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대부(大夫)가 된 적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대로, 공자가 50세 전후로 ‘대사구(大司寇, 따쓰커우, Da-si-kou)’라는 벼슬을 했다고 해서 아무 의식없이 그를 대부(大夫)라고 이야기한다. 요시카와 코오지로오(吉川幸次郞)와 같은 사계의 대가도 별 생각없이 여기저기서 공자를 노나라의 대부로 기술하고 있다. 보통 공자를 ‘대부’로 말하는 사람들은 대사구라는 벼슬이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대부로서의 식습을 분봉받았으리라고 하는 전제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과연 공자가 정확하게 대부로서 분봉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가 대부에 준하는 대접을 받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는 순수한 조정의 관료로서 활약했다. 공자는 대부가 되어본 적이 없다. 그것이 바로 공자를 공자다웁게 만드는 사실의 핵심이다. 공자 본인도 그래서 항상 ‘나는 대부의 뒤를 따르는 사람[吾從大夫之後(「선진」ㆍ「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공자시대의 ‘대부(大夫)’라는 것은 후대 특히 송대(宋代)에 형성된 ‘사대부(士大夫)’라는 막연한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경대부(卿大夫)’를 의미한다. 공자시대는 진시황에 의하여 시작된 군현(郡縣)제도 이전의, 인류문명사상 서구의 중세와 일본의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에서나 목격할 수 있는 봉건(封建)제도라는 매우 특이한 정치제도의 규율 속에 있었다. 그것은 군사ㆍ경제ㆍ정치적으로 독립된 단위들 사이의 계약관계를 의미하는 특이한 분권적 위계질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천자(天子) | 왕(王) |
제후(諸侯) | 공(公) |
대부(大夫) | 경(卿) |
사(士) | 사(士) |
서인(庶人) | 민(民) |
은대에만 해도 천자를 제(帝)라 불렀으나 주대에 내려오면서 무왕을 비롯하여 왕(王)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주대의 왕은 천자를 의미한다[其後世貶帝號, 號爲王. 「殷本紀」]. 제후는 천자로부터 국(國)을 봉토(封土)로 받는다. 그리고 대부(大夫)는 반드시 제후로부터 식읍(食邑)을 분봉(分封)받는다. 대부는 단순한 관리(officer)의 직위가 아닌 봉토(封土)를 가지고 있는 토착세력이다. 그 유명한 맹손, 숙손, 계손의 삼환(三桓)이 바로 대부들이다. 다시 말해서 대부는 나라 안의 작은 나라를 방불케 하는 조그만 성읍(城邑)을 보유하는 군사ㆍ경제 정치의 독립단위인 것이다. 그러나 ‘사’란 그러한 식습을 보유하지 않는다. 사는 단지 녹(祿: 월급이나 연봉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관리직책인 것이다. 그리고 매우 유동적인 직책이다. 요새말로는 쉽게 임용되고 쉽게 해고되는 직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정적인 경제적 하부토대가 없는 것이다.
공자가 어렸을 때 위리(委吏), 직리(職吏, 乘田), 사공(司空) 벼슬을 했다는 것은 계씨 즉 대부의 사적 조직 내의 관리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56세(정공 14년) 때 대사구(大司寇) 노릇을 했다는 것은 제후, 그러니까 국공(國公)의 관리를 했다는 것이다. 둘 다 사(士)라는 직분의 한계 속에 있는 것이지만 계씨의 가신노릇을 한다는 것은, 요새로 치면 사기업의 임원노릇을 하는 것이고, 정공(定公) 밑에서 관리가 된다는 것은 중앙청의 국가공무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그룹의 국장이나 중앙청의 국장이나 다 같은 사(士)이지만 격(格)이 다르고, 세력의 범위가 다르다. 공자와 그의 제자집단은 공가(公家)와 사가(私家)의 관료조직을 들락거린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자는 꾸준히 대부의 직책을 탐내었다. 그가 제나라에서 경공(景公)에게 ‘등용된다’함은 곧 제나라의 대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법가계열의 재상인 안영(晏嬰, 옌 잉, Yan Ying)이 그를 니계(尼谿, 니시, Ni-xi)의 땅에 봉(封)하려는 경공(景公, 징꽁, Jing Gong)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사실 안영은 공자의 은인이다. 공자가 만약 경공에 의하여 대부로 등용되었다면, 공자는 오늘날 정자산(鄭子産, 정 쯔츠안, Zheng Zi chan)이나 제안영(齊晏嬰) 이상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위(衛)나라 영공(靈公, 링꽁, Ling Gong)과의 관계도 동일한 것이었다. 공자는 대부(大夫)의 직책이 그에게 어떤 정치적 음모나 사회적 이상의 꿈을 실현시키는 확고한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양호의 꼬임에도, 공산불뉴(公山不狃, 꽁산 뿌니우, Gong-shan Bu-niu)의 유혹에도 공자는 항상 쉽게 넘어갔다. 공자는 정치적으로 매우 단순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공자의 설레임은 항상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자로에 의하여 좌절당했던 것이다. 자로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 주소정묘(誅少正卯)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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