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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 제1장 주자학과 『효경간오』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 제1장 주자학과 『효경간오』

건방진방랑자 2023. 3. 29.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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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람(序覽): 효경개략(孝經槪略)

 

 

1

주자학(朱子學)효경간오(孝經刊誤)

 

 

효의 나라 조선에서 효경이 읽히지 않은 것을 아시나요?

 

 

한국인의 혈관 속에는 효경이 흐르고 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효경이 소기한 가치가 적혈구에 배어 흐르고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인들은 효경이라는 문헌, 그 텍스트는 별로 접한 적이 없다. 요즈음 신세대 고전학자들도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읽었을지언정, 효경은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런데도 효경』」이 표방한 가치, 그리고 그 가치를 활용하여 사회질서(social order)를 유지 시키고자 노력한 이들의 땀방울이 한국인 모두의 체취 속에는 흥건히 젖어 있다.

 

효경이라는 책을 접한 적이 없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나 도올이나 동방학 관계 전문가들만 좀 접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조선조의 문인이나 대유(大儒)들도 효경을 접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효경을 접한 자가 거의 없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이런 이야기를 왜 내가 서슴치 않고 말하는가?

 

중국인들이 그들의 바이블로서 내세우는 십삼경(十三經) 중에서 가장 먼저 경()이라는 권위로운 이름이 붙은 책이 바로 효경(孝經)이요, , 우리나라에서도 백제시대에 이미 박사 왕인(王仁, 45세기 사람)논어(論語)천자문과 함께 효경을 일본에 전했다고 사료되고 있고삼국사기삼국유사등 우리측 사료에는 이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일본서기(日本書紀)고사기(古事記)의 기록을 통하여 추정될 뿐이다. 우리 민간전승에 의하면 왕인은 전남 영암인이다. 월출산의 정기를 받은 인물일 것이다, 신라의 문호 강수(强首, 신라의 삼국통일시기에 활약)가 어려서 효경곡례(曲禮)이아(爾雅)문선(文選)을 읽었다는 정확한 기록이 있고삼국사기46, 열전6, 또 신라 원성왕(元聖王) 4년조에 독서삼품과 선정에 있어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과 함께 논어(論語), 효경』」에 밝은 자를 상품(上品)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 국학(國學)의 필수공통 과목으로 논어(論語)효경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일찍부터 효경이라는 경전이 조선 땅의 사람들에게 읽혔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신라의 고등교육기관인 국학은 당()나라의 학제를 본뜬 것이고 또 신라 국학의 전통은 고려 국자감에 계승되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 마련된 국자감의 학식(學式)을 보아도 필수 공통과목으로 효경논어(論語)가 들어가 있다. 광종(光宗) 때 과거제를 도입하여 유교적인 관료체제를 확립하여 호족의 발호를 억제하려 하였고, 역량 있는 군주인 성종(成宗)은 승유(崇儒) 정책을 통하여 효()의 문화를 진작시키고, 36부의 중앙관제를 확립하고 12목의 지방제도를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완비한다. 그러니까 고려 성종 때부터는 이미 근세적 유교문화가 이 땅에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한가운데 효경이라는 경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조선 사람들이 효경을 접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본(最古本)과 조선조 효경인 효경대의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효경판본 중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홍무(洪武) 6, 그러니까 공민왕 22(1373)의 발문과 간행기가 붙어있는 목판본 효경인데 이것은 백낙천 장한가(長恨歌)의 주인공이며 양귀비와 로맨스를 속삭인 사람으로 유명한 당 현종이 직접 주석한 어주효경(御注孝經)계열의 금문 효경 텍스트로서 사료된다이재영(李宰榮)의 석사논문 조선시대 효()사상의 전개와 효경(孝經)의 간행에 언급되어 있으나 자세한 서지정보가 없다. 불행하게도 이재영과 연락이 안 닿아 실물을 확인하지 못했다. 귀중본일 것이다. 이러한 고판본에 대한 영인작업과 함께 치밀한 고증학적 연구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임화보(林華甫)의 찬주(纂註)와 서[, 1216], 조씨진덕재(曹氏進德齋)의 서문[1217], 그리고 당현종의 서문이 실려있다고 했는데 후학들의 연구를 기대한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오면 효경이라는 말은 거의 효경대의(孝經大義)라는 책명과 구분 없이 쓰여졌다. 그러니까 효경효경대의의 줄임말일 뿐이다.

 

효경대의란 어떤 책인가? 이것은 원나라 때 동정(董鼎, 똥 띵, Dong Ding)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나 주희(朱熹)의 사위인 황간(黃幹), 그리고 주희의 문인인 반간선생(槃澗先生) 동수(董銖)에게 사숙(私淑)한 송ㆍ원 교체기의 학자. 주자학을 황간에게 직접 배운 개헌(介軒) 동몽정(董夢程)의 족제(族弟)이기도 하다. 요주(饒州) 파양군(鄱陽郡) 사람, 현재는 강서성 파양호 동편에 있다. ()는 계형(季亨), 별호(別號)는 심산(深山), 한 선생의 설에 얽매이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제가(諸家)의 학설을 박채(博採)하였다고 한다. 송원학안(宋元學案) 89, 개헌학안(介軒學案)을 통해 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이 쓴 책이다.

 

그런데 왜 조선왕조의 사람들은 효경하면 동정의 효경대의만을 읽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효경대의가 주자가 지은 효경간오(孝經刊誤)라는 책을 크게 발양(發揚)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참 이상하기도 하다. 조선왕조의 사람들이 주자의 권위를 존숭(尊崇)한다면 주자가 산정(剛定) 한 주자의 텍스트를 직접 읽을 것이지, 왜 그 제자를 사숙한 손자뻘의 마이너한 사상가의 작품을 읽는가?

 

 

 

 

 효경간오는 실패작이다

 

 

그 대강의 사정은 이러하다.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는 우리가 독립된 작품으로서 읽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책자가 아니다.

 

우선 간오(刊誤)’라는 말을 살펴보자! 간오란 오류[]를 도려낸다[]는 뜻이다. 즉 외과의사가 암덩어리를 잘라내듯이 효경이라는 텍스트 속에 박혀있는 암덩어리들을 후벼 파내버린다는 뜻이다. 효경간오는 수술대 위에서 의사가 도려낼 것을 도려내기만 한 상태에서 멈춘 작품으로, 제대로 다시 봉합도 하지 않았고, 수술이 끝난 후 치유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수술은 제대로 되었는가? 천만에! 수술 자체가 엉터리로 되고 말았다. 이 덩어리를 자르다가 저 덩어리도 건드리게 되고, 그러다가 또 자르고 또 자르고, 그러다 보니까 엉망이 되어 버렸다. 환자가 살 가망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의사가 수술하다 말고 도망가 버렸다.

 

주자는 의사로서 효경수술에 실패를 자인했다. 그래서 효경간오에 대하여 서문도 쓰지 않았고, 주석도 달지 않았다. 그가 간오를 탈고한 것은 57세의 나이, 순희(淳熙) 13년 병오(丙午) 가을 8월이었는데 그가 71세 경원(慶元) 6(1200) 39일에 세상을 뜰 때까지 14년 동안이나 서재 대광주리 속에 처박아두고 한번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의 사후, 그의 막내아들 주재(朱在)() 숙경(叔敬), 벼슬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郞)에 이르렀다가 그 원고가 버리기 아까워 그것을 위료옹(魏了翁, 1178~1237)자는 화보(華甫), 호는 학산(鶴山), 사천성 포강(蒲江) 사람, 경원(慶元)의 진사. 주희를 사숙한 경학자에게 보냈는데 위료옹이 그것을 상재(上梓)하였다. 그러니까 효경간오는 제대로 된 책이 아니다. 그리고 주희 자신이 출판되기를 원치 않았던 책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주희의 범죄자에 가까운 자괴의식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후기가 붙어 있다.

 

 

나 희()는 예전에 형산(衡山, 지명) 호시랑(胡侍郞)호굉(胡宏), c.1105~c.1155. 남송의 성리학자. 자는 인중(仁仲), 복건성 건영(建寧) 숭안(崇安) 사람, 형산에서 20여 년간 독서에 열중하였다. 대유 무이선생(武夷先生) 호안국(胡安國, 1074~1138)의 아들이며 양시(楊時후중량(侯仲良) 문하에서 수학. 가학을 주희에게 전하였다. 남송 낙학(洛學)의 개창자격의 인물이다. 학자들이 오봉선생(五峰先生)이라 불렀다논어(論語)에 관한 논설을 읽는 중에, 효경에 인용된 시경의 구절들이 효경의 경전본문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의심하는 대목을 본 적이 있다.

熹舊見衡山胡侍郞論語說, 疑孝經引詩非經本文.

 

처음에는 심히 놀라 해괴하게 생각하였으나, 나중에 천천히 곰곰이 살펴본 결과, 비로소 호시랑의 말씀이 신빙성이 있을 뿐 아니라, 효경중에서 의심할 만한 것들이 비단 시경인용문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初甚駭焉, 徐而察之, 始悟胡公之言爲信, 而孝經之可疑者不但此也.

