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법치보다 덕치를 말하다
2-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정령으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이 면하기만 할 뿐이요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사람들이 부끄러움이 있을 뿐 아니라 떳떳해진다.” 2-3.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
유가와 법가
유가(Confucianism)와 법가(Legalism)의 정치철학적 입장을 단적으로 대비시키는 대구로서 늘상 인용되는 만고(萬古)의 명언이다. 그러나 유가와 법가가 과연 그렇게 날카롭게 대비되어야 할 성질의 것인지는 우리의 성찰을 요(要)하는 것이다. 유가의 정치철학의 근본이념은 덕치주의(德治主義)며, 이 덕치주의라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 덕성을 감화시키는 것을 그 제1원리로 삼는 것이다. 법가의 정치철학의 근본이념은 법치주의(法治主義)다. 이 법치주의는 덕치주의의 이상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도무지 객관적 기준이 서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감화’니 ‘감복’이니 ‘심복’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은 도무지 인간의 주관적 내면의 사건이래서 객관적인 통치이념으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객관적인 치세의 원칙(the objective governing principle)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뭘까? 법가들은 이것을 ‘법(法, Law)’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법으로 다스리게 되면 통치의 객관적 기준이 설 수 있고, 법을 적용하는 자는 부담이 없고 법을 적용받는 자도 원한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법처럼 좋은 게 없는데 왜 법을 외면하고 굳이 인의예지 따위의 애매한 도덕개념을 운운하냐는 것이다.
법가(法家)의 논의도 현실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매우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잘 씹어 생각해보면, 아무리 법가의 논의가 정당하다고 해도, 아무리 법이라는 객관적 질서가 없이는 복잡다단한 인간세상의 질서의 대강을 잡기가 어렵다고 해도, 역시 법으로만은 인간 삶의 궁극적 질서를 세울 수 없다고 하는 유가의 논의는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는데 외면할 수 없는 제1의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마는 궁극적으로 법을 위해서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법의 궁극적 존재이유는 인간의 내면적 덕성의 감화에 있다고 하는 유가의 주장이 역시 인간세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인간이 무엇 때문에 질서를 지켜야 하는가? 그 궁극적 소이연에 ‘인간다움’을 도외시한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 ‘인간다움’을 공자는 ‘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요, 그 인에 의한 인정(仁政)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서구라파 계몽주의철 학을 집대성한 임마누엘 칸트도 법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인간세의 질서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선의지(ein guter Wille)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법의 성 립근거라 할 수 있는 자의(恣意, Willkür)간의 조화로만은 달성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우리 일상생활 주변에서 아주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한국사람들은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경찰과 시비가 붙게 되면 기나긴 언쟁을 하기가 일쑤고 자칫하면 감정적 격투로 비화하는 것이 다반사다. 한국사람들의 일반적 정조는 교통 위반을 했을 때, 그 교통위반의 사태를 법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법이전의 사태, 즉 그 위반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당사자들, 즉 고발자와 피고발자 사이의 인간적 해결로서 그 사태를 마무리짓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것을 매우 전근대적인, 준법정신이 박약한 소시민의 악행처럼 간주해왔지만 그 행위의 이면을 잘 분석해보면 그러한 행태는 우리사회의 가치관의 전면적 사태와 관련되어 있음을 간파할 수가 있다.
차를 몬다는 행위 자체가 교통규약의 위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 에게는 실수는 있게 마련이며, 교통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의 한 방편인 이상 상황에 따라 교통방식의 변통이라는 것은 불가피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교통규약은 사회질서로서 엄격히 요청되는 것이며, 그것의 준수는 시민사회의 불가결한 정신이다. 그러나 그러한 법규의 존재는 끊임없이 위반상황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교통행위의 변증법적 안티테제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떤 절대적인 선(善)으로서 군림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멘탈리티는 바로 교통위반이라는 불가피한 사태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법적인 죄를 시인하기보다는 법 이전의 사태로 돌아가 어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중재(arbitration)를 요청하는 것이다. 물론 교통법규를 위반했을 때, 법규에 따라 벌금을 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벌금은 궁극적으론 국가의 예산을 불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법규의 위반에 대한 위협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그러한 벌금의 효용성은 국가에게 내나 교통경찰의 사비로 지출되나 똑같다고 분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국가라는 추상적 권력체제에 대한 불신감 내지는 소원감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의 일반적 정서는 아직까지도 교통법규를 위반했을 때, 교통경찰과 실 랑이를 치면서도, 비굴한 듯 슬슬 빌면서도, 몇 만 원으로 쓱싹 해버리는 해결 방식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유교문화의 뿌리 깊은 가치관과 관련되어 있다. 법(法)이라는 추상적 기준이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중재에 의하여 인간세의 분쟁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동네에서 무슨 분쟁이 일어났을 때 관아로 직접 달려가기보다는 동네의 권위 있는 할아버지나 촌장의 도덕적 중재를 요청하는 것이 우리가 몇 천 년을 살아온 관습의 방식이었다. 이것을 한국인들은 아직도 하루아침에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상황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무엇 때문에 교통경찰과 시비를 벌이고 앉아있을 참이냐? 교통위반? 딱지를 떼시라우요! 몇초후에 딱지 들고 후훅 다시 자동차 핸들을 잡고 일말의 회한의 기색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젊은이들. 과연 이런 젊은이들이 더 준법정신이 뛰어난 근대사회 시민이라고 할 것인가? 국가여! 잘 한번 생각해 보시라! 딱지 떼고 벌금물고 시비에 일말의 정력을 쏟지 않는 추세가 더 강화되면 우리 사회는 분명 ‘법적’ 사회로 이행 되고 있는 것이다.
