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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 『효행록』과 『삼강행실도』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 『효행록』과 『삼강행실도』

건방진방랑자 2023. 3. 3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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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행록삼강행실도

 

 

효행록(孝行錄)이란 어떤 책인가? 이것은 고려 말 충목왕 2(1346) 경에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주자학의 보급에 혁혁한 공을 세운 문신 권부(權溥, 1262~1346)가 그의 아들 권준(權準, 1280~1352)과 함께 효행에 관한 기록을 모아 엮은 책이다. 늙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권준이 중국의 효자 24명에 관한 이야기를 화공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한 뒤, 그것을 당대의 명문장가였던 이제현(李齊賢, 1287~1367)에게 찬()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여 만들었다. 이것이 전찬(前贊)이다. 이 전찬을 보고 아버지 권보는 자기 스스로 또 다시 38명의 효행을 골라 다시 이제현의 찬을 지어 받았다. 이것이 후찬(後贊)이다. 이 전ㆍ후편을 합하여 여기에 다시 이제현의 서문을 더해 한 책으로 만든 것이 효행록(孝行錄)이다.

 

효행록입학도설(入學圖說)의 저자로 유명한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정몽주정도전과 함께 활약한 고려 문신으로 조선왕조 개국공신이 주해를 달고권근의 후서(後序)는 태종 3(1403)이다 태종 5(1405)에 간행되었는데, 주해자 권근은 바로 권보의 증손자이다.

 

김화시부(金禾弑父) 사건을 놓고 세종이 대신들과 토론하는 내용을 보면 대신들은 이러한 이하범상(以下犯上)의 죄는 도저히 형률(刑律)의 조문을 가감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길이 없으므로 효행록을 중간(重刊)하여 널리 보급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종은 불만이 많았다. 왜냐하면 효행록에 실린 사례가 전편 24, 후편 38인 모두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태종 131230실록기사에 보면, 서연관(書筵官)에서 병풍을 만드는데 효행록에서 뽑아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이제현의 찬과 권근의 주()를 쓰게 하였고, 그것이 이루어지자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하여금 그 뜻을 풀이케 하였는데 충녕이 그 뜻을 곡진하게 다 해석해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니 세종(충녕)효행록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효행록을 중간하자고 건의한 것에 대한 세종의 반응을 기록한 내용을 정확히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세종 10103일 기사).

 

 

현재 우리나라의 풍속이 너무 각박하고 사악하게 되어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가 생겨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효행록을 간행하여 우매한 백성을 깨우치고자 한다.

今俗薄惡, 至有子不子者, 思欲刊行孝行錄, 以曉愚民.

 

이러한 방식이 시폐를 구하는 급선무는 아닐지라도 실상 이러한 문제는 교화를 우선으로 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땅히 이미 찬술된 24인의 효행에다가 또 다시 20여 인의 효행을 보태어 편집해야 할 것이다. 고려조와 삼국시대에 효행으로 특출한 사례들을 또한 모두 수집하여 한 책을 찬성(撰成)토록 하되, 그것을 집현전(集賢殿)이 주관케 하라.

此雖非救弊之急務, 然實是敎化所先, 宜因舊撰二十四孝, 又增二十餘孝. 前朝及三國時孝行特異者, 亦皆裒集, 撰成一書, 集賢殿其主之.

 

 

실록의 기사는 자세히 뜯어보면 매우 부정확한 기록이다. 효행록은 이미 24()에다가 38효를 더한 책이므로, ‘24인의 효행에다가 또 다시 20여 인의 효행을 보태어 편집하라는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시 보태는 20여 인의 효행이 중국 것이 아니라, 고려조와 삼국시대의 효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지도 문맥상 명확하지는 않다. 그리고 기존의 효행록을 중간(重刊)하라는 명령인지, 효행록외로 새로운 책을 별도로 출판하라는 명령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세종 연간에 효행록은 기존의 효행록의 모습대로 간행되었고선덕계축추팔월(宣德癸丑秋八月)의 발문(跋文)이 있는 세종 15년의 중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현존한다, 효행록의 핵심적 내용을 흡수하고 거기에 우리나라의 사례를 첨가한 새로운 방대한 책이 집현전(集賢殿)에서 편찬되었다. 이 편찬작업은 세종 14(1432) 6월에 마무리 되었고, 교정작업을 거쳐 세종 16(1434)에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를 마쳤다. 세종은 종친과 신하들에게 이 책을 하사하고 전국의 각 수령에게 배포하였다. 세종 164272번째 기사에서 세종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삼강(三綱)이란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의 큰 벼리이다. 군신ㆍ부자ㆍ부부가 마땅히 먼저 알아야 할 바이다. 이제 내가 집현전의 유신들에게 명하여 고금의 사례들을 편집하고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그림을 덧붙였다. 이 책을 이름하여 삼강행실(三綱行實)(실록에서 삼강행실은 모두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의미한다)이라 하고, 상재하여 서울과 지방으로 널리 유포하고 우선 학식있는 자를 선발하여 그들을 훈도하고 부추기어 권면하고, 어리석은 남정네와 아녀자들이 모두 깨달음이 있게 하여 그 삼강의 도리를 다하도록 만들게 하고자 한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하뇨?

三綱, 人道之大經, 君臣父子夫婦之所當先知者也. 肆予命儒臣編集古今, 幷付圖形, 名曰三綱行實, 俾鋟于榟, 廣布中外, 思欲擇其有學識者, 常加訓導, 誘掖獎勸, 使愚夫愚婦皆有所知識, 以盡其道, 何如?

 

 

이렇게 해서 탄생된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의 출판역사상 민중에게 가장 심원한 영향을 끼친 책이 되었다. 삼강행실도는 조선왕조를 뒤흔든 막강한 책이었다.

 

오늘날에도 정권이 교체되면 KBSMBC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장악하느냐를 놓고 실갱이를 벌인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라디오도 없었고, 신문도 없었다. 국민의 통제수단으로서의 매스컴이 부재하던 시대에 출판은 국가 권력의 상징이었다. 조선왕조가 하나의 거대한 출판사였고, 왕은 출판사 사장이었다고 생각을 해도 과히 틀린 유비(類比)는 아니다. 물론 요즈음 같이 민영화된 자유로운 출판계와는 달리 거의 독점적 출판권을 국가가 소유했고, 그 출판물의 유통구조가 법제화된 권력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과는 다를 뿐이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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