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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 제3장 다석의 효기독론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 제3장 다석의 효기독론

건방진방랑자 2023. 3. 29.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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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다석(多夕)의 효기독론

 

 

문화유형에 따른 효의 행동 패턴

 

 

이런 예를 한번 들어보자! 3세동당(三世同堂)의 집에서, 그러니까 연로하신 노모가 한 분 계시고 어린 자식 둘을 거느리고 있는 부부가 사는 작은 집에서 불이 났다고 가정을 해보자! 불이 훨훨 타올라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모두를 구출하기란 어렵다, 노모나 자식 중에 누구를 먼저 구출해야 할까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선택의 기로에 있는 가장(家長) 갑돌이! 과연 갑돌이는 본능적으로 누구를 먼저 구출할 것인가? 갑돌이가 미국사람이라면 아마도 100 99는 어린 자식 둘을 먼저 데리고 나올 것이다. 미국영화를 보아도 대개 그러한 분위기로 그려지고 있다. 어린 자식에 대한 보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처럼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그려진다. 이혼부부의 이야기는 어떤 스릴러 영상물이든지간에 어린 자식에 대한 보호는 신성한 가치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내 또래의 한국 남자만 해도 10098 정도는 본능적으로 설사 자식을 희생시키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노모를 먼저 업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말할 것이다: “자식은 또 생겨날 수 있지만, 부모는 바뀔 수 없는 천륜!” 그렇지만 어린 자식은 천륜이 아니란 말인가?

 

지금 우리나라 30대 정도의 갑돌이라면 한 80% 정도는 본능적으로 자식 둘을 먼저 데리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노모는 어차피 돌아가실 날이 며칠 안 남았고, 어린 자식은 미래가 창창한데, 새 생명을 먼저 구하는 것이 옳지……아마도 갑돌이가 노모를 먼저 구하고 자식이 희생되었다고 한다면, 갑돌이는 평생, 부인 갑순이의 원망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분명 시간ㆍ공간에 따라 가족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우열(優劣)을 논할 수 있겠는가? 노모를 구하는 것이 옳은가? 어린 자식을 구하는 것이 옳은가? 다같이 당위에 속하는 일인데 과연 시비의 가림이 가능할까?

 

그런데 우리 세대의 사람만 해도 본능적으로 노모를 먼저 구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더 인()하다고 하는 정당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자식만 살리고 노모를 살리지 못한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한다면(양쪽 다 살렸으면 오죽 좋으련만), 노모의 죽음이 자식의 죽음보다 더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동네사람으로부터 호로자식’ ‘불효자식이라는 욕설을 듣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설명하는 이유로서 그리 불경스러운 언사는 아니다.

 

그 말인즉슨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당연히 이렇게 행동한다고 하는 어떠한 행동방식의 일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컨센서스(consensus, 일치)에서 벗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판단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의 컨센서스를 그 시대의 윤리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막연히 본능이라고 규정하는 행동양식의 상당 부분이 생리적인 것이 아니라 기나긴 가치의 축적에서 유래된다. 이드 속에 슈퍼 이고가 촉촉히 배어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문명에 사는 사람들의 윤리규범을 규정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책을 하나 꼽으라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효경일서를 꼽아야 할 것이다.

 

 

 

 

 다석 유영모(柳永模)의 언어세계

 

 

서양인에게 그런 책은 물론 신약성서이다. 여기서 서양인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제국문명의 직ㆍ간접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땅에 가톨릭의 역사는 교황청체제에 의한 교권의 확립에 주력한 역사이기 때문에, 순교와 정의로운 항거의 역사는 있을지라도 독자적인 사상의 역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데 비하면 그래도 개신교는 인간의 사유를 규제할 수 있는 중앙의 통제력이 박약하고, 교회(에클레시아) 단위의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구속력만이 일차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러한 구속력을 벗어나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신학적 사유를 전개할 수 있다.

 

이렇게 자유롭게 살면서 독창적인 자신의 신학적 사유를 전개한 격동기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우리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를 들 수 있다.

 

그는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이미 유ㆍ불ㆍ도를 통달한 달인이었으며 특히 조선 고유의 선()의 전통을 몸으로 체현한 수련의 도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기독교 사유는 조선인 고유의 체질적 사유의 격의(格義)를 벗어날 수가 없다. 더구나 그의 사유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택스(syntax, 통사론)에 있어서나 세멘틱스(semantics, 의미론)에 있어서 서구화된 한국어가 아니라, 서구적 개념에 물들기 이전의 순결한 조선인의 언어소재를 자신의 고유한 생각의 어휘로서 개념화하기 때문에 이미 우리에게 상식화된 의미론으로써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파악하기가 어려운 만큼 고유한 언어의 색조(tonality)가 있고, 따라서 그만큼 매력(charms)이 있다. 사실 그의 언어는 난해한 영어나 독일어를 이해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다행히 그의 강의를 줄곧 수강했으며 그의 언어를 이해하고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현재(鉉齋) 김흥호(金興浩, 1919~2009)에 의하여 해설되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솔 출판사에서 나온 다석일지공부7권은 그 기념비적 저작이다.

