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한국의 토착경전 『부모은중경』
박성원의 『돈효록』을 간행한 정조의 효의식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줏간에 갇혀 굶어죽는 8일간의 고통을 11세의 나이에 같이 했다. 그는 그 현장을 목격했고 피끓는 아픔으로 그 처절한 사투를 같이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정조의 효심은 각별한 것이었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가 환갑을 맞이한 다음 다음 해 정조 21년(1797) 정월 초일에, 앞서 말한 『이륜행실도』와 『삼강행실도』를 합본하여 새롭게 편찬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펴낸다(총 150 케이스, 그 중 한국인은 16명), 그 서문에서 엄마 혜경궁 홍씨가 환갑을 맞이하도록 모실 수 있었던 행운을 언급하면서 이와 같이 말한다.
정치가 돌아가는 것은 조정에서 볼 수 있고, 나라의 풍속은 민간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치가 미치는 한계는 매우 천박한 것이요, 풍속이 발전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심오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나라가 다스려지는 것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민간을 우선으로 하고, 조정은 뒤로 한다.
觀政在朝, 觀俗在野. 政之所及者淺, 俗之所得者深. 故善乎觀人之國者, 必先其野, 而後其朝肆.
『오륜행실도』를 펴내는 그의 문제의식의 명료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정조 7년(1783)에는 어제(御製) 『돈효록(敦孝錄)』을 펴내었다. 그 「어제서(御製序)」에서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효란 하늘의 벼리요, 땅의 마땅함이요, 사람의 길의 큰 근본이다. 『효경』의 이와 같은 말씀에 더 붙일 말이 없다. 왕된 사람이 백성을 가르치고 풍속을 이루는 데 효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정치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효를 일으키는 것을 제일 힘써야 할 일로 삼지 아니 한 자가 없다
孝爲天經地義人道之大本, 固無論已. 王者之敎民成俗, 莫急於孝. 故爲政者, 未有不以興孝爲先務焉.
『돈효록(敦孝錄)』은 본시 영조 38년(1762)에 조선 후기 학자인 박성원(朴聖源)이 『효경』, 「서명(西銘)」을 비롯하여 경사와 다양한 문헌에서 효와 관련된 각종 교훈과 고사를 가려내어 57권 23책으로 편찬한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이것은 효를 주제로 한 대백과사전과도 같은 것이며 박성원의 필생의 노작이다.
주희가 『간오(刊誤)』 끝머리에서 『효경』의 뜻을 발휘하는 말들만 여러 책에서 골라 모아 별도로 외전(外傳)을 짓고 싶으나 여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바로 그 작업을 완수한 셈이다. 방대한 자료를 효의(孝義), 효교(孝敎), 생사(生事), 상사(喪事), 봉제(奉祭), 효감(孝感), 현미(顯美), 계술(繼述), 광효(廣孝), 수신(守身), 처변(處變), 11개 항목으로 분류하여 기술하였다.
박성원이 원래 이 책의 이름을 『효경』의 뜻을 펼쳐내는 책이라 하여 『효경연의(孝經衍義)』라고 지었는데, 그의 스승이며 노론계 낙론(洛論)의 거두인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1746)가 효행의 돈독함을 권장한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돈효(敦孝)’라고 명명(命名)한 것을 존중하여 선생의 말대로 책이름으로 삼는다고 서(序)에 써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돈효록』이라는 이름보다는 당연히 『효경연의』가 되었어야 한다.
정조가 간행한 책으로 『돈효록』은 효에 관한 이론의 집대성이며 학구적 노작이며, 『오륜행실도』는 효에 관한 실천사례 집성으로서 대중계몽적 걸작이라 할 것이다. 『돈효록』을 테오리아(theoria, 이론)라고 한다면, 『오륜행실도』는 프락시스(praxis, 응용)라고 할 수 있다. 정조의 삶에 있어서 이 테오리아와 프락시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바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다.
▲ 62권, 연세대학교 국학자료실 소장,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1915~2005) 교수 기증본.
명나라 제5대 황제 선종(宣宗, 朱瞻基, 1425~34 재위)이 경전과 기타전적에서 오륜(五倫)과 관련있는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채집하여 62권으로 편찬한 것. 선종은 조카 건문제(建文帝)의 제위를 찬탈하고 그 찬탈에 항거한 대유(大儒) 방효유(方孝孺) 등 900여 명의 일족과 친구, 학자들을 학살한 영락제의 손자이다.