유교적 측면이 강함 | 법가적 측면이 강함 |
교통경찰과 해결 | 딱지로 만족 |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유교적 사회는 유교적 사회 그 나름대로 문제가 많고, 법적 사회는 법가적 사회 그 나름대로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어느 한 면에서 인간세를 난도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치자(治者)들이여! 인간세의 복잡성을 잘 이해하시고나 덤비시게!
덕(德)과 예(禮)
‘도지이정(道之以政)’의 ‘도(道)’는 ‘치리(治理)’의 뜻이 있고, ‘인도(引導)’의 뜻이 있다. 황본ㆍ정평본에는 ‘도(道)’가 ‘도(導)’로 되어있다. ‘정(政)’을 고주(공안국)는 ‘법교(法敎)’라 하였다. 정법(政法), 정령(政令)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신주는 ‘법제금령(法制禁令)’이라 하였다. ‘제(齊)’는 가지런히 한다, 정돈한다, 뒷처리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법가적 법의 개념은 민법(民法)이 아닌 형법(刑法)이었다. 다시 말해서 법을 통해 민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타부의 강요며, 통치자의 권익을 위한 질서의 강압이며, 형벌의 강제였다. 그러므로 정령(政令)으로 이끈 것은 형벌(刑罰)로 정돈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면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면(免)’이라는 글자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형벌을 모면키만 하는 타율적 행위를 말한다. 행위의 자율성이나 도덕적 의지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치(無恥)’ 즉 수치를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법령에 의하여 질서가 잘 잡혀지는 사회라 할지라도 그 사회의 성원에게 수치감이 없다면 그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맨하탄을 가볼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그 사회 질서가 대체적으로 폴리스의 강력단속에 의하여만 유지되고 인간이 점점 수치감을 모르고 뻔뻔스러워져만 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데, 이것은 미국사회가 퓨리타니즘(Puritanism) 이래로 축적해온 그 나름대로의 도덕적 기반을 상실하고 근원적인 해체로 진입하고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바로 우리사회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로 적용되어야 할 우려일 것이다.
동양사회의 전통적 미덕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수치’라는 한 마디인 것이다. 우리문화는 ‘수치의 문화’인 것이다. 사회의 성원이 서로간에 ‘수치’를 아는 사회, 서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사회, 그것이 바로 유교가 포기할 수 없는 인간학이다. 그래서 말한다.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써 가지런히 하면 유치차격(有恥且格)할 것이다【정주한간본에는 ‘恥’가 ‘佴’로 되어있다. 같은 글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덕(德)이 정(政)과 대비되고, 예(禮)가 형(刑)과 대비되었다는 것이다.
정(政) | ↔ | 덕(德) |
형(刑) | ↔ | 예(禮) |
고주(古注)에서 덕(德)을 ‘도덕(道德)’이라 훈(訓)한 것을 다산은 심하게 질책한다. ‘도덕(道德)’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 무의미하고 애매모호하기만 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덕(德)은 구체적으로 ‘효(孝)ㆍ제(弟)ㆍ자(慈)’와 같은 구체적 덕목을 일컫는 것이라고 못박는다[德者, 篤於人倫之名, 孝弟慈是已]. 『대학(大學)』의 ‘명명덕(明明德)’의 명덕(明德)도 효(孝)ㆍ제(弟)ㆍ자(慈)일 뿐이라고 명시한다. 다산은 애매한 일반개념 대신에 고경에 나와있는 구체적 덕목을 가지고 그 뜻을 상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형(刑) 대신 예(禮)로써 가지런히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상일까보냐마는 물론 그것도 결코 쉬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예(禮)를 형(刑)과 대비시켰다는 것을 보아도, 예(禮)가 과거 유교사회에서는 구속력을 갖는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격(格)의 의미
‘유치(有恥)’는 쉽게 해석된다. 그러나 다음의 ‘격(格)’자는 고전에서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된다. 주희는 이 격(格)자를 항상 ‘지(至, 이른다, to reach)’로 해석한다. 그것은 그가 『대학(大學)』의 ‘격물(格物)’을 해석할 때부터 일관된 이해의 구조였다. 그렇게 되면 ‘격(格)’은 ‘선함에 이르게 된다[至於善]’는 뜻이 될 것이다.
