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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효경한글역주 - 제2장 사마광의 『효경지해』로부터 동정의 『효경대의』까지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 제2장 사마광의 『효경지해』로부터 동정의 『효경대의』까지

건방진방랑자 2023. 3. 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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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광의 효경지해(孝經指解)로부터 동정의 효경대의(孝經大義)까지

 

 

당현종의 어주효경이후 금ㆍ고문 다 사라지다

 

 

효경간오(孝經刊誤)의 문제도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간오의 문제가 아니라, 간오의 대상이 된 효경이 과연 어떤 텍스트였나 하는 것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효경은 한대로부터 이미 금문(今文)ㆍ고문(古文)의 시비가 있는 텍스트이다금ㆍ문 효경의 문제에 관해서는 제12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조금만 참아주면 좋겠다. 당대(唐代)에도 이미 금고문의 시비가 문제시되었고 이러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시비를 잠재우기 위하여 희대의 로만티스트(romancist)이며 지식인인 당현종(唐玄宗)은 스스로 금ㆍ고문학파의 주장을 절충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확정하고 그 새로운 텍스트에 주()를 가하였다. 이것이 소위 어주효경(御注孝經)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주효경도 일시적으로 반포한 것이 아니라 시기적으로 발전하였는데 개원(開元) 106월에 반포한 것을 개원시주(開元始注)라고 하고, 그후 개원시주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여 천보(天寶) 연간에 새로운 어주(御注)를 내었는데 그것을 천보중주(天寶重注)라고 일컫는다. 천보 4745, 우리나라는 통일 신라 경덕왕(景德王) 4 9월에는 현종이 친히 팔푼(八分)의 서체로써 그 천보중주를 쓰고, 그 서도작품을 돌에 새기어 태학(大學) 앞에 그 석비를 세웠다. 이것을 보통 석대효경(石臺孝經)이라고 부른다.

 

개원시주(開元始注)가 되었든 천보중주(天寶重注)가 되었든 이 어주효경은 금ㆍ고문을 절충하였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금문 효경을 위주로 한 것이다. 이 천보중주를 바탕으로 형병(邢昺)효경정의(孝經正義)가 성립하였으므로 오늘날 우리가 보통 13경주소본에서 보는 효경당현종어주효경계열이며, 금문 계열이다13경주소본에는 당현종명황제어주(唐玄宗明皇帝御注)와 송형병소(宋邢昺疏)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천보중주의 석대효경이 천하에 반포되고정확하게 말하면, 석대효경이 태학 앞에 세워진 것은 천보 4(745)인데, 그 다음 해인 천보 5년에 다시 그 석비의 불비(不備)함을 보완하여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다. 당현종은 집현원(集賢院)에 명령하여 그새 판본을 사()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케 하였다, 더구나 확고한 황제의 권위가 실리게 되자그만큼 효경의 내용은 역대의 황제들에게 통치수단으로서 매력적인 것이었다, 현종의 어주효경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정현()주의 금문효경과 공안국(孔安國)의 고문효경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금ㆍ고문 원경(元經)은 흐지부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더구나 오대(五代)의 난()을 거치면서 망일(亡佚)케 되었다.

 

 

 

 

 주희가 효경간오에 준거로 삼은 텍스트는?

 

 

그런데 주희는 뜬금없이 갑자기 어주(御注)의 금문에 의존치 아니하고 고문효경을 텍스트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상투적인 통용본 텍스트를 버리고 무엇인가 더 오리지날한 텍스트에 의거하여 간오(刊誤)작업을 하겠다는 주자의 자세는 높이 살 만하다.

 

그런데 과연 주자가 고문효경이라는 오리지날 테스트를 두 눈으로 본 것인가? 그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앞에서 주희가 효경의 경문(經文)을 만들기 위하여 1부터 7까지를 하나로 뭉뚱그리면서 각 장의 앞에 원래 있던 자왈(子日)’을 두 개 빼버려야 한다고 했는데, 만약 주희가 고문 텍스트를 기준으로 했다면 그것이 두 개가 아니라 여섯 개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사소한 하나의 실례이다. 자세하게 효경간오텍스트와 고문효경텍스트를 비교해보면 그 외로도 많은 차이가 난다. 금문효경과 고문효경의 가장 큰 차이가, 금문에는 없는 규문장(閨門章)이 고문에 있다는 것인데, 주희는 규문장이 있는 텍스트를 쓰고 있다주희는 규문장을 전() 12장으로 집어넣었다. 과연 주희가 본 텍스트는 고문일까, 금문일까?