그러므로 재위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기에 이런 책을 적극적으로 편찬한 것이다. 권 1은 오륜총론(五倫總論), 권2~23은 군도(君道), 권24~53은 신도(臣道), 권54~55는 부도(父道), 권56~58은 자도(子道), 권59 부부지도(夫婦之道), 권60은 형제지도(兄弟之道), 권61~62 붕우지도(朋友之道)로 구성되어 있다.
영종(英宗) 정통(正統) 12년(1447)에 상재(上梓), 천하(天下)에 반포하였다. ‘광운지보(廣運之寶)’라는 황제의 주인(朱印)이 찍혀있다.
1469년 중국황제가 보낸 이 책을 조선의 사신들이 받아와서 예종(睿宗, 1468~69 재위)에게 바쳤는데 예종은 바로 영락제의 선례에 힘입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아들이다. 정조의 『오륜행실도』 편찬은 우리나라에 이미 들어와 있었던 중국 도덕교과서들의 사례를 따른 것이다.
효의 본질은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다
용주사(龍珠寺)라는 이름 자체에서도 우리는 정조의 애틋한 효심을 읽을 수 있다.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어서라도 제왕의 묘혈에서 제왕을 상징하는 용(龍)으로서 입에 여의주(珠)를 물고 승천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용주사 대웅전 대들보 주변으로 여의주를 문 용들이 13수나 조성되어 있다.
『조선불교통사』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조와 보경(寶鏡) 사일(獅馹) 스님의 만남이 일차적으로 용주사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용주사를 개창하기 이전에 만난 것이며, 그 인연은 바로 『부모은중경』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이다.
정조는 원래 성리학에 밝은 대 유학자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불법(佛法)의 시비를 가려 도태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初欲沙汰佛法].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의 승려인 보경(寶鏡)이라는 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이라는 책자를 얻어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정조는 효에 관심이 있었다.
乙覽之餘, 宸心大有所感觸者.
여기 ‘을람(乙覽)’이라는 표현은 임금이 낮에는 정무에 바빠 책을 못 읽으므로 밤(乙夜)에 독서한다는 뜻으로 ‘임금의 독서’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신심(宸心)’이라는 표현도 임금에게 쓰는 말로 ‘임금의 마음’을 뜻한다. 정조께서 우연히 『부모은중경』을 얻어 읽다가 그 마음에 크게 ‘감촉(感觸)’된 바가 있었다는 뜻인데, 여기 ‘감촉’이라는 표현은 그 문자에 촉발을 받아 생각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정조는 우연히 『부모은중경』을 읽은 나머지 어떠한 생각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뜻이다. 과연 그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은중경』에서는 ‘효(孝)’라는 개념을 ‘보은(報恩)’이라는 개념으로 바꾼다. 효와 보은은 어떻게 다른가? 앞서 말했듯이 효의 본질은 아래서부터 위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다.
전술의 동아일보의 논설이 적확히 지적했듯이 유교의 『삼강행실도』 류의 효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방향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보은’은 필연적으로 쌍방적이다. 보(報)가 있기 전에 반드시 은(恩)이 선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은(恩)이란 위로부터 아래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은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무량(無量)한 은혜이다. 따라서 『부모은중경』의 위대한 측면은 『삼강행실도』가 강요하는 복종의 윤리를 하해(河海)와도 같은 자비의 윤리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 | 上 | 上 | |
효↑(孝) | 보(報)↑↓은(恩) | ||
자식 | 下 | 下 | |
『삼강행실도』 | 『부모은중경』 |
▲ 용주사 대웅전의 위용. 정조 14년(1790년)에 완공된 그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국전쟁의 화마도 비켜갔다. 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의 역작으로 알려져 있다.
남성성에서 여성성으로
다음으로 지적되어야 할 중요한 패러다임 쉬프트는 효를 남성성(masculinity)으로부터 여성성(femininity)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이다.
효의 가장 원초적 출발은 모성애이다. 동물의 세계에 있어서도 수컷은 수태과정에 주로 기능하며, 출산과 양육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출산과 양육은 암컷의 모성애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효의 교감의 가장 원초적 대상은 엄마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효경』이나 『삼강행실도』나 기타 유교경전을 보면 효의 대상이 모두 아버지로만 되어 있다. 모녀 관계는 언급되지 않고 부자관계, 부녀관계, 부부관계만 언급되어 있다. 부(父)는 자(子)의 벼리[綱]가 되고, 부(夫)는 부(婦)의 비리가 된다. 그러니깐 모든 것이 아버지 중심이요, 남성 중심이다.