 

그래서 서면으로 다시 사수(沙隨) 정가구(程可久)남송의 학자. 이름은 형(), 사수선생(沙隨先生) 어른께 질의하여 보았더니 어른께서 나의 편지에 답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었다: “근자에 옥산(玉山) 왕단명(汪端明)남송의 학자. 이름은 응진(應辰), 옥산선생(玉山先生)을 만났는데, 그 또한 생각하기를 이 효경이라는 책은 후세인들이 부회(傅會)하여 억지로 꿰맞추어 생겨난 부분들이 많다고 하였다.”

因以書質之沙隨程可久丈, 程答書曰: “頃見玉山汪端明, 亦以爲此書多出後人傳會.”

 

이에 나는 나의 선배 학자들이 책을 읽는 방식이 매우 정밀하고, 또한 깊게 살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 홀로 몰래, 내가 한 짓이 선대 학설을 인술(因述)한 것이며, 또한 근거 없이 망언을 일삼았다는 죄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아주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於是乃知前輩讀書精審, 固以及此. 又竊自幸有所因述, 而得免於鑿空妄言之罪也.

 

이러한 연유로 이 효경의 본뜻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관련된 타 문헌의 파편들을 긁어모아 한데 묶어 별도로 효경외전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만 있었을 뿐 감히 실행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순희 병오(1186) 812일 주희 쓰다.

因欲掇取他書之言可發此經之旨者, 別爲外傳, 顧未敢耳. 淳熙丙午八月十二日記.

 

 

매우 겸손한 듯이 보이는 레토릭이지만, 그 핵심인즉슨 자기가 효경이라는 중국의 바이블에 대하여 착공망언의죄(鑿空妄言之罪, 허공을 뚫어 허황된 말을 일삼는 죄)를 범하고 있는 공포감에 대한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 변명의 방식도 어떠한 명철한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호굉, 정가구, 왕단명 등 당대의 학자들의 인상주의적 언급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불안한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얻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당대 학자들과의 연대감만으로써는 도저히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효경이라는 텍스트를 보강할 수 있는 외전을 편찬함으로써 자신의 실패를 만회해보려고 했으나, 그것도 마음만 있었을 뿐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결국 주희효경간오의 실패를 선언한 것이다. 마음만 있었을 뿐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는 뜻은 더 이상 실패의 작업을 계속할 의향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효경간오는 서궤에 쑤셔박아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주희와 같은 대석학이 외전이라도 지어 효경간오의 작업을 마무리 짓지 못했을까? 그 가장 간요(肝要)한 이유는 외전의 작업에 대한 부담이 아니라 효경이라는 경전 자체에 대한 불신감 때문이었다

 

 

 

 

 효경은 한대의 위작이라는 것이 주자의 생각

 

 

주희는 아무리 효경의 내용이 공자가 증자에게 직접 타일러 훈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액면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허구적 구성으로 보았던 것이다. 효경을 공자 자신의 저작[自著]으로까지 보는 관점은 가소롭고 또 가소로운 일이라고 질책하였다[至或以爲孔子之所自著, 則又可笑之尤者]. 그리고 심지어 효경공총자(孔叢子)와 같은 위서(僞書)로 보아 그 위작연대가 후한대(後漢代)에까지 내려올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주자의 논의는 오늘날의 문헌학적 성과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엉성하기 그지없는 주장이다. 효경(孝經)은 엄존하는 문헌의 형태로 이미 여씨춘추(呂氏春秋, BC 241년에 성립)에 인용되고 있다. 효경이 진한(秦漢) 이전에 성립한 문헌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희와 같은 대석학이 여씨춘추(呂氏春秋)도 읽지 않았다는 말인가? 추론컨대, 주희는 우리가 대하는 것처럼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상세히 읽을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의 도학적 관심에서 여씨춘추(呂氏春秋)는 너무도 멀리 있었으며, 사마천여불위(呂不韋)를 아름답지 못한 인간으로 그려놓은 이후, 그리고 한서』 「예문지여씨춘추(呂氏春秋)를 변변한 일가(一家)에도 끼지 못하는 잡가(雜家) 류에 분류해놓은 이래,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중국의 독서계에서 냉대를 받았다. 청조의 고증학자들에 의하여 새롭게 정비되기 이전에는, 사람의 눈길이 별로 닿지 않은 채 여씨춘추(呂氏春秋)는 방치된 서물이었다.

 

하여튼 주희효경을 일대 수술을 가하지 않고서는 바이블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어려운 책으로 보았다. ‘간오(刊誤)’라는 말 자체가 효경은 오류투성이의 코럽티드 텍스트(corrupted text)’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희가 효경에 대해 감행한 작업은 제1장부터 제7(금문텍스트로서는 제6)까지를 하나의 통일된 경문(經文)으로 묶고, 그 이후의 제8장부터 제22장까지(금문텍스트로서는 제7장부터 제18장까지)는 그 경문을 부분부분 쪼개어 해설한 전()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경()과 전()이라고 하는 양식은 주역에서 이미 명료하게 예시(例示)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주희가 효경을 이런 양식으로 재구성하게 되는 계기는 이미 그가 대학(大學)이라는 문헌을 경과 전으로 재구성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서운동, 아타나시우스와 주희

 

 

주자학(Zhuxiism)의 출발이 사서운동(四書運動)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서(四書) 중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는 기존의 독립된 서물이다. 그런데 대학(大學)중용(中庸)은 독립된 책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예기(禮記)라는 잡다한 유가 저선집(An Anthology of Confucian Treatises on Rites) 중의 두 편이었다. 예기중의 두 편(two chapters)대학(大學)(42)중용(中庸)(31)을 독립시켜 논어(論語)맹자(孟子)와 함께 4개의 책으로 묶어 도학(道學) 즉 성리학(性理學)으로 불리는 새로운 유학운동을 전개하는 핵심 바이블로 삼았던 것이다.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D C. 298~373)가 이단을 배제하기 위하여 27서 정경작업을 한 것이나, 주희12세기에 4서작업을 한 것은 모두 유사한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지금 예기란 책이 있는가? 물론 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예기라는 책 속에 대학(大學)」 「중용(中庸)두 편이 들어있는가? 물론 들어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주자가 편찬한 사서집주(四書集注)속의 대학(大學)중용(中庸)과 현존하는 예기속의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정밀하게 비교해본 적이 있는가? 독자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서가 예기속의 대학(大學)중용(中庸)을 독립시켜 성립되었다는 철학사의 단편적인 지식만을 수용했을 뿐, 이러한 텍스트의 구체적인 사실에 대하여 치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질 못할 것이다.

 

사서집주(四書集註)‘4개의 책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축적된 주를 모은 서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서집주라는 말은 주자 자신이 붙인 말이 아니다. 그것은 후대에 그 책을 편찬하여 상재(上梓)하는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며, 주자는 단지 사자서(四子書)’라는 단어만 사용했을 뿐이다주자연보(朱子年譜)광종(光宗) 소희(紹熙) 원년(元年) ()를 보라.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사서집주란 표현은 어폐가 있다. ‘집주(集註)’의 주()는 고주(古注)도 일부 인용되지만 대부분 주자와 입장을 같이하는 송대의 도학자들의 주를 가리킨다. 역사적으로 이것을 한대에 성립한 고주(古注)와 대비시켜 신주(新註)’라 부른다.

 

그런데 논어(論語)맹자(孟子)의 경우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주를 달았으므로 집주(集註, 주를 모음)’가 가능하다. 그러나 대학(大學)중용(中庸)의 경우는 집주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주자가 맨 처음에 주목한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예기속의 두 편이었기에 주를 긁어 모을만큼 주석이 쌓여있질 않았다. 따라서 중용(中庸)대학(大學)에는 집주라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주자는 이 두 책에 대해서는 장구(章句)’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니까 사서집주는 실제로 논어집주(論語集注)ㆍ맹자집주(孟子集注)ㆍ대학장구(大學章句)ㆍ중용장구(中庸章句)로 이루어져 있다. 대학(大學)중용(中庸)의 경우는 집주가 아니다. 즉 선학(先學)의 주석을 모아놓은 서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예기속에 있던 문헌이기 때문에 독립된 책으로서의 편제(篇制)가 없었다. 그래서 먼저 장()을 나누고 그 한 장을 다시 구()로 나누어 주석을 가했다는 의미이다. 대학장구중용장구는 기본적으로 주자 자신의 주석일 뿐이다사서라는 개념을 최초로 확립한 것은 이정자(二程子)였지만 이들은 주석을 가하지 않았다. 이들을 사숙한 주자가 최초로 사서에 주석을 가했다.

 

 

 

 

 예기』 「중용(中庸)은 그대로, 예기』 「대학(大學)은 재구성

 

 

중용장구의 경우 예기31편의 중용(中庸)과 비교해보면 거의 텍스트의 변형이나 가감이 없이, 있는 순서대로 장을 33개로 나누어 배열했다. 본시 중용(中庸)에도 텍스트의 이질적 요소가 융합된 느낌이 있고, 한서』 「예문지에 예가(禮家)로 분류되어 수록된 중용설(中庸說)2편이라는 서물이 의문부호로 남아있기 때문에, 텍스트 비평의 시각에서 본다면 중용(中庸)텍스트 그 자체의 정합성(整合性)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누가 보아도 전반의 중용론(中庸論)과 후반의 성론(誠論)은 그 텍스트의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주희가 이것을 변형없이 그대로 수용했다고 하는 것은 중용(中庸)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서 간주하고서 일관되게 주해하고자 하는 웅혼한 해석학적 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용(中庸)과 성()을 하나의 연속적 코스몰로지(Cosmology)의 틀 속에서 일관되게 해석할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용의 경우 주희의 해석에 대한 반발이 크지 않다. 최소한 기존 텍스트를 있는 모습대로 온전하게 보전했기 때문이다. 