고주(古注)는 ‘격(格)’을 ‘정야(正也)’로 풀었다. 그리하면 ‘바르게 한다(to correct)’는 뜻이 된다. 혹은 ‘바르게 된다’는 자동사의 뜻으로 풀어도 된다. ‘바름으로 돌아간다[歸正]’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격(格)’이라는 글자의 원의는 반듯반듯한 격자[格子] 창틀과 같은 이미지를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희설 보다는 고주의 입장이 원의에 가깝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다산은 고주를 맹렬히 배척하고 주자를 배척하지는 않는 듯한 제스츄어를 쓰면서 자기의 설을 편다. 격(格)은 감격(感格)의 뜻이라고 한다. 『상서(尙書)』 「요전(堯典)」 1의 ‘격우상하(格于上下)’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위로는 천심(天心)을 감동시키고 아래로는 민심(民心)을 감동시킨다는 뜻이라고 한다[案, 格之爲字, 首見于堯典, 格于上下者, 謂上感天心, 下感民心也]. 그러니까 다산은 ‘격(格)’의 핵심적 의미를 ‘감동’으로 푸는 것이다. 혹자는 정현(鄭玄)이 격(格)을 래(來)로 푼 것에 근거하여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느끼어 군주에게 심복 하여 돌아온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카이즈카 시게키貝塚茂樹),
『예기』 「치의(緇衣)」편에는 이 『논어』의 구절과 상응되는 공자의 말이 실려있다. 최근 곽점(郭店) 분묘에서 출토된 간문(簡文) 중에, 바로 이 『예기』 「치의」 편이 들어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장서(章序)는 출입(出入)이 있고, 또 금본(今本)의 제1장, 제16장, 제18장이 없지만 그 외의 내용은 매우 정갈하게 실려있는 것이다. 제2장에 ‘치의(緇衣)’라는 말이 나오며 그것으로 편명이 결정된 것이므로 금본의 ‘자언지왈(子言之曰)’로 시작되는 제1장은 후대의 첨가임이 밝혀졌다. 죽간본은 바로 제2장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치의」편은 전편의 내용이 일관되게 치자(治者)가 백성을 어떻게 대할 때 덕정(德政)의 공적이 있게 되는가 하는 중민사상(重民思想)의 톤이 깔려있다. 각 장이 예외 없이 자왈(子曰)로 시작되는 공자의 말이 먼저 나오고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이 있으며, 마지막에 그 내용에 상응하는 『시경』이나 『서경』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짓는 매우 한결같은 양식을 취하고 있다. 곽점(郭店) 죽간의 출토로 인하여 『중용(中庸)』, 「표기(表記)」, 「방기(坊記)」, 「악기(樂記)」의 제편과 「치의(緇衣)」의 성립연대는 비슷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이 문헌들이 최소한 BC 300년 이전에는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위정 편의 성립도 치의의 성립연대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해볼 수도 있다는 가설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위정편의 성격이 「치의」편과 같이 단일한 양식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에, 「치의」편과 동 시대에 성립한 문헌의 파편이 「위정(爲政)」편에 삽입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치의」편의 문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대저 백성이란 덕으로써 가르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그들은 격심(格心)을 가지게 된다. 정령으로써 가르치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은 둔심(遯心)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백성의 임금이 되는 자는 자식과 같이 백성을 사랑하면 백성이 가깝게 따르고, 신험있는 말로써 그들을 결속시키면 백성은 배반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경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임하면 백성은 손심(孫心, 遜心)을 갖게 된다.”
子曰: “夫民敎之以德, 齊之以禮, 則民有格心; 敎之以政, 齊之以刑, 則民有遯心. 故君民者, 子以愛之, 則民親之; 信以結之, 則民不倍; 恭以涖之, 則民有孫心.”
이 문장을 보면 ‘도(道)’가 ‘교(敎)’로 바뀌어 있고, 정형(政刑)과 덕예(德禮)의 구절의 선후가 바뀌어 있을 뿐 그 내용이 동일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형(政刑)의 결과로서 백성은 ‘둔심(遯心)’을 갖게 되고, 덕예(德禮)의 결과로서 백성은 ‘격심(格心)’을 갖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논어』 | 「치의」 | |
정형(政刑) | 민면이무치(民免而無恥) | 둔심(遯心) |
덕예(德禮) | 유치차격(有恥格且) | 격심(格心) |
‘둔심(遯心)’이란 ‘숨는 마음’ ‘피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면(免)’에 대한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격심(格心)’은 ‘둔심(遯心)’과 대구를 형성하는, 그 뜻이 반대되는 맥락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둔심이 ‘숨는, 피하는 마음’이라면 격심은 자신을 정정당당하게 드러내는 마음, 즉 ‘떳떳한 마음’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때 격(格)이란 창틀의 격자(格子)와 같이 반듯반듯하고 질서가 있는 모양이라고 하는 함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같은 「치의」편 19장에 공자의 말로서 ‘격(格)’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간본에는 18장).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의 말에는 반드시 구체적인 신험이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반드시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그가 살아나가면 그 뜻을 빼앗을 수가 없고, 그가 죽어도 그 이름을 빼앗지 못한다. ……”
子曰: “言有物而行有格也. 是以生則不可奪志, 死則不可奪名. ……”
여기서 ‘언유물(言有物)’의 물(物)은 말에 대한 구체적인 ‘물징(物徵)’을 말하는 것이다. 말에 대응하는 물질적 사태를 말하는 것이다. 즉 말이 허황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유격(行有格)’의 격(格)은 ‘질서’나 ‘원칙’ 같은 것이다. 격자(格子)와 같이 반듯반듯한 어떤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격(格)이라는 글자는 자의(字義)를 보아도 나무가 들어가 있으며 그러한 격자의 뜻이 있다. 따라서 ‘격심(格心)’은 그렇게 떳떳하고, 질서 있으며, 원칙이 서있는 마음을 지칭 한 것이 분명하다. 『논어』 본문의 ‘유치차격(有恥且格)’에 대한 해설로서 『예기』 「치의」의 구절처럼 좋은 관련 사례가 없다.
다산은 이 「치의」편 구절을 자신의 감격(感激)의 논리에 따라 일관되게 해석한다.
내가 생각키에, 격심이란 감화되는 마음이며, 둔심이란 죄만을 피하려는 마음이다.
案, 格心, 謂感化之心; 遯心, 謂逭罪之心.
