투쟁하라[當不義則爭之]!”

 

 

 유향의 효자전에서 곽거경의 이십사효까지

 

 

효행록에서 선정된 인물들이 삼강행실도에도 계속 등장할 뿐 아니라(선정과 배열에 출입이 있다), 그 이야기의 양식적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효행록의 전편에 ‘24인의 효행을 아들 권준이 실었다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권준이 독창적으로 중국 고사에서 뽑아 실은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십사효라는 것은 이미 당말(唐末)에서부터 시작되어 송대에는 확고하게 정착된 일종의 설화 문학양식이다. 이미 한나라 때의 유향(劉向)효자전(孝子傳)을 지은 이래 벽암록(碧巖錄)첫 번째 공안의 주인공이며 우리나라에도 불사리(佛舍利)를 보내곤 했던(신라 진흥왕 10) 양무제(梁武帝)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효자전을 지었다.

 

이러한 효자전류에서 발췌하여 24인을 모은 ‘24()’라는 문학장르가 이미 당말에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돈황의 장경동(藏經洞)에서 고원감대사이십사효압좌문(故圓鑑大師二十四孝押座文)’이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대영도서관과 불란서국립도서관에 수장됨. 번호는 S7, S3728, P3361 그 작자가 당말오대의 원감대사(圓鑑大師) 운변(雲辯, ?~951)으로 사료되고 있다. 이미 이 속에 순(), 왕상(王祥), 곽거(郭巨), 노래자(老萊子) 등의 효자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어 24효의 한 원형임을 말해주고 있다.

 

1950년대 이래 중국에서 발굴된 송나라 때의 많은 분묘 속에서 24효도(二十四孝圖)의 벽화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24효도의 개념이 이미 송나라 때는 매우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분묘 속에 효자도를 그려넣는 것은 분묘 속의 주인공이 효자이기 때문에 사후의 세계에서도 복을 받으리라는 것을 기원하는 상징이기도 하고, 또 분묘 속의 효자들이 악귀들을 내쫓아버린다는 방술의 의미도 들어있다. 24효가 독립된 서물로서 일반인들에게 애독된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원나라 때 대전(大田)의 사람 곽거경(郭居敬, 는 의조義祖)이 편찬한 이십사효(二十四孝)인데 이 책이야말로 중국의 명ㆍ청대와 동아시아문명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24명을 누구로 볼 것이냐, 그 선정대상과 순서는 사람들에 따라서, 그리고 판본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이미 한나라 유향의 효자전에 거론된 순()ㆍ곽거(郭巨)ㆍ정란(丁蘭)ㆍ동영(董永)은 빼놓지 않고 등장하며 기본 인물들을 공유한다. 곽거경(郭居敬)이십사효에 등장하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우순(虞舜)ㆍ한문제(漢文帝)ㆍ증삼(曾參)ㆍ민손(閔損)ㆍ중유(仲由)ㆍ동영(董永)ㆍ염자(剡子)ㆍ강혁(江革)ㆍ육적(陸績)ㆍ당부인(唐夫人)ㆍ오맹(吳猛), 왕상(王祥)ㆍ곽거(郭巨), 양향(楊香)ㆍ주수창(朱壽昌)ㆍ유금루(庾黔婁)노래자(老萊子)ㆍ채순(蔡順)ㆍ황향(黃香)ㆍ강시(姜時)ㆍ왕포(王褒)ㆍ정란(丁蘭)ㆍ맹종(孟宗)ㆍ황정견(黃庭堅)

 

그리고 우리나라 효행록전편의 24인은 곽거경의 이십사효와는 조금 다른 계통의 판본에서 유래한 것인데 다음과 같다.

 

우순(虞舜)노래자(老萊子)ㆍ곽거(郭巨)ㆍ동영(董永)ㆍ민손(閔損)ㆍ증삼(曾參)ㆍ맹종(孟宗)ㆍ유은(劉殷)ㆍ왕상(王祥)ㆍ강시(姜時)ㆍ채순(蔡順)ㆍ육적(陸績)ㆍ왕무자(王武子)ㆍ조아(曹娥)ㆍ정란(丁蘭)ㆍ유명달(劉明達)ㆍ원각(元覺)ㆍ전진(田眞)ㆍ노고(魯姑)ㆍ조효종(趙孝宗)ㆍ포산(鮑山)ㆍ한백유(韓伯瑜)ㆍ염자(琰子)ㆍ양향(楊香)

 

권준의 아버지 권보가 위의 24효를 보고 다시 38효를 보탰다고 하는 것은, 당시 이미 송ㆍ원대에서 유행하던 다른 판본의 효행기록에서 권보의 24효가 누락한 케이스들을 골라 모았다는 뜻이며 전혀 독창적인 컬렉션은 아니다. 고려말에 권가에서 편찬한 효행록에서부터 이미 판화가 삽입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이미 중국 24효가 대개 판화를 동반했던 것임을 본뜬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조선초기의 권근의 주석판본에는 판화가 없다. 주석작업을 하면서 판화를 누락시킨 듯하다. 가학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효행록이 보다 진지하게 인식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동영(董永)의 고사,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원형

 

 

순임금의 효도 이야기는 이미 맹자(孟子)에도 잘 소개가 되어있는 것이며, 70 먹은 노인 노래자(老萊子)100세가 된 부모 앞에서 5색의 색동저고리를 입고 어린애처럼 재롱을 부려 노부모를 즐겁게 하여 노쇠함을 방지케 하려 했다는 이야기나, 민자건ㆍ증삼의 이야기는 이미 고전을 통하여 알려진 상식적인 수준의 것이다. 자로는 공자의 수제자로서 일화가 많은 캐릭터이다.