 

中庸論 2~11, 13 ~ 20(在下位) 자사 or 자사학파
誠論 16, 20(在下位)~ 전국 or 한대

  

그러나 대학(大學)의 경우는 사정이 매우 다르다. 예기속의 대학(大學)의 텍스트가 있는 그대로 읽기에는 문장의 연결구조나 사상의 흐름에 좀 문제가 있다는 의문은 주자 이전에 북송 사상가들에 의하여 이미 제기되었다. 그래서 대학(大學)의 텍스트의 순서를 재배치하는 작업을 감행한 사람이 있었다.

 

이정집(二程集)에 보면 예기(禮記)부문에 명도선생개정대학(明道先生改正大學)’이천선생개정대학(伊川先生改正大學)’이라는 두 텍스트가 실려있다. 이 두 텍스트는 대학(大學)이라는 텍스트를 자기의 생각에 따라 재배치한 것인데, 형 명도의 재배치와 동생 이천의 재배치가 사뭇 다르다.

 

이러한 사례에 용기를 획득한 주자는 대학(大學)이라는 텍스트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매우 강렬한 욕망을 느꼈을 것이다주희39세에 정씨유서(程氏遺書)를 편집했는데 이즈음에 대학(大學)재구성의 의욕이 생겨났다, 신약성서27서에서 요한계시록이 신앙에 혼동을 주는 문헌이라고 짤라내버리고 사도 바울의 서한 중에서 위작이라고 판명된 것들을 제거하고, 공관복음서가 아닌 요한복음이 후대의 교회에서 성립한 문헌이라고 하여 파기하여 신약을 새롭게 구성한다면 가톨릭교황청에서는 당장 그를 화형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송대에 이러한 어제(御製) 경전에 대한 민간학자들의 임의적 재구성이 허락될 수 있었다는 것은 중국 송대 사회가, 당대 비잔틴제국이 사라센과 버겁게 대결하고 있는 틈새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십자군이 만행과 약탈과 월권적 점유를 일삼고 있었던 야만의 서구라파사와 비교하면 참으로 개명(開明)한 근대사회의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주자의 경전 재구성은 확고한 인류 근대정신의 발로였다

 

 

 

 

 대학(大學)과 수기치인(修己治人)

 

 

주자는 대학(大學)이라는 텍스트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가장 이상적 전범을 이루는 텍스트라고 생각했다.

 

수기(修己)라는 것은 나라는 개인 존재의 내면적 덕성의 함양이며, 이것은 매우 도덕주의적인 실존활동(subjective moral activities)이다. 그리고 치인(治人)이라는 것은 나 이외의 타인을 어떻게 다스려서 사회적 질서(Social Order)를 형성시키는가에 관한 것으로 이것은 매우 사회과학적인 객관적 외재활동(objective governing activities)이다. 주자는 이 수기와 치인의 두 다른 층면(層面)을 동일한 연속적 차원에서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수기
修己
개인 존재의 내면적 덕성의 함양 도덕주의적인 실존활동
(subjective moral activities)
치인
治人
나 이외의 타인을 어떻게 다스려서 사회적 질서(Social Order)를 형성시키는가 사회과학적인 객관적 외재활동
(objective governing activities)

  

그러나 치인을 통하여 수기를 이룩하는 것보다는, 수기를 통하여 치인이 달성된다고 보았다. 어디까지나 개인 실존의 내면적 도덕성이 확립되어야만 그것이 끊임없이 확충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치인의 사회과학(the social science of governing others)이 완성된다고 본 것이다.

 

서구의 근대적 사회과학이론에 의한다면 이것은 존재와 당위를 혼동한 전근대적 사고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마키아벨리즘적인 사회과학적 사유야말로 전근대적 가치전도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근대성과 전근대성에 관한 동ㆍ서의 사유는 근원적으로 문제의식이 다르다. 도덕주의적 입장에서 사회과학적 진실을 자신있게 다루지 못하는 객관주의야말로 허구적 사회과학 종교의 질곡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총체적 연속성의 우주론을 주희대학(大學)의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에서 발견했다. 독자들은 상식적으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4조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신(修身)’ 아래로 4조목이 더 있다. 

 

팔조목
(八條目)
평천하(平天下) 치인(治人)
치국(治國)
제가(齊家)
수신(修身) 수기(修己)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격물(格物)

  

8조목 중 격물에서 수신까지의 프로세스(process)가 수기(修己)이고 제가에서 평천하까지의 프로세스가 치인(治人)이다. 

 

삼강령
(三綱領)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

 

3강령으로 말한다면 명명덕(明明德)은 수기를 말하는 것이요, 신민(新民)은 치인을 말하는 것이다.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수기와 치인을 통합하는 오메가 포인트로서의 지향점(the teleological apex)인 동시에, 수기와 치인이 끊임없이 통합될 수 있도록 만드는 모든 존재의 근거이다. 지극한 선[至善]이야말로 우주의 출발인 동시에 전우주가 지향해가는 자생적 정합질서(self-organizing order)이다.

 

이 삼강령 팔조목의 핵심적 이벤트가 수신(修身)’이라고 주희는 간파하였다. 평천하에서 수신까지, 수신에서 격물까지 통합하는 축(pivot)이 곧 수신이라고 본 것이다.

 

 

천자로부터 보통사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大學1

 

 

 

 

 왕양명의 주자 대학장구비판

 

 

주희대학(大學)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대학지도(大學之道)’로부터 미지유야(未之有也)’까지의 한 단, 즉 삼강령 팔조목의 한 섹션만을 경화(經化, canonization)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도학(道學)의 출발경전으로서의 최고의 권위를 대학(大學)의 첫머리에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에 오는 문장은 이 경()을 부연설명하는 전()으로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고 본 것이다.

 

명도(明道)주희가 경으로 간주한 부분에 이미 뒷 문장을 삽입해 넣었지만, 주희는 대학(大學)의 앞대가리 한 단은 온전하게 경()으로서 보전했다. 그러나 그것을 부연설명했다는 나머지 부분을 10장으로 나누어 배열하려고 하였을 때, 순서의 재배치가 불가피했다. 그리고 과연 주희가 주장하는 대로 전() 10장이 정확하게 경문과 매치가 되는 지도 보장할 길이 없다. 더구나 가장 핵심적인 격물치지부분에 대해서는 전()이 없었다. 그래서 제5장에 그 전에 해당되는 문장을 날조해서 보전(補傳)을 만들었다. 보전(補傳)’이야말로 주자학의 핵심에 해당되는 부분이며 대학(大學)을 그의 사상 전체계와 연결시키는 문장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희의 날조(捏造)이다.

 

주희 편집 이전의 예기42대학(大學)을 우리는 고본대학(古本大學)’이라고 부른다. 이 고본대학과 주희의 사서집주본의 대학(大學)은 텍스트 그 자체가 다른 성격의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당부분의 유자들이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을 모른 채, 주희의 사서집주만을 신봉했다. 주자 대학(大學)이전의 고본대학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감행한 조선 유자는 거의 없다. 이병휴(李秉休, 성호 이익의 조카)가 고본대학을 문제시 삼은 바 있고, 윤휴(尹鑴, 1617~1680)가 주자의 권위에 구애됨이 없이 새롭게 분장ㆍ분구를 시도하고 고본대학을 고수하려는 자세를 보인 것은 예외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이들의 학문성향은 전혀 체계적인 학통을 수립할 수 없었다. 주자를 잘못 건드리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고 일가 구족이 멸망하는 판이니 그 누가 구차스럽게 그런 짓을 하겠는가? 신ㆍ구약성경과 특정신학체계의 일자무오류(一字無誤謬)적 권위를 신봉하는 자들의 작금의 작태와 별 차이가 없다.

 

주희가 학용(學庸), 대학(大學)중용(中庸)의 이러한 장구의 틀을 짠 것은 주희의 서한들로 미루어 보건대 45세부터 46세에 이르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후 주자는 비로소 효경에 손을 대었다. 효경에 대해 간오(刊誤) 작업을 하게 된 것은 물론 이미 감행한 대학(大學)의 경ㆍ전의 틀이 그 모델로서 심중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희대학(大學)장구작업은 문제를 많이 안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왕양명을 비롯하여 양명심학 계열 사람들의 강렬한 비판에 봉착했지만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 이유가 있었고 대학(大學)이라는 문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측면이 강했다. 그러므로 주희의 대학(大學)장구 작업은 대체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가 있다.