다산의 해석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 가지 부언할 것은 이 ‘격심(格心) - 둔심(遯心) - 손심(孫心)’의 문장이 곽점죽간본(郭店竹簡本) 「치의(緇衣)」편에는, 금본(今本)에 제3장으로 되어있는 것과는 달리, 제12장에 나오고 있는데 그 문자도 약간의 출입(出入)이 있다. 현재 『예기』의 「치의」편과 곽점죽간본의 「치의」편은 동일편서(同一篇書)의 부동전본(不同傳本)으로 간주되는 것인데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죽간본이 예기금본을 앞서는 조형으로 판정이 되고 있다. 물론 금본으로써 죽간본의 오전(誤傳)을 바로잡아야 할 대목도 있다. 곽점본에는 격심(格心)이 ‘懽心’으로 되어 있는데, ‘懽’은 학자들에 따라 ‘歡환’으로 읽기도 하고, ‘勸권’으로 읽기도 한다. 환심(歡心)은 기뻐하는 마음의 뜻이고, 권심(勸心)은 권면하는 마음, 즉 백성들이 치자의 덕치에 부응하여 힘써 일하는 모습을 뜻하고 있다. 둔심(遯心)의 눈은 ‘’와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학자에 따라 ‘免면’으로 읽기도 하고 ‘遁둔’으로 읽기도 하고 ‘欺기’로 읽기도 한다. 면심(免心)이면 모면하기만 하는 마음이 될 것이고, 둔심(遁心)이면 피하는 마음이 될 것이고, 기심(欺心)이면 속이는 마음이 될 것이다. 큰 뜻으로는 대차가 없다. 마지막 손심(孫心)은 ‘愻心손심’으로 되어 있다. 손심(愻心)은 손심(遜心)과 같은 것으로 겸손하게 순종하는 마음이다. 「치의」편과 같이 발견된 곽점의 유가계열의 문헌에서는 인간의 ‘심(心)’이라는 현상에 대한 광범한 논의가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후대의 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성(性)’에 대하여 낮추어 말하는 것도 아니고, ‘정(情)’과 구별되는 어떤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후천적으로 습득되어지는 것이며 정감의 도야에 따라 형성되는 그 무엇이다. 성선(性善), 성악(性)을 운운하는 어떤 선천적 규정이 전무하다. 따라서 백성의 마음은 이러한 치자(治者)의 치세태도에 따라 가변적으로 형성되는 것일 뿐이라는 매우 소박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곽점죽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충격은 우선 다음의 몇 가지 인상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예기』를 한대(漢代)에나 편찬되었던 서물로서 안일하게 단정지었던 모든 고증학적 논의가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버리게 되었다. 『예기』는 분명하게 BC 300년 이전에, 어쩌면 맹자 이전까지도 소급될 수 있는, BC 4세기에는 이미 확고한 조형이 있었던 서물로서 재등장케 된 것이다. 이에 따른 전국시대 사상 풍토의 재평가는 실로 거대한 문제가 된다.
둘째, 「치의」편의 매우 정돈된 죽간 모습을 쳐다보면서, 우리는 이미 BC 4세기에는 공자의 말씀이 주제별로 하나의 편으로 치열하게 편집되어 있었다는 물리적 사실을 정확히 용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치의」편과 같은 성격의 공자어록이 이미 BC 4세기에는 쓰여진 기록으로서 상당히 많이 유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케 하는 것이다.
셋째, 「치의」편을 통해서도 우리는 공자의 단편적 언급이 맹자의 체계화된 중민사상(重民思想)으로 발전되어 가는 경로를 더듬을 수 있다. 「치의」가 결코 맹자 이후의 서물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넷째, 공자는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을 가치적으로 규정하는 인성론이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성의 선하다든가 악하다든가 하는 규정성이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성상근(性相近), 습상원(習相遠)’을 말했을 뿐이고, 호학(好學)의 권면을 통해 상황상황에 따라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공자의 인(仁)의 째즈에서 맹자의 성선(性善)의 이론으로 가는 과정을 곽점죽간ㆍ상박죽간(上博竹簡)은 우리에게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후학들 이 공독(攻讀)하여야 할 분야이다.