 

재미있게도 다석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라는 개념으로써 파악한다. 결국 기독교라는 것도 알고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이다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은 상징어이며 구체적인 생리 언어가 아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라 할지라도 그 상징적 개념의 보편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엄마와 딸이라고 말해도 그 상징성은 완전히 동일하다.

 

유대교에서는, 구약의 세계에서는 야훼라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종족의 신이며 우주의 창조자이며 인간 개인의 실존과는 거리가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의 평범한 삶의 세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실존적 체험에서 발하는 느낌의 아버지혹은 아빠아바(Abba)’라는 아람어 표현라는 표현으로써 호칭하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실존적 체험 속의 아빠희랍어로는 파테르이지만 이것은 실제로 아람어 아바의 표상이다로서 인식한다. ‘아빠로서의 하나님 표상은 복음서에 170회나 등장하는데 공관복음서에 61, 그리고 요한복음서에 109회 나타난다. 이것은 예수의 자기인식이 철저히 아빠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즉 하나님이 아빠화되어 있고, 예수 자신이 아들화되어 있다. 이것은 구약의 초월적 질투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민족의 관계가, 자비로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보편적 인간 개개의 실존의 관계로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한정으로 자애로운 아버지의 말씀에 순복(順服)하는 아들로서 예수가 자기를 규정할 때, 예수는 효자(孝子)일 수밖에 없다.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God)
()의 교감
효자 예수(Jesus)

 

다석에게 있어서 예수는 온전한 효자상이다. 사실 이러한 다석의 언어가, 말초적으로 서구신학의 세뇌만을 받아 온 천박한 식자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개화기를 통하여 장옷으로 몸을 가리고 천막교회를 나들이하던 조선의 여인들이나 오늘날 대형교회에 우글거리는 신도들의 심층의식에 깔려있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의 시니피에(signifié)의 실상을 다석은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언어라는 기호는 발성을 통한 청각 이미지와 그것이 지시하는 개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 청각 이미지(sound image)를 시니피앙(signifiant, signifier) 혹은 기표(記表)라 부르고, 그 개념(concept)을 시니피에(signifié, signified) 혹은 기의(記意)라고 부른다. 소쉬르는 이 양자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보는 반면 라캉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은 항상 불안정하며 기표가 기의에 대하여 우월하다고 본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기표 즉 청각 이미지에 어떠한 개념을 부착시키는지는 의문부호로 남을 수밖에 없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석은 한국민중의 무의식 속으로 미끌어져내려가 버린 시니피에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바이라는 이 한마디가 조선민중의 기독교의 실제적 의미의 전부를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효경의 통속화로서 생겨난 조선왕조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서 세뇌시켜온 아버지의 가장 온전한 모습을 바로 예수의 아빠속에서 발견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쌍방적이어야 한다

 

 

큐자료마태와 누가에서 마가자료를 제외시키고 남은 자료에서 또 다시 공통되는 자료로서 공관복음서에 내재하는 어록복음서(sayings gospel)이다. 공관복음서의 가장 오리지날한 층대를 형성한다에 속하는 예수의 주기도문(6:9~13, 11:2~4)도 인자하기 그지없는 아빠의 나라(바실레이아, βασιλεία), 곧 사랑밖에 모르는 아빠의 다스림(Reign)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간구하는 기도일 뿐이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김명수, 큐복음서의 민중신학8큐복음의 주기도문참고, 통나무출판사에서 2009년에 출간됨. 김명수의 큐복음서에 관한 함부르그대학 박사학위논문은 세계큐연구학회(IQP)의 권위 있는 정경으로 선정되었다.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온전한 효자로서 규정했을 때에, 그 효의 개념 속에는 아버지에게로의 아들의 복종이라는 전통적 효의 뉘앙스가 물론 내포되어 있다. 아버지가 죽으라면 서슴치 않고 죽기까지 하는 아들의 모습이 예수의 십자가에 서리어 있다. 그러나 예수의 복종은 나 밖으로부터 내려오는 일방적 명령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자기버림이다. 예수의 자기버림이 곧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다.