 

그리고 고본 대학(大學)에 비해 장구 대학(大學)이 텍스트를 크게 손상시켰다고 말하는 자도 물론 있겠지만, 그렇게 혹평할 이유까지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효경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효경수술에 대한 주희 자신의 변명

 

 

효경장구라 말하지 않고 효경간오라 말한 것 자체가 이미 효경이라는 문헌을 학용(學庸)에 비해 낮잡아 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는 효경, 대학(大學)처럼 한 경의 한 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독립된 경()이었으며 주희가 손을 대기 이전에 이미 장()의 구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금문효경은 1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고문효경은 22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분장(分章)을 무시한 전체 경전의 내용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주희가 대학(大學)을 모델로 삼아 감행해야 할 작업은 우선 삼강령 팔조목에 해당되는 경()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효경의 앞대가리 제1장부터 제7장까지(고문)를 하나의 연속된 문장으로 뭉뚱그려 한 덩어리로 만들어야 했다. 

 

1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하나의 경문(經文)으로 만듦
2 천자장(天子章)
3 제후장(諸侯章)
4 경대부장(卿大夫章)
5 사장(士章)
6 서인장(庶人章) 금문에서는 한장
7 효평장(孝平章)

  

그런데 이미 분장되어 있는 원래의 체제에서는 각 장이 공자님께서 말씀하시었다하는 자왈(子曰)’로 시작되고, 또 각 장의 말미는 시경의 노래 구절을 인용하거나 상서의 구절을 인용하는(2의 경우) 매우 유니크한 문헌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로 뭉뚱그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결책은 매우 간단하다. 그러한 부분을 모두 잘못된 암덩어리라고 간주하고 싹둑 잘라버리는 외과수술을 감행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진단일까? 오진일까? 과연 아름다운 시경의 노래 가사가 암세포일까? 떼어내야만 할 악성종양일까?

 

주희의 진단은 완벽한 오진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는 이러한 사정을 바르게 그 뿌리로부터 파악하는 학자가 부재했다. 구구한 말을 하기 전에 주희 자신의 변명을 들어보자!

 

 

대저 효경, 경문의 첫머리에 효의 끝과 시작을 총괄적으로 논하고, 중간에 천자와 제후와 경대부와 사()와 서인(庶人)의 효를 개별적으로 나누어 부연설명하였고, 또 그 말미에 그것을 총결하여, ‘그러므로 천자로부터 아래로 서인에 이르기까지 효의 끝과 시작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은 채, 환난이 그 몸에 미치지 아니하는 자는 있어본 적이 없다라고 하여 매듭짓는다.

蓋經之首, 統論孝之終始, 中乃敷陳天子諸侯卿大夫士庶人之孝, 而其末結之曰: ‘故自天子以下, 至於庶人, 孝無終始, 而患不及者未之有也.’

 

그러므로 그 수미(首尾)가 상응하고, 차제(次第)가 상승하며, 문세(文勢)가 연속되며 맥락(脈絡)이 통관하니 이것은 분명 한 시점에 연속해서 단번에 말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其首尾相應, 次第相承, 文勢連屬, 脈絡通貫, 同是一時之言, 無可疑者.

 

그런데 후인(後人)들이 바보같이 망령되이 나누어 67장으로 분리시켰다. 금문은 6장으로 나누고 고문은 7장으로 나누었다. 그러면서 또한 자왈(子日)’시경서경의 문장을 인용하는 말을 보태어 그 사이사이에 끼워 넣음으로써 문의(文意)를 분단(分斷)시키고 격절시켜 버렸다. 그래서 독자들이 성인의 말씀의 전체대의를 제대로 다시 파악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으니, 그 해()가 결코 가볍지 않다.

而後人妄分以爲六七章. 今文作六章, 古文作七章. 又增子曰及引詩書之文, 以雜乎其間, 使其文意分斷間隔, 而讀者不復得見聖言全體大義, 爲害不細.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 67장으로 나뉘인 것을 합하여 한 장으로 만들고, 그에 따라 자왈(子日)’이라고 한 것 두 군데, 서경을 인용한 것 한 군데, 시경을 인용한 것 네 군데, 도합 61자를 싹둑 잘라 내버려 경문(經文)의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그리고 이 후로 이어지는 전문(傳文)의 잘못된 것은 별도로 논하겠다.

故今定此六七章者, 合爲一章, 而剛去子曰者二, 引書者一, 引詩者四, 凡六十一字, 以復經文之舊. 其傳文之失, 又別論之如左方.

 

 

주희의 변명이 독자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생각해보라! 과연 주희식으로 외과수술을 해놓은 것이 경문지구(經文之舊)’일까, 그 수술을 하기 전의 온전한 모습이 경문지구(經文之舊)’일까? ‘경문지구를 복원한다[以復經文之舊]’하는 말이 어찌 가소롭지 않을 수 있느뇨! 이런 식으로 잘려나간 글자가 효경전체 1780자 중에서 무려 223자나 된다효경대의셈법인데 판본마다 약간 다르다. 삭제자를 230으로 센 것도 있다.

 

과연 효경간오의 텍스트가 효경의 옛 모습을 복원한 것일까? 그렇다면 경문(經文) 이후의 전문(傳文)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문이 과연 경문의 순서에 따라 그것을 차곡차곡 해설한 문장일까? 주희는 전문(傳文)을 모두 14장으로 나누었는데 그 14장 중 대부분은 금ㆍ고문 1의 개종명의장의 내용을 해설한 것이다. 그리고 제10장 한 장이 천자의 효를 해설한 것으로 보았고, 9, 11, 12, 세 장이 사의 효를 해설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제13장과 제14장은 경문과 관계없이 따로 독립된 의미를 발휘하는 문장[不解經而別發一義]으로 간주하였다.

 

결국 전체적으로 경문과 전문의 내용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희는 억지로 꿰어 맞추어놓고도 흥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고문효경 효경간오
1~7장으로 분장되어 있음 하나로 묶어 경화(經化) 시킴
9, 11, 12 ()의 효 해설
10 천자(天子)의 효 해설
13, 14 不解經而別發一義

 

 

 

 천자와 사에 대한 주희의 강조

 

 

천자(天子) - 제후(諸侯) - 경대부(卿大夫) - () - 서인(庶人)’하이어라키(hierarchy, 계층)에서 제후ㆍ경대부ㆍ서인이 빠져버리고 천자와 사만 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주희의 의식세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천자 - 제후 - 경대부 - - 서인이라는 하이어라키(hierarchy, 계층)주대의 봉건질서를 전제로 한 것이며 송대의 정치제도나 사회조직에는 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왕조의 유자들은 주희가 막연하게 복고적인 사상가인 것처럼 떠받들었을지 모르지만 주희는 과거지향적 인물이 아니라 철저히 현재지향적 인물이었다. 주희는 정강지변(靖康之變, 1127) 이후 굴욕적으로 여진족의 금나라와 대치하고 있었던 남송(南宋) 당대의 문제의식 속에서 씨름하고 산 사람이었다. 조선 왕조의 보수주의적 유자들이 주자를 교조주의적으로 떠받들게 된 근원에는 주희의 정통론(Zhuxiistic theory of Orthodoxy)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희에 대한 복고주의적 인상은 공맹(孔孟) 정통론에서 비롯되지만, 주희의 정통론 그 자체도 결코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배불론적(排佛論的) 입장이나 남송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현재적 관심의 이론적 근거로서 그는 정통론을 말했을 뿐이다.

 

주희에게 문제된 권력의 센터는 황제(천자)와 사()일 뿐이었다. 주자 시대의 사대부는 이미 식읍(食邑)을 소유한 경대부(卿大夫)가 아니며, 단순한 행정관료였다. 출신여하를 막론하고 과거(科擧)라는 시험제도를 통하여 일거에 인민을 통치할 수 있는 권력의 자리를 부여받는 특별한 존재였다. 요즈음과 같이 고등고시를 패스하면 고위관리가 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으나, 가장 큰 차이는 순수하게 봉급(salary)에 의존하여 사는 공무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관리의 주요임무는 조세의 징수와 재판이지만 결국 이러한 지방행정의 실제적 담당자는 서리(胥吏, 書吏)였다. 서리는 공식적으로 봉급이 없었다. 그들은 관청에 기생하는 사무하청업자로서 사무를 수행할 때 민중에게서 수수료를 징수하여 생활한다. 이들은 세습적인 지연과 혈연관계 속에서 지위는 낮지만 강력한 지방 공동체조직을 형성한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의 삶이란 결국 이들과의 결탁을 떠나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제도적인 부패가능성이 항존한다. 그리고 관리들의 조세수취의 자의성을 체크할 수 있는 하등의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그리고 지방관의 성적은 무엇보다도 조세징수의 실적에 의하여 평가되었다. 이러한 특성이 송대의 관료제도가 매우 합리적인 객관기준을 지닐 수도 있는 조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하는 근대적 관료제(modern bureaucracy)의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이다. 이 결핍을 주희는 도학(道學)의 도덕주의로써 메꾸려고 했다. 더구나 송대의 사대부를 형성하는 지식인들은, 과거의 천거방식에 의한 인재등용이 특정한 귀족 써클 내에서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개 문벌이 없는 서민 출신의 신흥계층이었다. 짜고치는 고스톱과도 같은 천거에 의하여 선발되는 관리는 멍청한 놈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귀족문벌의 소양은 일정하게 확보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과거에 의하여 선발되는 관리는 그러한 도덕기반을 어려서부터 체질적으로 확보하지 못한 채 권좌에 앉게 되는 생뚱맞은 인물일 경우가 많다. 주희는 이들 신흥관료를 어떻게 도덕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송대에는 천자의 중앙집권적 결정권이 극대화되었다. 과거제도전시(展試)’화 되면서 관리들은 모두 천자의 문하생이 되고 만다. 결국 관리들은 황제에 대한 절대적 복종의식만을 키우게 되고 대민(對民)의 보편의식을 상실케 될 수가 있다.