소정묘 주살 사건의 진실
그런데 이 「위정(爲政)」편의 ‘덕예지치(德禮之治)’의 주장과 관련하여, 공자의 생애에서 아주 상치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어떤 사건이 있다. ‘소정묘(少正卯) 주살’ 사건이 그것이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12의 이와 관련된 문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정공 14년, 공자의 나이 56세, 대사구라는 직책을 맡아 수상의 직무를 섭정하는 일을 행하게 되었으니 그 얼굴에는 희색이 가득했다. …… 그리고 얼마 아니 있어, 노나라의 대부로서 국정을 어지럽히는 소정묘를 주살하였다. 이렇게 국정을 다스리기 시작한 후 3개월이 지나자,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그 가격을 속이지를 않았다. 남녀가 길을 갈 때에도 따로 따로 질서 있게 걸었으며, 길거리에 재물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어 졌다. 그리고 사방에서 성읍내로 몰려드는 객손들이 성읍의 관리들에게 빽 을 쓰는 일이 없이 모두 충분한 대접을 받고 다시 제 갈 길로 돌아갔다. 제 나라 관리들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공자가 정치를 계속하게 되면 노나라는 반드시 패자가 될 것이다. ……”
定公十四年, 孔子年五十六, 由大司冦行攝相事, 有喜色. …… 於是誅魯大夫亂政者少正卯. 與聞國政三月, 粥羔豚者弗飾賈, 男女行者別於塗, 塗不拾遺, 四方之客至乎邑者不求有司, 皆予之以歸. 齊人聞而懼, 曰: “孔子爲政, 必霸 ……”
자아! 이 사마천의 세가 기록이 공자의 생애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면 우선 우리는 이 「위정(爲政)」편의 공자의 주장과 관련하여 이러한 사실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리고 만다. 소정 묘(少正卯)라는 대부(大夫)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공자가 대사구의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그 지위의 권력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은 지 며칠도 안 되어 급격하게 소정묘(少正卯)를 주살(誅殺)해버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정형(政刑)의 엄벌주의의 처사며 도저히 덕예(德禮)의 인정(仁政)으로 간주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인정(仁政)은 최소한, 관용론(leniency)을 내포해야 하기 때문이 다. 뿐만 아니라 공자의 치세의 내용을 묘사한 국민들의 모습을 보면 그것은 유가적이라기보다는 법가적 엄형주의 때문에 타율적으로 법제적인 질서가 잘 지켜지고 있는, 마치 상앙(商鞅, 상 양, Shang Yang, ?~338 BC)의 변법(變法)이 행하여지고 있는 사회의 모습과도 같은 스산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길거리에 돈이 떨어져도 줍지 않고 남녀가 유별(有別)있게 걸어다니고, 장사가 가격을 속이지 않고, 관리들이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얘기가 덕치(德治)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문맥상 분명히 소정묘(少正卯)의 주살이라고 하는 엄형(嚴刑) 의 사건과 연이어 묘사되고 있다는데 그 법칙(法治)의 내음새가 강하게 풍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모습은 외방(外邦)에서 평가하기를 ‘필패(必霸)’란 말로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즉 공자는 엄형주의에 의한 변법(變法)주의자이며 결국 패도(覇道)를 지향하는 현실정치인으로서 그의 대사구 치세 기간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염약거(閻若璩)를 위시한 청대의 고증가 제씨(諸氏)들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사태의 날조일 뿐이라고, 「세가」의 기록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정묘 주살사건은 어디까지나 공자의 삶의 주요 이벤트로서, 그리고 ‘거로(去魯)’와 관련된 공자의 삶의 한 고비로서 역사적으로 이미 깊게 인식되어온 해석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소정묘(少正卯)의 이야기는 『논어』에 나오는가? 그것은 『논어』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에 나오는가? 그것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순자(荀子)』 「유좌(宥坐)」 2편이며,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 『설원(說苑)』, 『백호통(白虎通)』, 『논형(論衡)』, 『공자가어』 등에도 약간의 문자의 출입은 있어도 추상열일(秋霜熱日)과도 같은 무단적 공자상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맥락으로 기재되어 있다. 문헌적으로 우리가 이 소정묘 주살설화를 추구해 들어가 보면 이 분명 『순자(荀子)』라는 문헌에서 처음으로 형성된 것이며 그 이후 문헌은 이 『순자(荀子)』의 설화를 전승한 것이며, 그 전승이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정리되어 수록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순자』의 소정묘 주살설화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노나라의 재상직책을 섭정하는 사람(수상서리)이 되어, 조정에 나간 지 겨우 7일만에 소정묘를 주살하였다. 공자의 제자가 나아가 여쭈었다: “소정묘라는 사람은 그래도 노나라의 대부로서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선생님께서 정치를 하시자마자 다짜고짜 그를 주살하심은 아무래도 좀 실수가 아닐까요?” 공자가 말하였다: “그래 게 좀 앉거라! 내가 그 자초지종 연고를 너에게 말해주마. 사람에게 증오스러운 것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우선 도적질은 그 속에 들지를 않는다. 그 첫째가 마음이 사물에 통달해 있으면서도 음험한 것이요, 둘째는 행실이 한 곳으로 치우쳐 있으면서 완고한 것이요, 셋째는 말하는 것이 모두 거짓인데도 구변이 썩 좋은 것이요, 넷째는 추악한 것들만 기억하면서도 박식하게 보이는 것이요, 다섯째는 비리만을 따라가면서도 겉으로 윤기가 자르르 도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 다섯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있어도 그놈은 군자의 주살을 모면키 어려운 것이어늘 소 정묘는 이 다섯 가지를 모두 겸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텃세를 부리면서 불량배를 모아 반역의 무리를 짓기에 충분하고, 교활한 언변으로써 사악함을 수식하여 대중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고, 억센 배짱으로 틀린 것을 오히려 바르다고 강변하고 홀로서기에 충분하다. 이런 놈이야말로 소인들의 걸출한 영웅이다. 이런 놈은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야! ……”
孔子爲魯攝相, 朝七日而誅少正卯. 門人進問曰: “夫少正卯, 魯之聞人也. 夫子爲政而始誅之, 得無失乎?” 孔子曰: “居! 吾語女其故. 人有惡者五, 而盜竊不與焉. 一曰心達而險, 二日行辟而堅, 三曰言僞而辯, 四曰記醜而博, 五曰順非而澤. 此五者有一於人, 則不得免於君子之誅, 而少正卯兼有之. 故居處足以聚徒成群, 言談足以飾邪營衆, 强足以反是獨立. 此小人之桀雄也. 不可不誅也. ……” [이하 『순자(荀子)』 원문은 남송(南宋) 대주간본(臺州刊本)을 저본으로 한 집영사(集英社) 전석한문대계(全釋漢文大系) 카나야 오사무(金谷治) 본(本)에 의거함.]
