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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효경한글역주, 제7장 효와 제국의 꿈 - 유대교 창조신화나 희랍신들의 세계나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효 결여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제7장 효와 제국의 꿈 - 유대교 창조신화나 희랍신들의 세계나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효 결여

건방진방랑자 2023. 3. 31.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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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교 창조신화나 희랍신들의 세계나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효 결여

 

 

유대교의 전통 속에서도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자신을 창조한 야훼 아버지와 선악과를 사이에 두고 끊임없는 긴장관계에 있다.

 

그리고 부인 하와(이브)와의 관계도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 하나에 불과한 종속적 존재이다. 그리고 실낙원(失樂園)과 복락원(復樂園)의 테마는 인간과 야훼와의 긴장관계가 유지된 채 인간 삶의 역사성을 계속 신화적 합목적성 속에서 전개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효라는 주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우스(Zeus)도 아버지 크로누스(Cronus)와 끊임없는 대립적 긴장관계에 놓여있다. 티탄들의 왕인 크로누스는 부인 레아(Rhea)와의 관계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이 자기보다 더 강성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공포심에서 낳는 족족 그들을 다 삼켜버린다. 즉 아버지에게 자식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며 공포의 대상이며 삼켜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다.

 

결국 레아가 갓난아기 제우스 대신 돌덩어리를 크로누스에게 줌으로써 제우스는 죽음을 모면한다. 장성한 후에 제우스는 티탄들에게 항거하는 반란을 주도하고 아버지 크로누스의 성기를 낫으로 절단하여 죽여버린다. 제우스는 아버지에 대한 반란으로써만 그 존재를 보장받은 것이다.

 

물론 이런 관계 속에는 효라는 덕목이 자리잡을 곳은 없다. 제우스가 올림푸스산의 전지전능의 제왕의 자리에 등극한 후에도 그에게 일차적 관심은 사랑이 아니라 정의이다. 정의(δικη)란 대립적 신들이 서로 고유의 영역을 이탈하여 침범하지 않는 상태일 뿐이다. 인간세에 관한 그의 관심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정의라는 개념에는 반드시 대립적 인간관계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신화(myth)는 인간의 삶의 양식의 투영이다. 이러한 신화(myth) 속에 사는 인간들에게 비로소 외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와 같은 인간이해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유아의 성욕(infatile sexuality)의 발견이 인간의 성욕개념을 확장시킨 프로이드의 공헌이라고 찬양하지만, 우리의 기억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그토록 상세한 설명을 통하여 인간존재의 보편적 구조를 규정하려는 정신분석학적 언어가 과연 어디까지 타당한지 우리 자신의 언어개념 지도로써는 너무도 파악하기 힘들 때가 많다. 원초성이 인간성의 근원이라는 가설, 그리고 그 근원에 인간의 보편성이 존한다는 가설도 때로는 매우 나이브한 생각일 수가 있다.

 

그리고 왜 유아의 정신세계를 근친상간에 대한 욕정과 금기의 갈등을 통하여서만 규정하려고 드는지, 그리고 왜 인간의 양심이나 도덕적 이상의 형성이 일차적으로 그런 외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의 극복과정에서 일어나는 동성 부모와의 동일시로써만 설명되어야 하는지, 왜 어린아이의 자기 신체의 인식이 거세공포와 같은 강박관념을 거쳐야만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특수한 뉴로시스 환자의 정신세계의 무의식적 바탕으로서 유아정신영역에 관한 판타지의 언어들은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화적이며, 서구언어의 독특한 전승의 산물일 뿐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상징적 의미체계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매우 단순한 실존적인 것일 수 있다. 그 단순한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꼭 근친상간의 대립과 갈등과 그 극복이라는 테제를 도입해야만 할 필요성이 있는지,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유아에 대한 가설은 어차피 신기루이다. 도라(Dora)프로이드가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뉴로시스 환자의 이름의 의식세계를 가지고 인간 보편을 운운할 수는 없다. 서구인들의 언어 개념지도에 우리의 사유를 억지로 꿰맞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의 특수한 개념과 감성구조에 따라 우리 스스로의 철학을 전개해야 한다. 효라는 언어가 있는 한 효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서구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효의 철학을 전개할 수가 없다. 효라는 언어가 없는데 어찌 효의 철학이나 효의 가치관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이 기나긴 효의 가치관의 전승을 이룩한 경전이 바로 효경이다. 효경은 사라지지 않는다. 효경이 표방하고자 했던 그 가치관은 바로 지금 이 순간 21세기 한국인들의 혈맥 속을 흐르고 있는 것이다.

 

논어(論語)』 「위정편을 한번 펴보자!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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