 

사대부의 존재의의가 단순히 독재적 황제 권력의 유지를 위한 관료제의 한 부속품적 기능에 머물고 말 때, 국가는 위태롭게 되고 민생은 외면당하고 만다. 황제가 이상적인 철인왕(Philosopher-King)가치를 구현하는 인물이라면 모르되,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상황에서 사대부가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규정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바로 주희효경에서 천자와 사만을 전()의 주축으로 설정한 이유가 드러난다. 

 

천자(天子)
   
()

  

대학(大學)경문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케 하는 결정적인 한마디가 있었다. ‘천자로부터 보통사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주희에게 이 말은 천자와 사의 관계가 수직적인 일방하달관계가 아니라 수신(修身)’을 매개로 하여 수평적인 관계로 전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천자이든, 사이든, 서인이든, 모든 인간존재가 수신이라는 내면적 덕성의 함양에 있어서는 평등의 관계에 놓여있다. 그것은 인간존재의 근원적 조건으로서 어디까지나 자내적(自內的) 사태이며, 자외적(自外的)ㆍ향외적(向外的) 사태가 아니다. 주자는 바로 이 수신(修身)’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송대 지식사회의 보편적 패러다임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패러다임이 천자와 서인의 차등 위에 설 때는 보편주의(universalism)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수신이라는 명제는 동방사회의 근대적 패러다임의 확고한 보편주의적 측면이다. 천자도 끊임없이 수신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매진할 때만이 평천하라는 결과를 획득하는 것이다. 수신도, 평천하도 결국은 동시적 프로세스(Process)이다.

 

이러한 대학(大學)패러다임에 비하면 효경은 천자의 권위를 배천(配天)의 존재로서 신비화시키고 있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주희는 천자 한 사람의 효()의 실천이 만인의 도덕적 교화의 규범이 되며 그것으로써 사해(四海)가 다스려질 수 있다는 효경의 논리를 신비주의적 망상 정도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천자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절대적 권위를 확보할 것이 아니라, 인사(人事)의 상황성 속에서 부단히 도덕적 단련을 해야만 하는 수신(修身)의 존재일 뿐이다.

 

주희가 말년에 (1194) 영종(寧宗)의 시강(侍講)으로서 대학(大學)을 진강(進講)할 때 즈음 그가 주상(奏上)한 상서(上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조정의 기강은 특별히 엄격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위로는 천자로부터, 아래로는 실무를 담당하는 백관에 이르기까지 각기 맡은 고유의 직분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 아니 됩니다.

朝廷紀綱, 尤所當嚴. 上自人主, 下至百執, 各有職業, 不可相侵.

 

현재 재상(宰相, 宰執)의 진퇴문제나 대간(臺諫: 감찰하거나 간언하는 관직)을 갈아버리는 문제가 모두 폐하한 사람의 독단(獨斷)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대신이 그 모의과정에 더불어 참여할 수도 없고, 급사(給舍)급사중(給事中)과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일컫는데 이들은 임금의 조칙정령(詔勅政令)의 내용이 과연 정당한가를 따지는 직책의 사람들이다가 폐하의 결정이 정당한지 그 시비를 평의(評議)하는 일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독단으로 판결하는 일들이 설사 모두 사리에 합당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올바른 정치를 하는 본체가 아니올시다.

今進退宰執, 移易臺諫, 皆出陛下之獨斷, 大臣不與謀, 給舍不及議. 正使其事悉當於理, 亦非爲治之體.

 

하물며 조정 내ㆍ외에서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폐하의 주변에 가까이 있는 자들이 폐하의 위광(威光)을 도둑질하여 횡포를 부리고 있다고 모두 말하고 있으니, 그들이 하는 짓거리가 또한 공의(公議)에 다 합당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況中外傳聞, 皆謂左右或竊其柄, 而其所行, 又未能盡允於公議乎.

 

이러한 폐단이 개혁되지 않는다면, 제가 우려하옵는 것은 명목상으로 그러한 결단이 폐하 한 사람의 결단이라고 규정하여도, 실제로는 폐하의 권위가 신하의 수중으로 하락하는 결과를 모면키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바른 정치를 희구하여도 오히려 난세를 초래하는 결과를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면재勉齋주자행장朱子行狀에서 인용).

此弊不革, 臣恐, 名爲獨斷, 而主威未免下移, 欲以求治, 而反不免於致亂.

 

 

이러한 주희의 직언에서도 명료하게 그 의식이 드러나 있듯이 천자와 사()의 관계는 쌍방적이야 하며, 서로 침범할 수 없는[不可相侵] 고유의 직분 영역이 있다[各有職業], 어떠한 경우에도 천자의 독단(獨斷)은 바람직하지 않다. 주자의 어휘 속에서 천자와 사의 관계는 서로 더불어 공도(公道)를 모의(謀議)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자의 틀에서 본다면 효경은 효()의 충화(忠化)를 중심테마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도학적 틀에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주희의 틀에서 본다면 천자나 사()나 모두 개인 내면의 존양성찰을 통하여 치인(治人)의 보편적 규범을 달성해야 한다. 그러나 효경은 효()라는 보편적 규범을 먼저 내세움으로써 개인을 순화(淳化) 시키려고 한다.

 

 

 

 

 송나라는 매스컴시대

 

 

앞서 말했듯이 주희45~6세 때에 학용장구(學庸章句)의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57세 때 효경간오를 썼다. 46세 때 탈고한 대학장구가 과연 어떠한 모습의 것이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주희는 대학장구에 대하여 각별한 애착을 지니고 끊임없이 수정작업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71세로 세상을 뜨기 사흘 전까지 대학장구에 수정을 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여튼 대학장구의 초고를 46세 때 탈고한 후 11년 후에 효경에 손을 대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각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주희가 사서(四書)새로운 유학운동의 시발점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우선 그의 정통론의 구상과 관련이 있다. 주자는 학문의 보편성을 매우 강조한 사람이다. 학문의 보편성이란, 우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즉 일반대중에게 학문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송대는 대운하가 활발히 가동되면서 남북이 하나로 소통되는 대상권을 형성하였고 농촌의 구석구석까지 화폐경제의 와중에 휩쓸려 들어갔다. 송의 수도 동경(東京) 개봉부(開封府)는 그러한 대동맥 루트의 심장에 해당되는 곳으로 성내 전체가 시장화 되어있는 화려한 메트로폴리스였다(과거 도시의 시장은 일부 구역에 제한되어 있었다).

 

이 대시장 도시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가장 획기적 사실은 문화상품의 시장화였다. 특히 서적이 오늘날의 책방에서처럼 상품으로서 유통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방대한 독서계층이 1억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송나라 인구의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송나라는 매스컴시대였다. 이러한 매스컴시대에는 사람들은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원한다. 중국의 호한(浩瀚)한 정사(正史)를 다 읽는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이다. 그래서 사마광은 그 방대한 분량을 다이제스트(digest, 분해)한다는 의미에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었는데, 자치통감만 해도 294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래서 주희는 문인(門人)에게 명하여 이를 다시 간략화시켜 59권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지었다. 이것은 당대의 사람들이 어려운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도통(道統) 속 문제는 증자의 책

 

 

마찬가지로 중국의 오경(五經)은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읽기가 어렵다. 주희는 따라서 오경에 접근하기 전에 일반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을 편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자서(四子書)라는 것이다.

 

사자서(四子書)’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사자(四子)’라는 표현이다. ‘사자는 네 책이라는 뜻이 아니라 네 선생(Four Masters)’이라는 뜻이다.

 

이 네 선생은 과연 누구일까? 당대(唐代)의 문호 한유(韓愈, 768~824)원도(原道)로부터 촉발되어 형성된 송대의 도통론은 다음과 같은 계보를 말하고 있다.

 

주공 공자 증자 자사 맹자
周公 孔子 曾子 子思 孟子

 

한유(韓愈)맹자(孟子)가 죽은 이후로 그 도통의 전수()가 끊겼다고 말한다[孔子傳之孟軻. 軻之死, 不得其傳焉].

 

이 계보에서 공자 이전에 해당되는 경전이 육경(六經)이다. 그러나 그것은 난해하여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렵다. 그 난해한 육경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주희는 공자 이래의 네 선생의 가르침을 전하는 책을 하나씩 선정하였다. 그것이 바로 사자서(四子書)인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경우는 논어(論語)가 있고, 맹자의 경우는 맹자(孟子)가 있다. 그리고 중용(中庸)은 이미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에 자사(子思)중용(中庸)을 지었다고 확실하게 명시되어 있어[伯魚生, 字子思, 年六十二. 嘗困於宋. 子思作中庸] 예로부터 확고하게 자사의 작으로 간주되어 왔다. 문제는 증자의 책이다.