아버지 | ||
↗ | ↑ | ↖ |
딸 | 아들 | 엄마 |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이것은 자연현상을 넘어서는 문명현상이요, 정치현상이다. 인간세의 문명은 전쟁과 더불어 시작하였고【고릴라의 세계에도 대규모 전쟁이 있다】, 전쟁의 주도권을 남성이 장악하였는다는 데 있다. 전쟁의 주도권과 함께【추방사회(chiefdom)의 등장】 가정의경제권을 아버지가 장악하였다는 데 부계의 우위(the superiority of patrilineage)가 확보된다.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한 효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문명의 가치관 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라는 것도 문명화되고 윤리화되었지만, 그 바탕에는 자연적이고 생리적이고 본능적인 그 원초성이 퇴색되지 않는다. 아버지의 체취는 사라져도 엄마의 체취는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
『삼강행실도』가 철저히 아버지 중심의 효를 말한 것은, 군(君)은 신(臣)의 벼리(綱) 된다고 하는 군위신강(君爲臣綱)에 부위자강(父爲子綱)과 부위부강(夫爲婦綱)을 귀속시켜야 하는 정치적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중심의 효는 한마디로 불순(不純)한 측면이 있다.
▲ 용주사 대웅전 앞에 있는 천보루(天保樓)와 5층석탑(1702년 성정性淨스님이 부처님 사리 2과 안치), 천보루의 아래층이 대웅보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그 안에는 홍제루(弘濟樓)라는 현판이 있다. 용주사는 우리나라 효문화의 중심이며 소중한 문화재가 많이 보존되어 있다. 현륭원ㆍ건릉(정조의 릉)과 유기적인 공간연속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주변경관이 모두 정조 효행의 족적과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을 다 복원해도 모자를 판에 그 소중한 역사공간에 고층 아파트를 짓는 등 단순한 자본의 논리에 따라 마구 훼손해 가고 있다. 효를 테마로 하는 세계적인 공원을 조성하면 훨씬 더 수익이 높을 수도 있는데 수요도 절실하지 않은 고층 아파트만 지을려고 하는 것은 토목ㆍ건설공화국의 소아병적 발상이다. 국가의 보호와 지역인사들의 각성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불교와 여성성
그런데 불교는 원래 정치적 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하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고해로부터의 구원과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각성(覺醒)운동이다. 따라서 그 각성을 유도하는 대자대비의 상징체계에는 본시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이 강하다. 우리나라 민중에게 가장 아필이 된 구세보살(救世普薩)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경우에도 그 성별을 정확히 논하기는 어려운 것이나(물론 남성으로 규정되었다), 그 불상의 표현양식을 보면 온갖 찬란한 영락(瓔珞: 꿴 보석구슬 장식)으로 몸을 휘감고 속이 비치는 샤리 속에 아련히 흘러내리는 몸매의 표현은 지극히 여성적이다. 고려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섬세하기 그지없는 그 매혹적인 자태를 보라! 석굴암의 11면관음보살상 대비성자(大悲聖者)의 지엄한 자태 속에도 아주 소박한 조선의 여인, 우리가 흔히 느낄 수 있는 엄마의 모습이 들어가 있다. 『부모은중경』의 뛰어난 사실은 ‘부모’를 말하면서도 오로지 ‘엄마의 무한한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강행실도』 | 『부모은중경』 |
아버지에 대한 충효 | 엄마의 자애 |
아버지 ↑ 아들ㆍ딸 |
엄마 ↓ 아들ㆍ딸 |
국보 제120호, 용주사 범종, 명문은 다음과 같다: “성황산 갈양사 범종 한 구를 석반야가 2만 5천근을 들여 주성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어느날 사문 염거[成皇山葛陽寺, 梵鐘一口, 釋般若鑄成, 二萬五千斤. 今上十六年九月日, 沙門廉居].”