 

주희효경간오가 준거로 삼은 텍스트는 한마디로 족보가 불확실한 엉터리 텍스트이다. 이 엉터리 텍스트는 어디서 왔을까?

 

주희는 송대의 선배학자 사마광(司馬光, 쓰마 꾸앙, Sima Guang, 1019~1086)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불린다을 존경했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한 구법당(舊法黨)의 영수였으며, 매우 보수적인 정치성향과 학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사마광은 일찍이 효경의 정치사적 중요성을 간파했다. 그리고 효경에 대한 주석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미 어주효경이 금문에 바탕하고 있었고 그것에 기초한 주석들은 꽤 많이 있었기 때문에 사마광은 고문효경 텍스트에 의거하여 주석작업을 하려 했다.

 

사마광이 볼 수 있었던 텍스트는 당시 어떤 것이 있었을까? 오대시대(五代時代, 907~960)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의 혼란을 거치면서 이미 정주금문(鄭注今文)과 공전고문(孔傳古文)이 망일(亡逸)되었다는 것은 이야기했다.

 

 

 

 

 사마광의 엉터리 효경지해를 계승한 주희

 

 

그런데 북송 옹희(雍熙) 원년(984), 일본의 동대사(東大寺)의 스님인 쵸오넨(奝然, 우리말로는 소연이라 발음)이 입송(入宋)하여 송태종에게 정주(鄭注) 한 책[一本]을 헌상하였다송사(宋史)491 일본전(日本傳). 태종은 쵸오넨을 직접 만났으며 그를 후대하였다. 그리고 자의(紫衣)도 사()하였다. 이 일본에서 보존된 정현주 금문효경을 황실도서관인 비각(秘閣)에 보관하였는데 사마광은 비각에 접근이 용이하였고, 바로 이 쵸오넨이 헌상한 정주 금문효경을 보았던 것이다애석하게도 사마광이 본 후로 언젠가 이 판본도 사라지고 말았다. 일본사람들이 애써 보관하여 헌상한 것을 중국인들은 유실하기만 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어주효경도 보았을 것이다이상하게 어주효경도 개원시주는 사라지고 천보중주만 남았다. 또 비각에 다행히 고문효경이 남아 있었는데, ()은 없고 경()만 남아있는 불완전한 텍스트였다공안국(孔安國)의 서문과 주석이 붙어있지 않다는 뜻이다.

 

게다가 사마광이 본 고문텍스트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 옛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옛날 선진시대의 텍스트가 보존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공안국이 효경에 전()을 달 때에, 이미 고문(과두문자)이 공안국 당대에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서체로 고쳐 썼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지식꾼들이 다시 예서체로 된 효경을 옛 고문으로 고쳐 썼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마광이 본 고문 효경공전효경(孔傳孝經)에서 효경의 본문만을 떼어내서 과두문자로 고쳐 써놓은 좀 어설픈 조작판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문자는 엉터리라도 그 말인즉슨 괜찮은 것이라고 사마광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此蓋後世好事者, 用孔氏傳本, 更以古文寫之. 其文則非, 其語則是也]. 그래서 사마광은 그 고문을 예서로 다시 고쳐쓰는 작업을 감행했다[是敢輙以隸寫古文].

 

그러니까 사마광이 본 고문효경은 결코 제대로 된 고문효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마광은 고문효경에 오직 근거하여 자기의 효경주석서인 효경지해(孝經指解)를 쓴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말은 고문효경에 대한 지해(指解)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당현종어주효경과 일본판 정현주의 금문효경을 대폭 수용했다.

 

그러니까 사마광은 이념적으로는 고문효경을 신봉한다 하면서도 그가 막상 의존한 텍스트는 순수한 고문이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문 비슷하면서도 고문이 아닌 애매한 텍스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문에 대한 그의 집착은 다음 문장에 잘 드러나고 있다.

