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士)의 새로운 의미
공자는 사(士)로 살고 사로 죽었다. 공자의 삶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결코 이 사(士)라는 성격에서 이탈해본 적이 없다. 그의 제자 중에 나중에 대부가 된 자도 적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공자의 교단은 사의 집단이었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사실은 어폐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라는 개념의 모든 속성을 최초로 구현한 자가 바로 공자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삶으로써 사를 규정해야지, 사로써 공자의 삶을 규정할 수 없다. 공자에게서 최초로 ‘성(聖)’ 새로운 의미맥락이 생겨났다면, 마찬가지로 ‘사(士)’도 공자에게 이르러서 새로운 의미맥락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사는 전통적으로 공(公)ㆍ경(卿)ㆍ대부(大夫)의 계층과 민(民)의 계층 사이에 존재하는 관리계층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의 외연과 내연이 다르다. 『시경』에 흔히 나오는 ‘사녀(士女)’라는 표현에서의 ‘사’는, 거의 통속적 의미에서 ‘계집[女]’과 짝을 짓는 ‘사내[士]’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즉 어떤 계급적ㆍ신분적 의미로 한정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의 원초적 의미는 그 자형이 ‘도끼’나 도끼를 상징하는 의기(儀器)로 상정되듯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문사(文士, 선비)적 의미보다는 단순한 전사(戰士)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즉 왕이나 제후의 공민으로서 전투에 참가할 자격을 지니는 사람을 무분별하게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공자 이전의 사의 일차적 의미는 문적(文的)인 의미보다는 무적(武的)인 의미가 더 강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관학교’라 할 때의 ‘사관(士官)’의 총체적 의미를 생각하면 아마도 연상이 쉬울 것이다. 더욱이 춘추와 전국시대를 통틀어, 특히 공자의 시대에는 문(文)ㆍ무(武)의 구분이 거의 없었다. 중앙청 과장이 따로 있고, 소위(少尉)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행정업무인력이 곧 전투수행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공자시대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전차전(戰車戰)’ 중심이며, 보병(步兵)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전국(戰國)시대로 내려가면서 전투의 양상은 ‘보병전(步兵戰)’ 중심이 되면서 대규모화되고 장기화되는 양상을 띤다. 공자시대의 사의 기본기는 육예(六藝) 중 ‘사(射)ㆍ어(御)’였다. 그것은 전차전의 특성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전차수레에 타서 말을 모든 것을 ‘어(御)’라 했고, 그 수레에 타서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을 ‘사(射)’라 한 것이다.
「자한」 편에 달항당인(達巷黨人)이 공자를 비판하여 ‘박학이무소성명(博學而無所成名)’이라 한 대목이 나오는데, 나는 이 구문에서 ‘이(而)’를 전ㆍ후로 하여 어떤 문ㆍ무의 대립적 맥락이 감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박학(博學)’은 공자가 추구한 문적인 세계지만, 그것은 사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이 깔려있는 것이다. ‘무소성명(無所成名: 이름을 이룬 바가 없다)’이란 곧 사의 본질인 무인으로서 이름을 날린 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로소 공자의 대답이 구체적으로 이해가 된다.
공자가 이러한 비판을 듣고 문하의 제자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뭘 잡을까? 말고삐를 잡을까? 활을 잡을까? 난 역시 말고삐를 잡아 이름을 날려야지.”
子聞之, 謂門弟子曰: “吾何執? 執御乎? 執射乎? 吾執御矣.”
여기서 공자는 자신도 전차(戰車)몰이의 명수라고 하는, 사로서의 재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육예의 커리큐럼이,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라고 하는 사실은 곧 공문의 사의 집단이 기본적으로 문ㆍ무 통합적 인격체의 집단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예악은 ‘문적’이다. 사어는 ‘무적’이다. ‘서수’는 문무에 공통적인 기본교양이다. 육예는 실제적으로 공문(孔門)에서 그 구체적 커리큐럼이 완성된 것이다. 물론 공자 이전에도 이러한 커리큐럼의 조형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소수 귀족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한, 국도(國都)에 한정된 특수한 학교들의 커리큐럼이었다. 그러나 공자시대에는 그러한 학교제도는 봉건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존립기반을 상실했다. 따라서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공자는 새로운 교육의 커리큐럼과 고매한 정신이상을 정립하였던 것이다. 요새처럼 젊은이들 가운데 상무(尙武)정신이 희박한 가치관 속에서는 육예가 이해되기 힘들다. 전차를 몬다든가[御], 활을 쏜다든가[射]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예악의 인문적 교양과 완전히 동일한 교육적 가치였고, 그러한 교육을 받아 사가 되고, 사가 되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영예였다. 그리고 군공(軍功)에 의하여 작위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군인과 학자가 요즈음처럼 직업적으로 분리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사학의 문제의식 속으로 깊게 진입하여 생각해보아도 사실 이 ‘사’라는 개념은 도무지 명료한 계급적ㆍ분적 규정이 불가능하다. ‘계급(Class)’이다, ‘신분(Status)’이다 하는 말들이 모두 서양사학에서 명료히 규정되고 있는 말들이며 그러한 개념이 도무지 공자시대의 ‘사’의 정확한 외연이나 내연을 그려내기에 적합하질 않기 때문이다. 계급이란 부르죠아혁명 이후에나 쓸 수 있는 개념이며, 신분이란 부르죠아혁명 이전의 중세기적 체제 안에서 쓸 수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는 계급도 아니요, 신분도 아닌 것이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상 첫 머리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맹자와 양혜왕의 “하필왈리(何必曰利)”의 대화 속에서, ‘왕’이 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그 다음으로 ‘대부’가 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그 다음으로 분명하게 ‘사서인(士庶人)’이 하나의 통합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곧 사(士)와 서인(庶人) 사이에 뚜렷한 신분적ㆍ계급적 차별이 없는, 상하이동(upward and downward mobility)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사는 분명히 서인 위에 가장 직접적으로 군림하는 지배계층임이 분명하다. 물론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전쟁이 대규모화 되어 군대편제 속에 서인들의 참여가 필요했고, 군부(軍賦)의 징수가 서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으므로 사와 서인의 구분은 더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혹자는 사(士)의 존재를 지역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사(士)는 씨족 중심적인 성읍(城邑) 국가에 있어서 국성(國城) 안에 사는 국인(國人)이며, 이는 밖의 ‘야(野)’에 사는 야인(野人) 즉 서인(庶人)들과는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도 절대적인 준거를 찾을 수 없다. 사가 현실적으로 국인(國人) 중에서 공경대부(公卿大夫)를 제외한 말단의 관료층으로 이해하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문제는 사가 정확히 세습적인 신분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士: 현실적 관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인간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냐는 것이다. 삼례(三禮) 중 「의례(儀禮)」라는 책 중에는 사관례(士冠禮)니 사혼례(士昏禮)니 사상견례(士相見禮)니,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 사상례(士喪禮), 사우례(士虞禮) 등, 사를 규정하는 매우 까다로운 예식들이 질서 정연하게 기술되어 있다. 의례』의 정확한 성립시기와 맞물리는 문제이지만, 이러한 예에 의하여 규정되는 사의 신분의 성립은 결코 공자시대로 올라갈 수는 없다. 공문의 제자(諸子)들이 모두 이렇게 까다로운 삶의 절차 속에서 규정되는 사의 신분을 획득한 그런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이다【이러한 모든 제반논의와 관련하여 사의 문제와 춘추전국시대의 사회계층의 공간적ㆍ시간적 구조를 퍽 소상하면서도 명료하게 다룬 논문이 있다. 李成九,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講座中國史 I』, 지식산업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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