『부모은중경』은 세존이 수많은 대중들과 함께 여행[南行]을 하다가 한 무더기의 마른 뼈[枯骨]를 보자 갑자기 오체투지를 하여 그 삭은 뼈에게 절을 하는 극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많은 대중 앞에서 놀란 아난은 세존이야말로 삼계의 큰 스승이요, 중생의 자비로운 아버지이시라서 모든 사람이 절을 올리는 분이신데 어찌하여 썩은 뼈에 절을 올리시는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묻는다. 이에 세존은 대답한다: “저 마른 뼈가 전생의 나의 부모님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으랴[此一堆枯骨, 或是我前世翁祖累世爺!”
이런 극적인 대화로써 사람을 끌어들이며 곧바로 엄마가 아기를 가진 후 열 달 동안 고생하는 모습을 그리는데, 한 달, 두 달, 세 달 … 열 달까지 그 태아의 생성모습을 그리는 언어가 오늘날의 발생학적 사유와 대차가 없으며 그 묘사기법이 매우 절실하다. 그리고 천 개의 칼로 배를 휘젓고 만 개의 칼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엄마의 산고를 묘사하고 곧이어 앞서 말한 어머님 은혜 십게찬송(十偈讚頌)이 설파된다.
▲ 용주사 『은중경』의 첫 판화 「여래정례(如來頂禮)」. 가운데 세존이 오체투지를 하고 있고 그 앞에 마른 뼈[고골枯骨]가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자세히 뜯어보면 단원의 표현력이 섬세하다.
『은중경』 대성공의 비결
정조가 『부모은중경』을 펴내고(1796) 게송을 지었는데, 그 게송에 화답하여 당시의 영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지은 게송을 보면 당시 편견없이 부모은중경을 읽은 사람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번암집樊巖集』권59).
신이 연전에 우연히 죽산(竹山) 칠장사(七長寺)에 올라 갔다가, 그곳에 『부모은중경』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나이다. 그것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채 반도 나가기 전에 감격하여 눈물이 저절로 눈시울 안에 가득하게 되었나이다. 이는 사람이 마음이 동하여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지 억지로 된 것이 아니옵니다.
臣年前, 偶上竹山七長寺, 見有恩重經. 拈讀未半, 感淚目然盛眶, 此人心之不待勉强而然者.
대저 우리 유가에서는 불승(佛乘)이라 하면 오랑캐 놈들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나아가 오륜의 중함도 모르는 것이라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이 『은중경』을 보면 부모의 은혜가 중함을 설파하는 데 그 묘사가 너무도 진솔하고 핍절하여 보통사람들이 이르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게 하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심도가 깊고 깊습니다. (중략)
夫吾儒之不以佛乘爲在夷狄, 則進之者以其不知有五倫之重也. 今是經也, 說及父母恩重, 描寫得十分眞切, 造人所不能到, 其感人之深. …
그리하여 승인(僧人)에게 간청하여 『은중경』을 끼고 내려왔습니다. 지금까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진귀하게 여겨 아끼고 애호하옵나이다. 세간에 저와 같이 이 책을 보는 자가 적은 것만을 한탄하옵나이다.
遂懇僧人挾以來, 至今置在丌上, 珍惜愛護, 恨世之同我見者盖尠.
물론 왕의 보호가 있으니 이런 말을 마음 놓고 하는 것이겠지만, 조선왕조의 영의정의 입에서 이런 말을 공식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우리의 상념을 여지없이 격파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학에 심취한 자라도 『은중경』을 읽으면 부모님의 은혜에 관해 어떤 진솔한 느낌이 촉발된다는 그 고백은 진정성이 인정된다. 그 진정성의 핵심은 역시 ‘엄마의 정’을 묘사했다는 데 있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위압적이고 권위적이고 수직적이고 당위적이고 이성적인데 반해, 엄마에 대한 감정은 인종적이고 포용적이며 수평적이고 자연적이고 감성적이다. 따라서 『부모은중경』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엄마에 대한 원초적 느낌’을 촉발시킨다. 아버지에 대한 효는 강요되는 느낌이 있지만 엄마에 대한 감정은 효라는 말을 떠나 그냥 스스로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것이다. 이것이 『부모은중경』의 대성공의 비결이라 할 것이다
위경은 잘못된 개념, 전래경전과 토착경전만 있을 뿐
용주사에 소장된 목판본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뒤에 보면, ‘세유조집서중하개인(歲柔兆執徐仲夏開印), 장우화산용주사(藏于花山龍珠寺)’라고 되어 있다.