 

동영(董永)의 이야기도 후한 무씨사(武氏祠) 화상석(畵象石)에 이미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지극히 낭만적인 이야기 틀을 가지고 있어 중국역사를 통하여 문학이나 다양한 희곡의 주제가 되었다. 동영은 본시 효행이 지극하여 품팔이로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자기 몸까지 팔아 전주(錢主)에게 1만 전을 빌려 후장(厚葬)을 지내었다. 그런데 장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아리따운 여인이 동영의 처가 되기를 자처하였다. 동영이 이미 몸을 팔아 노예가 된 처지를 이야기하자 그 여인이 동영과 함께 주인에게 나아가 동영을 노예신분에서 풀어주기를 간청한다. 주인이 비단 300필만 짜 오면 풀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 여인은 동영의 누추한 집에 행복하게 거하면서 불과 한 달만에 비단 300필을 다 짜버린다. 전주에게 비단 300필을 갖다 주니 전주는 놀라면서 약속대로 두 사람을 풀어준다.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지점에 이르자 그 여인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동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본시 하늘나라의 직녀올시다. 그대의 지극한 효성에 감복하여 하느님께서 그대를 대신하여 빚을 갚아주라고 나를 보내셨다오. 나는 돌아가야 할 몸이요.” 말이 끝나자마자 푸른 하늘로 치솟으며 훨훨 날아가버렸다.

 

이 이야기는 하늘세계(이상계)와 땅의 세계(현실계)라는 우주적 스케일의 대비가 있고, 하늘의 선녀와 정직한 속세의 선남이 만나 같이 땀을 흘리면서 살아가는 땅의 기쁨이 있는가 하면 갑작스러운 이별의 슬픔이 있다. 희곡의 작가들은 이 줄거리에 무한한 상상력을 독입(讀入, to read in)할 수 있다.

 

나는 올 봄(2009)에 베이징의 국가대극원(國家大劇院)에서 후앙메이시(黃梅戲) 천선배(天仙配)라는 작품을 관람했는데 이것도 동영의 고사를 아름다운 노래로 각색한 일종의 전통 뮤지컬이었다. 우리나라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한 원형을 이룬다 할 이 이야기는 한대로부터 현대중국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민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본래의 주제는 이다동영은 산동성 박흥현(博興縣) 진호진(陳戶鎭) 동가촌(董家村)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역사적 실존성의 근거가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무씨사(武氏祠)의 사람들과 동시대의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효가 발현되는 가장 중요한 장()은 삶의 평상시이다. 일상적 평온함 속에서 은은히 꾸준하게 발현되는 효야말로 가장 위대한 효인 것이다. 그러나 평상적 효는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구나 삼강행실도류의 효는 그 포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포상을 통하여 백성들의 가치관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위대한 효는 포상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타인에게 모범으로 내걸 수 있는, 그러니까 타인의 주목을 끌 만한 드라마가 없다. 따라서 효의 상황이 점점 극화되게 마련이다. 일상이 아닌 이변(異變)ㆍ재해(災害)ㆍ우환(憂患), 생사의 기로와 같은 극적상황이 설정되고, 그 극적 상황에 대처하는 효자들의 극적 희생이 그 예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大道廢, 有仁義; 대도가 폐하여지니깐 인의가 생겨났고
慧智出, 有大僞; 지혜가 생겨나니깐 큰 위선이 생겨났고,
六親不和, 有孝慈. 육친이 불화하니깐 효도와 자비가 생겨났다.

 

 

가슴에 새겨보고 또 새겨볼 만한 명언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효를 포상하면 효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효를 포상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면 효는 위선이 되거나 불순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이러한 철인 노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모기에게 알몸을 준 오맹과 어린 아들을 묻은 곽거

 

 

곽거경의 이십사효에는 들어 있는데, 권준의 이십사효에 누락되자, 권보가 다시 집어넣은 고사 중에 오맹문서(吳猛蚊噬)’라는 것이 있다.

 

오맹은 진()나라 사람인데 불과 8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동이다. 집안이 빈곤하여 식구들이 여름철에 모기장을 치고 잘 돈이 없었다. 그래서 몸을 발가벗고 부모님 곁에 누워 잤는데 그 효심인즉 자기 몸을 모기들이 진냥 뜯어먹고 배가 불러 부모님을 물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어찌 이러한 어린아이의 행태가 효심의 예찬이 될 수 있을까? 어린이는 발가벗고 모기에게 진냥 뜯기고 어른은 편하게 잠을 잔다? 아니 모기들이 그토록 영민할까? 여덟 살 짜리 오맹의 피를 잔뜩 먹었다고 그 어린이의 효심을 생각하여 부모님은 안 물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옛 사람은 이 정도의 상식도 없었단 말인가?