 

 

앞선 유자들이 모두 생각하기를, 공자집안 사람들이 진나라의 협서율(挾書律, BC 213년 반포)을 피하기 위하여 공씨집안 벽 속에다가 책들을 감추었다고 한다.

先儒皆以爲孔氏避秦禁而藏書.

 

그러나 나 사마광의 생각은 다르다. 왜냐하면 진나라 때에는 이미 과두문자가 폐절된 지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시황 34(BC 213)에 비로소 분서(焚書)의 명령이 떨어졌는데 그것은 한나라가 흥하기(BC 206) 불과 7년 전의 사건일 뿐이다. 그러니까 공자의 자손들이 협서율이 해제된 후에도 그 일을 새카맣게 모르고 있다가 한참 뒤 한 무제 때 노나라의 공왕(恭王)이 궁궐을 지으려고 공벽을 허물었을 때야 비로소 그 과두문자의 고문 문헌들이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臣竊疑其不然. 何則秦科斗之書廢絶已久. 又始皇三十四年, 始下焚書之令. 距漢興變纔年耳. 孔氏子孫, 豈容悉無知者, 必待共王, 然後乃出.

 

대저 그것을 공벽에 파묻어 둔 것은 공씨집안에서 정본을 후세에 전하려는 배려에서 공자께서 돌아가신 후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일이므로, 그 고문경전들은 매우 진실한 것이며, 타국의 사람들이(일본판 정씨금문을 염두에 두고 한 말) 모습을 바꾸어가며 전수하여 세월이 지나면서 소원해진 판본들과는 가히 동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蓋始藏之時, 去聖未遠, 其書最眞, 與夫他國之人轉相傳授, 歷世踈遠者, 誠不侔矣.

 

더구나 효경상서가 같이 공벽에서 나왔는데, 지금 학자들이 모두 고문상서의 진실은 인정을 하면서 고문효경은 위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마치 육회 날고기는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구운 고기는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고문효경의 진위문제는 명료하기가 일월(日月)과 같다.

且孝經與尙書俱出壁中. 今人皆知尙書之眞, 而疑孝經之僞. 是何異信膾之㗖, 而疑炙之不可食也. 嗟乎眞僞之明皦若日月.

 

 

사마광의 효경지해(孝經指解)는 문연각(文淵閣) 사고전서에 들어가 있으므로 컴퓨터상으로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주희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강()과 목()으로 분류하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지을 정도로 사마광을 존숭했으므로, 사마광이 만든 고문효경지해의 텍스트가 곧 고문효경이라고 생각해버린 것 같다. 주희와 같은 대학자의 소견 치고는 참으로 애석한 불찰에 속하는 일이다. 주희의 효경간오판본은 금문도 아니고 고문도 아니며 바로 사마광의 효경지해판본이었다.

 

이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오류의 반복이다. 지해판본은 효경학사(孝經學史)에서는 그냥 송본효경(宋本孝經)’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무가치한 판본에 속한다.

 

 

 

 

 효경간오의 뜻을 실현한 동정의 효경대의

 

 

그러니까 주희효경간오는 사마광의 효경지해원문을 놓고 거기에 자신의 간오(刊誤) 작업을 한 것인데, 효경원문변형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삭제할 부분과 바꾸어놓을 부분을 지시만 한 것이며 원문을 일단 전통방식대로 실어 놓았다. 그러니까 효경간오는 미완성작이며 일체의 주석을 가하지 않았다.

 

간오를 경() 1과 전() 14장의 체제로 삭제할 부분은 삭제하고 전 14장을 원문의 순서를 바꾸어 다시 배열하여 간오가 지시하는 바 대로의 원문을 만든 다음에 그 경() 1장 전() 14장에 대하여 상세하고 화려한 주석을 가한 것이 그 유명한 동정(董鼎, 자는 계형季亨)효경대의(孝經大義)라는 책이다동정의 정확한 생몰연대가 미상이라서 확언하기 힘드나 책에 따라 동정을 송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원나라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동정은 주희의 손제자(孫弟子) 혹은 3전 제자에 해당되는 사람이므로 송말에 걸쳐 원대에까지 산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조선조에는 효경간오가 유입되지 않았고, 효경대의만 크게 유행한 것이다. 대의의 구비구비에 간오속에서 주자가 한 말이 재배치되어 들어가 있다. 우리나라 젊은 학도의 최근 논문에 마치 간오대의의 텍스트가 출입(出入)이 있는 것처럼 기술해놓은 것이 있는데, 간오대의는 배치만 다를 뿐 전적으로 동일한 텍스트라는 것을 재인식해주었으면 한다.