고갑자(古甲子)로 ‘유조(柔兆)’는 천간(天干) 병(丙)의 별칭이고, ‘집서(執徐)’는 12지중 진(辰)의 별칭이다. 때는 병진년(정조 20년, 1796) 중하(仲夏: 한 여름)에 개인(開印: 초판 인쇄)하였고, 경판은 화산 용주사에 보관한다는 뜻이다. 이 목판은 규장각(奎章閣) 소속의 주자소(鑄字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경판을 용주사에 내려보내어, 그곳에 보관케 하였다. 용주사에 경판이 보관된다는 의미는 용주사에서 계속 책으로 찍어낼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목판의 특징은 변상도 12매(목판은 앞뒤로 다 새겼으므로 6매가 된다), 한문 경전 22매(목판 11매), 한글 경전 50매(목판 25매)가, 보통 경전에는 혼합되어 병렬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 한글 경전에 변상도만 붙이어 책으로 만들 수도 있고, 순 한문 경전에 변상도를 붙이어 책으로 만들 수도 있고, 변상도, 한문, 한글을 합본할 수도 있다. 완벽하게 대중보급을 의식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대중보급을 의식하였기 때문에, 한문본이나 한글본에 모두 친절하게 용어 해석을 한 주석까지 곁들였다.
『부모은중경』을 보통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위경(僞經)’이라는 표현은 매우 잘못된 관념에서 날조된 용어이다.
불경의 경우 진ㆍ위를 인도경전을 기준으로 하여 말할 수 없다. 인도경전 자체가 다양한 유파에 의하여 시공을 달리하여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팔리어 아가마(āgama)【아함경(阿含經): 장부(長部)ㆍ중부(中部)ㆍ상응부(相應部)ㆍ증지부(增支部)ㆍ소부(小部)의 다섯 니까야(Nikāya, 部)가 있다】 경전 정도나 그 권위를 보장받을 수 있을까, 불경에 대해 진위를 논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불성설이다.
한역불경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다면 ‘전래경전(傳來經典)’과 '토착경전(土着經典)’ 정도로 분류하는 것이 훨씬 더 불교의 진면목을 정확하게 표현해 줄 것이다. 불교는 토착화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경전을 위경(僞經)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위경(apocrypha)’이라는 개념은 오직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가톨릭 정통파의 편견 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개념일 뿐이다. 『부모은중경』을 보면 그것이 효사상을 강조하는 중국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임이 분명하고, 고판본에는 유향의 『효자전』에 나오는 정란(丁蘭), 곽거(郭居)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1900년에 발굴된 돈황 문서 중에 그러한 문헌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효의 새로운 보편주의적 지평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이라는 이름의 경전이 중국에서 통용되지 않았으며 그것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이름의, 우리나라 판본의 원형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 은중경류의 경전이 많이 있으나 우리나라 『불설대보부모은중경』과 같이 완벽한 체제를 갖춘 짜여진 경전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러한 문제에 관하여서는 최은영, 『부모은중경』의 해설과, 『가산불교대사림(伽山佛敎大辭林)』 제10권 ‘부모은중경’ 항목을 보라】. 우리나라 판본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대덕본(大德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대덕 4년(충렬왕 26년, 1300)에 목판으로 간행된 『부모은중경』. 후대의 판본과 내용상 차이가 있으나 이영성(李永成)의 발문과 연기(年紀)가 있어 우리나라에서 판각된 것이 확실하다. 현재 경주의 기림사(祇林寺)에 소장되어 있음.
2) 고려무오본(高麗戊午本)
고려 우왕 4년(1378)에 간행된 목판, 조명기 박사 소장 보물 제705호.
3) 삼경합부본(三經合部本)
조선 문종 1년(1451)에 명빈 김씨(明嬪金氏)의 발원으로 간행.
4) 화암사본(花岩寺本)
조선 세종 23년(1441) 전라도 고산 화암사에서 간행된 판본.
5) 구마라집역본(鳩摩羅什譯本)
조선 태종 7년(1407) 궁중에서 간행된 판본. ‘구마라집조역(鳩摩羅什詔譯)’이라하여 역자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구마라집이 번역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권위에 가탁하여 이 경전의 가치를 높이고자 한 사족일 뿐이다.
6) 보물 제920호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단종 2년(1454)에 간행된 목판본으로 ‘사문구마라집봉 조역(沙門鳩摩羅什奉 詔譯)’으로 되어 있다. 평양부(平壤府) 대성산(大成山) 광법사(廣法寺) 개판(開板). 이행로(李幸鷺) 소장.