 

 

 

 

곽거매자(郭居埋子)’의 이야기는 한대 유향의 효자전에서부터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곽거는 한나라 때 사람인데 가정이 빈한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는데 3살 난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음식을 줄여 드시고 나머지를 3살 난 손자에게 주시니까어떤 버젼에는 철없는 아들이 엄마 식사를 탐하여 자꾸 뺏어 먹었다라고 되어 있다, 곽거가 그 부인과 의논하기를, “아들은 또 낳을 수 있지만, 다시 없는 어머님을 봉양하는 데 아들이 방해가 되니, 우리 아들을 산 채로 묻어 버립시다하니, 착한 부인이 동의하여 같이 3살 난 아들과 함께 산으로 갔다. 아들을 묻으려고 땅을 파는데 땅속에서 두 개의 금덩어리가 발견되었다. 임금이 이 소리를 듣고 천사효자(天賜孝子, 하늘이 낸 효자)’라는 명호를 내려, ()에서도 금덩이를 못 뺏게 하였고 민()에서도 취하지 못하게 하였다 운운.

 

해피엔딩으로 끝난 스토리라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효행을 장려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야기이지 이것을 실제로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한 사태이다.

 

기독교신화(myth)도 어디까지나 신화(myth)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사실로 믿고 실천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신(愚信)이 된다. 신화(myth)는 오직 신화(myth)로서만 이해할 때 그 의미가 전달된다는 것이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의 요점이다. 서양문명이 얼마나 기독교 신화(myth)의 사실적 인식의 오류에 젖어 있었길래 개명한 20세기에도 불트만의 신학이 요청되어야만 했을까?

 

그런데 결코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활을 입증하기 위해서 광신도로 하여금 자기 부인을 죽이게 해놓고 자기 부인의 시체를 놓고 하염없이 기도를 하던 목사가 최근에 매스컴에 공개된 일도 있다. 그런데 엄마 밥을 축낸다고 어린 자식을 산에다 생매장한다고 한다면 이런 우행(愚行)도 부활에 미친 목사의 기도와 과히 큰 차이가 없다. 밥이란 죽을 때까지 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다. 어찌 엄마 밥 때문에 어린 아들의 생명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광신적 윤리가 조선오백년의 리얼한 모랄이었다. 곽거매자의 이야기는 곽거경의 이십사효에 등장하여 권준의 효행록을 통과하여 삼강행실도로 들어갔다.

 

 

 

 

 왕상빙어과 정란의 목각엄마

 

 

왕상빙어(王祥冰魚)’의 이야기도 마음씨가 악랄한 계모가 겨울에 잉어를 먹고 싶어하니깐, 왕상이라는 효자가 꽁꽁 얼어붙은 연못 얼음을 깰 수가 없어 옷을 벗고 알몸으로 드러누워 얼음을 녹이려 하자, 얼음이 스스로 녹고 잉어 두 마리가 튀어올라 왔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도 효성감천(孝誠感天)’의 한 패턴으로서 곽거경 이십사효에 등장하여 권준의 효행록을 통과하여 삼강행실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악랄한 계모에게도 효도를 다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민자건(閔子騫)의 이야기(설원(說苑)에 실림)로부터 내려오는 한 패턴이다. 이 이야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조선의 아동들이 계모에게 학대를 받으면서도 끽소리 한번 못냈을 것인가?

 

 

 

 

유향의 효자전에도 나오고 한대의 화상석에도 나오는 포퓰라한 주제이며 이십사효』 → 『효행록』 → 『삼강행실도로 들어간 정란각모(丁蘭刻母)’라는 고사가 있다. 이 정란의 고사는 버젼의 변화가 너무 심해 일정한 이야기가 없지만, 우선 우리나라 효행록의 버젼을 한번 들어보자.

 

 

정란(남자이다)은 엄마에게 지극한 효도를 다하였다. 그런데 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애통하는 마음 그지없어, 나무를 각하여 엄마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 목각엄마를 섬기기를 살아계신 엄마와 같이 하였다. 그런데 정란이 밖에 나갔을 때에, 심술궂은 부인이 불경(不敬)한 여자인지라, 바늘로 목모의 눈깔을 찔렀다. 그랬더니 눈에서 피가 나고 눈물이 흘렀다. 정란이 귀가하여 이를 살피고 즉시로 그 아내를 내쫓았다. 그 효성이 이와 같았다.

丁蘭事母大孝, 母因病亡, 哀痛固極. 刻木爲母形, 事之如生. 蘭出外, 其妻不敬, 以針刺目, 出血泣下. 蘭歸察知之, 卽逐其妻, 其孝如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삼강행실도에서 다음과 같은 버젼으로 세련화된다.