그런데 이 순자의 소정묘 주살설화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매우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공자가 노나라의 섭상(攝相, 수상서리)이 되어 조정에 나간 지 불과 7일만에 노나라의 명망이 높았던 소정묘라는 사람[魯之聞人]을 사형에 처했다는 아주 급진전의 긴박한 사태의 역사적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주변의 평이 좋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상황이 제자의 질의를 통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정권을 잡자마자 곧바로 그렇게 권력을 휘두른 사태에 대하여, 실정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던 주변의 여론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소 정묘를 사형에 처했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사형의 죄목, 다섯 가지를 열거하기 전에 갑자기, ‘도절불여언(盜竊不與焉)’이라는 구문이 어색하게 삽입되어 있다. 도둑질은 그 죄목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갑자기 뭔 소리인가? 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집단을 ‘도(盜)’로 규정했던 본서 서막의 논의를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공자시대의 도(盜)에 대한 관념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도둑’ 이상의 복합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즉 주살의 죄목에 해당되는 다섯 가지의 악덕은 최소한 ‘도둑질’보다는 더 사악한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기의 ‘도절불여언(盜竊不與焉)’이라는 삽입구문은 『순자(荀子)』 「비상(非相)」편의 논의와 같은 연계선상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는 어떤 설화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비상(非相)」(관상술을 배격함)편은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다.
사람의 변론에는 소인의 변론이 있고, 사군자의 변론이 있고, 성인의 변론이 있다. …… (소인의 변론은) 그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지만 도무지 조리가 없고, 직접 일을 시켜보면 거짓투성이며 실제 공적이 없으며, 위로는 명철한 임금님을 따를 길이 없고 아래로는 백성을 질서 있게 화합시킬 능력이 도무지 없다. 그러면서도 입에 붙은 말들은 그럴싸하게 조리가 있어 보이며, 거절하고 승낙하는 것이 절도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뭇 사람들에게는 위대하고 우러러 추앙되는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놈들을 간악한 소인의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왕이 일어서게 되면 우선 이런 놈들을 주살시켜야 하는 것이다. 도둑놈들은 그 다음의 일이다. 도둑놈들은 감화시키면 마음이 변할 수 있지만 이런 간악한 소인배들은 도무지 변할 길이 없는 것이다.
有小人之辯者, 有士君子之辯者, 有聖人之辯者. …… 聽其言, 則辭辨而無統; 用其身, 則多詐而無功. 上不足以順明王, 下不足以和齊百姓. 然而口舌之均, 噡唯則節, 足以爲奇偉偃却之屬. 夫是之謂姦人之雄. 聖王起, 所以先誅也. 然後盜賊次之. 盜賊得變, 此不得變也.
여기서 우리는 명백하게 ‘성왕기(聖王起), 소이선주야(所以先誅也)’라고 하는 「비상(非相)」편의 논의가 「유좌(宥坐)」편의 소정묘주살로 실현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여기서 암암리 ‘공자(孔子) = 성왕(聖王)’이라는 도식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적(盜賊)’은 가르쳐서 감화시키고 변하게 할 수 있지만, 이런 간악한 무리는 주살시키는 것밖에는 별 다른 도리가 없다는 논리가 관철되어 있다. 분명 우리는 『순자(荀子)』 「비상」편의 저자와 「유좌(宥坐)」편의 소정묘 주살설화의 저자가 동일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논리적 주제의식으로나 문체나 단어의 선택으로 입증할 수가 있다. 그 동일인이 ‘순자’라는 역사적 인물이라고 한다면, 순자는 왜 그다지도 ‘간인지웅(姦人之雉)’(「비상」편) 혹은 ‘소인지걸웅(小人之桀雄)’(「유좌(宥坐)」편)의 주살(誅殺)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일까?
우선 『순자』 속의 공자가 열거하고 있는 소정묘(少正卯)의 다섯 개의 죄목을 캐어보자!
1 | 심달이험(心達而險) | 소인지걸웅(小人之桀雄) |
2 | 행벽이견(行辟而堅) | |
3 | 언위이변(言僞而辨) | |
4 | 기추이박(記醜而博) | |
5 | 순비이택(順非而澤) |
이 다섯 개의 죄목, 험(險, 음험하고), 견(堅, 완고하고), 변(辨, 달변이고), 박(博, 박 식하고), 택(澤, 번지르하다)이라는 죄목은 우선 그것이 구체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공자라는 노나라의 역사적 개인을 둘러싼 어떤 실제적 상황에서 출발한 사건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 이 입증되는 것이다. 사실 외면적으로는 그 실제상황을 모르는 이상 그 죄목만으로는 도무지 왜 사형이라는 중형에 처해져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순자의 어떤 역사적 문제의식에서 나온 추상적 사태를 공자와 소정묘라는 가상적 캐릭터를 통해 구현시킨 설화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든다. 취도성군(聚徒成群: 반역의 무리를 짓다)하고 식사영중(飾邪營衆: 사특한 것을 수식하여 대중을 현혹한다)하며 반시독립(反是獨立: 올바른 도리를 뒤집고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다)하는 어떤 사태도 그것은 가능태일뿐 소정묘의 역사적 반역행위의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순자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그가 구상하는 왕자(王者)의 정치제도(王制)에 관하여 매우 명쾌한 글이 있다(「왕제(王制)」편).