 

공자 논어(論語)
증자(공자의 직전제자) ?
자사(증자의 직전제자) 중용(中庸)
맹자(자사의 손제자) 맹자(孟子)

 

주희예기로부터 대학(大學)을 독립시키고 대학(大學)에 장구작업을 할 때, 대학(大學)의 경문(經文)은 공자의 말을 술()한 증자의 작()이고, 전문(傳文)은 증자의 뜻을 설명한 증자문인의 작품이라고 못을 박았다[, 經一章, 蓋孔子之言, 而曾子述之. 其傳十章, 則曾子之意, 而門人記之也].

 

주희 이전부터 그러한 설이 있었으나 주희가 그것을 확고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정설화된 것이다. 무슨 근거가 있는가? 근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냥 그렇게 주자가 말했다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사자서(四子書)의 구색이 갖추어졌으나 주자의 심중에 찜찜한 구석이 남아있다. 왜냐하면 증자가 공자의 말을 기록한 것으로서 이미 경문화되어 있는 권위있는 바이블이 엄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효경인 것이다.

 

 

 

 

 사자서가 세상에 나오게 된 까닭

 

 

효경은 첫머리부터 공자가 증자에게 (, 증자의 이름), 게 앉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겠다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증자의 책으로서 대학(大學)효경은 라이벌 관계에 있게 된다.

 

대학(大學)을 경()과 전()으로서 나누어 장구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주희는 당연히 효경마저 같은 방식으로 경()과 전()으로 나누어 새로운 장구작업을 시도하려 하였다. 물론 그는 그의 도학적 틀 속에 효경을 편입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효경에 손을 대고 보니 효경이라는 경전은 전혀 자기의 도학적 틀과 맞아떨어지는 책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경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들을 삭제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억지춘향이로 만들어 놓은 경문과 전문을 매치시키는 과정에서 또 많은 삭제가 불가피했다.

 

결과적으로 주희효경에 손을 댔다가 사상적으로도 자신의 성리학적 틀을 보완할 수 있는 결정적 내용을 얻지 못했고 텍스트비평의 성과도 올리지 못했다. 애꿎게도 한대로부터 이미 경()의 권위를 획득하여 내려온 바이블 한 권만 망쳐버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아무리 레토릭의 구사가 좋은 주희라 할지라도 효경간오를 세상에 내놓을 자신은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서문도 아니 쓰고 장구주해작업도 하지 않고 서궤에 쑤셔넣어 두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효경간오작업의 실패로 말미암아 주희는 사자서의 구상에 대한 확신을 획득한다. 자기의 경학 틀 속에서는 효경을 잠재워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증자의 작으로서는 오직 대학(大學)만을 어필시키기로 작심한 것이다. 4년 후 61세 때 드디어 회암(, 주희의 호)은 임장군(臨漳郡)에서 사자서(四子書)를 상재(上梓) 한다(소희紹熙 원년, 1190),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82서임장소간사자후(書臨漳所刊四子後)’라는 발문이 실려있다.

 

 

성인께서 경전(바이블)을 지으시어 후세에 가르침을 드리우실 때에는, 읽는 자로 하여금 그 문장을 암송하고, 그 뜻을 생각하고, 사리의 당연함을 깨달아, 도의(道義)의 전체를 보고 몸으로 힘써 실천하여, 성현의 경지에 스스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라 ()를 구하여 덕()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는 성인의 경전을 버리고서는 도무지 마음 쓸 곳이 없다.

聖人作經, 以詔後世, 將使讀者誦其文, 思其義, 有以知事理之當然, 見道義之全體而身力行之, 以入聖賢之域也. 欲求道以入德者, 舍此爲無所用心矣.

 

그러나 지금 성인의 시대로부터 세상이 너무 멀어져 그 뜻을 일깨워 강의해주는 자들이 사라졌고, 그 상수(象數)와 명물(名物)로부터 훈고(訓詁), 범례에 이르기까지 서당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덕망이 높은 대학자들도 그 뜻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런데 하물며 새로이 공부하려는 초심자가 벼락 같이 읽기 시작하여 그 큰 대강의 뜻과 핵심적 요점을 갑자기 터득한다. 하는 말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然去聖旣遠, 講誦失傳, 自其象數名物, 訓詁凡例之間, 老師宿儒尙有不能知者, 況於新學小生, 驟而讀之, 是亦安能遽有以得其大指要歸也哉!

 

그러므로 하남 정부자(程夫子, 정이천을 가리킨다)께서 사람을 가르치실 때에 반드시 먼저 대학(大學)논어(論語)중용(中庸)맹자(孟子)네 책을 먼저 힘써 공부하게 하셨고, 그 네 책을 마스터 하고난 연후에나 육경(六經)의 공부를 시작하게 하시었다. 대저 그 쉽고 어렵고, 멀고 가깝고, 크고 작은 것의 순서가 원래 이와 같은 것이니 함부로 어지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故河南程夫子之敎人, 必先使之用力乎大學論語中庸孟子之書, 然後及乎六經. 蓋其難易遠近大小之序, 固如此而不可亂也.

 

 

이것이 그 유명한 사서집주가 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 첫 실마리이다. 그러나 이때 간행된 최초의 사자서(四子書)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의 사서집주였는지, 어떠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꾸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희대의 명저 사서집주의 초간본인 사자서는 현재 하나도 남아있질 않기 때문이다.

 

주희는 당대에는 복건성에 사는 외롭고 고고한 시골선비에 불과했다. 그의 벼슬경력은 극히 미약하다. 19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50년간이나 관원 직원록에 등록은 되어있었지만 대부분 명목상의 직책에 그쳤다. 지방관 생활 9, 중앙에서 천자시강 45, 그것이 전부였다.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는 주자학의 맹점이 바로 사서로부터 육경으로 진입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혹평을 늘어놓는다. 그것은 읽는 순서나, 난이(難易)의 차서(次序)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사서의 이론적 틀 속에서 육경을 규정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선왕지도(先王之道)로서의 육경의 성격이 사서의 관념적 틀 속에서 왜곡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사서를 통하여 육경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육경의 오리지날한 틀 속에서 사서를 용해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소라이의 비판도 일리가 있지만 하여튼 주희의 문제의식은 그 나름대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의 효 담론과 주자의 효 중시

 

 

그렇다면 주희는 자신의 사상체계 속에서 효경을 파기해버렸을까?

 

()라는 것은 인륜의 대본(大本)이요 유교의 대강(大綱)이다. 공자가 인()을 말하였다고는 하나, 인은 너무 어렵고 구름 잡는 것 같아 이해하기가 어렵다. 논어(論語)를 펼치면 바로 두 번째로 유약(有若)의 말로서 기록된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는 로기온이 나오고 있다. 효야말로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라는 뜻이다. 인의 구체적인 실천덕목이 효라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인을 가깝게 실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효()이다.

 

위정편에 보면 제5장부터 제8장까지 쪼로록 효에 관한 담론이 나오고 있다. 공자의 효에 대한 생각을 매우 절절하게 알 수 있다. 효에 관한 공자의 생각은 개념화되어있질 않고, 매우 실제적인 가족관계에서의 미묘한 감정의 교섭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위정편 21에는 누군가 공자에게 왜 정치를 직접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공자는 이와 같이 대답한다: “서경효성스럽도다. 효성스럽도다. 형제간에 우애가 깊도다. 이를 정치에 베풀도다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정치함이 아니겠는가? 어찌 내가 직접 정치를 하는 것만이 정치라 할 수 있겠는가[子曰: ‘書云: ‘孝乎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공자는 효가 실천되는 사회가 되면, 구태여 자신이 정치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정치의 목표가 결국 효라는 인간관계의 사랑이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희가 유교적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말하는 한에 있어서 효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가 도외시한 것은 효경이라는 텍스트였고 효()라는 덕목이 아니었다.

 

주자행장(朱子行狀)에 보면 희는 8세 때에 서당 선생님으로부터 효경을 전수받았는데, 한번 눈을 스치자마자 그것을 통달하고, 그 책 위에 6글자로 제()하기를, ‘이와 같지 아니 하면 인간의 자격이 없다. [不若是, 非人也]’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희(紹熙) 5(1194) 봉사(封事)를 올리기를, ‘제가 읽은 것이라곤 효경논어(論語)』 『맹자(孟子), 그리고 육경뿐이올시다. 그리고 배운 것이라곤 요ㆍ순ㆍ주공 ㆍ공자의 도()에 지나지 않습니다[臣所讀者, 不過孝經語孟六經之書. 所學者, 不過堯舜周孔之道]’라고 하였고, 여자에게도 마땅히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효경논어를 가르치는 것 외로도, 여계(女誡)한서의 저자 반고(班固)의 여동생 반소(班昭)가 여자의 덕성에 관해 지은 책가범(家範)송나라 때 대학자 사마광(司馬光)이 가정일상 규범에 관하여 쓴 이론서로서 그의 속수가의(涑水家儀)라는 책과 한 쌍을 이루는 책을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효경논어를 여성들까지 읽어야 할 필독서로서 지칭하고 있어 주희 자신이 효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희는 49(순희淳熙 5)로부터 52세까지 남강군(南康軍)의 지사로 있었는데 그때도 효경서인장(庶人章)을 설파하면서 백성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하여튼 이러한 기록은 주희 본인이 어려서부터 효경을 존중하였고, 사람들이 자기수양의 기틀로 삼아야 할 책으로 간주하였으며, 서민들의 교육에도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효경이라는 텍스트를 거의 파기하다시피한 그의 지적 작업의 파산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소학의 편집자 유청지(劉淸之)와 주희의 관계

 

 

그는 효()의 중요성은 확고하게 인식하였다. 그러나 효는 그의 이기론(理氣論)코스몰로지(Cosmology)의 논리적 결구 속에서 분석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다.