 

 

정란은 하내(河內)의 사람이었다. 어려서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고 공양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무를 조각하여 어머니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기를 살아계신 어머니 모시듯이 하였다. 목상에게 아침ㆍ저녁으로 꼭 문안인사를 올리었다. 후에 이웃에 사는 장숙(張叔)이라는 사람의 처()가 정란의 처에게 그 목상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정란의 처가 무릎을 꿇고 그 목상을 빌려주려고 하자, 목상이 기뻐하지 않았다. 그래서 목상을 빌려주지 않았다.

丁蘭, 河內人. 少喪考妣, 不及供養. 乃刻木爲親形像, 事之如生, 朝夕定省. 後鄰人張叔妻從蘭妻借看. 蘭妻跪授木像, 木像不悅, 不以借之.

 

그런데 어느날 장숙(張叔)이 술에 취하여 들어와 목상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지팡이로 목상 대가리를 두드려 했다. 정란이 집에 돌아와 목상을 보니, 목상의 안색이 심히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연고를 물으니 아내가 전후 사정을 다 이야기하였다.

張叔醉罵木像, 以杖敲其頭. 蘭還見木像色不懌, 問其妻, 具以告之.

 

정란은 분한 마음에 그 길로 장숙에게 가서 그를 몽둥이로 쳤다. 나졸이 와서 정란을 체포하였다. 정란이 목상에게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자, 목상은 떠나는 정란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군현의 사람들이 정란의 지극한 효성이 신명(神明)에 통하는 것을 보고 찬미하였다.

卽奮擊張叔, 吏捕蘭. 蘭辭木像去, 木像見蘭爲之垂淚. 郡縣嘉其至孝通於神明.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일본에만 남아있는 고본(古本) 효자전으로 양명본(陽明本)이라고 부르는 판본에는 다음과 같이 다른 버전으로 나타난다.

 

 

하내(河內)의 사람인 정란이라고 하는 자는 지극한 효자였다. 어려서 엄마를 여의었고, 나이가 15세가 되었을 때 엄마에 대한 극진한 사모의 정이 그치지를 않아 나무를 깎아 엄마를 만들었다. 그리고 생모를 섬기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 없이 목모를 공양하였다.

河內人丁蘭者, 至孝也. 幼失母, 年至十五, 思慕不已. 乃剋木爲母, 而供養之如事生母不異.

 

그런데 정란의 처는 매우 불효한 여자였다. 어느 날에 불을 지펴 목모의 얼굴을 끄슬렸다. 그날 밤 정란은 꿈에서 목모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네 처가 내 얼굴을 끄슬렸다.’ 정란은 그 부인을 곤장으로 다스리고 난 후에 내쫓아버렸다.

蘭婦不孝, 以火燒木母面. 蘭卽夜夢語木母, : ‘汝婦燒吾面.’ 蘭乃笞治其婦, 然後遣之.

 

또 어느날, 이웃 사람이 정란에게 도끼를 빌리러 왔다. 정란은 목모가 계신 곳을 열고 상의를 드렸더니 목모의 안색이 심히 기쁘지를 않았다. 그래서 도끼를 빌려주지 않았다. 그 이웃 사람은 눈을 흘기며 앙심을 품고 돌아갔다.

有隣人借斧, 蘭卽啓木母, 木母顔色不悦. 便不借之. 隣人瞋恨而去.

 

어느날 그 사람이 정란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들어와 칼로 목모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랬더니 유혈이 낭자하여 바닥을 적시었다. 정란이 집에 돌아와 이를 보고, 비참하여 울부짖으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즉시 이웃에게 달려가 그 놈 모가지를 베어다가 목모 앞에서 제사를 지내었다. ()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죄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정란에게 녹(祿)과 위()를 더해주었다.

伺蘭不在, 以刀斫木母一臂, 流血滿地. 蘭還見之, 悲號叫慟, 卽往斬隣人頭, 以祭母. 官不問罪, 加祿位其身.

 

찬하여 말하노라. 정란은 지효(至孝)하도다. 어려 어머니를 여의고 추모하는 마음 미칠 곳 없어 목모상을 세우고 조석으로 공양하였네. 사친(事親)에서 특출났고, 그 몸은 갔으나 이름은 남아 만세에 진실하도다.

贊曰 丁蘭至孝, 少喪亡親, 追慕无及, 立木母人, 朝夕供養, 過於事親, 身沒名在, 萬世惟眞.

 

 

독자들은 과거의 설화들이 기록자에 따라 제멋대로 변형해가는 하나의 재미있는 샘플을 목격했을 것이다. 말하려고 하는 주제는 확실한 그 무엇이 있지만 결코 바람직한 윤리를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목모 때문에 부인을 내쫓은 이야기나, 목모 때문에 살인까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결코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이야기가 실제로 중국법제에까지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친부모의 효도를 위한 복수살인은 정당화되었으며 이 주제는 중국법제사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는 과제상황이다. 부인을 내쫓는 이야기라면 더욱 끔찍한 이야기가 효행록에 실려 있다. ‘포영거(鮑永去妻)’의 항목을 보자

 

 

 

 

 개 야단쳤다고 내쫓긴 포영 처와 슬픈 효녀 심청의 프로토타입인 조아

 

 

한나라의 포영은 자()가 군장(君長)이었다. 포영의 처가 엄마 앞에서 개를 꾸짖었다. 그래서 포영은 부인을 내쫓아버렸다.

