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론과 무신론
다시 말해서 자연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Truth)라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인식체계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술어이다. 트루쓰(Truth)라는 것은 트루(true)라는 형용사의 명사형이다. ‘트루’라는 형용사는 ‘틀리다, 거짓이다’를 의미하는 ‘폴스(false)’라는 형용사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맞다. 진짜다’를 의미한다. 진리는 ‘맞음, 진짜임’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타난 현상(appearance)과 실재(reality)의 일치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타난 것과 실재로 있는 것, 그 양변이 모두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에 진리관계라는 것도 유동적일 수 밖에 없다. 현상과 실재의 일치관계라는 것은 우리의 사변이성이 양변에서 추상된 요소들을 일치된 것으로 규정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진리라는 것도 때로는 매우 임의적일 수도 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진부한 것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이 이 세계를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과학적 정보의 정밀성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는 생각도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때로는 계측기계들의 정밀성이 과학의 진보를 방해할 수도 있다. 어쩌면 과학적 진리라는 것이 예술가가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처럼, 과학자가 자연에 그려가는 그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림 그 자체의 진리성은 영원히 확보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학을 가장 신빙할 만한 진리체계로서 수용하는 이유는 과학을 하는 인간의 이성이 인류사에 있어서 어떠한 인간의 정신활동보다도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이고도 보편적인 지식체계를 제시해왔기 때문이다. 여기 객관이니, 합리이니, 보편이니 하는 말들은 구체적으로 기독교나 기타 주술적ㆍ신화적ㆍ초월적 종교 혹은 지식체계가 인간세에 저질러온 죄악에 대비하여 일컫는 말이다. 객관은 주관의 임의성을 체크하며, 합리는 비합리의 광신성을 경계하며, 보편은 국부성과 상대성의 독선을 무력화시킨다. 이러한 과학적 진리가 서양역사에서, 아니 인류사에서 우리에게 신빙할 만한 것으로 인지된 것은, 과학적 진리 그 자체의 합리적 정합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면서 국부의 원천이 되고 제국주의의 무기가 되는 실용성을 충분히 과시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과학을 하면 할수록 인간세가 더 못 살게 되고 인간의 삶이 더 초라하게 오그라 붙는다고 한다면, 인류가 서로 다투어 과학을 회피할려고 노력할 것이다.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실용주의)의 진리관은 과학적 진리를 테스트하는 궁극적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세기의 반동으로서 르네상스 시기로부터 발현되었다. 물론 중세기를 통하여 과학의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학은 신의 은총이나 계시를 거부하는 인간의 이성에 오로지 의지하기 때문에, 과학과 교권(敎權)과의 마찰은 서구역사에 있어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과학은 신의 법칙을 신에 의지하지 않고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독자적인 로고스에 의지하여 알아낼려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로고스기독론적인 로고스의 이해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신과 신의 아들인 로고스의 관계는 철저히 단절되었다. 신의 법칙을 신이 부여할 필요가 없어졌다. 신의 법칙 그 자체를 인간이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우주의 입법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수학적 계산을 할 줄 아는 평범한 인간의 이성(Reason)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이성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게 되면 인간의 이성 그 자체가 신이 되어 버린다.
한마디로 우주의 법칙은 신의 법칙이 아니라 이성의 법칙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주의 법칙을 존재론적으로 신적인 것이라고 규정할지라도, 최초에 신이 설계한 것이라 말할지라도, 그것을 알아내고 작동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됨으로 더 이상 신에게 신세질 이유가 없어진다. 우주의 알파와 오메가를 인간의 이성에 귀속시키는 모든 법칙적 이해를 이신론(理神論, Deism)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구원을 신의 계시에서 찾지 않고 오직 인간의 이성에서만 구하는 것이다. 모든 계시종교는 픽션적 구성일 뿐이며, 그것은 인간의 무지와 정치적 독재와 성직차의 횡포를 조장한다. 모든 과학자는 본질적으로 이신론자가 되어야 하며, 이신론자는 레토릭의 껍데기만 벗겨지면 실제로는 무신론자이다. 무신론이야말로 근대정신의 출발인 것이다.
과학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매우 구차스러운 일이지만, 서양 역사에서 항상 과학이 이런 식으로 설명되는 이유는 과학이 기독교라는 종교와의 텐션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유교전통을 지닌 동양인들이 과학이라는 것에 관하여 한 번도 그러한 텐션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조적인 현상이다.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초월성을 과학이성이 대치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초월성과 미신성은 여전히 현세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텐션 속에서 이신론이니 무신론이니 하는 말들이 부정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 이성의 역사성의 정당한 측면들이 과학과 더불어 같이 유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소기하는 진정한 가치관이나 합리적 질서는 유실되고 오직 생존수단이나 국부(國富)의 수단으로서만 이해되고, 과학자가 가장 미신적인 인간이 되고마는 유례는 너무도 많다. 주중에 이신론적 법칙에 의하여 실험을 하고 있는 과학도가 주말에 교회에 나가서 초월신의 은총을 갈구하는 것은 정신박약자이거나, 과학의 신념이 전혀 그에게 가치로서 정착되는 인식의 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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