 

 

 

 

주자 존숭만 있고 주자 판본에 대한 검토가 없다

 

 

조선왕조에서 효경』」이라고 하는 것은 동계형의 효경대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용으로 효경언해(孝經諺解)를 만들었는데선조(宣祖) 때 안동 하회 사람,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류성룡(柳成龍)이 주관하여 만들었다, 그 언해도 효경대의의 경과 전만을 도려내어 그 경전(經傳)에 대해서만 언해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동계형의 대의주석 부분은 번쇄하다고 생각하여 언해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효경언해는 사마광의 효경지해를 주자가 간오(刊誤)한 대로 배열해놓은 경전에 한글 토를 달고 한글해석을 겸하여 단 것이다. 효경언해로서 조선왕조의 최고본(最古本)인 경진자(庚辰字) 귀중본은 불행하게도 이 땅에 보존되어 있지 않다. 현재 일본 동경 존경각(尊經閣)에 소장되어 있는데 타가와(田川孝三) 씨가 조선학보(朝鮮學報)27집에 논문과 함께 그 영인본을 실어 놓았기 때문에 다행히 그 전모를 엿볼 수 있다(본서의 말미에 수록됨). 류성룡의 발문(跋文)은 만력(萬曆) 176월 하한(下幹), 그러니까 선조 23, 1589년이다.

 

이제 내가 조선의 유자들이 거의 효경을 읽지 않았다고 모두(昌頭)에서 설파한 뜻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주자에 대한 존숭만 있었고 엄밀한 판본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학계에도 계승되고 있다. 나 도올의 정보도 아직 불비(不備)한 측면은 있겠으나, 어떠한 고전을 대하든지 그 판본에 대한 인식이 선행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 그 치열한 탐구의 한 족적을 남겨 놓음으로써 후학들에게 계발의 한 실마리가 되었으면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조선 땅에서 21세기에 효경을 새롭게 읽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내 인생에 너무도 깊고 깊은 감명을 전해준 동굴 프레스코 벽화인데, 다석(多夕) 선생의 효 기독론(Xiao Christology)의 강렬한 징표로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터키 카파도키아(2:9, 벧전 1:1에 나오는 성서지명)의 우흐랄라 계곡(Ihlara Valley) 절벽에 위치한 성다니엘 동굴교회(the Church of St. Daniel)의 벽화이다. 9세기 비잔틴 시대의 작품이다. 예수는 엄마 마리아가 애통해하며 지켜보는 중에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였고, 엄마 마리아는 예수가 승천한 후에도 앞서 보낸 아들을 생각하면서 슬프게 살았다.

이제 기나긴 슬픔의 세월을 보낸 엄마 마리아가 이 땅의 삶을 마감하려 하고 있다. 오른쪽에 남편 요셉이 호곡하고 있고 승천한 예수가 이번에는 땅에 내려와 상주(喪主)로서 엄마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다. 예수 왼쪽에 서있는 상은 가브리엘천사의 모습이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受胎)를 고지했던 장본인이다. 지금은 예수가 엄마 마리아의 영혼을 가브리엘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옛 설화에도 일찍 죽은 아들이 엄마가 죽었을 때 다시 빈소에 나타나 통곡하는 것을 동네사람들이 보았다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엄마 마리아에게는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였다. 예수는 불효자로서 다시 나타나 어머니에게 마지막 효도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얼마나 눈물겨운 모습인가?

기독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가 전부가 아니다. 서구전통 속에서도 무한히 다양한 민간전승이 있었다. 그것을 다 묵살하고 오직 편협한 27서 정경전통만 살아남은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효()는 삶의 중요한 테마였다. 나는 아나톨리아(Anatolia) 핫산다그 만년설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이 벽화의 성스러운 이미지의 전율 속에서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이 순간 새롭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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