漢鮑永, 字君長. 妻於母前叱狗. 永遂去之.

 

 

이 고사는 매우 간단하다. 그 구체적인 상황설명이 없다. 그러나 시어머니 앞에서 개를 꾸짖었다고 조강지처를 내쳐버린다는 것은 바른 윤리라고 말할 수 없다. 소위 칠거지악(七去之惡)에 해당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고사에 대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개산조 중의 한 사람이며 여말 효행록을 엮은 권보ㆍ권준의 후손인 권근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존장(尊丈)의 앞에서는 개도 소리쳐 꾸짖지 아니 한다는 것은 예의 소절(小節)이다. 지금 포영의 부인이 시어머니 앞에서 개를 꾸짖었다는 것은 예를 몰라서 소절을 범한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포영이 부인을 내쫓고 말았다는 것은 어머니를 공경하는 마음이 더 중했던 것이다.

尊丈之前不叱狗, 此禮之小節也. 今鮑永之婦, 叱狗於母前, 是不知禮而犯小節, 宜若可恕也. 永遂去之, 是其敬母之心重矣.

 

또한 예로써 그 부인을 내쫓고 그 죄목을 명백히 밝히지 아니 한 것은, 그나마 다른 남자에게 용납되어 새로 시집을 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且禮出其婦, 而不明言其罪者, 欲使見容於他人而可以嫁也.

 

그러므로 포영은 그 허물이 커지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 하고, 그 소절을 책망하여 내쫓아 딴 사람에게 새로 시집갈 수도 있게끔 한 것은 또한 충후(忠厚)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故永不待其過之大, 責以小節而出之. 令其可嫁於人, 亦忠厚之意也.

 

 

양촌 권근은 완전히 소설을 쓰고 있다. 부인을 내쫓은 것이 그나마 예를 갖추어 내쫓은 것이라는 논리를 펼 수 있는 하등의 실마리도 본문 고사에는 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여말선초(麗末鮮初) 우리나라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도 이 고사는 좀 황당했다. 이러한 이유로 부인을 내쫓는다는 것은 권근에게도 비상식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여말선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여자들이 남자가 내쫓는다고 해서 굴하는 여자들이 아니요, 마음대로 딴 남자에게 개가할 수 있었다는 색다른 풍속도를 엿볼 수 있다. 조선 중기라면 이러한 권근의 주석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행실도류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사회의 모랄이 어떻게 변모해갔는지를 규탐(窺探)할 수도 있다.

 

효아포시(孝娥抱屍)’의 고사는 14살 먹은 소녀의 슬픈 이야기이다.

 

조아(曹娥)는 회계(會稽)의 사람이다. 그 아버지가 무당이었는데 55일 강신(江神) 파사(婆娑)에게 강가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물이 급히 불어 그만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 시체를 건질 길이 없었다. 14살 먹은 어린 딸 조아는 강가를 헤매며 주야로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호곡하다가 17일만에 물에 빠져 죽어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은 채 물위로 떠올랐다. 후에 관민이 개장(改葬: 처음에는 초라하게 묻어 놓았다가 나중에 포상되어 크게 분묘를 다시 만들었기에 이런 표현이 사용된 것 같다)하고 비를 세웠다.

 

 

 

 이것은 정조 때 간행된 오륜행실도속에 나오는 효아포시(孝娥抱屍)의 판화이다.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듯이 기존의 행실도 판화와 비교해 볼 때 심청이 빠져 죽은 임당수의 성난 물결이 튀어 오르는 듯 그 텃치가 너무도 리얼하다.

조아(曹娥)17일 동안이나 강변을 헤매였으니, 아비의 주검이 떠오른 것을 목격하고 그것을 건지기 위해 투강(投江)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주검을 꼭 부둥켜 안은 채 익사한 것이다.

조아의 이야기는 결코 신화(myth)적 각색이 아니라 리얼한 삶의 이야기로 보여진다.

 

 

 허벅지 살을 도려내거나 똥맛을 보거나 사슴젖 구하다 화살 맞거나 손가락 자르거나 한 이들

 

 

의부할고(義婦割股)’는 하양인(河陽人) 왕무자(王武子)의 처가 그가 환유(宦遊: 벼슬하여 타지에 삼)하고 있는 동안에, 그 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하게 되었는데 그 부인이 효성이 지극하여 허벅지 살을 도려 내어 시어머니께 달여 드려서 그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이다.

 

 

 

 

금루상분(黔婁嘗糞)’은 남북조시대의 남제(南齊) 사람 유금루(庾黔婁)가 아버지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벼슬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 병환의 차도를 알기 위해 아버지의 설사똥 맛을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상분(嘗糞)은 효행의 주요한 테마 중의 하나이다.