 

효는 일차적으로 감성의 문제이며, 당위의 문제이며, 실천의 문제이다. 그것은 성인(聖人)의 문제이기보다는 소아(小兒)의 문제였다. 성인에겐 효를 가르친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그것은 어린이의 일상거지로부터 스며드는 것이라야 했다. 효는 논()의 문제가 아니라 습()의 과제였다.

 

() ()
성인(聖人)의 문제 소아(小兒)의 문제
()의 문제 ()의 과제

 

주희의 판단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그가 효경간오를 쓴 것이 57세인데, 소학(小學)을 그 이듬해 58세 때 완성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희는 소학(小學)을 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부터 소학에서 사람을 가르치기를, 물 뿌리고 청소하고, 응대하고 진퇴하는 절도로써 하였고, 또 부모를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스승님을 융성하게 대접하고, 동무를 친하게 대하는 도()로써 하였는데, 이 모두가 수신제가치국ㆍ평천하의 근본이 되는 까닭이다.

古者小學敎人以灑掃應對進退之節, 愛親敬長隆師親友之道, 皆所以爲修身齊家治國平天下之本.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유치한 나이에 강습하여야 하며, 배우면서 이지가 더불어 자라나고 몸의 변화를 일으키면서 마음이 무르익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때늦게 억지로 주입시키느라고,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서로 애써 고생만 하는 그런 우환이 없도록 해야 한다한격이불승(扞格而不勝)’이라는 말은 예기』 「학기(學記)에 출전이 있다. 이상은 주문공문집76에 있다.

而必使其講而習之於幼稚之時, 欲其習與知長, 化與心成, 而無扞格不勝之患也.

 

 

전통적으로 소학(小學)이란 책은 주희의 저술로 인식되어 왔으나, 실은 주희의 문인이며 친구라 할 수 있는 유청지(劉淸之, 리우 칭즈, Liu Qing-zhi, 1139~1195)임강(臨江) 사람으로 소흥(紹興) 27년 진사. 주희를 만나고 나서 자기가 배운 것을 다 불태워버리고 의리지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자()가 자징(子澄)이다. 그의 전기가 송사437에 자세히 실려있다에게 명하여 여러 경전에서 동몽을 교화시킬 수 있는 내용을 한데 모아 편집하도록 한 책이다.

 

주문공문집35에는 유자징과의 서한문들이 실려있어 그 자세한 왕래를 엿볼 수 있다. 이미 순희 10(1183, 주희 54)에 자징에게 보낸 답서에, “소학(小學)이라는 책은 정돈이 잘 되어가고 있소? 빨리 되었으면 다행이겠구료, 찾는 대로 곧 보내주면 행복하고 또 행복하겠소(무엇을 찾는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소학(小學)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小學書曾爲整頓否? 幸早爲之, 尋便見奇, 幸幸]”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보면 퍽 일찍부터 계획된 사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헌비평가들이 소학(小學)은 유자징의 작품이며 주희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나, 소학(小學)편집에 관여한 사람이 유자징 일인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또 처음부터 마스터 플랜을 정하고 그 편집과정을 주희가 다 감독했으므로 실상 주희의 작품이라고 말하여도 무방하다이 문제와 관하여서는 진영첩(陳榮捷, Wing-tsit Chan)주자신탐색(朱子新探索)소학(小學)’ 일문(一文)에 자세하다.

 

소학(小學)대학(大學)의 분별에 관한 주희의 논의는 명료하다. 그의 대학장구』 「()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 8세가 되면, 왕공(王公)으로부터 서인(庶人)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에 들어가 쇄소ㆍ응대ㆍ진퇴의 절도와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의 글을 배웠다.

人生八歲, 則自王公以下, 至於庶人之子弟, 皆入小學, 而敎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 禮樂射御書數之文.

 

그리고 나이가 15세가 되면, 천자의 원자(元子)ㆍ중자(衆子)로부터 공ㆍ경ㆍ대부ㆍ원사(元士)의 적자(適子: 적자嫡子를 의미한다)와 뭇 백성의 준수(俊秀)한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학에 들어가, 궁리ㆍ정심ㆍ수기ㆍ치인의 도를 배웠다. 이는 또한 학교의 가르침에 작고 큰 절차가 있어 소학과 대학으로 나누어진 까닭이다.

及其十有五年, 則自天子之元子衆子, 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 與凡民之俊秀, 皆入大學, 而敎之以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 此又學校之敎, 大小之節, 所以分也.

 

 

효경이라는 텍스트에 실패를 선언한 후 대학(大學)에 전념하게 되면서 소학(小學)을 창조해내는 주희의 구상이야말로 사상가로서 탁월한 전략인 동시에, 그가 얼마나 현실적 문제에 고심하고 산 사람인가, 그 뼈저린 충정을 엿보게 한다.

 

 

 

 

 주희 당대에만 해도 가례는 정설이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자학의 체계가 사서중심주의로 특징 지워지고 효경이 경시되며 그 대신 소학(小學)이 부상한다는 것은 동아시아문명권의 주자학 700년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프레임웍(framework)임에 틀림이 없지만, 소학(小學)과 더불어 반드시 고찰해야만 할 중요한 문헌이 바로 주자가례(朱子家禮)라는 것이다.

 

조선조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는 번쇄한 권력다툼인 예송(禮公)의 주역이었으며, 송시열(宋時烈)주자가례(朱子家禮)야말로 주자가 고금을 참작하여 시의적절하게 정립한 의례로서 그 절대적 권위가 고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송시열도 가례의 위작설에 관한 문제의식은 있었다 한다 아무도 본격적으로 그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으니송시열의 선생인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가례의 변통에 관해서는 너그러운 편이었다, 주자가례는 당연히 주자의 저작이며 동아시아문명의 내재적인 기본 틀이라고 전제하기 쉽지만, 주자가례(朱子家禮)야말로 주자의 생애에서 언제 어떻게 성립한 문헌인지 그 확실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주자가례는 주자의 저작이 아닐 수도 있다주자연보를 찬정(纂訂)한 청대의 왕무횡(王懋竑, 왕 마오홍, Wang Mao-hong, 1668~1741)은 독실한 주자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박(精博)한 논지로써 가례가 주자의 소찬(所撰)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가례의 성립은 대체적으로 소학(小學)성립과정과 그 상황이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어린 나이에(14) 부친상을 당했을 때 집안에서 행할 수 있는 의례에 관하여 여러 가지 상념이 오가면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가 40세 때(1169) 모친상을 겪으면서 그 생각이 구체화되어 말년에 가례를 완성했다고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례의 성격으로 보아 주희 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가례효경간오의 실패 이후에 더욱 박차를 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희의 생애의 사건들과 관련하여 가례의 성립을 운운하는 제설의 배경에 깔려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주희 본인의 집안사정만 해도 부친상과 모친상에 관하여 어떤 확고하게 정해진 의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주문공문집75에는 가례서가 실려있는데 거기에는 고례(古禮)와 주자 당대의 의례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을 뿐 아니라, 확고하게 정해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기복(器服)의 제도나, 출입기거의 절도가 모두 현세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뜻이 있는 군자가 고금의 변화를 참작하여 일시지법(一時之法)을 시행하려 해도 쓸데없이 자세해지거나, 혹은 아무렇게나 생략할 수도 있어, 절충의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 근본을 버리고 말엽을 쫓게 마련이고, 실제적인 것은 소홀히 하고 형식적인 것만에 급급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가례는 주희의 혁명적 시안

 

 

우리는 현재 주자가례가 관혼상제에 관한 가장 신빙성 있는 정통의 기준이라고 그냥 믿어버리지만, 그것은 역사적 본말을 전도시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가례주희에게 있어서는 매우 혁명적인 시안일 뿐이었다. 우리는 여기 시안(試案)’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주희 시대에 주희는 전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가례는 주자가 하나의 민간사상가로서 송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규범으로서의 가정의례를 시험적으로 구성해본 하나의 모델(이데아 티푸스, ideal type)일 뿐이며, 우리나라 조선왕조에서와 같이 전혀 구속력을 지니는 절대적 의례질서가 아니었다. 주자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서 추앙받게 되었고, 따라서 주자가례는 덩달아 구속력 있는 사회규범으로서 준수되게 되었다. 사실 의례는 너무 복잡하고 형식적이며 예기는 너무 잡다해서 어떤 일관되고 통일적인 가정의례 준칙을 제시하지 않는다.

 

주례는 본시 주관(周官: 주나라의 이상적 관료질서)이라고 부른 것으로 국가질서를 말하는 것이지 가정의례가 아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일반 가정에서 삼례(三禮)와 같은 고경에 의거하여 관혼상제의 가례를 행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불성설이었다.

