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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효경한글역주, 제1장 주자학과 『효경간오』 - 『효경간오』는 실패작이다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제1장 주자학과 『효경간오』 - 『효경간오』는 실패작이다

건방진방랑자 2023. 3. 29.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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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경간오는 실패작이다

 

 

그 대강의 사정은 이러하다.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는 우리가 독립된 작품으로서 읽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책자가 아니다.

 

우선 간오(刊誤)’라는 말을 살펴보자! 간오란 오류[]를 도려낸다[]는 뜻이다. 즉 외과의사가 암덩어리를 잘라내듯이 효경이라는 텍스트 속에 박혀있는 암덩어리들을 후벼 파내버린다는 뜻이다. 효경간오는 수술대 위에서 의사가 도려낼 것을 도려내기만 한 상태에서 멈춘 작품으로, 제대로 다시 봉합도 하지 않았고, 수술이 끝난 후 치유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수술은 제대로 되었는가? 천만에! 수술 자체가 엉터리로 되고 말았다. 이 덩어리를 자르다가 저 덩어리도 건드리게 되고, 그러다가 또 자르고 또 자르고, 그러다 보니까 엉망이 되어 버렸다. 환자가 살 가망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의사가 수술하다 말고 도망가 버렸다.

 

주자는 의사로서 효경수술에 실패를 자인했다. 그래서 효경간오에 대하여 서문도 쓰지 않았고, 주석도 달지 않았다. 그가 간오를 탈고한 것은 57세의 나이, 순희(淳熙) 13년 병오(丙午) 가을 8월이었는데 그가 71세 경원(慶元) 6(1200) 39일에 세상을 뜰 때까지 14년 동안이나 서재 대광주리 속에 처박아두고 한번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의 사후, 그의 막내아들 주재(朱在)() 숙경(叔敬), 벼슬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郞)에 이르렀다가 그 원고가 버리기 아까워 그것을 위료옹(魏了翁, 1178~1237)자는 화보(華甫), 호는 학산(鶴山), 사천성 포강(蒲江) 사람, 경원(慶元)의 진사. 주희를 사숙한 경학자에게 보냈는데 위료옹이 그것을 상재(上梓)하였다. 그러니까 효경간오는 제대로 된 책이 아니다. 그리고 주희 자신이 출판되기를 원치 않았던 책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주희의 범죄자에 가까운 자괴의식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후기가 붙어 있다.

 

 

나 희()는 예전에 형산(衡山, 지명) 호시랑(胡侍郞)호굉(胡宏), c.1105~c.1155. 남송의 성리학자. 자는 인중(仁仲), 복건성 건영(建寧) 숭안(崇安) 사람, 형산에서 20여 년간 독서에 열중하였다. 대유 무이선생(武夷先生) 호안국(胡安國, 1074~1138)의 아들이며 양시(楊時후중량(侯仲良) 문하에서 수학. 가학을 주희에게 전하였다. 남송 낙학(洛學)의 개창자격의 인물이다. 학자들이 오봉선생(五峰先生)이라 불렀다논어(論語)에 관한 논설을 읽는 중에, 효경에 인용된 시경의 구절들이 효경의 경전본문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의심하는 대목을 본 적이 있다.

熹舊見衡山胡侍郞論語說, 疑孝經引詩非經本文.

 

처음에는 심히 놀라 해괴하게 생각하였으나, 나중에 천천히 곰곰이 살펴본 결과, 비로소 호시랑의 말씀이 신빙성이 있을 뿐 아니라, 효경중에서 의심할 만한 것들이 비단 시경인용문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初甚駭焉, 徐而察之, 始悟胡公之言爲信, 而孝經之可疑者不但此也.

 

그래서 서면으로 다시 사수(沙隨) 정가구(程可久)남송의 학자. 이름은 형(), 사수선생(沙隨先生) 어른께 질의하여 보았더니 어른께서 나의 편지에 답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었다: “근자에 옥산(玉山) 왕단명(汪端明)남송의 학자. 이름은 응진(應辰), 옥산선생(玉山先生)을 만났는데, 그 또한 생각하기를 이 효경이라는 책은 후세인들이 부회(傅會)하여 억지로 꿰맞추어 생겨난 부분들이 많다고 하였다.”

因以書質之沙隨程可久丈, 程答書曰: “頃見玉山汪端明, 亦以爲此書多出後人傳會.”

 

이에 나는 나의 선배 학자들이 책을 읽는 방식이 매우 정밀하고, 또한 깊게 살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 홀로 몰래, 내가 한 짓이 선대 학설을 인술(因述)한 것이며, 또한 근거 없이 망언을 일삼았다는 죄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아주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於是乃知前輩讀書精審, 固以及此. 又竊自幸有所因述, 而得免於鑿空妄言之罪也.

 

이러한 연유로 이 효경의 본뜻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관련된 타 문헌의 파편들을 긁어모아 한데 묶어 별도로 효경외전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만 있었을 뿐 감히 실행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순희 병오(1186) 812일 주희 쓰다.

因欲掇取他書之言可發此經之旨者, 別爲外傳, 顧未敢耳. 淳熙丙午八月十二日記.

 

 

매우 겸손한 듯이 보이는 레토릭이지만, 그 핵심인즉슨 자기가 효경이라는 중국의 바이블에 대하여 착공망언의죄(鑿空妄言之罪, 허공을 뚫어 허황된 말을 일삼는 죄)를 범하고 있는 공포감에 대한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 변명의 방식도 어떠한 명철한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호굉, 정가구, 왕단명 등 당대의 학자들의 인상주의적 언급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불안한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얻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당대 학자들과의 연대감만으로써는 도저히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효경이라는 텍스트를 보강할 수 있는 외전을 편찬함으로써 자신의 실패를 만회해보려고 했으나, 그것도 마음만 있었을 뿐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결국 주희효경간오의 실패를 선언한 것이다. 마음만 있었을 뿐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는 뜻은 더 이상 실패의 작업을 계속할 의향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효경간오는 서궤에 쑤셔박아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주희와 같은 대석학이 외전이라도 지어 효경간오의 작업을 마무리 짓지 못했을까? 그 가장 간요(肝要)한 이유는 외전의 작업에 대한 부담이 아니라 효경이라는 경전 자체에 대한 불신감 때문이었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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