 

그러니까 다석에게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의 효()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기계적인 복종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 상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אלי אלי למה סואחטאני,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외치는 인간적 번뇌가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다석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쌍방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가 자기를 버렸다면, 물론 아버지 하나님도 자기를 버려야 한다. 욕심내고 질투하기만 하며, 자기만 믿으라고 인간을 징벌하는 독점 욕망의 화신으로서의 구약의 이스라엘 종족의 하나님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러한 욕심쟁이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것이 효()는 아니다. 효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상국가인 대동(大同)사회를 논한 예기』 「예운편에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무엇이 사람의 의로움인가? 아버지가 자애로울 때 자식은 효성스럽게 되고, 형이 착하게 굴 때 동생은 형을 따르고, 남편이 의로울 때 부인은 남편의 말을 듣게 되고, 어른이 은혜를 베풀 때 어린 사람은 순종하게 되고, 임금이 인()할 때 신하는 충성을 다하게 된다. 이 열 가지의 쌍방적 관계를 일컬어 인의(人義) 즉 사람의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何謂人義? 父慈子孝; 兄良弟弟; 夫義婦聽; 長惠幼順; 君仁臣忠. 十者謂之人義.

 

십의(十義)
부자(父慈) 자효(子孝)
형량(兄良) 제제(弟弟)
부의(夫義) 부청(婦聽)
장혜(長惠) 유순(幼順)
군인(君仁) 신충(臣忠)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강성은 쌍방성이다. 인륜의 도덕이 호혜적인 정당한 관계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아들의 관계가 쌍방적이 아닐 때는 인간세의 모든 관계가 파탄에 이르고 만다.

 

예수가 자기를 버리듯이 하나님도 자기를 버린다는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도 자신을 끊임없이 무화(無化)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나 노장(老莊)이 말하는 ()가 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허무(虛無)기독교에 고유한 인격성을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바로 그 허무(虛無)를 친근한 아버지로서 감지할 수 있을 때 인간의 참나, ‘얼나다석의 용어: ‘몸나에 대비되는 얼나가 작동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가장 경계해야 할 사태는 하나님을 인간화시킴에 존()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유교가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효()를 철저히 충화(忠化)시켜버린 것이다. ()을 인간 내면의 중심(中心)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군신(君臣)관계에 있어서의 일방적 충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자의 효는 군신의 충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군신의 충을 실현키 위한 세뇌적 도구로서 가정 내에서 부자의 효를 강요하는 것이다.

 

 

 

 

 군신관계로 충화(忠化)된 기독교신앙 속 얼나와 몸나

 

 

현재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다석이 말하는 보편적ㆍ쌍방적 효의 실천의 대상이 아니라 군신(君臣)의 관계로 충화(忠化)된 하나님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철저히 인간화된, 그러니까 타종족의 신앙을 배타하기 위하여 폭력화된 하나님이며, 그것은 타종족(이단)을 무찌를 수 있는 군주(a secular King)로서의 하나님이다.

 

다석의 효기독론이 철저히 배제하는 것은 충화(忠化)된 유교의 형식주의적 측면과 서구전통의 인격성의 배타성과 폭력성이다. 다석의 하나님은 인간화된 모습으로 칠정(七情)식색(食色)을 드러내는 하나님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관이나 희랍 신관의 일반적 모습이 아니라, ‘없이 계신 하나님이다. 그것은 표전(表詮)으로서의 태극(太極)의 배면에 있는 차전(遮詮)으로서의 무극(無極)이다머우 쫑산(牟宗三) 교수의 표현. 끊임없이 자신을 무화(無化)시키면서도 끊임없이 생명을 탄생시키는 창조력으로서의 생생지도(生生之道, Creative Creativity)황 똥메이(方東美) 교수의 표현이다. 그것은 바로 장횡거(張橫渠)서명(西銘)에서 말한 건칭부곤칭모(乾稱父坤稱母)’로서의 부모(父母)이다. 따라서 그 사이에서 생성되는 모든 존재는 나의 동포이다(同胞)탯줄을 공유한 존재, 원불교에도 동포은(同胞恩)’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 동포 역시 배달민족 동포가 아니라 천지만물과의 동포의식이다. 따라서 효자 예수와 나와의 간격은 존재할 수 없다이러한 문제에 관한 담론으로서 다석의 신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명저가 있다. 감신대 이정배 교수의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 多夕신학의 얼과 틀 그리고 쓰임을 보라. 다석신학을 현대신학 담론의 주류적 쟁점 속으로 편입시킨 그의 공로는 크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정배 교수는 종교간의 편견없는 소통을 가장 자유롭게 외쳤던 변선환의 제자로서 김흥호의 가르침을 정통적으로 계승하였다.

 

안병무(安炳茂)유영모(柳永模)의 집회에 참석했을 때 유영모와 나눈 유명한 대화가 있다(안병무의 구술을 기록한 것).