어떤 이가 정치를 행하는 방법을 물었다. 순자는 이에 대답하였다. 현인이 나 능력 있는 자가 있으면 신분이나 지위를 불문하고 바로 기용하며, 어리석은 자나 무능한 자는 지체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파면시키며, 극악한 원흉은 가르치려하지 말고 즉시 죽여 버리며, 평범한 일반 민중들은 정령이 나 형벌로 다스리지 말고 감화가 되도록 이끌어 나간다. …… 이것이 곧 왕자의 정치이다.
請問爲政. 曰, 賢能不待次而擧, 罷不能不待頃而廢, 元惡不待敎而誅, 中庸雜民不待政而化, …… 王者之政也.
다시 말해서 중용(中庸)【평범한 일반대중, 다른 판본에는 ‘중용민(中庸民)’으로 되어있다】에게는 정형(政刑)에 의존치 않는 덕치(德治)의 원칙으로 다스리지만 원악(元惡)【신분이 높은 자로서 부패한 자들】은 즉각 주살(誅殺)시키는 법가적 엄벌주의를 적용하는 것이 곧 왕도(王道)의 첩경이라는 것이다. 소정묘는 이러한 원악(元惡)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지금 순자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공자라는 역사적 인간에 대한 사상적 로얄티가 아니다. 그의 관심은 통일제국의 완성이다. 전국(戰國)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왕제(王制)의 출현이다. 이 새로운 왕제는 강력 한 중앙집권적 군주의 출현이다. 이러한 강력한 전제군주의 출현은 곧 지방의 토호들을 제압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순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자라는 역사적 인간의 행위로서 구현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소정묘(少正卯)’라 는 말 자체가 순수한 날조임이 드러난다. 순자는 이러한 단어의 선택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소정묘’라는 캐릭터의 부정적 이미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정(少正)’이란 관명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것은 ‘정의를 결여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묘(卯)’는 ‘모(冒)’와 상통하며 ‘복폐(覆蔽)’의 의미가 된다. 즉 ‘사악함에 덮여버린 인간’이라는 뜻이다. 소정묘는 ‘정의를 결여한, 사악함에 빠진 인간’이라는 의미이며, 이것은 바로 「왕제(王制)」편에서 말하고 있는 ‘원악(元惡)’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참견(參見) 와타나베 타카시(渡邊卓), 『고대중국사상의 연구(中國思想の硏究 - 공자전의 형성 孔子傳の形成』, 東京: 創文社, 1973】.
여기서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결국 순자사상의 한 구현체계로서 공자의 이미지가 소정묘 주살설화를 통하여 구사되었다는 사실이다. 공자는 단순히 역사적 공자(Historical Confucius)일 뿐만 아니라, 후대의 학파의 관점에 의하여 해석되어진 상(像)들의 총화이기도 할 것이다. 순자(荀子)는 「왕제(王制)」를 통하여 예형병용(禮刑倂用)의 사상을 펴고 있는 것이다. 덕예(德禮)는 일반백성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정형(政刑)은 고급관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원악(元惡) | 부패한 고급관리 | 엄형주의의 적용 |
중용(中庸) | 평범한 일반백성 | 예교주의의 적용 |
공자는 이러한 순자의 왕제의 정신을 구현하는 인격체로서 소정묘를 주살하고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았던 것이다. 최소한 순자의 설화 속에서의 공자는 그러한 순자의 케리그마를 구현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순자의 픽션을 사마천은 구태여 「세가」라는 공자의 정전에 삽입시켜야만 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사마천의 문제의식을 또 다시 읽어 내야 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시대는 한무제의 시대였다. 새로 시작한 제국문명이 새로운 기틀을 잡기 시작하는 왕성한 시기였다. 그리고 제국의 기틀이 확립되자 한제국은 파출백가(罷黜百家)하고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유교의 막연한 덕치(德治)주의만으로는 사회의 기강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시 순자(荀子)적인 예형병용(禮刑倂用)의 복합적 노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순자가 원악(元惡)의 주살(誅殺)을 부르짖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지겨웁도록 끈질긴 역사의 보수세력, 반동세력의 척결에 관한 문제였다. 음험하고 완고하고 말 잘하고 인맥관리 잘하며 박식한 체하며 윤기나게 살고 있는 보수세력, 특히 관료세력의 척결에 관한 문제였던 것이다. 사마천은 이러한 척결의 과감한 이미지를 덕치주의 유교(儒敎)의 창시자인 공자라는 권위로운 상(像)속에 염색시킴으로써 암암리 한무제시대의 원악(元惡)에 대한 사무친 한(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소정묘의 주살은 사마 천의 공자케리그마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설화나 신화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과의 부합의 여부에서 긍정되거나 부정되는 것으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여태까지 중국고전을 읽는 모든 태도들이 청대의 고증학자들로부터 오늘날의 식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러한 긍정, 부정의 주장으로 일관되어 있는 것이다. 설화는 긍정될 수도 없고 부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해석되어질 뿐인 것이다. 여태까지 우리에게는 이러한 해석의 틀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논어』가 제대로 읽히지 않은 것이다.