 

 

 

 

염자입록(琰子入鹿)’이십사효효행록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두 눈을 실명해가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사슴젖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사슴젖을 구하는 염자의 이야기이다. 이십사효에는 염자가 주나라 사람으로 되어 있고 효행록에는 가이국인(迦夷國人)으로 나온다. 염자는 사슴젖을 구하기 위해 사슴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사슴떼 속으로 들어가 젖을 짠다. 그러던 중 사냥꾼의 화살에 맞을 뻔하다가 구출되는 것으로 이십사효에는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효행록에는 왕의 사냥행렬을 만나 화살에 맞는다. 염자는 왕의 화살에 맞아 죽어가면서 애통하게 부르짖는다[哀呼日]. “임금님의 화살 하나가 세 사람을 죽이는구려[王今一箭殺三人]” 왕이 그 까닭을 묻는다. 숨을 헐떡이며 대답한다: “내가 죽으면 나의 양친이 같이 죽게 되옵니다[我已死而兩親具死矣]” 그리고 숨을 거둔다. 왕이 그 부모를 데려오게 한다. 부모는 그 시체를 부둥켜안고 대곡진동(大哭振動)한다. 그때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天宮天帝] 감동하여 그의 입으로 약을 불어넣어 준다. 그러자 염자는 기적적으로 소생하였다[琰子得蘇].

 

 

 

 

삼강행실도의 효자도 끝머리에 실려 있는 본국(本國: 조선왕조)의 유석진(兪石珍) 이야기는 고산현(高山縣)의 아전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이다왜 하필 민중을 착취해서 먹고사는 아전을 모델로 썼을까? 불순한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

 

아버지 천을(天乙)이 악질(惡疾: 아마도 간질류였을 것이다)을 얻었는데 매일 한 번씩 발작하여 기절하고 만다. 사람들이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석진이 밤낮으로 옆에 붙어 간호하고 정성을 다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석진은 하늘에 울부짖으며 호곡하며 사방으로 의약(醫藥)을 광구(廣求)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살아있는 사람의 뼈[生人之骨]를 피와 섞어 달여 먹으면 낫는다고 하였다. 석진은 이에 좌수(左手) 무명지를 짤라 그 말대로 달여 드리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 운운.

 

손가락 하나 고아 먹어봤자, 요즈음의 곰탕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어찌 곰탕 한 그릇으로 간질이 나을 수 있단 말인가! 조아가 물에 빠져 죽는 이야기도 우리나라 심청전의 리얼 스토리를 전해주는 고사일 수도 있다. 임당수에 빠져 죽는 심청이가 어찌 안락하게 용궁으로 간단 말인가? 그 순간 허우적거리는 심청이의 고뇌 속에 담긴 조선 여인들의 천추만한(千秋萬恨)은 오색찬란한 용궁의 신화적 각색 속에 단순한 선업선과(善業善果)의 해피엔딩으로 탈색 되어 버리고 만다

 

 

 

 

 우효ㆍ우충ㆍ우열의 역사

 

 

조선조 오백년을 통하여 삼강행실도가 가르친 우효(愚孝)ㆍ우충(愚忠)ㆍ우열(愚烈)의 소행은 참으로 비참한 수준의 것이었다.

 

송ㆍ원대에 이십사효가 확립된 이래, 이러한 우효의 관행은 명나라를 통하여 주자학의 관학화와 더불어 엄청난 포퓰리즘의 흐름을 형성한다. 그것은 명태조 주원장의 개인 싸이콜로지(psychology, 심리학)와도 관계가 있었다. 주원장은 천애(天涯)의 고아(孤兒)로 자라나 천자가 된 인물이다. 우리나라 북녘땅 곳곳의 민담 중에 주원장이 자기네 동네 고아였다는 설화가 많이 있다. 그토록 그는 출신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포의(布衣)로서 민간의 빈곤과 질고를 충분히 체험하였으며, 민간에서의 효도의 거대한 효용을 숙지하였다. 더구나 원나라 통치를 통하여 북방 유목민족의 악습과 괴이한 가정풍습(형이 죽으면 형수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등등의 풍습)이 중국인에게 침투하였다고 생각하였기에 중국 정통의 종법개념과 일가일성(一家一姓)의 효도를 새롭게 확립할 필요를 절감하였다. 더구나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가 된 후에도 자신의 영화를 같이 나눌 수 있는 혈육이나 부모가 없다는 고아로서의 고독감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뼈에 사무치게 만들었다. 그는 조종(祖宗)에 제사를 지낼 때도 실제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청나라도 이민족으로서 중원을 제패했을 때, 한민족의 민족적 감정을 억누르고 충군(忠君)케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효도를 강조하는 것이라는 비법을 그들은 일찍이 체득했다. 순치(順治)황제도 입관(入關)하여 자금성의 주인이 된 후 얼마 안 되어 친히 효경을 주석했고, 강희제도 강희 46년에는 만한합벽(滿漢合璧: 만주어와 중국어가 같이 쓰여짐)효경을 간행했다. 옹정제도 옹정 5년에 흠정(欽定)의 새로운 효경을 판각하여 반포시켰다. 그리고 역대 효경의 중요한 주해를 회집(匯集)하여 효경집주(孝經集註)를 간행하였다.

