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이라는 우상과 허상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을 분리해서 논한다면,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당(唐)제국이 도달한 수준은 서양의 여하한 문명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오늘날에도 일본의 기술수준은 다방면에서 서양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를 과학의 진보라 말할 수 없다. ‘애니콜’을 잘 만들고 있는 것은 대체적으로 기술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과학문명의 수준을 반영하는 사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은 삶의 방편으로서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사변이성이 가설과 입증의 과정을 통하여 자연의 모든 개별적 사실들을 어떤 일반적 원리를 예시하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탐구해 들어가는 독자적인 관성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과학의 발전이 기술의 진보를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기술의 증진이 과학적 가설과 입증에 새로운 계기들을 도입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사에 있어서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는 최근 한 200년간의 현상이며, 이러한 상호연관성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기술은 여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로 남는다. 동방인들이 아직도 한참 투쟁해야 할 과제는 과학적 사유의 빈곤이다.
그러나 5ㆍ4운동(五四運動, May Fourth Movement) 직후에 중국의 활발한 근대 여명을 목격했던 럿셀경(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중국의 문제(The Problem of China)』에서 지적했듯이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양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전이 쉬우며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순수한 열정만 있으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질적인 예술이나 종교나 삶의 방식이나 감각같은 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럿셀은 아시아인들의 과학적 성취에 관하여 매우 낙관적 예언을 하고 있다. 그가 뉴욕의 시티 칼리지(City College in New York)에서 학생들에게 성적 자유(‘sexual immorality’라는 악랄한 표현으로 그를 매도)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나서 곤요로운 가운데 집필한 세기의 명저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이 대작을 집필한 기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유럽문명의 우월성은 한편으로는 과학과 과학적 기술에 기인하고 또 한편으로는 중세기를 통하여 서서히 구축해온 정치적 제도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우월성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아무 곳에도 없다. 요번의 세계대전에서도 러시아, 중국, 일본은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였다. 이 국가들은 서양의 기술문명을 비잔틴 문명, 유교, 신도와 같은 동방의 이데올로기와 결합시켰다. 인도도 이제 해방되면 세계문명에 또 하나의 동방적 요소를 첨가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다가오는 몇세기 동안에는, 인간의 문명이, 살아남기만 한다면, 르네상스 이후에 보여왔던 문명의 형태보다는 훨씬 더 다양한 형태를 과시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문화적 제국주의가 무력적 제국주의보다 훨씬 더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서방제국(the Western Empire)이 멸망하고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도, 실로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그 시점까지만해도 모든 유럽의 문화는 로마제국주의의 색채를 짙게 깔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문화야말로 서유럽의 제국주의적 색채에 깊게 물들어 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제2차 세계대전)후에 세계에 평화가 되찾아오고, 그 세계에서 우리가 편하게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유체계에 있어서 아시아를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동등한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과연 무엇을 초래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매우 심원할 것이며 매우 엄중한 의미를 갖는 것일 꺼라고(399~400).
럿셀의 예언은 매우 적확한 것이고 우리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혜언(慧言)이지만, 우리는 결코 이러한 혜언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서구인이 아시아 사람들에게 모든 가치관에 있어서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 요원하다. 럿셀은 중국에서 강의하면서 중국인이 서유럽사람들을 30년이면 따라잡을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아직도 1세기의 세월은 족히 남아있다. 이것은 세월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지금 여기서 투쟁하여 쟁취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 자신을 혁명하여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데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에 그 성패가 달린 문제일 뿐이다.
현재 ‘과학입국(科學立國)’이라는 테제는 아시아 민족들의 지상의 과제이며 반드시 성취해야할 지고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기실 과학이라는 인간의 사변 이성의 산물이 동방에 넘어오면서 그것이 소기하고자 하는 인간세의 선(善)을 전혀 달성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성 또한 심화되지 않으면 아니 될 문제상황인 것이다. 과학이 우리에게 절박한 과제로서 느끼게 되는 우리의 콤플렉스의 이면에는 과학이야말로 매우 안전한 진리의 기준이라는 검토되지 않은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과학도 본시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자연과학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자연이지만, 자연은 본시 자연(自然)일 뿐이다. 즉 노자(老子)의 말대로, 자연은 스스로(自) 그러할(然) 뿐이며 일체의 언어적 규정을 거부하는 것이다[自然者, 無稱之言, 窮極之辭也. 제25장 王弼注].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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