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焚書)는 소실의 계기가 아니라 복원의 명분
기본적으로 금고문논쟁은 하나의 환상일 수가 있다. 어차피 진한지제(秦漢之際)의 막대한 전란을 거치면서 막중한 문헌이 소실되었다.
그런데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문헌을 소실시킨 것이 아니라, 문헌을 복귀시키는 데 더 큰 명분을 제공한 역사적 사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제각기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문헌들을 한제국이 성립하면서 통일된 문헌으로서 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하나의 환상이 금고문논쟁일 수가 있다. 그 판타지를 제공한 것이 진시황의 분서령이었을 뿐이다. 금고문논쟁이란 비통일문헌이 통일 문헌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특수한 문제라고 생각하면 아주 정통한 견해를 획득하게 된다.
한번 생각해보자! 아타나시우스의 27서 정경이 발표된 이후 아타나시우스파의 실각으로 27서 정경들이 모두 불태워졌다고 해보자! 그리고 얼마 후에 복원작업이 다시 이루어졌다! 물론 암기왕들이 나타나서 27서를 복원하여 금문신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27서 정경에서 제외되었던 고대 사경자료들을 가지고 와서 본래 27서 정경의 모습은 이러한 것이었다고 우기게 되면 고문신약은 보다 분량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정경과 외경의 구분은 없었던 것이다.
하여튼 금고문논쟁으로 인하여 중국은 한대에 치밀한 텍스트 의식을 개발했고 주석이라는 해석방법론을 확립했다.
양한(兩漢)의 금고문논쟁으로 유발된 경전해석학은 인류사에 유례를 보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것이며, 그 경전해석학의 틀에 의하여 인도에서 들어온 불전들이 해석되고 주석되어 해인사에 있는 8만대장경의 장관을 연출시켰다고 한다면 진시황의 우행도 인간역사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일을 담당한 것이다. 금고문에 관해서는 개별경전에 따라서 세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더 이상 논급할 여지가 없다.
▲ 『효경정주(孝經鄭註)』, 1791년(寬政三年) 일본에서 간행된 판본의 모습. 카와무라 마스네(河村益根, 1756~1819) 가각(家刻). 다자이 쥰(太宰純)의 고문효경 출판이 중국에 알려져 공전의 히트를 치자 일본에서 정주판본을 찾아내는 노력이 일어났다. 중국에서 사라진 당나라의 군서치요(群書治要) 전집이 일본에 보존되었는데 그 군서치요에 들어있는 효경정주를 카와무라가 펴낸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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