7) 동대소장귀중본
가정(嘉靖) 41년 임술(명종 17년, 1562) 6월, 안동(安東) 광흥사(廣興寺), 채문(蔡文) 등 개판, 이것도 구마라집역으로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판본이 있으나 문제는 이 판본들이 모두 정확하게 공개되어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판본의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용주사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이다. 고려ㆍ조선 판본들을 세밀하게 대비ㆍ검토하여 그 출입을 논할 필요가 있겠으나 필자의 여력이 그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후학들의 노력을 기대한다. 사진상으로 언뜻보기에 기림사 대덕본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고려무오본(1378)의 내용은 이미 용주사판의 내용과 대차가 없다고 판단된다. 그러니까 이미 고려 말에는 우리가 오늘 운운하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원형이 성립되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현재 대정대장경 85권(No. 2887)에 실려 있는 돈황본의 『불설부모은중경(佛說父母恩重經)』(‘대보大報’가 빠져 있다)을 살펴보면 훨씬 더 간소하고 상식적인 언어로 기술되어 있으며 ‘엄마’의 은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부모’의 은혜를 설하고 있다. 앞에서 세존이 고골(枯骨)에 오체투지 절하는 드라마틱한 도입도 없다.
그리고 돈황본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사랑을 배반하는 자식에 대한 한탄이나 질책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반하여 용주사본은 오직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끝없는 근심과 무한한 애정을 강조할 뿐, 배반한 자식에 대한 부모의 한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용주사본에는 불효하면 아비무간지옥(阿鼻無間地獄)에 떨어져 쇠몽둥이, 쇠꼬챙이, 쇠망치, 쇠창과 칼날과 도끼날이 비구름처럼 공중에서 떨어져 찔리고 베이면서 몇 겁이 지나도록 조금도 쉬지않고 참기어려운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실려있으나 돈황본에는 일체 지옥이야기가 없다. 그러니까 용주사본의 구성은 보은에 대한 절실한 마음을 흥기시키는 강렬한 드라마적 구성이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 진정한 ‘한류’의 시작을 『부모은중경』에서부터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돈황본 | 용주사본 |
부모의 사랑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사랑을 배반한 자식에 대한 한탄이나 질책이 나타남 | 오직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끝없는 근심과 무한한 애정을 강조함 |
일체 지옥이야기가 없음. | 불효하면 아비무간지옥(阿鼻無間地獄)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들어있음. |
그리고 여타 돈황본에는 우란분재와의 연결이 있지만, 우리 용주사본에는 그러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용주사본에는 ’원유팔종(援喩八種)’이라하여 부모님의 무량한 은혜는 현실적으로 곧 갚을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덟 번이나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설사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메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메고 살갗이 닳아 뼈가 드러나고, 다시 뼈가 닳아 골수가 드러나도록 수미산을 돌고 돌아 백천 번을 지나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나니라.
假使有人, 左肩擔父, 右肩擔母, 硏皮至骨, 骨穿至髓, 遶須彌山, 經百千匝, 猶不能報父母深恩.
이러한 이야기가 여덟 번이나 반복하여 설파되는 것은 부모의 은혜는 한이 없어 현세적 좁은 개념의 인과로써는 갚을 길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단지(斷指)나 할고(割股)와 같은 우효(愚孝)의 우행이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 부모 만에 국한되는 개체적 보은은 진정한 보은이 될 수 없다. 그러한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보은으로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개입된다. 그리고 좁은 인과적 행동이 아닌 넓고 무량한 자비공덕의 보편적 행동으로 승화될 수 있는 새로운 효 개념이 도입되는 것이다. 이것은 효의 새로운 보편주의적 지평(a new universalistic paradigm of xiao morality)을 의미하는 것이다.
『은중경』은 가지산문 학승의 작품
보경스님과 정조의 특별한 만남이 단지 우발적인 사태가 아니라 기나긴 조선불교사의 필연적 기파(奇葩, 기이한 꽃)라 해야 할 것이다. 보경이 가지산문의 본산인 장흥 보림사의 스님이었고 또 용주사의 전신인 갈양사는 가지산문의 제2대 조사인 염거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가지산문은 체징(體澄) 이후로, 강진 무위사(無爲寺)에서 입적한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태조 왕건의 존숭을 받았던 풍기 비로암의 진공대사(眞空大師), 고려시대 숙종과 인종때 활약하였던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 『삼국유사』를 찬술한 보각국존(普覺國尊) 일연(一然), 충렬왕ㆍ충숙왕 때 존지를 선양하였던 보감국존(普鑑國尊) 혼구(混丘), 현재 한국 불교의 종조가 되는 태고보우(太古普愚)로써 그 법맥이 이어진다.