「위정(爲政)」편의 이 장은 아마도 순자에 의하여 형성된 해석이 법가적으로 윤색되어가는 전국시대의 공상에 대한 강력한 반발로서 성립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아폴로제틱(apologetic, 변명의)한 성격이 도지이정(道之以政)과 도지이덕(道之以德)의 이원적 대비의 틀을 형성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최근 죽간의 발굴은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금(今)의 문헌들이 모두 후대에 날조된 것이라는 의고풍의 무차별한 문헌비평을 재고하게 만든다. 전국시대의 아폴로지가 반영되었을 수도 있지만 역사적 공자의 말씀이 전송되어 문헌화되어간 전승의 가능성을 무자비하게 묵살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소정묘 주살의 진상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역사적 공자의 행위 속에 이미 그러한 법가적 가치관이 내재해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덕치주의적 전범을 구현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21세기의 공자상은 무한히 다양한 가설을 포용한다. 본 장의 내용을 역사적 공자의 초기 로기온 자료에 가까운 어떤 공자사상의 강령으로 보는 키무라의 설도 오히려 21세기에는 설득력을 획득해가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야말로 중국철학의 또 하나의 ‘백화노방(白花怒放)’ 시대가 아닐까 한다.
‘道’는 ‘도(導)’로 발음한다(성조가 달라진다). 이하 용례도 같다. ○ ‘도(道)’는 ‘인도(引導)’와 같으니, 그것은 무엇을 솔선수범하여 앞에서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정(政)’이란 법제(法制), 금령(禁令)을 일컫는다. ‘제(齊)’는 하나로 한다, 즉 가지런히 질서있게 한다는 뜻이다. 솔선수범하여 이끌어도 따르지 않는 자는 형벌을 가하여 가지런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면이무치(免而無恥)’는 구차스럽게 형벌은 면해도 부끄러움이 없음을 일컫는 것이니, 비록 감히 악한 짓을 하지는 못해도 악한 짓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직 없어지지는 아니 한 것이다. ‘예’라는 것은 제도(制 度), 품절(品節)이다. ‘격(格)’이라는 것은 도달한다는 뜻이다. 몸소 행하여 솔선수범하여 이끌면 백성들은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가슴이 흥기(興起)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얕고 깊고, 두텁고 엷어서 한결같지 못한 것은 또 다시 예로써 고르게 하면 백성들은 선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어 선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격(格)’이라는 글자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격(格)’이란 바로잡는다[正]는 뜻도 있다. 『서경』에 ‘그 그른 마음을 바로잡는다[格其非心]’는 용례가 있다.
道, 音導, 下同. ○ 道, 猶引導, 謂先之也. 政, 謂法制禁令也. 齊, 所以一之也. 道之而不從者, 有刑以一之也. 免而無恥, 謂苟免刑罰. 而無所羞愧, 蓋雖不敢爲惡, 而爲惡之心未嘗忘也. 禮, 謂制度品節也. 格, 至也. 言躬行以率之, 則民固有所觀感而興起矣, 而其淺深厚薄之不一者, 又有禮以一之, 則民恥於不善, 而又有以至於善也. 一說, 格, 正也. 『書』曰: “格其非心.”
○ 나 주희가 말한다. ‘정(政)’이라고 하는 것은 다스림의 도구이다. ‘형(刑)’이라고 하는 것은 다스림을 보완하는 법령이다. ‘덕(德)’과 ‘예(禮)’라고 하는 것은 정치가 이루어지게 하는 근본인데, 또 덕은 예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본 장에서 말하는 이 양 측면(정형과 덕예)은 서로 종(終)과 시(始)를 이루는 것이며, 어느 한 편을 폐(廢)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형(政刑)은 능히 백성들을 죄로부터 멀리하게 할 수는 있으나, 덕예(德禮)의 효과는 백성들로 하여금 날로 개과천선케 하면서도 자신들도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있다. 그러므로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그 말엽인 정형(政刑)에 쉽게 의지해서는 안 될 것이요, 마땅히 그 근본인 덕예(德禮)를 깊이 탐구해야 할 것이다.
○ 愚謂政者, 爲治之具. 刑者, 輔治之法. 德禮則所以出治之本, 而德又禮之本也. 此其相爲終始, 雖不可以偏廢, 然政刑能使民遠罪而已, 德禮之效, 則有以使民日遷善而不自知. 故治民者不可徒恃其末, 又當深探其本也.
정형(政刑)에 쉽게 의지하지 말고, 덕예(德禮)를 깊게 탐구하라는 말은 오늘날 21세기의 정사(政事)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만고의 명언이다. 주희도 말하고 있듯이 본시 법과 예는 어느 한 편도 치우쳐 폐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유가와 법가도 본시 대립적 두 학파가 아니다. 유가 속에 법가가 들어있고, 법가 속에 유가가 들어있다. 중국의 역사가 음법양유(陰法陽儒)하거나, 음유양법(陰儒陽法)했을지언정 어느 한편을 폐한 적은 없었다. 항상 양자는 서로 보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을 예(禮)에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 동방 사회철학의 대강이다. 서양에서도 로마의 도시국가건설(BC 753)로부터 동로마 제국의 멸망(AD 1453)에 이르는 유구한 로마법이 다양한 민법정신을 개발했지만 그 배경에는 항상 그 시대를 지배하는 도덕정신이 깔려있다. 근세정신을 대변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부패하고 사악했던 그의 시대에 대한 도덕적 항변이다. 이러한 모든 정신이 그 외형만 전승되어 형식주의적 법제주의(Legalism)로 발전하고, 그것이 마치 근대사회의 필연인 양 선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형과 덕예는 병존하는 것이지만 그 근본은 덕예에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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