 

이들은 효의 충화(忠化)야말로 한족을 통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희제는 효야말로 백행지본(百行之本)이요, 만사지강(萬事之綱)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효로써 위로는 신명에 감응하고[上感神明], 아래로는 민심을 순화시킨다[下順民心]는 효치(孝治)의 이념에 철저했다. 그는 강희 16년에 인심풍속치치미정십육조(人心風俗致治美政十六條)를 반행(頒行) 했는데 그 제1조가 효제를 돈독히 함으로써 인륜을 중시하고[敦孝悌以重人倫], 종족을 돈독하게 함으로써 화목을 밝힌다[篤宗族以昭雍睦]’라는 것이다. 명대의 썩어문드러진 황제들에 비하면 청조의 이민족 황제들은 학술과 문화에 밝은 개명한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명ㆍ청대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그 양 조대에 걸쳐 지속된 조선왕조는 안심하고 삼강행실도의 우효(愚孝)ㆍ우충(愚忠)ㆍ우열(愚烈)의 우행을 선전한 것이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상당수의 우행들이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이라는 효경의 종지에 어긋난다. 송대는 이러한 우효(愚孝)를 조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전통에 물들지 않은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송나라 사람들이 최고의 효행이라고 여긴 단지(斷指: 손가락을 자름)와 할고(割股: 허벅지 살을 베어 료친療親), 그리고 효도를 위하여 자녀를 상해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원조(元朝)가 지난 후, 명ㆍ청대에는 다시 이러한 송대의 분위기가 부활된 것이다. 효행의 포퓰리즘은 날로 극단화되어간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단지나 할고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소독(sterilization: 미생물 발견 이후에 생겨남)관념이 전혀 없었던 시대에 부엌칼로 자기 살을 에어내는 고통이란 형언키 어려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균감염(infection)으로 그들의 대부분은 죽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몇 사람이 쾌차되어 표창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우매한 소행에 우리는 낭만성을 부여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공자라도 괘씸하게 생각했을 우행일 뿐이요 인권의 유린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은 만청에서 끝난 우행이, 일제의 악랄한 압제수탈시기를 통하여 더욱 조장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교풍회(矯風會) 등의 조직을 통해 효자ㆍ열녀에게 상을 내리고, 명륜회와 향교도 삼강적행위에 대하여 적극적 권장을 하였다. 조선총독부와 천황에 복종하는 식민지 국민을 만드는 데 삼강적 인간상은 매우 유효하였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유교도덕을 부르짖는 보수주의자들이, 대부분 반공이나 부르짖고 친체제적인 사유에 물들어 있는 까닭은 그들이 참다운 효경의 도덕을 배우지 못한, 모두 일제 끄나풀에 불과한 세도가나 우매한 촌로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사회에서 유학이라 하면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것이다이러한 문제는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5장 주영하의 글을 보라.

 

 

 

 

 효의 생리성과 도덕성

 

 

1922103, 동아일보기사를 한번 살펴보자.

 

 

경남(慶南) 삼천포(三千浦) 동리(東里) 김형수(金馨洙, 34)는 신병으로 신음한 지 우금(于今) 수년이라. 그 처 강씨(姜氏, 33)와 그 아우 김덕수(金德洙, 23)는 이래 장구한 세월을 하루와 같이 간호하는 바 약석의 효험이 없이 병세가 점점 위중하여져서 지난 달 23일에 이르러 그만 절명하려 함으로 그 아우 김덕수는 급히 식도(食刀)로써 넓적다리 살을 베어 선혈을 그 형의 운명하려는 입에 떨어트리었더니 절명되었던 그 형은 곧 회생되어 10여 시간을 지내어 그 이튿날 오후에 또 운명하려 함으로 그 처 강씨는 왼쪽 손 무명지를 단지(斷指)하여 그 피를 흘리어 넣었더니 다시 일주야(一晝夜)를 회생하였다가 운명을 어찌하지 못하여 27일에 필경 사망하였는데, 부근 인사들은 김덕수의 우애와 강씨의 열행을 모두 칭찬하여 그곳 청년회에서도 표상을 하리라더라(삼천포).

 

 

 

이러한 유형의 기사들은 동아일보에서만도 수없이 발견된다. 남편에게 우육(牛肉)이라 가장하고 자기 살을 멕인 여인이 오히려 병석에 눕게 되어 병원에 입원했다는 등의 기사가 눈에 띈다. 할고(割股)한 부인이 대부분 남편보다 먼저 황천객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우행이 미담으로서 192030년대 우리나라 신문의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왕조의 삼강행실도의 비극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연상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과거를 낭만화시킬 수 없다. 이러한 세태에 일침을 가하는 논설이 동아일보에 실려 있는데(192416일 기사) 누구의 글인지 추정하기는 어려우나 참으로 희대의 명문이며, 우효의 문제점을 너무도 명료하게 드러내놓는 논리를 담고 있어 여기 좀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개화기 지사의 정의로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그 제목부터가 확고한 의식이 드러나 있다. ‘제졀로 살자 - 껍질 도덕인 단지의 류행.’