 

사실 우리는 중국역사의 실생활사에 관하여 너무도 정보가 없다. 그리고 중국가정의 역사도 시대적으로 다양한 변천을 거쳐온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만 해도 특수지배층을 제외하고는 일반서민은 모두 핵가족이었다. 그리고 진율(秦律)국가 세원의 호구수를 늘이기 위해 분가(分家)를 장려했다.

 

위진남북조시대를 통하여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과 더불어 귀족정치가 발달하면서 분가가 악덕시 되고 대가족화되었으며, 그러한 대가족화는 당ㆍ송대까지 계속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대가족주의는 종족(宗族)이라는 혈연개념을 발전시키고, 지역적으로도 우리가 비근하게 알고 있는 성씨마을을 탄생시킨다. 그러니까 대개 가례가 강제력을 갖는 것은 그러한 성씨마을이라는 대종족 공동체를 전제로 할 때 생겨나는 것이며 족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종가집의 권위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 관혼상제의 모든 것이 알고 보면 효()라는 관념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도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성인예식이며, ()도 일차적으로 부부를 맺어 가정을 꾸려 효의 본질적 마당을 형성하는 것이며, ()과 제()라는 것도,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는 것이 살아계실 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똑같은 지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효경』 「기효행장(記孝行章)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효자가 부모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부모님께서 집에 거()하실 때는 그 공경된 마음을 부모님께 다 바치고, 부모님을 봉양할 때는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을 극진히 하고, 부모님께서 편찮으실 때는 그 근심을 다하고, 돌아가셔서 상례를 치를 때는 슬픔을 다하고, 그 영혼을 제사지낼 때에는 근엄한 마음을 다한다. ()ㆍ양()ㆍ질()ㆍ상()ㆍ제(), 이 다섯 가지가 다 구비되어야만 비로소 부모님을 잘 섬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孝子之事親也, 居則致其敬, 養則致其樂, 病則致其憂, 喪則致其哀, 祭則致其嚴. 五者備矣, 然後能事親.

 

 

 

 

 대종주의와 소종주의

 

 

주자가 가례를 만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고전학자로서 고경의 내용을 축약시켜 놓은 다이제스트(digest)판 의례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효경을 이론적으로 탐구하지 않았다. 효경이 계몽하고자 하는 효의 덕성을 구체적인 제도로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효는 추상적 함양이 아니라 제도적 실천이다. 이렇게 되려면 당대의 사람들이 누구든지 집안에서 당하는 일상적인 사태로서 익숙하게 알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주자 가례서(家禮序)의 첫 문장을 한번 살펴보자.

 

 

대저 예()라는 것에는 본질과 형식이 있다. 일상가정에 시행되는 것으로부터 이러한 문제를 접근해 들어간다면, 명분을 바르게 지킨다든가, 사랑()과 공경()을 실천한다든가 하는 것은 예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凡禮有本有文, 自其施於家者言之, 則名分之守, 愛敬之實, 其本也.

 

그러나 관ㆍ혼ㆍ상ㆍ제와 같은 의장도수(儀章度數, 의례규범)는 예의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그 본질이라는 것은 일반가정에서 일용생활을 하는 항상된 바탕이니 하루라도 닦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冠昏喪祭儀章度數者, 其文也. 其本者有家日用之常體, 固不可以一日而不修.

 

그런데 그 형식이라는 것 또한 사람된 도리의 끝과 처음의 기강을 잡는 것으로서, 행함에 때가 있고 베풂에 장소가 있지만(시ㆍ공의 특수성이 있다), 평소에 밝게 강구해두고 평소에 익숙하게 습득해놓지 않으면 졸지에 일을 당했을 때에 또한 의에 합당하고 절도에 응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처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의 형식 또한 하루라도 강구하고 습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其文又皆所以紀綱人道之終始, 雖其行之有時, 施之有所, 然非講之素明, 習之素熟, 則其臨事之際, 亦無以合宜而應範, 是不可以一日而不講且習焉也.

 

 

이러한 취지에서 만들어진 가례는 우선 당대 송나라 사람들의 가정의 현실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져야 했으며, 또 누구나 실천할 수 있도록 간결해야 했다.

 

이래서 주자 가례는 고경의례와 비교해보면 퍽으나 차이가 있다. 오늘날 우리 감각에서 보면 가례가 번쇄(煩瑣)하고 복잡한 것 같으나 주자시대의 일반 대가족의 의례에 비교하면 퍽 간소화된 것이다. 이러한 주자가례의 본래적 정신이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의 보수유자들에게는 오히려 이해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딱한 일이다.

 

주희혁명적인 발상은 우선 대종족주의의 의례를 소종주의(小宗主義)로 바꾼 것이다. 중국은 대국이다. 성씨마을이라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규모의 촌락이 아니다. 종가집 일가에 백 가호가 누대로 같이 사는 상황도 있다. 그러한 종가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방대한 촌락 공동체가 있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사당이라는 것이 선비 집집마다 있는 것이 아니고 종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사당이 있어서 제사도 공동으로 족규(族規)에 따라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대종주의를 주자는 소종주의로 바꾸고, 여유가 있는 선비라면 누구든지 사당을 지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주자가례는 송대의 사대부 계층의 개체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사대봉사(四代奉祀)라는 것도 소종(小宗)의 범위를 국한시킨 것이다.

 

 

 

 

 가정(Family)과 교회(Church)

 

 

회창폐불(會昌廢佛)842년부터 4년에 걸친 당무종(唐武宗)의 불교탄압 이래 지속된 송대의 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선종(禪宗)이 쇠퇴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장경의 율장, 그러니까 원시불교의 승가계율에 기초한 법규(法規)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중국사찰에 맞는, 승단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중국식 청규(淸規)가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타종파와는 달리 선종은 사찰 자체가 개별적으로 독립되어 있었으며 승려의 노동력에 기초한 자급자족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대종(大宗)이 아니라 소종(小宗)이었던 것이다. 논장(論藏)부처님의 말씀을 크게 경ㆍ율ㆍ논 삼장(三藏), 곧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으로 나눈다.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말씀이고, 논장(論藏)은 그 후 보살들이 나와서 부처님 말씀에 대하여 각자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부연 설명한 것이다을 새로 쓴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율장(律藏)을 새로 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주자는 신유학운동의 생명력을 새로운 율장에서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참으로 탁월한 전략이요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주자는 육경의 주석을 통하여 경장(經藏)을 확보하고, 사서의 주해를 통하여 논장(論藏)을 확보하고, 소학(小學)가례를 통하여 율장(律藏)을 확보한 셈이었다.

 

신유학의
삼장
경장(經藏) 육경(六經)의 주석
논장(論藏) 사자서(四子書)의 주해
율장(律藏) 소학(小學)가례(家禮)

 

효경간오의 실패가 소학(小學)가례로서 보상을 받았다면, 간오의 실패는 한마디로 주자학의 대박이었던 셈이다.

 

주자학의 체계를 신봉하는 자들은 암암리 효경을 경시하고, 그 대신 소학(小學)가례를 중시한다. 재미있게도 우리나라 조선왕조의 주자학의 실상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육경의 주자학도 아니요, 사서의 주자학도 아니며, 실상 소학(小學)가례의 주자학이다. “제읍(諸邑) 유생들에게 장유(長幼)를 막론하고 소학(小學)가례를 먼저 읽혀라!” “소학(小學)가례에 통달한 자만이 생원시험을 볼 수 있다는 등등의 메시지는 세종실록이나 성종실록등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는 실상 소학(小學)가례의 왕국이었다. 나의 어머니께서도 수의를 지으실 때 항상 주자가례를 펴놓고 지으셨다. 어렸을 때 안방 장판 위로 펼쳐져 있는 주자가례를 신기하게 쳐다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주자는 가례를 효의 현실적 실천방안으로서 혁명적으로 기획했지만 불행하게도 가례의 소종주의(小宗主義)는 더욱 더 철저하게 사회를 도덕주의적으로 옥죄어 들어가는 기미가 된다. 대종주의(大宗主義)일 때에는 오히려 일반가정은 의례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구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종주의가 되면 오히려 모든 가정이 주자가례에 의하여 철저히 구속당한다. 쉽게 생각하면 가정이 모두 주자학의 작은 교회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교회가 가부장의 권위에 의한 종교재판(Inquisition)까지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종법의 굴레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내 말을 부정할 길이 없을 것이다. 얼마나 수많은 조선의 여인들이 시부모에게 야단맞고 우물에 몸을 던졌으랴!

 

주자의 가례는 결과적으로 가()를 국()의 규범에 의하여 규정하는 사태로까지 발전시킨다. ()가 철저히 정치화되는 것이다. ()가 모여서 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의 규범과 국의 규범이 일치되는, 그러니까 국()이 일가(一家)가 되고 가()가 일국(一國)이 되는 철저한 충ㆍ효의 일원화가 성립한다. 본문에서 세밀하게 주해를 가하겠지만 효경은 결코 그러한 틀의 경전이 아니었다. 주자는 효경을 너무도 협애하게 만들었다. 주자학의 저주가 바로 이 점에 있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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