이러한 정황을 생각해 볼 때,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가지산문의 탁월한 학승이 성리학의 주요개념인 효에 상응할 만한 불교이념을 제시해야만 했던 어떤 역사적 필연성을 이미 여말선초의 격동기에 예감하고 새롭게 한국적 정서를 감안하여 찬술한 한국불교의 한 토착적 대맥이라는 가설을 나는 제시하고자 한다.
하여튼 이러한 인연으로 『부모은중경』은 16세기 중반 이후 유교적 정통론의 강화로 다소 소강상태를 유지해오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 정조대왕의 효심을 빌어 장엄한 화엄의 꽃을 피우게 된다.
용주사 『은중경』은 변상도(變相圖)의 그림이 워낙 섬세하고 탁월하다. 그리고 당시의 민중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세련된 언해본이 동시에 간행된 것이다. 변상도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 해 간행된 『오륜행실도』의 판화와 같은 수법임이 드러나는데 이 양종의 판화가 모두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용주사의 대웅보전의 삼존상 뒤에 위치하는 삼세불의 후불탱화도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사계의 학자들이 고증하고 있다.
이 시기가 단원 김홍도의 작품활동의 전성시기였을 것이다(신창현감新昌縣監 사임 전후). 아마도 요새 전문 만화가들이 하나의 도제그룹을 형성하는 것처럼, 김홍도가 주관하는 화공그룹이 있었을 것이다.
용주사 『부모은중경』, 『삼강행실도』를 능가하는 대중적 인기
용주사 『부모은중경』은 정조대왕의 후원과 함께 조선말기 우리사회의 최대의 힛트작이 되었다.
그 후로 일제시대까지 다양한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포퓰라리티는 실제로 『삼강행실도』를 능가했다. 『삼강행실도』보다는 단일하게 촛점이 맞추어진 스토리이며 훨씬 더 부모의 은혜를 자식에게 가르치는데 유용했으며, 또 삶의 가치를 깨닫는데 어떤 종교적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삼강행실도』가 가르치는 의무적 효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효 개념이었다.
구한말의 기독교의 전파도 실상 『부모은중경』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다석이 ‘효기독론’을 주장하게 되는 배경에도 불교의 효의 보편주의적 패러다임이 깔려 있다.
실상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들의 심리상태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모태신앙’ 운운하면서,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교회에 나간다고 하는 신념의 배면에는 『은중경』적 가치관이 배어 있다. 그들의 기독교는 실제로 ‘은중경기독교’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나 기독교가 모두 아녀자들의 종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나 대자대비의 구세주 관세음보살이나 결국 대차가 없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가족관계의 화목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나간다. 부인이 교회에 미쳤는데 아니 나갈 수 없고, 시어머니의 눈치를 봐야하는 며느리가 아니 나갈 수 없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유교적 덕성에도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 가치관을 잘 활용하는 목사는 목회에 성공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메뚜기도 뛰어봐야 한 철이라는데 그 ‘한 철’에 그치고 말 것이다.
연세대학교 도서관 귀중본 중에 용재 백낙준(白樂濬. 1895~1985) 박사의 회갑연에 송신용(宋申用)이라는 사람에 의하여 기증된 용주사 『은중경』이 보관되어 있는데 내가 본 『은중경』 중에서는 가장 정교하고 가장 아름답게 제본된 것이다.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도 『은중경』이 소중하게 여겨졌던 역사적 사실을 엿보게 한다.
이 기나긴 효의 역사를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우리 민중의 효의 가치관의 패러다임은 『삼강행실도』의 효에서, 『부모은중경』의 효로, 사복음서의 효로 확대되어 나갔다가, 요즈음은 묵시론적 대형교회의 효로 축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 | 불교 | 예수의 가르침 | 묵시화된 기독교 | |||
『삼강행실도』의 효 | → | 『부모은중경』의 효 | → | 「사복음서」의 효 | → | 타락한 대형교회의 효 |
정치적 충화 | 무량공덕 | 아가페 | 정치적 충화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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