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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제1장 주자학과 『효경간오』 - 효의 나라 조선에서 『효경』이 읽히지 않은 것을 아시나요?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제1장 주자학과 『효경간오』 - 효의 나라 조선에서 『효경』이 읽히지 않은 것을 아시나요?

건방진방랑자 2023. 3. 29.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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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람(序覽): 효경개략(孝經槪略)

 

 

1

주자학(朱子學)효경간오(孝經刊誤)

 

 

효의 나라 조선에서 효경이 읽히지 않은 것을 아시나요?

 

 

한국인의 혈관 속에는 효경이 흐르고 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효경이 소기한 가치가 적혈구에 배어 흐르고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인들은 효경이라는 문헌, 그 텍스트는 별로 접한 적이 없다. 요즈음 신세대 고전학자들도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읽었을지언정, 효경은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런데도 효경』」이 표방한 가치, 그리고 그 가치를 활용하여 사회질서(social order)를 유지 시키고자 노력한 이들의 땀방울이 한국인 모두의 체취 속에는 흥건히 젖어 있다.

 

효경이라는 책을 접한 적이 없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나 도올이나 동방학 관계 전문가들만 좀 접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조선조의 문인이나 대유(大儒)들도 효경을 접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효경을 접한 자가 거의 없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이런 이야기를 왜 내가 서슴치 않고 말하는가?

 

중국인들이 그들의 바이블로서 내세우는 십삼경(十三經) 중에서 가장 먼저 경()이라는 권위로운 이름이 붙은 책이 바로 효경(孝經)이요, , 우리나라에서도 백제시대에 이미 박사 왕인(王仁, 45세기 사람)논어(論語)천자문과 함께 효경을 일본에 전했다고 사료되고 있고삼국사기삼국유사등 우리측 사료에는 이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일본서기(日本書紀)고사기(古事記)의 기록을 통하여 추정될 뿐이다. 우리 민간전승에 의하면 왕인은 전남 영암인이다. 월출산의 정기를 받은 인물일 것이다, 신라의 문호 강수(强首, 신라의 삼국통일시기에 활약)가 어려서 효경곡례(曲禮)이아(爾雅)문선(文選)을 읽었다는 정확한 기록이 있고삼국사기46, 열전6, 또 신라 원성왕(元聖王) 4년조에 독서삼품과 선정에 있어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과 함께 논어(論語), 효경』」에 밝은 자를 상품(上品)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 국학(國學)의 필수공통 과목으로 논어(論語)효경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일찍부터 효경이라는 경전이 조선 땅의 사람들에게 읽혔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신라의 고등교육기관인 국학은 당()나라의 학제를 본뜬 것이고 또 신라 국학의 전통은 고려 국자감에 계승되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 마련된 국자감의 학식(學式)을 보아도 필수 공통과목으로 효경논어(論語)가 들어가 있다. 광종(光宗) 때 과거제를 도입하여 유교적인 관료체제를 확립하여 호족의 발호를 억제하려 하였고, 역량 있는 군주인 성종(成宗)은 승유(崇儒) 정책을 통하여 효()의 문화를 진작시키고, 36부의 중앙관제를 확립하고 12목의 지방제도를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완비한다. 그러니까 고려 성종 때부터는 이미 근세적 유교문화가 이 땅에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한가운데 효경이라는 경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조선 사람들이 효경을 접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가?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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