 

 

근일 경향 각처를 물론하고 소위 효자나 절부의 단지(斷指)가 매우 많이 유행되는 모양이다. 손가락 하나를 끊어서 죽은 사람이 정말 소생한다 하면 남의 아랫사람 된 사람은 손가락 하나도 남길 수가 없을 것이다.

 

부모가 세상을 버리려 할 때의 자식된 마음은 정말 비통한 것이요, 남편이 운명을 다하려 할 때의 아내 된 마음은 극히 아플 것이다. 이 자리를 당하여 여간 손가락쯤이야 아플 줄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은 사실이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죽어가는 목숨을 살리려 할 것은 인정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아름다운 심사를 결코 가볍게 비평하고자 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고왕금래에 단지나 열지를 한 자식이나 아내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자식이나 아내를 위하여 그 같은 일을 하였다는 아비나 남편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은 없다. ! 이것이 대체 무슨 모순됨이리오.

 

인정은 일반이다. 아비가 죽는 것을 자식이 보기나, 자식이 죽는 것을 아비가 보기나 그 무엇이 다름이 있으리오. 하거든 어찌 윗사람의 단지는 없는가. 이는 두말할 것도 없다. 껍질만 남은 효()와 열()이라는 형식도덕으로 인함이다. 종래 우리의 도덕은 아래 사람에게만 많이 지우고 윗사람은 헐한 편이 많았다. 다시 말하면 후생(後生)을 압박하여 멸망을 청해 드렸을 뿐이다.

 

! 부모의 죽음과 남편의 죽음에 손가락을 끊는 가련한 사람들아! 우리는 그대들의 행위를 악이라고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손가락의 피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는 없다. 낫키도 저절로 이오, 죽기도 저절로 이다. 살기도 저절로 살자. 껍질 도덕에 갇혀 살지 말고.

 

 

 

이 위대한 논설이 우리에게 일깨우고자 하는 것은 효의 도덕성의 일방성(the unilaterally hierachical character of morality)에 관한 것이다. 어찌하여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만이 효가 될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예운편에서 말하는 십의(十義)는 어디까지나 쌍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효의 원초적 본질을 아래로 부터 위에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에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다. 효의 가장 원초적 사실은 병아리를 품는 암탉의 행태에서 볼 수 있듯이(병아리를 기를 때는 암탉은 솔개에게도 저항한다), 어미의 자식에 대한 보호본능과 관련된 것이다. 이 보호본능은 도덕적 현상이라기보다는 핵산 배열의 정보 속에 내장된 생리적 코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호는 갓 태어난 개체가 사회화(socialization) 되기까지만 유지되는 것이다. 여기 사회화라고 하는 것은 그 개체가 속한 사회 속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시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동물은 원래 그 사회화의 과정이 비교적 긴 시간을 요하는 동물인 데다가 군집생활을 통하여 문명세계를 창출하면서부터 그 사회화과정이 비상하게 연장되었다. 따라서 연장되는 것만큼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게 되고, 그 필요성은 생리적 한계를 넘어 도덕적 요구로서 발전해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효에는 생리성과 도덕성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 효가 도덕적 차원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그 핵심에 있는 것은 부모의 자애이지 자식의 효도가 아니다. 부모의 자애 때문에 자식의 효도는 마땅한 당위로서 인식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리적 코딩(coding)을 넘어서는 도덕적 베품이기 때문이다. 효의 본질은 위로부터 아래에로의 베품에 있는 것이다. 베풂의 전제가 없이 아랫사람의 복종이나 희생,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강탈이요, 복종주의적 강압이다.

 

 

 하나님이야말로 인간에게 효자, 가정윤리의 연속성

 

 

어찌하여 24효 중에 병들어 죽어가는 어린 자식을 위하여 부모가 단지나 할고를 했다는 소리는 단 한 건도 없는가?

 

다석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효로서 인식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간에게로 향한 아가페적 베풂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충화된 효가 아닌 아가페화된 효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효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야말로 인간 모두에게 완벽한 효자일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야말로 나의 효자이다. 하나님이야말로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나님은 삼강행실도를 만백성에게 강요한 폭군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 체험을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자식이 아무리 부모에게 효도한다 한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미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를 구가하는 발랄한 생명을 먼 거리에서 지켜보면서 보호하고, 또 그의 불안정한 판단에 대해 달관된 눈으로 가슴 아프게 쳐다보는 아버지ㆍ엄마의 인욕과 사랑(愛情)의 깊은 심정이야말로 자식이 다 깨달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자식이 또다시 부모의 입장이 되어 그러한 심정을 깨닫게 될 때 가정윤리의 연속성이 성립한다. 그 연속성의 도덕성을 우리가 효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아랫사람의 윗사람에 대한 복종적 효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효를 설파한 또 하나의 흐름을 우리는 바로 부모은중경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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