 

유영모: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했는데 그 는 나 유영모의 를 가리킵니다.

안병무: 그것이 어떻게 선생님의 입니까? 예수님의 이지 않겠습니까?

유영모: 나는 성경을 읽을 때 의 이야기로서 읽지 않습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곧 나의 삶과 죽음입니다. 예수의 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예수라는 개인의 가 아닙니다. 는 하나님의 이며 온 인류의 참 나입니다.

 

예수라는 인간 개인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면 그것은 또 다시 예수 자신의 효()를 충화(忠化)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예수에 대한 효를 충화시키는 것이다. 충화되는 동시에 예수는 폭군(暴君)으로 화하고 만다.

 

예수는 하나님일 수가 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됨을 온전한 효()로서 보여준 사람의 길[]일 뿐이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인간의 참 생명이 몸에 있지 않고 얼에 있는 것임을 알리러 온 것이다. 다석은 말한다.

 

 

내가 없는 것이 마음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하게 되어야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거울 같은 마음이요, 얼이요, 얼은(成人)이다. (이정배 75).

 

몸나가 없는 곳에 한아님이 계시고, 한아님 앞에는 얼나가 있다. 얼나가 있는 곳에 한아님이 계시다. 얼나와 한아님은 하나다. (이정배 68).

 

 

다석에게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몸나얼나의 대비적 관계는 성리학의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대비로 이해할 수도 있고, 바울이 말하는 육체와 성령, 몸과 영, 율법과 의, 사망과 생명 등등의 이분법적 사유로 규정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다석에게서 몸의 극복은 몸에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결코 그러한 이원론의 틀로써 다석의 사상을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가온찍기

 

 

몸나와 얼나는 결국 가온찍기에서 통합되는 것이다.

 

가온찍기란 물론 원래 있던 우리말이 아니고 다석이 만든 말이다. ‘가온의 뜻은 역시 가온데라는 뜻이 일차적인 것으로 나의 내면 중심이면서 우주의 중심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가온의 의미 속에는 온전함이라는 의미도 들어가 있다. ‘찍기점을 찍는다는 말의 동명사형이다. 가온찍기란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참나를 영원히 오가는 시공간 속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만나는 생명사건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되는 찍음이다. 그 가온찍기가 씨ᄋᆞᆯ이요 해탈이요 견성이요 십자가를 짐이다. ‘찍기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그것은 삶의 순간순간에서 끊임없이 찍는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효라는 것은 돈오(頓悟)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점수(漸修)적인 것이다. 돈오(頓悟)는 가온찍기의 점수(漸修)과정 속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석의 씨ᄋᆞᆯ사상에는 여래장적 요소가 희박하다. 하나님이라는 존재, 그것을 구현하는 예수라는 생명,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나가 모두 무화(無化)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함석헌의 씨ᄋᆞᆯ은 여래장적 실체화의 가능성을 내포할 것이다. 함석헌의 언어는 그러한 문제에 관한 금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좀 복잡한 문제인데 나의 논의는 마쯔모토 시로오(松本史郞)연기와 공 여래장사상비판(緣起如來藏思想批判)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혜원 스님의 번역본이 있다.

 

이상으로 간략히 소개한 다석 유영모의 효기독론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독교신앙의 수직구조가 전통적 효개념의 수직구조와 맞닿아 있다는 그 한 축에서 찾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석은 그 수직구조를 수운, 해월과 같은 동학의 사상가들이 수평구조로 해소시키려고 노력한 것과는 달리 그 수직구조의 보편주의적 진면목을 추구함으로써 조선왕조의 효윤리의 폐해를 막으려 하였던 것이다. 효가 기껏해야 일가족 내에서의 생리적 존재에 대한 충성이나 복종으로 이해될 때, 그것은 무서운 질곡이 될 수도 있다. 효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를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확이충지(擴而充之)할 때 효는 우주론적 차원을 확보하고 좁은 윤리의 리고리즘(rigorism)을 벗어난다.

 

()   하나님 아버지
  ()
충화(忠化)
  ()
()   예수 - 인간

<기독교신앙의 왜곡된 모습>

 

이 도표에서 효()가 충화(忠化)되는 위험성을 다석은 가장 크게 경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교의 현실은 효를 충화시킨 결과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아니ᄒᆞ면 아니된단 어머니 ᄆᆞᆷ 아ᄇᆞ지 뜻 참 믿고 따라간 것이 아ᄃᆞᆯ인가 ᄒᆞ노라 다석일지공부』 Ⅱ-690

 

 

효자로서의 아들 예수의 삶을 잘 그려놓은 다석의 말이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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