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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16. 나에게 옳고 그름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알아가라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16. 나에게 옳고 그름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알아가라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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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나에게 옳고 그름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알아가라

 

 

1-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할지니.”
1-16.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이 장은 별다른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학이(學而)편의 첫 장에서 이미 논파한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을 이어 학이편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공자의 일생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데 대한 한 맺힌 생애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한을 새로운 보편적 인()의 간()의 지평으로 확산시켰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한이 있다면, 우리는 그 한을 역으로 내가 이 순간 남의 훌륭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의 내성으로 회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천국에 대한 선포도 그러한 회심(메타노이아)의 한 계기였다. 천국이 이미 인간 사이로 실현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곧 회개의 출발이었다. 회개는 회심으로 개역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구절이 경전석문에 기초한 다른 텍스트에 보면 불환인지불기지(不患人之不己知), 환부지야(患不知也)’로 되어 제일 끝의 ()’이 빠져버린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좋은 해석이 가능하다. 이때 부지(不知)’는 단순히 내가 타인을 몰라본다는 협애한 의미를 떠나, 내가 진정으로 알려지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참으로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것에 대한 냉정한 자기 반성이 요청된다는 뜻이다. 남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내 면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가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인(里仁)14남이 나를 알지 못하 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참으로 알려질 수 있기를 구하라[불환막기지(不患莫己知), 구위가지야(求爲可知也)]’라고 한 뜻과 내면적으로 상 통하게 된다. ‘의 내면적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이 나를 모른다는 것을 탓하기에 앞서 내가 참으로 알려질 수 있는 내면적 실력을 함양하는데 더 주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구하지 말라! 나에게 알려질 만한 그 무엇이 참으로 내재하고 있는가를 반성하자!

 

헌문32에 공자는 말한다: ‘남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치 말라. 자신의 능하지 못함만을 걱정할지니[불환인지불기지(不患人之不己知), 환기불능야(患其不能也)]’. 위령공18에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만을 병으로 여겨야 한다. 남이 자기를 알지 못함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군자병무능언(君子病無能焉), 불병인지불기지야(不病人之不己知也)]”.

 

공자의 사상에 있어서 남과 나의 관계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일차적인 것은 아니다. 남이 단절된 나의 절대적 반성이 선행되어야만 남과의 관계가 항상 보편적 지평에 놓이게 된다. 남과 나가 어떤 공리주의적 수수의 관계에 놓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공이 공자에 끊임없이 미칠 수 없었던 바의 요체였던 것이다.

 

브룩스는 이 장을 양화(陽貨)편 뒤로 옮겼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치 않는다. 브룩스는 논어의 유기적 흐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학이(學而)편은 이 편 나름대로 일관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에서 시작하여 불환인지불기지(不患人之不己知)’로 끝나는 어떤 기승전결을 이 학이편의 편자는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윤언명은 말하였다: “군자는 구하는 것이 나에게 있다. 그러므로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남을 알지 못하게 되면 옳고 그름과 사도와 정도의 분별이 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우환으로 삼는 것이다.”

尹氏曰: “君子求在我者, 故不患人之不己知. 不知人, 則是非邪正或不能辨, 故以爲患也.”

 

 

머우 쫑싼(牟宗三)중국철학의 특질(中國哲學的特質)이라는 명저 속에서 중국철학의 도덕중시성향(重道德性)은 우환(憂患)의 의식에 근원한 것이라고 갈파하고 그것을 불교의 업식(業識)과 기독교의 원죄(原罪)와 대비시켰다. 불교의 고(), 기독교의 죄(), 유교의 환(), 이 세 개념을 잘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종교적 정서의 근원은 공포의식(Dread)에 있다. 그러나 유학에서 말하는 우환은 그러한 공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야ㆍ불()은 인생의 부면(負面)으로 들어갔고 유가는 인생의 정면(正面)으로 들어갔다. 천지의 대 생명이 유로(流露)하는 중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 긍정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 말하는 환()과 관련하여 한번 생각해볼 만하다. 우환이 없으면 대인(大人)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죄를 벗어나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이야말로 도덕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천시자아민시(天視自我民視), 천청자아민청(天聽自我民聽)’이라 하는 것도, 결국 하느님은 내가 보는 것을 통해 보고, 하느님은 내가 듣는 것을 통해 듣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의 도덕적 내면의 반성의 심화만 이 결국 하늘과 인간의 화해(Reconciliation)를 가져온다고 머우는 말한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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